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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2)] 19세기 서울 남산봉수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산꼭대기에 뜬 네 개의 ‘작은 별’ 나라 전체가 무사하다는 신호 

우물 같은 석재 원통 5개, 정상 성벽과 평행 되게 설치
당시 조선 방문한 美 천문학자 로웰이 직접 보고 기록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남산봉수대에서 남산봉화제를 개최했다. 봉화 의식을 재현하고 있는 보이스카우트연맹 대원들.
인터넷에서 ‘봉수대’라는 단어를 검색해서 이미지를 확인해보면 전국에 각양각색의 봉수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봉수대가 모두 최근에 복원한 것으로 원형이 보존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백 군데가 넘는 곳에 있었던 봉수대가 단 한 개도 원형을 간직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꽤 충격적이다.

최근에 각 지역에서 봉수대를 복원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웬만한 시나 군에는 보통 한두 군데 봉수대가 있었으므로, 각 지자체에서는 이를 복원하고 싶어 한다. 큰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지역의 역사적인 유물을 복원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봉수대 복원 작업의 선두에 서울 남산의 봉수대가 있다.

서울 남산의 봉수대는 1993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됐는데 공식적인 명칭은 ‘목멱산봉수대(木覓山烽燧臺)터’다. 그러니까 기념물로 지정된 것은 봉수대가 아니라 봉수대 터인 셈이다. 서울시는 남산의 봉수대 터를 기념물로 지정하면서 봉수대도 복원했다. ‘목멱산’은 남산의 여러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인데 일반적으로 남산이라고 부르지만, 옛날 문헌에는 주로 목멱산이라고 돼 있다. 남산이라는 지명은 전국에 너무 많으므로, 목멱산이라고 부르면 서울의 남산이라는 의미가 분명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목멱산이라는 명칭은 거의 쓰이지 않으니 이 글에서는 흔히 쓰이는 남산봉수대라고 부르기로 한다.

문화재청에서 남산봉수대를 소개한 글을 보면,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해 5개소가 있었다 하는데, 현재 봉수대는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 정확한 자리를 확인할 수는 없는데 ‘청구도’ 등의 관련 자료를 종합해 1개소를 복원했다”고 했다. 봉수대가 있던 자리나 봉수대의 모양을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이런 모양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봉수대는 봉수(烽燧)를 올리기 위해 만든 구조물을 말하는데, 봉(烽)과 수(燧)는 둘 다 봉화(烽火)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다. 그런데 봉화라고 하지 않고 굳이 봉수라고 말하는 것은 봉화라고 하면 불만을 말하는 것이지만, 봉수는 불과 연기 둘을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올리고,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전달하는 통신 방식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을 이용해서 신호를 전달한 이야기는 매우 많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아이스킬로스가 쓴 [아가멤논]에도 봉화로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니 이미 2500년 전에 서양에서도 봉화가 문학작품에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봉수(烽燧)는 불과 연기를 의미


▎‘화성성역의궤’에 게재된 화성봉수대 외형도 /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동양의 봉화 관련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중국의 전설적인 미녀 포사(褒姒)와 관련된 고사일 것이다. 주나라 유왕(幽王)이 포사를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포사는 잘 웃지 않았다. 어느 날 봉화를 잘못 올려 제후의 군대가 모였다가 돌아간 일이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본 포사가 크게 웃었다. 그러자 유왕은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수시로 봉화를 올려 제후의 군대를 불러들였다. 그러다가 정말로 외적이 침입하여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또 장난 봉화라고 생각해서 아무도 오지 않았고, 유왕은 외적의 손에 죽었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고는 하나, 확실한 기록이 전하는 것은 아니다. 고려에 들어와서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됐음을 알려주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또 외국인이 본 기록으로는 1123년 중국 송나라에서 고려에 보낸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을 들 수 있다. 송나라 사신들은 현재 중국 상하이 남쪽의 닝보(寧波)에서 출발해 흑산도를 거쳐 군산과 인천 앞바다를 지나 예성강까지 배로 온 다음 육로로 개성에 들어왔다. 서긍은 흑산도를 기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봉화를 언급했다.

매번 중국인 사신의 배가 이르면, 밤에 산꼭대기에 봉화를 밝힌다. 여러 산이 차례로 서로 호응해 왕성까지 이르는데 이것이 이 산에서 시작된다.

[고려도경]의 이 내용을 통해 고려시대에 흑산도에서 개성에 이르는 봉화 노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봉수제도는 조선으로 이어졌고, 세종 때 봉수제도를 크게 정비했다.

조선을 다스리는 데 기본이 되는 법령을 모아놓은 [경국대전]은 성종 때 완성됐는데 ‘봉수’가 하나의 항목으로 들어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서울의 남산봉수대를 자세히 설명해놓았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봉화를 올리는 규정은 다음과 같다.

아무 일이 없는 평상시에는 봉화를 하나만 올린다. 그리고 적이 나타나면 봉화 둘을 올리고,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봉화 셋을 올리며, 적이 경계를 침범하면 넷을 올리고, 적과 접전을 벌이면 봉화 다섯을 올린다. 봉화를 올리는 방식이 이렇게 다섯 단계로 나뉘어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각 봉수대에는 불이나 연기를 올릴 수 있는 다섯 개의 구조물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19세기 각 지역의 봉수대가 모두 이런 시설을 갖추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남산봉수대에 관한 역사 기록은 많이 남아 있으나, 정확한 장소와 구조물의 모양을 묘사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남산에 봉수대는 한 군데가 있었고, 여기에 다섯 개의 불 피우는 구조물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서울의 경치를 읊은 한시 가운데 남산의 봉화를 언급한 것을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시 속의 남산 봉화는 대부분 시인이 멀리서 본 풍경을 그린 것이어서 이를 통해 남산 봉수대의 모양을 알 수는 없다. 게다가 한시를 지은 이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면서 매일 남산의 봉화를 보기 때문에 굳이 이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에 봉화가 나오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특이하게도 [춘향전]에는 남산 봉화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수많은 [춘향전]의 이본(異本)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20세기 초 전주에서 간행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완판 춘향전]이라고 말하는 이 책의 정식 명칭은 [열녀춘향수절가]다. 1930년 대부터 여러 연구자가 주석서를 낸 바 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단어나 구절이 상당수 있다. 남산 봉화가 등장하는 대목도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너는 죽어 장안 종로 인경이 되고, 나는 죽어 인경 망치가 돼 길마재 봉화 세 자루 꺼지고, 남산 봉화 두 자루 꺼지면, 인경 첫 마디 치는 소리 그저 ‘뎅 뎅’ 칠 때마다 다른 사람 듣기에는 인경소리로만 알아도, 우리 속으로는 춘향 ‘뎅’ 도련님 ‘뎅’이라. 만나 보자꾸나. 사랑 사랑 내 간간 내 사랑이야.”

이도령이 부르는 ‘사랑가’의 한 구절인데, 춘향은 죽어서 서울의 인경(보신각종)이 되고, 자신은 종을 치는 망치가 돼 죽은 후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말하는 길마재와 남산의 봉화가 꺼지고, 인경을 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19세기 중반에 서울의 풍물을 읊은 [한양가]라는 작품이 있는데, 여기에도 봉화에 관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길마재 한 봉화에 남산 봉화 응하여서
일제히 네 자루가 변방 무사 보(報)하였다
초경 삼 점 인경소리 이십팔수 응(應)하였고


[한양가]에도 [춘향전]처럼 ‘길마재 봉화’ ‘남산 봉화’ ‘인경소리’ 등이 나오는데, 각 단어의 뜻은 알 수 있어도 전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다. 두 작품에 나타나는 봉화 대목은 남산봉수대의 운용 방법과 그 역할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전국 다섯 방향에서 오는 신호 종합


▎‘청구도’에 실린 안산봉수대. /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남산봉수대는 전국의 다섯 방면에서 올라오는 봉화가 최종적으로 전달되는 곳이다. 남산봉수대로 모이기 직전의 다섯 방면 봉수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올라온 양주 아차산(현재 중랑구 봉화산), 둘째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서 온 광주 천림산(현재 성남시 천림산), 셋째는 평안도와 황해도 방면에서 연결된 무악 동쪽 봉우리(현재 서대문구 안산), 넷째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해로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현재 서대문구 안산), 다섯째는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달된 양천현 개화산(현재 강서구 개화산) 등이다.

이렇게 전국의 다섯 방향에서 각기 봉화를 전해오면 서울 남산봉수대에서는 이 신호를 종합해서 봉화를 올린다. 그런데 다섯 방향에서 전해오는 봉화는 언제나 평온하다는 신호로 하나만을 올렸으므로, 남산봉수대에서는 매일 다섯 방면이 모두 무사하다는 의미로 다섯 개의 봉화를 올렸다. 남산의 봉화는 매일 다섯 개를 올려 온 나라가 평온하다는 소식을 임금과 서울 시민에게 알렸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서 남산의 봉화는 다섯 개가 아닌 네 개만 올리는 것이 상례가 됐다. 한 방면을 생략한 것이다.

현재 서울의 독립문에서 홍제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무악재라고 하는데 이 고개가 말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현(鞍峴)이나 길마재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개 왼쪽의 산을 무악 또는 안산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두 작품에서 길마재 봉화라고 한 것은 안산의 봉화를 말한다. 19세기 서울 사람들은 안산에서 봉화를 올려 남산에 전달하면, 남산에서는 네 개의 봉화를 올리는 것을 매일 볼 수 있었다. 남산의 봉화는 온 나라가 평온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산의 봉화가 꺼지면 8시 무렵에 종로의 보신각종을 28회 울리고 사대문을 닫았다.

[춘향전]과 [한양가]는 이런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양가]는 서울 사람이 서울 풍경을 그린 것이므로, 안산 봉화는 하나를 올리고, 남산 봉화는 네 개를 올린다고 정확하게 썼지만, [춘향전]은 전주 사람이 썼으므로, 서울의 봉화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서울 시민의 일상과 함께했던 남산봉수대는 고종 32년(1895) 6월 1일 봉수제도의 폐지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별다른 연구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경제 성장과 함께 과거를 복원하려는 열망이 일어나면서 1990년대에 들어와서 봉수대도 복원의 대상에 포함된다. 서울에서는 남산봉수대와 함께 서대문구 안산과 중랑구 봉화산의 옛 봉수대 터가 기념물로 지정되고, 봉수대의 복원도 이뤄졌다. 대부분의 봉수대는 산 정상에 있었으므로 봉수대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이 없지만, 남산에는 정상에 팔각정이 있어서 복원 장소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1990년대 수원 화성 봉수대 모양 본떠 복원한 듯


▎‘청구도’에 수록된 남산봉수대. /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현재 복원한 남산봉수대의 위치는 케이블카 정류장과 팔각정 사이이고, 벽돌로 쌓은 다섯 개의 구조물로 돼 있다. 그렇지만 남산봉수대를 언급한 과거 기록을 보면 모두 남산의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고 했으므로, 원래 봉수대의 위치는 현재 팔각정이 있는 자리일 것이다. 그리고 복원한 봉수대의 모양도 19세기 봉수대와는 다른 것 같다. 현재 복원한 모양의 봉수대에서 피우는 불로는 종로나 광화문에서 선명하게 불을 확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현재 복원한 안산의 봉수대는 남산 것과 같은 모양이고, 봉화산 봉수대도 비슷한 모양이다. 남산과 안산의 봉수대는 수원 화성의 봉수대 모양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화성은 정조 임금이 세웠다. 화성은 오랫동안 방치되고, 또 한국전쟁 때 파괴돼 제 모습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화성을 건설할 때 만들어놓은 설계도가 있어서 원형을 복원할 수 있었다. 화성의 설계도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자세한 그림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봉수대도 들어 있다.

서울의 남산과 안산의 봉수대를 복원할 때 서울시 관계자들은 ‘화성성역의궤’에 들어 있는 봉수대 모양을 참고해서 만든 것 같다. 아마도 이 방법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남산봉수대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복원에 기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산봉수대의 모양은 화성 것과는 다르다.

남산봉수대의 모습과 그 운용 방식은 19세기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의 기록을 통해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퍼시벌 로웰(1855~1916)이다. 로웰은 명왕성을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의 천문학자다.

그는 하버드대를 졸업한 후 동아시아에 대한 호기심으로 1883년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미국을 방문하는 조선의 보빙사(報聘使) 일행이 일본에 도착했는데, 그는 이 사절단에 합류할 것을 요청받았다. 로웰은 보빙사의 고문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조선의 외교사절과 함께 미국 국내를 여행했다. 1883년 말 로웰은 고종의 초청으로 조선을 방문하여 두 달 정도 머물게 되는데, 이때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라는 책을 1886년에 간행했다.

서구에 조선을 소개한 책 가운데 퍼시벌 로웰의 이 책은 아주 이른 시기에 나온 것이다. 특히 직접 조선을 방문해서 자신의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으로, 여기에는 로웰이 찍은 고종의 사진 등 여러 장의 사진과 그림이 들어 있다. 이 책은 전체 37장으로 나눴는데, 그중 제10장에는 ‘남산의 봉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10장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다.

외국인의 ‘조선 방문기’ 자세히 살필 필요


▎서울 남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남산봉수대를 둘러보고 있다.
“하루가 흘러가기를 머뭇거리는 어둑어둑해질 무렵 서울의 거리를 나서본다면 당신의 시선은 어두운 도로에서부터 하늘의 사라지는 빛을 따라가다가 아마도 서울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남산에 머물게 될 것이다. 어둡고 강렬하며 신비스러운 황혼에 그 거대한 덩어리는 남쪽 하늘에서 아주 편안한 모습을 보인다. 마치 낮에는 감춰져 있던 것이 밤이 돼 갑자기 드러난 것 같이 이 도시에서는 꽤 돌출적인데, 점점 짙어가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사라지는 이 산을 본능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둠 속으로 산이 사라지면서 주술에서 풀려난 것처럼 당신의 시선이 거리로 돌아오면, 전율이 온몸에 휘감기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암흑의 세상이 되고, 조금 전까지 누워 있던 산의 꼭대기에서 네 개의 작은 별이 갑자기 나타난다. 별들은 하늘 높이 걸려 있어서,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불빛인 것 같다. 그것은 남산의 신호용 화톳불인데, 매일 밤 나라 안의 모든 일이 무사하다고 서울에 보내는 신호다. 별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은 봉화인데, 이는 정말로 상징적이다. 봉화는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안전하고 평화롭다는 신호다. 각 지방의 메시지를 서울에 전하는 이 봉화는 15분 동안 타오르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로웰의 이 글은 1883년 12월 어느 날 그가 본 서울 남산의 봉화가 어떤 모습이었나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 조선 사람들의 기록에서도 남산봉수대에 네 개의 봉화가 오른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들은 매일 보는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로웰처럼 자세히 기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1883년 로웰이 묘사한 남산봉수대의 모습은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만하다.

퍼시벌 로웰은 직접 남산에 올라가서 봉수대와 봉수군의 막사를 살펴보고 모양과 크기를 기술했다. 그에 의하면 봉수대는 남산 정상에 성벽과 평행을 이루는 방향으로 설치돼 있으며, 지름이 5피트 정도의 우물처럼 생긴 다섯 개의 원형 석재 구조물이라고 했다.

19세기 말에 서울을 방문했던 외국인의 기록에는 남산봉수대를 언급한 것이 상당수 있다. 이런 기록을 자세히 조사한다면, 남산봉수대가 있던 장소나 모양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거를 정확하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연구와 적절한 행정적 뒷받침이 필요한데, 그 모두는 한 사회의 역량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2021년 2월호 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①의 첫 번째 사진설명(P 230)가운데 ‘서울 광화문 앞 훈 련원에서 훈련 중인 대한제국 군인들’을 ‘서울 광화 문 앞에서 훈련 중인’으로 바로 잡습니다. 당시 대한 제국 군인들의 훈련원은 광화문 앞이 아닌 동대문 근 처에 있었다고 필자가 알려왔습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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