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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5)] 장희빈의 슬픈 혼 서려 있는 대빈궁(大嬪宮) (上) 

왕을 낳은 궁녀 출신 왕후의 비극 

당대 최고 역관 가문의 딸, 빼어난 미모로 숙종 총애 받아
후궁 때 낳은 아들, 서인들 격렬한 반대에도 원자로 책봉


▎2002~2003년 총 100부 작으로 방영됐던 KBS 사극 [장희빈]에서 숙종(전광렬 분)과 장희빈(김혜수 분)이 사랑을 나누고 있다.
청와대 영빈관 서쪽에 있는 칠궁…. 조선시대 임금을 낳은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신 사당 이름이다. 언뜻 겉으로 봐서는 다섯 채의 사당 건물이 다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중 한 곳은 미세한 차이를 보인다. 오르내리는 계단의 길이가 더 길며 개수도 많고 사당 건물을 구성하는 기둥의 형태 역시 사각인 다른 사당과 다르게 원형이다. 이 사당의 이름은 무엇이며 누구의 사당일까?

이 사당에는 ‘대빈궁(大嬪宮)’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대빈(大嬪)’이란 ‘크고 높은 후궁’을 뜻한다. 이 대빈궁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禧嬪張氏, 1659~1701년)의 신위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희빈 장씨,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궁녀로 입궁해 왕후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다. 우리에게는 희빈 장씨보다는 장희빈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천한 궁녀의 신분에서 빼어난 미모와 권모술수를 이용해 왕비의 자리에 오른 요부,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를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한 장본인, 이로 인해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여인…. 이 정도가 영화나 TV 드라마를 통해 통상적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장희빈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실록의 내용은 그동안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아버지 장형은 사역원의 역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창릉동에 있는 희빈 장씨의 대빈묘.
그녀의 이름은 장옥정(張玉貞), 인동(仁同) 장씨의 22대손으로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장형(張烱)의 2남 2녀 중 막내다. 궁녀로 입궐해 숙종의 후궁이 된 후 내명부 정2품 소의(昭儀)로 있을 때 왕자(훗날 경종)를 낳았다. 이 왕자가 태어난 지 100일도 되기 전에 원자(元子)로 책봉됨으로써 그 어머니 장씨는 정2품 소의에서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인현왕후에 이어 궁녀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왕후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다시 빈으로 환원되고 몇 년 후 숙종으로부터 자진(自盡)하라는 명을 받아 4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다.

부친 장형은 사역원 부봉사(司譯院副奉事: 정9품)였으나 희빈이 11세 때인 현종 10(1669)년 1월 사망했다. 사역원은 조선 시대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통역관을 양성하는 일종의 외국어학교와 같은 기능도 맡았다. 그러니까 장형은 사역원의 역관이었던 셈이다. 희빈의 아들이 원자로 정해졌을 때 장형은 영의정으로, 숙종이 희빈을 왕후로 삼겠다는 전지(傳旨)를 내렸을 때 장형은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각각 추증됐다.

장형(張炯)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추증(迫贈)하고는, 그의 아내 고씨(高氏)를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증했으며, 윤씨(尹氏)를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봉했다([숙종실록] 15(1689)년 5월 6일).

희빈의 집안은 조선 중·후반기 당대 최고의 역관 가문이었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은 조선 시대 외교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지(通文館志)]에까지 행적이 기록될 정도로 선조 때 유명한 중국어 역관이었으며, 생전 최고 관직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정3품 무관직)에 이르렀다.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도 일본어 역관으로 사역원 첨정(僉正: 종3품)이었다. 일찍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희빈의 이복오빠 희식(希栻) 역시 18세의 나이로 효종 8(1657)년 식년시(式年試: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 역과(譯科)에서 장원(壯元)했다.

이렇듯 인동 장씨 집안은 외국어에 관한 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는데 조부인 장응인 이후 20여 명의 역관이 나왔으며, 그중 역과에 장원 합격한 사람은 7명일 정도였다. 특히 역과 장원 출신인 희빈의 5촌 당숙 장현(張炫)은 인조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역관으로 활동하면서 역관의 최고 책임자인 수역(首譯)까지 올랐다. 인조 15(1637)년 청나라 심양(瀋陽)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을 수행하기도 했다.

실록을 살펴보면 역관 장현을 ‘국중거부(國中巨富)’라고 기록한 부분이 등장한다. 즉 ‘역관 장현은 나라 안에서 큰 부자다’라는 뜻이다. 조선 시대 역관이라 하면 단순히 통역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역관이 전문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많은 돈을 만질 수 있는 직업은 아닌 것 같은데 장현은 어떻게 국중거부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심복으로 있다가 경신년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됐다. 장씨(장희빈)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다([숙종실록] 12(1686)년 12월 10일).

당시 중국과 조선은 1년에 서너 차례 30여 명 정도로 구성된 공식 사신단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 사신단 외에도 통역을 담당할 역관들과 원행(遠行) 길에 화물 등을 운반할 마차와 인원까지 포함하면 대략 200~300명 정도의 대규모 사신단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대부분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했기에 통역을 담당할 역관이 필요했다. 이런 사정으로 역관들은 사신 행렬에 빠짐없이 선발됐으며 외교상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했다.

조정에서는 사신단에게 쌀·면포·종이 등을 지급하고 이것으로 무역을 해서 사행 경비를 충당하게 했다. 그 무역의 권한은 역관에게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출장비를 받지 않던 역관들에게는 대신 개인당 인삼 8포, 즉 80근의 인삼을 거래할 수 있는 권리도 줬다.

시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당시 인삼 80근을 현재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3억원 정도로 매우 큰 금액이다. 역관들은 인삼·면포·종이 등을 팔아 비단이나 약재류를 비롯한 골동품이나 사치품을 구입한 후 대부분을 조선에 있는 왜관(倭館)을 통해 일본에 팔아 몇 배의 이득을 남겼다. 이런 거래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청나라의 직교역 금지 조치에 따라 일본은 조선을 통해서만 중국의 문물을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관들은 청나라와 일본의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다.

조선의 역관은 나라의 거상(巨商)


▎장희빈의 사당인 대빈궁의 편액. / 사진:이성우
장현도 이와 같은 중개무역을 통해 부를 창출한 것으로 보인다. 실록에는 장현의 무역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 있다. 효종 4(1653)년 역관들이 무려 50 수레가 넘는 인삼을 중국으로 가져가다가 발각되자 장현이 그 인삼의 주인으로 지목돼 곤욕을 치를 뻔했으나, 효종의 두둔으로 처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효종)이 하교하기를 “사신 일행이 도강한 초기에 내사의 화물이라고 핑계하며 내패를 꽂은 것이 50여 바리(駄: 말 한 마리에 실을 정도의 양)라 하였는데, 행대(行臺: 종사관)인 관원이 어찌하여 금지하지도 않고 계문해 엄중히 다스리지도 않았는가” 했다. (…) 이른바 성명을 끌어댄 자라는 것은 역관 장현(張炫)인데, 궁인(宮人)의 아비다([효종실록] 4(1653)년 7월 27일).

장현이 이같은 특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오가면서 귀중한 문서를 입수해오는 등 국가에 기여한 그의 외교적 능력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을 당시 효종과 맺은 인연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국중거부였던 장현은 외교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도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다. 장현의 조카딸이었던 희빈은 아버지 장형이 일찍 사망하면서 이런 장현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녀의 입궁이 단순히 궁여지책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추정케 한다. 그렇다면 희빈은 왜 궁녀가 됐을까?

숙종 6년인 1680년, 그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났다. 현종에 이어 1674년 8월 23일 보위에 오른 숙종은 그동안의 집권세력이었던 남인들 간의 파벌싸움으로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정원로·강만철은 숙종 6(1680)년 4월 5일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 등이 복선군 이남을 옹위하고자 한다는 글을 올렸다.

복선군은 인조의 손자로서 숙종과는 5촌 간인데 허견 일당이 복창군·복선군·복평군 삼형제와 결탁해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를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라고 한다. 다음 날인 4월 6일부터 시작된 국문의 결과는 삼복을 비롯해 허적과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 세력이 대거 죽음에 이르거나 유배되는 결과를 가져오며 남인들의 몰락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는 서인들이 차지한다. 숙종의 환국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환국의 파장은 장희빈의 집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역관 장현도 남인 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로 함경도로 유배를 갔다. 장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장천익, 그의 동생 장찬까지 모두 유배형에 처해졌다. 희빈의 입궁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절차와 관련한 자세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일각에서는 희빈의 입궁 당시 나이와 입궁 시기를 경신환국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경신환국의 여파 때문에 희빈이 입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고 물리는 권력 암투, 환국정치의 시작


▎경기도 고양시 중산동 고봉산에 있는 희빈 장씨의 부친과 인동 장씨들의 묘역. / 사진:이성우
숙종이 희빈을 왕비로 삼겠다며 내린 전지에 ‘희빈 장씨의 집안이 부유했고 장씨가 어려서 입궁했다’는 실록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장현이 곤경을 겪던 경신환국 즈음보다는 이른 시기에 입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국중거부로 불렸고 희빈의 부친 장형보다 10세 많았던 5촌 당숙 장현의 딸 역시 효종 당시 이미 궁녀로 입궁해 있었기에 가세가 곤궁해 궁녀가 됐다는 일부의 주장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역관의 딸들이 궁녀가 됐던 사례는 실록에서도 여러 번 나타난다.

“희빈 장씨는 좋은 집에 태어나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 인효공검(人孝恭儉)해 덕이 후궁(後宮)에 드러나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숙종실록] 15(1689)년 5월 6일)

희빈의 입궁에 남인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장현이나 장렬왕후(莊烈王后, 인조의 계비)와 6촌 간인 조사석 등 남인 계의 추천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희빈이 입궁 후 남인 계의 어른이었던 장렬왕후 처소에서 일하는 궁녀였기 때문이다.

또한 희빈이 출궁 됐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였던 장렬왕후가 친정 외질녀인 숭선군 이징의 아내 신씨에게 장씨를 돌보도록 친필 서신을 쓴 것이나, 희빈의 재입궁을 주선했다거나, 장렬왕후가 인현왕후와는 소원하면서도 희빈은 지나치게 사랑하고 있다는 [숙종실록]12(1686)년 12월 10일의 내용을 보면 희빈이 장렬왕후의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6(1680)년 10월 26일 숙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승하했다. 발 빠르게 움직인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 세력은 국상이 끝나기도 전에 당시 대비였던 서인 계열의 명성왕후(明聖王后: 현종비, 숙종의 어머니)를 움직여 같은 서인인 병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어렵지 않게 숙종의 계비로 결정하게 했다. 그녀가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였다. 숙종 7(1681)년 3월 26일의 일이다. 그리고 5월 14일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본래 정비가 사망하면 3년 상을 마치기 전에는 재혼할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돼 있었으나, 숙종은 불과 6개월여 만에 재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반대는 없었으며 오히려 당연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기까지 했다. 서인들로서는 안정적인 집권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치였을 것이다.

자전(慈殿: 명성왕후)이 하교(下敎)하기를, “대혼(大婚)을 병조판서 민유중의 집과 정했는데, 여러 대신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진실로 신인(神人)의 소망에 맞으니, 이는 온 나라 신민(臣民)의 복(福)입니다.” 했다([숙종실록] 7(1681)년 3월 26일).

당시 희빈은 이미 출궁 된 상태였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에 의해서였다. 명성왕후가 일개 궁녀에 불과한 희빈과 숙종의 관계를 어떻게 알았으며 출궁시켜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희빈은 숙종의 증조모인 자의대비(恣懿大妃,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처소의 궁녀였다. 따라서 문후(問候)드리러 오는 숙종과 마주치는 기회가 많았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미색이 뛰어났다고 알려지는 희빈을 젊은 숙종은 눈여겨보고 있었을 것이다.

대비전 미색의 궁녀… 젊은 임금은 눈여겨보고


▎우승우 한국화가가 그린 경종의 초상. 경종의 어진(御眞)은 전해지지 않아 이복동생인 영조의 초상화와 희빈 장씨의 외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참조해 그렸다.
희빈이 숙종의 승은을 입게 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인경왕후 사망 후에야 비로소 숙종을 모셨다는 기록들이 실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기는 인경왕후의 사망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숙종과 희빈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왕후 사망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희빈이 총애를 받고 있다는 기록이 실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명성왕후와 조정 대신들도 숙종과 희빈이 가까운 사이라는 점을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국상(國喪)은 혜성이 나타나기 전에 이미 났으므로, 이러한 이변의 출현 조짐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에 장녀(張女: 희빈 장씨)가 (…)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니,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 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숙종실록] 6(1680)년 11월 1일).”

장씨(張氏)를 책봉해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 경신년(1680년)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숙종실록] 12(1686)년 12월 10일).

희빈이 출궁 당한 시기는 인경왕후가 사망한 숙종 6(1680)년 겨울쯤이었다. 희빈의 출궁은 명성왕후의 뜻이었다. 서인 계열이었던 명성왕후가 경신환국에 연루돼 유배 간 역관 장현을 5촌 당숙으로 둔 희빈이 숙종으로부터 승은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이상 만일 후사라도 먼저 보게 된다면 왕위 계승 문제로 조정과 왕실이 불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궁녀 상태로 출궁 당한 희빈은 6년째 사가(私家)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사이 명성왕후가 승하했다. 그러나 3년 상이 끝날 때까지는 후궁을 들일 수 없다는 국법이 도사리고 있었기에 숙종은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희빈을 입궁시킬 수 없었다.

숙종 11(1685)년 12월 5일 드디어 명성왕후의 3년 상이 끝났다. 그러자 숙종은 희빈을 다시 불러들였다. 희빈의 재입궁은 숙종 12(1686)년 봄쯤으로 추정된다. 6년 만에 숙종의 곁으로 돌아온 희빈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지극했다. 숙종 12(1686)년 윤4월 20일 [승정원일기]에는 ‘임금이 숙의 김씨를 새로 간선했고, 또 총애하는 장씨(張氏)도 있는데 여색으로 몸을 망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이이명(李頤命)의 간언이 등장한다.

이를 보면 희빈은 간택 후궁으로 입궁한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 김씨 이전에 이미 입궁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숙의 김씨는 서인 노론(老論)의 영수였던 김수항(金壽恒)의 종손녀로서 당시 최고의 권문세가 출신이었다. 인현왕후가 가례 6년이 지날 때까지도 후사를 생산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인 측에서는 인현왕후 대신 희빈을 견제하는 차원으로 숙의 김씨를 들인 것이다. 훗날 영조를 친아들처럼 보살펴 주었다는 영빈 김씨가 그녀다.

하지만 서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숙의 김씨 역시 후사를 생산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서인들의 경계심은 커졌다. [승정원일기]나 [숙종실록]의 기록에는 ‘여러 도에 큰 수해가 났는데 숙종이 장씨를 총애하기 때문에 생기는 징조’라는 둥, ‘후궁 장씨의 어미는 조사석(趙師錫)의 처가 종이었는데 장가(張家)의 아내가 된 뒤에도 때때로 조사석의 집에 오갔었다’는 둥 서인들은 숙종과 희빈의 밀접한 관계를 경계하면서 재차 출궁시킬 이유를 계속 찾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기준으로 희빈이 뛰어난 미색의 소유자였던 점은 확실한 것 같다. 실록 여러 군데에서 그녀의 미색과 관련한 언급이 등장한다. [숙종실록] 12(1686)년 9월 13일 기록에는 대사헌(大司憲) 김창협(金昌協)이 “장씨의 미색에 마음이 현혹돼 은총을 열어준다는 비난을 없게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는가 하면 같은 해 12월 14일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의 상소에도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라며 희빈의 숙원 책봉이 미색 때문임을 언급하는 기록이 등장한다.

아들 왕위 계승자 된 날, 생모는 빈으로 승격

희빈은 숙종 12(1686)년 12월 10일 숙원(종4품)으로 책봉됐다. 희빈의 숙원 책봉 당시를 기록한 실록에도 그녀를 가리켜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실록에서 이처럼 여인의 미색을 여러 번 언급한 기록은 희빈이 거의 유일하다. 책봉 당시 나이는 28세였다.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숙종실록] 12(1686)년 12월 10일).”

조정 대신들은 물론 사관들조차도 아직 회임 상태도 아닌 희빈을 숙원으로 책봉하는 것은 전례에도 맞지 않는다며, 그것은 숙종이 미색을 좋아하고 총애하기 때문이 아니냐고 거세게 반대했다. 그러나 숙종은 오해라고 하면서도 희빈의 숙원 책봉을 강행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현왕후를 비롯한 서인 세력들과의 거리를 두기 위해 창덕궁과 떨어져 있는 창경궁에 은밀히 별도의 처소도 지어 주었다. 그 처소의 이름이 취선당(就善堂)이다.

숙종 14(1688)년 10월 27일 희빈이 드디어 왕자 윤(昀)을 낳았다. 당시 희빈의 품계는 소의(昭儀: 내명부 정2품)였다. 숙원에서 소의로 품계가 오른 시기는 따로 확인되지 않지만, 회임 사실이 알려졌을 1688년 봄쯤으로 생각된다.

숙종은 28세에 처음으로 대를 이을 후사를 보게 된 것이다. 숙종은 뛸 듯이 기뻐하며 왕자 윤이 태어난 지 채 100일도 되지 않았던 숙종 15(1689)년 1월 조정 대신들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왕자 윤의 원자정호(元子定號) 의지를 밝혔다. 원자정호(元子定號)란 원자 책봉을 말하는데, 곧 후궁인 희빈의 몸에서 생산된 왕자가 다음 왕위를 잇는 세자가 된다는 뜻이다.

조정에 모였던 서인계 대신들은 크게 놀라며 인현왕후는 아직 젊어 회임의 가능성도 충분한데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고 하나같이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숙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결혼한 지 18년, 나이 서른이 다 될 때까지 후사 걱정을 하다가 겨우 첫아들을 봤는데 이게 빠르다는 것이냐며, 희빈의 회임 중 태중 아이가 아들이라는 태몽까지 내가 꿨으니 원자정호를 반대하는 대신들은 모두 사직하라고까지 말했다. 숙종 15(1689)년 1월 10일의 일이다.

대신들이 원자정호를 극렬 반대하는 데에는 또 다른 속뜻이 들어 있었다. 희빈의 아들이 원자로 정해지면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돼 장자가 된다. 그러면 자식이 없던 인현왕후가 후사를 생산하더라도 그는 차자가 되므로 왕위 계승은 불가능하다. 남인들의 후원을 받는 희빈의 아들이 원자가 된다는 것은 서인들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서인들의 희망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당시에 장씨에 대한 총애가 날로 성했는데…([숙종실록] 15(1689)년 1월 15일).”

1월 11일 왕자 윤의 명호(名號)가 원자로 정해졌다. 그리고 1월 15일 숙종은 왕자 윤이 원자로 책봉됐음을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告)함으로써 일사천리로 차기 왕위 계승권자가 확정됐다. 같은 날 원자의 생모는 소의에서 빈(嬪)으로 승격됐다. 그녀가 장희빈, 곧 희빈 장씨이며, 원자는 후일 조선의 제20대 임금인 경종이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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