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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27 마지막 회)] 로마는 왜 폭군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했나 

밝음으로 어둠 덮어 제국의 황금기 이뤄 

원로원 암살하고 가족 자살로 몰았지만, 공로 더 커 ‘기록말살형’ 면해
핏빛 복수극 대신 치적 더 키우는 정치, 인류 문명사 불멸의 모델 남겨


▎셀리누스 유적지 인근 절벽에서 내려다본 해적 기지. 여름철 피서지와 더불어 보물 전설을 찾는 관광객들로 채워진 곳이다. / 사진:유민호
고대 로마 유적지 셀리누스(Selinus)에 들렀다. 지중해를 낀 항구 도시로,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남동쪽 킬리키아(Cilicia) 지방의 관문 역할을 해온 곳이다. 고대 그리스 이전엔 해적들의 본거지로, 십자군 원정이 한창이던 12세기엔 ‘이슬람권 속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의 망명지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셀리누스는 바다에 접한 면이 모두 절벽으로 이뤄져 있어 고대엔 난공불락 철옹성이었다고 한다. 육지로 접근하는 길도 경주 토함산처럼 지그재그 급경사 1차선 비포장도로만이 유일한 출입구다. 로마 당시엔 인구 1만 명 정도의 중규모 도시였지만, 지금은 부서진 담벼락과 성곽만이 눈에 띌 뿐이다. 사람 하나 없이 적막만이 표류한다.

계단식 밭을 통한 바나나 재배가 인상 깊다. 멀리서 보면 2000년 전 고대 도시도 바나나밭 속에 가려져 안 보인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닷가 주변은 해적들이 숨겼다는 보물 스토리로 넘쳐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지금은 한산하지만, 해적선 모양의 관광 선박을 탄 관광객으로 인산인해였다고 한다. 그리스로마·십자군·아르메니아가 아니라, 번쩍이는 보물 스토리가 인류의 영원한 흥밋거리일지 모르겠다.

많은 시간을 들여 일부러 들린 것은 필자의 관심을 끄는 역사적 인물과 겹쳐지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Traianus)가 주인공이다. 서기 117년 8월 8일 63세 나이에 저세상으로 간, 황제 최후의 인생 종착점이 바로 셀리누스다. 트라야누스는 로마 최절정기 황제인 5현제(賢帝)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이탈리아가 아닌 스페인 출생 장군 출신으로, 적과 직접 싸우면서 로마의 영토를 확장·보전해나간 야전사령관으로서의 황제다.

이탈리아 로마 한복판 로만 포럼(Roman Forum)에 가면, 19년에 걸친 황제 트라야누스의 행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높이 40m에 달하는 트라야누스 탑(Column)이 단적이다. 당시 로마 원로원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세워진 초대형 대리석 탑이다. 야전사령관 황제 트라야누스의 다키아(Dacia), 즉 현재의 루마니아에서의 전승 무용담이 대리석 탑 전체에 새겨져 있다. 영토라는 관점에서 보면, 건국 이래 최대의 땅을 확보한 주역이 바로 트라야누스다. 셀리누스에서의 죽음도 메소포타미아 동부에서 벌어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던 중 전해진 비보(悲報)다. 유대인을 탄압할 경우 로마 최고의 황제라도 신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소문이 이후 퍼져 나간다.

로마 정복왕의 갑작스런 죽음


▎셀리누스 꼭대기 성. 트라야누스가 숨진 곳으로, 12세기 아르메니아인들이 확대 개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유민호
셀리누스에서 주목한 부분은 황제의 쓸쓸한 죽음에 관한 부분이다.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로마 5현제의 중심에 선 인물이라지만, 너무도 황량하고 적막한 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러나 거슬러 보면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트라야누스의 최후와 같은 상황으로 점철돼 있다. 32세에 객지 바빌로니아에서 급사한 영웅 알렉산더부터 한국 역사에 오르내리는 위인의 대부분은 어둡고도 척박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조용한 방에서 자식과 손자의 위로와 사랑 속에서 저세상에 간 영웅은 거의 없다.

로마는 음모론에 기초한 대제국이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음모론이 많은 조직·사회·나라일수록 처절한 복수극도 많다. 트라야누스의 갑작스런 죽음은 음모론에 딱 맞는 소재다. 음모론 대부분에서 후계자인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등장한다. 하드리아누스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트라야누스의 아내 프로티나(Pompeia Plotina)가 죽였다는 소문과 이미 죽었는데도 트라야누스를 흉내 낸 가짜 목소리를 통해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식의 스토리가 음모론의 중심이다. 셀리누스는 이 모든 이야기의 진원지다.

흔적만 남은 셀리누스 유적지 곳곳을 헤매며 1900여 년 전 역사의 현장을 오감으로 느끼고 싶었다. 구체적으로, 트라야누스 최후의 장소가 어디인지 찾아 헤맸다.

최근 2014년 방영된 일본 드라마를 보다가 흥미로운 역사관 하나를 발견했다. 일본어로 ‘가게무샤(影武者, 그림자 무사)’로 불리는, 권력자의 대역 대리인에 관한 스토리다. 가게무샤는 김일성·김정일 시대에 자주 등장하던 뉴스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짝퉁’ 인물을 의미한다. 비슷한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행동 패턴을 가진 대역을 통해 암살이나 위기를 대신 막아줄 방패막이가 바로 가게무샤다. 절대 권력자나 독재자는 결국 고립될 수밖에 없다. 가장 믿는 충복을 자신의 자리 바로 뒤에 세우지만, 결국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리를 비우고 멀리 갈 경우, 공백을 노린 경쟁자의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다. 가게무샤는 국민과 권력 주변을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치술수의 하나라 볼 수 있다.

본체가 대역 뒤에 숨지 않아


▎하드리아누스 황제 동상. 로마 변방을 정비하고 인프라를 확충해 제국을 반석에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유민호
일본에서는 내일 목숨이 보장되기 어려웠던 16세기 전국시대 때 창궐한다. 통일을 노리는 맹주들이 자신과 닮은 가게무샤를 고용해 통치한다. 필자가 본 일본 드라마는 에도(江戸)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가게무샤를 다룬다. 도쿠가와가 짝퉁 인물을 내세웠다는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을 총동원해 역사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드라마다. 진짜는 암살당하고, 짝퉁이 진짜로 나서면서 에도 시대의 평화를 창조해냈다는 스토리다. 황당하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에게 행복을 안겨준 픽션이란 점에서 흥행에 성공한 사극으로 평가된다.

필자가 관심 있게 본 부분은 드라마의 시작 부분이다. 짝퉁 가게무샤가 아예 처음부터 진짜 도쿠가와와 함께 전쟁을 지휘하는 장면이다. 상상력에 의한 얘기지만, 너무도 색다르게 와 닿았다. 보통 생각하기에 짝퉁 대역은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극비 중의 극비로 처리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비록 드라마지만 가게무샤가 진짜 도쿠가와 함께 작전지휘를 하는 식으로 나타난다. 현지 전투 상황을 보고하는 정보원들의 보고가 이어지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공평히 정보가 전해진다. 둘 다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받는다. 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다. 한 명은 가짜라 볼 수 있겠지만, 둘 다 가짜일 수도 있다. 드라마 속에서 도쿠가와는 아예 처음부터 짝퉁을 밖으로 공개하면서 권력을 유지한다. 짝퉁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극비사항이란 식으로 대하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그 나라의 국민성 캐릭터가 눈에 들어온다. 만약 한국에서 가게무샤 짝퉁 얘기를 다룬다고 할 때 아예 처음부터 가짜와 진짜를 동시에 출연시키는 발상이 가능할까? 최고 권력자가 짝퉁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겁쟁이라는 식의 소문과 함께, 여러 가지 불편한 일들이 벌어질 수 있다. 극비사항으로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진짜와 가짜가 동시에 등장한다는 것은 가게무샤의 가치를 망각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 드라마에선 두 사람 모두 등장해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국의 상식과 다른, ‘노출형 가게무샤’가 일본에서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들자는 것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100% 완전한 픽션이 아니란 점에서 흥미롭다. 일본 전국시대 당시 실제로 가게무샤를 공공연히 밖으로 등장시켜, 짝퉁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가짜인 인물을 외부에 공표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식이다.

극비사항을 노출해 진짜를 위험하게 만드는 발상이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을 듯하다. 그러나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시점도 있다. 암살을 계획하는 적의 입장에서, 짝퉁이 있다는 것을 알 경우 어떻게 대응하게 될까? 진짜인지 알 수 있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해 진짜만을 공격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진짜 정보의 한계다. 일본 전국시대를 예로 든다면,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다. 구체적인 얼굴은커녕, 버릇이나 신체의 특징을 아는 사람은 주변 몇 사람에 그친다. 거기까지 접근해 알아내려다 암살 계획 자체가 들통날 수 있다. 진짜와 더불어 짝퉁에 관한 정보도 얻어야 하니까 암살에 필요한 노력이 두 배로 늘어난다.

‘노출형 가게무샤’가 더 무섭다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티볼리 별장에 만든 인공 호수. 티볼리 별장의 전체 규모는 120㏊에 달한다. / 사진:유민호
결론으로 가자. 짝퉁 가게무샤를 노출형으로 하는 이유는 처음부터 적의 무모한 계획을 차단하자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설령 진짜가 암살됐다 하더라도 살아남은 짝퉁이 진짜라 주장하면서 권력을 그대로 유지해 갈 수도 있다. 내부에서 진짜로 받아들이는 한, 짝퉁이라도 지도자로 나설 수 있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장르 중에 ‘모노마네(物眞似)’라는 분야가 있다. ‘흉내 내기’ 정도로 풀이된다. 가수 나훈아나 이미자 짝퉁이 나서, 성대모사 하는 식이다. 가수만이 아니라 정치가·배우·운동선수 등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라면 모노마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성대모사만이 아니라, 사투리·버릇·자세·옷차림 등을 전부 흉내 낸다. 극비형 가게무샤 관점에서 본다면, 기존 유명인의 품격과 명예를 해치는 인물이라 볼 수도 있다. 나훈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과장해서 바보스럽게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일본은 모노마네로 살아가는 짝퉁 연예인이 엄청 많다. 미남 배우이자 가수인 기무라 타쿠야(木村拓哉)의 모노마네 짝퉁을 직접 본 적이 있지만, 무릎을 칠 정도로 똑같다. 짝퉁이지만, 개인 콘서트도 갖고 열성 팬을 위한 사인회도 연다고 한다. 기무라 타쿠야가 자신의 짝퉁을 만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짝퉁과 함께 나와 노래도 부르고 서로 누가 진짜인지 설전을 벌일 정도로 친하고도 가깝다. 모노마네를 한다는 말은 진짜 당사자의 인기가 건재하다는 의미다. 모노마네 인기가 높을수록 진짜의 주가도 올라간다. 진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적이 아니라, 공생관계인 것이다.

가게무샤와 모노마네는 사람의 흥미를 끄는 데 탁월한 일본 문화 특유의 본보기 중 하나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재미가 전부는 아니다. 실제 현실 생활에서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새로운 가치 창출이란 측면도 있다. 짝퉁을 만들어 정보를 분산시키면서 상대의 전의(戦意)를 무너뜨리고, 자신의 인기를 제3자를 통해 확대 확인하는 묘책(妙策)이 가게무샤와 모노마네에 배어있는 또 다른 세계관이라 볼 수 있다. 21세기식으로 말하자면 투명성을 통한 ‘모두의 이익증진’이란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명(明)만이 아니라, 암(暗)도 전부 보여주는 개방형 세계관이다.

세상만사, 부끄럽고 가려야만 하고 위험한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부 열어서 알릴 경우, 결과적으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 따라서 결국은 개방형 민주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단기적으로 볼 때, 진짜가 개방형 가게무샤의 효과를 이해할지, 자신의 추한 모습조차 모노마네로 표현하는 짝퉁을 인정할지가 문제다. 도쿠가와가 카게무샤를, 기무라 타쿠야가 자신의 짝퉁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느냐에 관한 부분이 관건이다. 최종 결정은 권력을 쥔, 인기에 오른 당사자 스스로가 내리게 된다.

다시 지중해 셀리누스로 돌아가자. 필자가 셀리누스에 들른 목적은 현지에서 최후를 맞이한 트라야누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트라야누스에 이어 로마 5현제 정점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진짜 방문 목적이다. 트라야누스 서거 당시 하드리아누스는 지중해 동쪽 끝에 인접한 안티오크(Antioch)에 머물고 있었다. 현지 최고 군사사령관으로 변경의 국경선을 지키고 있었다. 안티오크는 최초의 기독교 교회가 세워지고 크리스천(Christian)이란 말 자체가 탄생된, 사도바울(Paulo)의 흔적이 서린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자신을 후계자(양자)로 임명했다는 편지를 받는 즉시,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하면서 로마로 들어온다. 로마사에 빠진 사람이라면 하드리아누스를 로마의 링컨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 빠진 인문 미학 숭배자로, 로마 전역을 여행하면서 국경선을 다진 지덕체(智德體)를 겸비한 황제로 추앙된다. 그리스 미소년 안티쿠스(Anticos)와 맺어진 특별한 러브 스토리는 유럽 문단에서 다뤄진 클래식 테마 중 하나다. 필자 역시 타임머신 여행이 가능하다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로마 황제 중 한 명이 바로 하드리아누스다.

음모론 중심에 있던 하드리아누스


▎에게 해와 맞닿은 고대 도시 에페소스에 세워진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입구. 행운과 번영의 여신 티케가 아치 부분에 양각돼 있다.
명암은 함께 존재한다. 하드리아누스도 예외가 아니다. 셀리누스 음모론의 대부분이 하드리아누스에 관계된다고 앞서 말했지만, 황제 오른 뒤의 행적을 보면 ‘음모론=진짜 역사’였다고 믿을 법하다. 하드리아누스는 황제에 오르는 즉시, 원로원 유력자 4명을 살해한다. 하드리아누스가 트라야누스의 진짜 후계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인물들이다. 이후 원로원과의 관계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쁘게 간 것은 당연하다. 하드리아누스는 말기에 자신의 의형제와 휘하 자식들을 자살하도록 만든 악행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주변을 공포로 몰아넣은 폭군이 생존 당시 하드리아누스의 진짜 모습이다.

서기 138년 하드리아누스 사망 후 원로원은 그동안의 공포를 복수극으로 답하려 한다. 이른바 기록말살형(Damna tiomemoriae)을 통한 하드리아누스 축출이다. 로마에서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게, 관련된 모든 자료·정보·조형물을 폐기하는 형벌이다. 원로원의 원한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흔적이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는 21세기 현재 로마의 현군으로 우뚝 서 있다. 이유는 뒤를 이은 황제 피우스(Antoninus Pius)의 눈물 어린 부탁과 요청에서 비롯됐다. 하드리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질 경우 피우스 스스로 황제 자리를 버리겠다고 최후통첩했다. 평화 시의 로마 황제 자리는 정치권 모두가 타협한 결과물이다. 피우스가 황제 자리를 버릴 경우 또 다른 혼란이 닥칠 수 있다. 그 같은 상황을 우려한 원로원이 기록말살형이 아닌 신격화에 동의하면서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5현제의 중심에 서게 된다.

하드리아누스를 생각하면 가게무샤와 모노마네가 떠오른다. 명과 암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폭군 하드리아누스의 실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판테온 신전을 짓고, 로마 외곽 티볼리(Tivoli) 별장에 칩거하면서 인문 미학에 빠진 지덕체 겸비 황제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로마 역사에서 하드리아누스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필적되는 현제로 그려진다.

사실, 로마사에 깊이 빠지지 않는 한 하드리아누스의 악행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역사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숨긴다고 비난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터넷 시대에 숨긴다고 해서 가려질 수도 없다. 원로원을 공포로 몰아넣고 주변 가족을 자살로 몰아간 황제가 왜 로마 최 번성기의 최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암(暗)보다 명(明)이 더 크고 넓고 깊기 때문이다. 그 같은 명암의 비교는 로마를 통치한 황제들의 면면을 비교하면서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트라야누스처럼 스페인 출생 장군 출신인 동시에, 그만큼 로마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살핀 부지런하고도 열심히 살아간 황제도 없다. 자식을 통해 자신의 위업을 전승할 생각도 없었다. 사심 없이 행동한 황제였다는 점에서 로마 현제의 대표주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말년에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식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로마 전체를 위한 황제로서 마이너스보다 플러스가 많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지금까지 존경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기록말살형 반복하는 한국 정치에 교훈

2021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면 음모론 천국처럼 느껴질 정도로 혼란스럽다. 나라 전체를 흔들어놓을 만한 사건·사고가 연일 터지지만, 뚜렷하게 규명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19세기 말 조선이 이런 상황이었을까. 음모론이 요동칠수록, 피 튀기는 복수극이 예정된 듯 느껴진다. 권력의 주체나 상황이 바뀐 뒤 기록말살형이 등장할지, 거꾸로 신격화가 이뤄질지 지금으로써는 가늠하기 어렵다. 옳고 틀리고를 따지는 사람들이 있지만, 21세기 한국은 더는 흑백으로 간단히 나눠질 나라가 아니다. 암에 비해 명이 얼마나 더 큰지, 과거의 지도자나 상황에 비교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행복하고 안전하다고 믿는지, 우물 안 책상머리가 아니라 현장감각에 기초한 오감(五感) 치적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가게무샤 존재 자체를 숨기면서 뒤로 숨는 식의 정치나 통치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아예 진짜와 가짜 전부를 통째로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하게 하는 것이 한층 더 현명하고 시대정신에도 맞을 듯하다. 인간·사회·국가, 누구에게나 명암은 있다. 그러나 명을 한층 더 개발 진화시킬지, 암을 더더욱 들추면서 핏빛 복수극으로 갈지에 따라 미래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로마는 세계의 모든 길이 통하는, 지형적·물리적 소통의 중심지에 한정되지 않는다. 역사의 교훈이자 인류 문명사의 모델로 21세기를 넘어 영원히 존재할 곳이 바로 로마다. 승자의 조건을 갖춘 나라로서만이 아닌, 패자로서의 교훈도 로마 역사 곳곳에 배어있다. 폭군으로 불릴 수도 있는 하드리아누스가 로마 최전성기의 상징물이 된 것은 최적의 본보기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더는 최선이나 최고는 없다. 차선(次善) 차악(次悪)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록말살형을 반복하는 대한민국은 더는 원치 않는다. 폭군이란 불명예가 붙더라도, 대제국과 로마 시민 모두를 위해 일한 하드리아누스 같은 지도자가 그립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03호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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