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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1)] 제1부 일본에 대한 다양한 시선(1) 혐한론의 실체 

경제 침체 울분 외부로 돌려 병적인 분풀이 

조선 지배 향수에 젖은 우익, 대한민국 약진 용납 못해
불안정한 감성의 나라, 칼 잡으면 대상 안 가리고 칼춤

19세기 후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기치로 내걸고 서구를 배운 뒤 동아시아 패권을 차지한 일본. 그들은 메이지 유신 이래 구미인에게 ‘수수께끼와 신비의 나라’로 알려졌다. 일본은 한때 세계 제2의 경제 대국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맞아 일본은 아날로그 시대 때의 역동성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대한민국은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고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 직전 일본 자위대원들에게 재무장을 촉구하고 있다.
하라키리(切腹)는 칼로 상징되는 사무라이가 명예롭게 목숨을 끊는 방법이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는 [금각사] 등의 소설로 널리 알려진 작가다. 그는 상식적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할복이라는 죽음의 의례로 세상에 큰 충격을 줬다.

미시마는 1970년 11월 25일 도쿄 육상 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부에서 할복했다. 미시마는 자신이 만든 ‘방패회’ 회원 4명과 함께 총감부에 침입했다. 마쓰다 총감을 꽁꽁 묶고 자위대원에 전후(戰後) 평화헌법을 없애고 사무라이 정신의 부활을 재촉하는 연설을 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냉소와 야유였다.

이에 그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고 일본도(刀)로 자신의 배를 그었다. 한 추종자는 그의 목을 쳐줬다. 자위대의 궐기에 목숨을 버린 것이다. 현대에도 이런 잔인무도한 의식이 벌어질 수 있다니 놀랍다. 죽음의 철학으로 과대 포장돼 숭상하는 병적인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는가.

한·일 관계는 2018년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로 경색됐다. 2019년 일본은 대(對)한국 무역 보복 조치를 취하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가 취한 가장 강력한, 전쟁에 버금가는 공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시마의 주장대로 평화헌법을 없앤다면 전쟁이 아닌가.

한·일 간에는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 그리고 독도를 둘러싼 영토 문제 등 현안이 쌓여 있다. 일본을 잘 안다는 사람들은 우방국끼리 싸우는 모양새가 좋지 못하다며 양비론을 펼쳤고, 대한민국이 아직은 국력이 안 따라주니 일본에 강경책을 쓰는 게 시기상조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웃 나라들은 한한령(限韓令)이나 혐한론(嫌韓論) 같은 괴상한 단어를 신조어로 사용하는 등 대한민국을 압박하고 있다.

불변하는 진실은 한반도는 화약고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은 단순한 경제 보복이 아니고 전쟁 도발이나 마찬가지다. 우리의 가장 아픈 곳을 골라 공격했기 때문이다.

일본이란 이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기 알맞은 시기다. 역사 속에서 무수히 한반도를 침략했던 그들의 본질을 다시 되새겨볼 때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일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국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다. 때로는 상종하지 못할 민족적 원수, 우리가 배워야 할 근대화의 모범국가, 유별난 민족성을 가진 인종 등 다수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혁명적 전환이다. 우리의 대처가 더 빠를 수 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국제정치적으로 외풍에 시달리기 십상이었다. 주변의 강국을 대하는 권력의 선택에 따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기도 했다.

일본을 대하는 많은 태도를 일컫는 말이 있다. 항일·친일·배일·반일·극일·지일 등 아주 자극적인 단어들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매국적 친일이 아닌, 일본에 조금 친근한 태도를 보이기만 해도 친일이라는 프레임에 가둬 낙인을 찍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주변국에 대한 이해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숙명이다.

수년 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논란 때 중국 정부의 한반도 정책을 보면서 우리는 중국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여겨졌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는 한·일 양국은 역사 문제 등으로 촉발된 경제 전쟁을 치렀고, 그로 인해 새로운 관계설정이 요구되고 있다.

원한 품고 한반도에서 철수한 왜국


▎일본의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일본서기].
그간 우리가 자제해왔던 반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물론 감정적으로 경도된 일본에 대한 태도가 아니다. 다시 살펴보자는 말이다. 2020년에 작고한 김용운 교수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의 특징을 원형사관에 따라 서술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은 바람(風)의 나라이며 홍익인간을 원형으로 파악한다. 중국은 물(水)의 나라다. 모든 것을 삼키는 황하의 물처럼 중화사상이 원형이다. 일본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불(火)의 나라이며 백강전투(663년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의 구원병과 백제의 부흥군이 합세해 나·당연합군과 벌였던 전투) 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신라를 얕보는 번이(蕃夷) 사관과 주변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원형으로 파악한다.

이 역사서는 신라에 패한 열등감을 지렛대로 편찬됐다. 일본의 침략 민족성은 이렇게 풀이한다. “각 민족에는 이런 고유한 성격(원형)이 있어서 신기하게도 비슷한 역사적 국면에 같은 패턴을 되풀이·연출한다.” 김운용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한·일의 인종·언어적 뿌리는 하나인데, 백강전투 이후 일란성 쌍둥이가 별개의 인격체를 갖게 되는 신기한 변화를 했다는 것이다.

일본사에서 일본의 역사를 바꾼 전쟁의 첫머리는 백강전투가 장식한다. 일본이 패한 전쟁을 일본 역사를 바꾼 전쟁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일본의 뿌리 깊은 대륙 지향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섬나라 일본의 적은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에 있었고, 대륙은 반드시 수복해야 하는 원수의 땅이었다.

전투의 무대를 중국에서는 백강구(白江口)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백촌강(白村江)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곳이 현재의 금강이라는 설도 있고 동진강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백강전투는 지정학적으로 동아시아 대륙·반도·섬에 있는 나라가 양편으로 나뉘어 맞붙는 최초의 동아시아 세계대전이었고 각국의 명운을 건 대회전이었다.

이 전쟁은 백제가 신라에 공격을 받고 멸망하자, 부흥을 목적으로 백제가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약 2만7000명의 백제와 왜군 연합군에 압승을 거둔 전쟁이었다. 당시 왜는 국가의 존망을 이 전쟁에 걸었다. 백제와 왜의 수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중국의 역사서 [구당서(舊唐書)]는 ‘왜선 400척을 불태웠는데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후 왜는 한반도에서 영향력 행사는 고사하고 당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비해 다자이후(大宰府·오사카 현에 있는 시) 인근에 대규모로 성을 쌓기에 급급했다. 백제·왜 연합군의 패전 이유는 당군의 예상 밖 신속한 참전 때문이었다. 백제·왜의 연합군은 당군의 화공에 무기력하게 당했는데 왜군은 조수간만의 차이 등에 관한 지리적 지식조차 없었다.

백강전투 이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은 한반도에 남아 있던 백제와 왜의 세력을 차례차례 격파한다. 왜군은 망명을 요청한 백제인들과 함께 한반도에서 철수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백제 왕조 부활의 싹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신라는 이후 반도에 남아 있던 고구려마저 멸하고 676년 통일을 이룬다.

신라에 대한 열등감의 기록 '일본서기'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 스님.
일본 국내에서는 왕위 계승을 미루던 덴지(天智) 천황이 백강전투 후 즉위한다. 하지만 나·당 연합군이 여세를 몰아 침입할 거란 우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덴지 천황은 규슈 북부와 나가토 국의 방비망을 구축한다. 덴지 천황은 방비 태세를 갖추는 한편 당과의 관계 수복에도 힘을 쓴다. 그는 견당사를 파견하는데 여기에는 정말로 당에 일본 침략 의도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 포함돼 있었다.

일본은 덴지 천황 4(665)년부터 당과 사절을 교환하게 된다. 이로부터 2년 후에는 당이 일본인 포로를 쓰쿠시(筑紫)에 보내줌으로써 양국의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다. 비로소 대륙문화가 일본에 전해지게 되는 것이었다.

백강전투에서 완패한 왜는 이후 한반도의 주요 세력이 된 신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게 된다. 월등한 국력을 지닌 당에는 문호를 열고 활발하게 교류하지만, 신라와는 철천지원수가 된다. <일본서기>는 이러한 기조에 바탕을 두고 쓰인 역사서다. 신라에 대한 열등감에서 기인한 기록으로 제대로 된 역사로 볼 수 없다는 평가도 있다.

신라를 얕보는 번이 사관과 주변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팔굉일우 사상이 [일본서기]의 주된 흐름이다. 팔굉일우란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 일가처럼 화합시킨다는 말이다. 2차 대전 때 일본이 국가 이념으로 내세워 해외 진출을 정당화하는 강령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가 기록된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천제의 아드님이신 환웅이 인간세계에 강림할 때 내세운 하늘의 이념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여러 사례가 등장한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스트리커(streaker)라 불리는 정수 스님의 ‘정수사구빙녀(鄭秀師求氷女)’의 이야기가 그 일례다. “겨울 눈은 내렸고 해는 저물었다. 삼랑사(三郞寺)에서 돌아오는 길에 천암사(天巖寺) 문밖을 지나는데 걸인 여인과 갓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정수는 이를 보고 연민을 느껴 안아주니 얼마 후 깨어났다. 이어서 옷을 벗어 덮어줬고 나체로 본 절로 뛰어갔다.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지새웠다.”

한편 소설 [토지]는 소설로 씌어진 ‘일본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박경리 작가가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은 뚜렷했다. 그가 유작으로 남긴 [일본산고(日本散考)]에는 이 일화를 떠올린 이야기가 나온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대표작 [라쇼몽(羅生門)]은 [곤자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에서 소재를 얻어 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정수 스님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다. 흉년이 들어 아사 직전의 하인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생계를 이어가는 노파의 옷을 벗겨 달아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빙녀의 비극을 스님의 나체 질주로 희극화하는 따뜻한 이야기와 아비규환 같은 삶 속에서 자신보다 약한 자의 옷을 벗겨 도주하는 이야기를 대비한 이유는 간단하다. 다소 거친 대비이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통해 일본인이 드러내는 공격과 약탈 본능을 말하려 한 것이다. 확실히 우리의 휴머니즘과는 차이가 있다.

이웃 나라 헐뜯는 책, 비정상적 열풍


▎박경리 작가의 생전 모습. 집필 도중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 있다.
백강전투에서 유래한 이야기가 일본의 설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모모타로(桃太郎)는 일본의 동화 속에 나오는 전설의 대중적 영웅이다. 복숭아 열매에서 태어난 소년 모모타로가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수수경단을 받아 개·원숭이·꿩을 거느리고 오니가시마까지 귀신을 퇴치하러 가는 이야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를 뜻하는 모모와 일본의 남자아이 이름인 타로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복숭아 소년, 또는 복숭아 동자로 번역해 부른다. 일본은 이런 설화를 만들어서 임진왜란과 조선침략의 정신적 배경으로 삼았다. 태평양전쟁 때는 모모타로가 군국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용감함의 화신으로 회자됐다. 미국·영국을 귀신으로 여기는 ‘귀축미영’(鬼畜米英)]이 슬로건으로 이용됐다.

백강전투에서 패한 후 신라와 당 연합군의 공격을 우려해서 덴지 천황은 서일본 각지에 축성한다. 그중의 하나가 현재의 오카야마(罔山)에 세워진 귀신의 성이라는 이름의 기노죠(鬼ノ城)다. 이 성은 백강전투에서 도망쳐온 망명자들의 기술을 활용해 만들었다.

이 부근에 모모타로의 모델이 된 기비코히코노미코토(吉備津彦命)를 기리는 기비코 신사가 있다. 기비코히코노미코토는 기노죠에 살았는데, 그들의 표현에 따르면 악행을 일삼았던 백제의 왕자 우라(溫羅)를 토벌하고 목을 쳤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모모타로의 이야기가 창작됐다는 설이 있다.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원한을 품은 역사는 이렇게 오래됐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증오심은 아시아의 대표적 국가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한 21세기에 들어 신조어로 표현된다. 한국 대중문화의 붐을 가리키는 한류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난 말이 혐한류(嫌韓流)다. 혐한은 한국 국민과 한국계 인사에 의한 혐오 감정이 응축된 단어다.

혐한이라는 신조어는 2005년 무렵 [만화 혐한류]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해당 출판사에 따르면 발행 후 1주 만에 2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혐한류 관련 서책은 2009년 [만화 혐한류] 시리즈만으로 이미 누계 90만 부를 넘어섰다. 이 시리즈 이외에도 혐한류 관련 책은 서점의 주요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방송 매체에서도 연일 혐한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병적인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서점에서 별도의 코너까지 만들어서 한 나라를 헐뜯는다는 게 과연 정상적인 멘털을 가진 나라에서 할 수 있는 행위일까.

박경리 “일본 역사 본질은 뼛속 깊이 야만이다”


▎루스 베네딕트의 소설 [국화와 칼]의 한국판 표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가 되면서 일부 일본인의 ‘혐한’이라는 감정과 행동은 인터넷을 통해 널리 확대되기에 이른다. 또 한국 내에서 생산되는 일본 관련 기사 등이 일·한 번역 사이트 등을 통해 전달되자 ‘혼네’(本音, 본심)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일본인들은 익명성에 숨어 병적인 증오를 한국을 향해 쏟아냈다. 혐한은 ‘잃어버린 30년’이란 일본 경제 침체의 울분을 외부의 적에 돌려세우고 병적으로 분풀이하는 제2의 정한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을 지배하던 때의 향수에 젖어 있는 일본 우익은 국제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약진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이 전통적 사회질서를 유지한다는 ‘와(和)’는 각자의 자리(各其の所)를 찾는 것이었다. 일본은 인도의 카스트에 비견되는 엄격한 신분제, 즉 평민·사무라이·귀족·쇼군·덴노로 이어지는 알맞은 ‘자리’의 확립을 통해 자신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와’를 실현하고자 했다.

국제질서에 대한 일본의 태도도 이와 유사하다.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지배했던 나라가 위계질서를 벗어나 알맞지 않은 위상에 이르자 현실감각이 마비된다. 한국에 대해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찾아야 한다”며 일으키는 소동이 혐한이다. 그들은 언제나 형이고 한국은 아우여야 한다는 논리다. 왜냐하면 한 번 형성된 확고한 위치는 변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잘나가는 동생의 출세를 눈을 뜨고 볼 수 없다. 혐한은 그 양상이 매우 치졸해 병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일본의 한 서점 내 판매대. ‘너무 이상한 나라, 한국’ 코너에 ‘가깝지만 먼 게 좋은 일본과 한국’ 등의 혐한 서적을 모아놓았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이고 그 본질은 뼛속 깊이 야만이다.”(박경리, 1926~2008)

우리는 일본을 잘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 하지만 직접 그들의 실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무역 보복과 코로나19 사태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이란 나라가 보여주는 선진국답지 못한 행태를 목도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첨예한 대치 속에서 주머니 속 송곳은 어김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날로그 시대 모범국가에서 디지털 시대 지진아 같은 모습은 ‘선진국 일본’을 상상하던 때와는 차이가 난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철저한 혁명이나 개혁에 서툰 사람들이었다. 전쟁의 시기를 거쳐 평화의 시기에 일본의 변신은 놀라웠다. 전쟁의 책임을 ‘요령 있게’ 회피하고 경제 모범국이 되면서 감춰져 있던 그들의 본모습은 다시 드러나고 있다. 변하지 않는 민족의 원형사관이라는 말은 유효하다.

루스 베네딕트가 쓴 일본론의 고전 [국화와 칼]이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방외자의 시선으로 일본을 관찰한 보고서라면, 박경리 작가의 일본론은 식민지의 황국신민으로 태어나 민족적 차별을 겪으며 성장한 한 인간의 진솔한 관찰기다. 어쩌면 관찰을 뛰어넘는 심오한 통찰력이다. 감정적 반일주의가 아니고 그 누구보다 다양한 직간접적인 일본의 체험에서 우러나 있기에 놀랍다.

죽음을 강요하는 칼의 나라


▎일본 우익 네티즌들의 혐한 시위. 이들은 한·일 국교 단절을 주장한다.
박경리 작가는 소설가답게 어린 시절부터 일본어로 세계 소설을 읽으며 통찰력과 일본적 시선 그리고 한국적 정서를 융합해 자신만의 확고한 일본론을 지닐 수 있었다. 그의 일본에 대한 단언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라는 거대한 분노다.

베네딕트가 제시한 일본은 이중적이다. 국화는 미(美)와 평화를 상징한다. 칼은 무(武)와 폭력을 나타낸다. 박경리 작가는 일본을 상징하는 이 두 가지를 가차 없이 비판한다. 일본의 와카(和歌, 일본 고유의 시)나 하이쿠(俳句, 일본 고유의 단시형)에서 볼 수 있는 감상주의적인 사람들의 경우 깨끗하고 순수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너무나 가냘픈 로맨티시즘일 뿐이라고 일소(一笑)한다. “선이 너무 가늘고 미약합니다.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일 뿐이에요.” 반면 칼의 문화는 단지 죽음의 문화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깨끗이 책임지고 자신의 주체적 결정으로 몸에 칼을 긋는 할복 문화를 일본 정신의 표본이라고 포장해 떠받들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박경리 작가는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강제된 체념과 마조히즘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 분위기가 죽음의 문화를 형성한 것이며 예술도 죽음의 추구가 아닌 생명의 추구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바라보는 일본의 사회나 문화는 건강하지 못했다.

“예술도 삶의 투쟁, 삶의 인식, 삶의 조화 그 모든 삶에 수반되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신묘한 본질적 삶의 교향악 위에서 군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은 삶의 추구며 방식이다.”

박경리 작가는 자신을 철저한 반일작가로 칭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 혹은 지성을 나는 지적 허영으로 본다.” 뜨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지적 허영의 종말과 새로운 접근 방식이 필요할 때다.

국가 간 경쟁과 반목의 시대다. 일본인의 미적 관념에 자주 등장하는 상심과 한적함 속에서 불완전 속의 내면을 추구하는 와비(侘, 투박한)·사비(寂, 조용한), 숙명적 애상의 모노노와와레(物の哀れ) 등은 긍정적으로 보면 섬세한 감수성이지만 다른 측에서 보면 짙은 허무주의이자 가녀린 센티멘털리즘이기도 하다. 이런 불안정한 감성에 칼이 쥐어지면 그 칼끝은 자신의 배에서도 상대의 목에서도 대상을 가리지 않고 춤을 출 것이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104호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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