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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현대 건국운동사 | 근·현대 건국 담론(6)] 통합일진회, 일제의 식민지 공작에 말려들다 

민권 얻으려 국권 포기한 ‘보호독립’ 선언 

“차라리 무정부가 낫다” 기존 국가권력에 대해 깊은 반감
매국 조직으로 변질, 을사늑약 정당화하는 선언서 공포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재구성한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의 삽화. ‘조선산 보호 새’란 팻말을 붙인 조롱 속에 갇힌 닭(조선)이 주인(일본)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있다. 을사늑약 체결을 기념하는 만화로 [도쿄퍽] 1905년 12월 15일 자에 실렸다.
1904년 12월 2일 진보회와 일진회가 통합할 당시 총 회원은 대략 12만2000명 수준이었다. 그중 진보회 회원은 대략 11만8000명, 일진회 회원은 4000명이었다. 진보회 회원이 97%가량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통합일진회는 본회(本會)와 지부(支府)로 구성됐다. 본회는 기왕의 일진회였다. 구 독립협회 회원들이 주축인 일진회는 한양에 있었기에 그대로 본회가 됐다. 반면 동학교도들이 주축인 진보회는 지방에 있었기에 지부가 됐다.

당시 진보회는 군과 도 단위에 조직돼 있었다. 이에 따라 통합일진회의 본회 회장은 윤시병이 맡고, 지부 총회장은 이용구가 맡았는데, 이용구 산하에는 13도에 설치된 13명의 지부회장(支府會長)과 200군 내외에 설치된 200명 내외의 지군회장(支郡會長) 그리고 각 군에 소속된 일반회원 11만8000명이 있었다.

이처럼 통합일진회는 군 조직, 도 조직, 13도 연합조직 그리고 한양의 본회 조직으로 구성됐다. 당시 대한제국 안에 이 정도 규모를 가진 민간 조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통합일진회는 근대민족운동을 대표하던 구 독립협회와 동학 주류가 결합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통합일진회는 명실상부 근대 대중운동을 상징하는 전국조직이자 대표조직이었다.

통합일진회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됐다. 우선 각 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민원(民願)을 지군(支郡) 조직에서 수합하고, 이를 다시 도 단위의 지부(支府) 조직에 보고했다. 그러면 도 단위의 지부 조직에서는 13도 지부 총회장인 이용구에게 보고하고, 이용구는 이를 수합해 한양의 본회에 보고했다. 최종적으로 본회에서는 이들 민원을 정리해 중앙 정부의 해당 부서에 통지하거나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상소나 신문 광고 등을 통해 민원을 여론화하기도 했다.

일제, 고종황제 약화시키려 황실 재산 국유화


▎러일전쟁 종료를 위해 영국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평화회담.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국제평화’를 이끈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소
통합일진회가 이런 방식으로 운영되자 지방 동학교도들의 민원은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중앙정부에 전달됐다. 나아가 정부 정책에 동학교도들의 민원이 효율적으로 반영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동학교도들의 민권이 적지 않게 개선되기도 했다.

이는 본회 조직으로 재편된 구 독립협회의 역량과 지회 조직으로 재편된 동학교도들의 역량이 통합함으로써 나타난 결과였다. 이런 결과로 통합 초기 일진회는 민권의 대변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문제는 통합일진회의 민권 개선 운동이 자력이 아닌 일제의 위력에 의지했다는 사실이었다.

통합일진회가 출범하던 즈음, 일본인 메가타다 네타로(目賀田鍾太郞)가 탁지부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추천하는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고용한다는 1904년 8월 22일의 ‘한일협정서’에 따른 결과였다. 메가타 고문은 대장성(大藏省) 주세국장(主稅局長)으로 재직하던 재정 전문가였다.

1905년 봄, 일본으로 귀국한 메가타 고문은 고무라(小村) 외무대신으로부터 ‘재정통일방침(財政統一方針)’을 전달받았다. 그 방침은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대한시설강령’을 10개 항으로 구체화한 것인데 지방 경무관, 지방 세무관, 내장원(內藏院), 광산, 하천 및 연안 항행, 우편과 전신 및 전화, 재외공사관, 세관, 황실에 속한 사업, 연초와 식염의 전매 등 대한제국의 재정, 경제 전반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내장원, 광산, 황실에 속한 사업 등은 대한제국 황실의 재정에 직결되는 문제들이었다.

탁지부 고문 메가타는 정부 재정과 황실 재정이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기에 황실 재정에도 간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탁지부 재정의 10% 정도가 황실비 명목으로 공식 지출됐고, 비공식적 지출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방침이란 것이 바로 ‘재정통일방침’이었다.

그 방침에 따라 메가타 고문은 ‘궁중혁정(宮中革正) 5대 강목(綱目)’을 세웠다. 그 내용은 ‘황실비는 정액으로 하고, 그 내용은 탁지부에서 사정하지 않는 대신 황실 소요 일체의 경비는 궁내부가 책임지고 이후 정부에 부담을 전가하지 않는다’ ‘영업의 면허, 특허 기타 일반 행정 관청의 소관에 관한 일에 대해서 궁내부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궁내부 소관의 경지·건물 등으로서 정부의 소관으로 돼야 할 것은 그것을 정부에 이관할 것, 그를 위해 황실유국유재산조사회(皇室有國有財産照査會)를 설치해 소관을 결정할 것’ 등이었다.

요컨대 메가타 고문이 제시한 황실 재정 정리는 정부 재정과 황실 재정의 분리를 원칙으로 하면서 황실 재산 중 대부분을 국유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황실 재정 정리를 핑계로 황실의 경제 기반을 파탄시키고 그를 통해 고종황제를 약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려는데 있었다. 황실 재정 정리는 1904년 10월 5일 설치된 제실제도정리국(帝室制度整理局)이 1905년 1월 23일부터 업무를 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메가타 고문이 황실 재정 정리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이던 즈음, 통합일진회는 시정 개선에 관한 5가지 민원을 제기했다. [원한국일진회역사(元韓國一進會歷史]에 의하면 통합 일진회는 1905년 2월 7일 의정부에 청원서를 보내 관기진숙(官紀振肅), 행정 정리, 지방 정치, 국민 교육, 식산 흥업 등을 요구했다. 관기진숙은 관료들의 기강을 진작시키라는, 행정 정리는 행정기관을 정리해 통폐합하라는 요구였다.

또한 지방 정치는 지방 제도 개선에 관한, 국민 교육은 국민 교육을 강화하라는, 식산 흥업은 상공업을 진흥시키라는 요구였다. 이 같은 5가지 요구는 메가타 고문이 추진 중이던 황실 재정 정리를 지방 차원으로도 확대하라는 요구와 같았고, 그래서 메가타 고문의 황실 재정 정리를 적극 지지하는 선언과 같았다.

통합일진회, 지방 관청에 일본인 감독 요청


▎1894년 8월 12일 자 [파리지엥지]가 조선시대 상황을 표현했던 그림. 고종황제가 호위대에 둘러싸여 있다.
특히 지방 정치에는 당시 지역민들의 민원이 대거 포함됐다. 예컨대 지방제도를 조선시대 때처럼 8도로 하되 각 군은 150군 정도로 조정하자는 요구는 대한제국 들어 지방제도가 13도와 330여 군으로 재편되면서 야기된 지역민들의 불편을 반영한 것이었다. 지방관은 행정 업무만 맡아보게 하고, 재판업무와 세금 업무는 재판소와 징세소를 둬 별도로 맡아보게 하자는 요구는 혁명적이기까지 했다.

절대군주제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지방관은 절대군주를 대행하는 관료인데, 그들로부터 재판 업무와 세금 업무를 제외하고 행정 업무만 맡게 하자는 것은 궁극적으로 고종의 절대권력을 파괴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당시 중앙정부에서는 메가타 고문이 고종황제의 재정권을 약화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었다. 특히 메가타 고문은 ‘재정통일방침’ 중 지방 경무관과 지방 세무관 문제가 쉽지 않았다. 지방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실현하려면 고종황제의 절대권력 약화와 더불어 지방민들의 요청이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통합 일진회가 지방 재판소와 지방 징세소를 설치하자고 요청한 것은 메가타 고문의 필요에 부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통합일진회의 요청으로 지방 재판소와 지방 징세소가 설치된다면 지방 차원에서도 고종황제의 절대권력이 약화하는 것이고,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황제권 약화이지만 결국은 국권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합 일진회에서 지방 재판소와 지방 징세소를 설치하자고 요청한 이유는 절대 황제권에 근거한 지방관의 절대권력이 농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통합일진회는 지방의 관청·재판소·징세소에 적당한 일본인을 초빙해 감독으로 두자는 요구까지도 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지방의 군청·재판소·징세소에 일본인 고문이 배치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통합일진회는 한국인 지방관들을 믿지 못하고 차라리 일본인 고문들을 믿겠다는 것과 같았다. 한국인 지방관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고종황제를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시 고종황제와 양반·관료 체제가 극도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자행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무능과 부정부패를 일본인 고문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은 분명 국권의식의 왜곡 내지 부재라고밖에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이 같은 통합일진회의 국권 의식 왜곡 내지 부재는 일본 정부에 이용당하기에 너무나 적합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시정 개선이라는 명분으로 대한제국에 재정 고문 메가타와 외교 고문 스티븐슨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스티븐슨은 오랫동안 일본 정부에 고용돼 있던 친일파 미국인이었다. 이들 재정 고문과 외교 고문의 목적은 일단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장악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 내지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 내부에 강력한 협조자가 필요했다. 그것도 자발적인 협조자가 필요했다. 일본 정부는 통합일진회를 강력한 내부 협조자로 만들고자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표면상 민권 향상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민권 향상을 내세우면, 국권 의식이 부재한 통합일진회는 자발적으로 협조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러일전쟁 승리한 일본, 조선 강탈 정책 노골화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
당시 메가타 재정 고문이 추진하던 황실 재정 정리는 많은 부분이 민권과 연결됐다. 황실 토지 중 많은 부분이 농민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메가타 고문은 소유권이 불분명한 황실 토지는 국유지로 편입하고, 농민 소유가 분명한 토지는 농민 소유지로 확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렇게 되자 전국에서는 황실 토지의 소유권을 놓고 황실과 농민 사이에 법적 다툼이 빈발했다. 농민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과 세금을 얻어내려면 한국인 관리보다는 일본인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런 배경에서 통합일진회는 한국인 지방관으로부터 재판권과 징세권을 배제하자고 요구하고 나아가 일본인 고문을 두자고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농민들의 권익을 향상하고자 하는 의도가 분명하지만, 황제권과 국권을 일본인에게 빼앗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컸다. 그런데도 통합일진회가 그런 요구를 공식적으로 한 것은 당시 통합일진회가 이미 강력한 친일단체가 됐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민권 향상이라는 미몽에 사로잡힌 통합일진회가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었다.

한편 초반부터 일본 우세로 전개되던 러일전쟁은 1905년 1월 2일 여순 요새가 함락되면서 결정적으로 일본에 유리한 상황이 됐다. 만주의 러시아군은 한반도와 요동반도 양방향에서 협공당하는 형편이었다. 100만 이상의 육군을 동원한 일본 역시 한계 상황에 다다르고 있었다. 유리한 상황에서 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일본 정부는 1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에게 강화(講和) 중재를 요청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전달한 강화 조건 중 핵심은 ‘조선을 완전히 우리 세력권에 두고 그 보호·감독 및 지도를 우리 수중에 둘 필요가 있음을 믿습니다’는 내용이었다. 강화 협상에 대비해 일본 정부는 공개적으로 한국의 보호국화를 추진했다.

5월 27일 발트 함대가 대마도 해협에서 궤멸한 후 러시아는 더는 전쟁 수행이 어려워졌다. 이에 일본과 러시아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중재를 통해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9월 5일 총 15조항의 강화조약이 체결됐는데, 핵심 내용은 제2조의 ‘러시아제국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탁절(卓絶)한 이익을 소유함을 승인하고 일본제국 정부가 한국에서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집행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또는 간섭하지 않는다’였다.

이로써 러시아는 대한제국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됐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여순, 대련의 조차권도 일본에 이전, 양여했고, 남만주 철도도 일본에 이전, 양여했다. 나아가 사할린 섬의 남부도 양여했다. 러일전쟁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은 물론, 요동반도와 남만주 그리고 사할린 남부까지 수중에 넣은 것이었다.

이렇게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명실공히 서구 열강의 일원이 됐다.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일본을 막을 나라는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2개월이 지난 11월 2일,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의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됐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보호국으로 만들라는 임무였다.

11월 5일 일요일 오전 7시,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휴대한 이토는 신바시(新橋) 역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전용 열차에 올라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11월 8일 오전 7시 45분, 군함 수마(須磨)에 탑승한 이토 일행은 시모노세키 항을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오후 5시, 부산에 입항한 이토 일행은 일본 영사관 직원들, 대한제국 관리들 그리고 일본인 거류민들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 방한 맞춰 보호독립선언서 발표


▎1895년 고종에게 하사받은 가옥에 인테리어를 서양식으로 바꾼 손탁 호텔 내부와 손탁. / 사진:휴머니스트
11월 9일 오전 7시, 이토 일행은 대한제국 황실에서 마련한 궁정 열차를 초량 정거장에서 타고 경성으로 향했다. 오후 6시 20분, 경성의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한 이토 일행은 기마 의장대의 호위를 받으며 손탁(孫濯) 호텔로 옮겨 여장을 풀었다.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던 와중에 조선에서는 기이한 일이 있었다. 이토가 도쿄를 떠나던 11월 5일에 통합일진회에서 보호독립선언서를 여러 언론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보호독립선언서란 간단히 말해 일본제국의 보호를 통해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선언서였다.

이토가 한양에 도착하기 4일 전에 통합일진회에서 이런 선언서를 공포한 이유는 자명했다. 이토가 도쿄를 출발할 때, 이미 일본 정부가 통합일진회에 공작해 을사보호늑약 분위기를 조성하게 했다. [원한국일진회역사(元韓國一進會歷史]에 의하면 통합일진회는 1905년 11월 5일 특별 평의회를 개최했다. 그 평의회에 의장 송병준이 출석해 우방을 신뢰해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즉 보호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는 제안이었다. 반대하는 평의원은 없었다.

이에 따라 제술위원 홍긍섭이 준비해온 보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로 보면 11월 5일 이전에 홍긍섭은 보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것이 분명하다.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이토가 특파대사로 임명된 직후 일본 정부의 공작으로 통합일진회에서 보호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렇게 작성된 보호독립선언서는 이토가 도쿄에서 출발하던 날짜에 발맞춰 11월 5일 공포됐다.

보호독립선언서는 당시 통합일진회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나아가 국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컨대 일본에 대해 보호독립선언서에서는 “일본은 선진국이고, 선각국이다. 동양의 평화를 극복하고자 해 십 수 년 이래로 전력 주선했다. 갑오년 청일전쟁과 오늘날 러일전쟁이 모두 의협심에서 나왔다”고 밝히는 등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 반면 국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절대적인 불신 내지 절망을 보였다.

“우리 일진회는 주의강령(主意綱領)이 위로는 황실의 존엄을 유지하고, 아래로는 인민의 안녕을 도모해 국가의 독립을 굳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황실의 존엄이란 헛된 영광이 아니고 신민의 숭상과 믿음을 얻음이고, 인민의 안녕이란 고식이 아니라 영구한 평화이며, 국가의 독립이란 형식이 아니라 실체다. 정치의 대권이 황제 폐하께 속한다는 것은 논쟁이 필요 없다. 한편 내치외교와 백반 시정에 경계와 역할이 있고, 신료에게 각각 분임이 있는 것이 정부인데, 과연 정부가 능히 그 직분을 다하고, 책임을 완수해 위로는 폐하의 신임에 대응하며, 아래로는 국민의 여망에 응답하는가? 슬프다! 일찍이 없던 일이로다! 대신 이하 문무백관은 그 자리에 갖춰 늘어섰을 뿐이고, 영록(榮祿)을 함부로 훔치며 심지어 백성을 학대해 사익을 경영하기까지 한다. 이런 것은 명분도 없고 실상도 없는 것이니. 차라리 무정부가 더 좋지 않겠는가?”

인접 국가 보호로 국권·민권 지킨 유례 없어


▎통감관사는 1906년에 설치돼 1910년 총독부가 설치될 때까지 대한제국을 지배했던 기구로, 서울 중구 예장동에 있다.
위에서 보듯 통합일진회는 민권이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 관료들에게 학대당하고 압살당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차라리 무정부가 더 좋지 않겠는가’라고까지 했을까? 실제로 통합 일진회는 차라리 고종황제도 없고, 양반 관료도 없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제국의 보호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다는 보호 독립 논리가 탄생했다고 이해된다.

당시 통합일진회는 구 독립협회와 동학을 계승한 전국조직이자 대표 조직이었다. 한국의 근대운동이 구 독립협회와 동학으로 대표된다는 점에서, 이들을 계승하는 통합일진회가 보호 독립을 선언했다는 것은 근대운동의 실패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민권을 부르짖던 구 독립협회와 동학이 어떻게 보호 독립을 선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이런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국권 의식이 왜곡되면 국권은 물론 민권도, 자유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돌아보면 국권은 국민 스스로 지킬 때만 지킬 수 있었다. 국권을 포기하는 나라는 다른 나라의 보호국이나 식민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보호국이나 식민지는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노예국가와 같다.

통합일진회는 기존 국가권력에 대한 절망과 증오심에서 보호 독립을 선언했다. 이웃 국가의 선의에 국권과 민권을 송두리째 맡긴 것과 같았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인접 국가의 선의로 국권과 민권을 지킨 사례가 있는가? 그런데도 통합일진회가 보호 독립을 선언한 것은 국권이 있어야 민권도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모른 결과라 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통합일진회는 민권 향상이라는 구호 속에서 매국조직으로 변질하고 말았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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