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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신곡 ‘파스’로 돌아온 55년 차 가수 문주란 

“삶이 너무 고달픈 시기 국민 허리에 파스 한장 붙여드릴래요” 

4월 발표한 탱고 스타일 노래, 유튜브 등에서 화제
“남은 인생은 받은 사랑 되돌려드리며 살겠다” 다짐


▎문주란이 서울 강남구 개포동 ‘STARRY SOUND(스타리 사운드)’ 스튜디오에서 노래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저음의 대명사’ 문주란(70)이 돌아왔다. 양손에 ‘파스’를 든 채.

1966년 데뷔한 그는 올해 가수 인생 55주년을 맞았다.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곡은 어림잡아 1800여곡. 반백 년 가수 인생 동안 어지간한 스타일의 노래는 다 불러봤다.

문주란은 “반백 년 넘도록 수많은 곡을 불렀지만 ‘파스’ 스타일은 없었다”며 “너무 고달픈 시기를 살아가는 국민 허리에 ‘파스’ 한장 붙여드린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이 노래를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배석한 전경민 작곡가는 “이 곡은 전통적인 트롯풍(風)과는 거리가 있는 탱고”라며 “지인들이나 팬들로부터 ‘좋다’는 반응이 많다”고 거들었다.

4월 15일에 발표된 ‘파스’(박승욱 사, 전경민 곡)는 유튜브 등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우선 노랫말이 코로나19 등으로 우울해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다는 평이 많다. “파스좀 붙여주세요. 파랗게 멍든 가슴에, 어디라 말할 수 없는 이렇게 아픈 마음에, 파스 좀 붙여 주세요. 어루만져 찾아주세요. (…) 헤아려 붙여주세요. 아무도 몰라주는 이 아픔을, 위로처럼 어루만져 풀어줘요. (…)”

월간중앙과 만난 자리에서 문주란은 “좀 더 많은 분께 ‘파스’ 붙여드릴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인터뷰는 5월 6일 화창한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신곡 발표 후 여기저기서 연락이 옵니다. (방송 출연, 인터뷰 등) 스케줄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움직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고 있어요. 저는 스케줄이 없는데 굳이 약속 잡아가면서까지 사람 만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파스’라는 신곡이 어떻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됐나요?

“아마 1년 전쯤이었을 거예요. 평소 친분이 있던 박승욱 작사가에게서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직접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쓴 노랫말이라며 ‘파스’의 가사를 보여주더군요. ‘괜찮다’ 싶었는데 나중에 곡까지 붙여서 다시 가져온 겁니다. 들어보니 느낌이 좋더라고요. 박승욱 작사가가 ‘반드시 가수의 목소리는 흑인들의 솔(soul) 느낌이어야 하고, 곡은 탱고여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요. 그래서 몇 차례 편곡 끝에 지금의 ‘파스’가 탄생하게 된 겁니다. 작사가나 작곡가의 기획 의도에 맞추기 위해 저 역시 루이 암스트롱 스타일로 노래를 불렀어요.”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전경민 작곡가가 답했다)

“솔직히 좋은 얘기는 많이 듣고 있습니다. 우선 문주란 선생님 같은 목소리가 한국에는 없잖아요? 심지어 발표 전 주변 음악인들에게 들려줬더니 ‘남자가 불렀죠?’라고 물은 사람도 꽤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1800곡 가운데 이런 스타일의 노래가 있었던가요?

“없었어요. 물론 탱고풍의 노래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파스’처럼 전형적인 탱고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문주란만의 스타일에 맞는 노래를 불렀다면, 이번에는 그런 이미지에서 탈피해서 제 목소리 톤에 맞는 노래, 젊은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보고 싶었어요. 노래를 부른 가수로서는 곡에 대한 만족도가 큽니다. 젊은 세대에게 어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웃음).”

‘박춘석 사단’의 일원이었던 문주란은 1966년 제1집 [동숙의 노래/ 낙엽 지는 밤]을 시작으로 [당신이 있으니까/ 젊은초원](1973년), [아마다 미야/ 남의 속도 모르고](1989년), [97 春 내 가슴 벌집 됐네](1997년), [시절인연](2011년) 등 수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그는 데뷔 때부터 남자보다 더한 저음으로 큰 화제를 모았고, 최근 발표된 신곡은 흑인 재즈 가수인 레이 찰스나 루이 암스트롱 감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800곡 가운데 단 하나뿐인 ‘탱고 스타일’


▎문주란은 독신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 “성격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요즘 트롯이 대세잖아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는지요?

“가수 입장에서 그런 현상 자체는 너무 좋은 일이죠. 사실 옛날에는 트롯을 부른다고 하면 수준이 낮고, 팝이나 칸초네를 부르면 수준이 높다는 편견이 있었잖아요? 그런 측면에서는 크게 반길 일입니다. 단, 모든 가수가 트롯을 부르는, 지나치게 상업적인 흐름으로 가는 건 솔직히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젊은 트롯 가수 후배 중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나요?

“트롯 가수가 워낙 많다 보니 누가 누구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노래 잘 부르는구나’ 정도로 생각할 뿐이지 특별히 염두에 두는 가수는 별로 없어요. 어쨌든 트롯은 전통가요이고, 듣는 사람의 가슴 깊이 와 닿는 게 본질입니다. 자기 스타일에 맞게 편곡하는 것까지는 좋다고 봅니다만, 너 나 할 것 없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춤추는 건 좀…. 트롯이 대세라고 하더라도 트롯에 대한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람들까지 트롯을 부르는 건 지나친 상업주의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만15세 때 데뷔했죠? 그때와 비교하면 요즘 10대 트롯 가수들은 어떤가요?

“제가 데뷔할 때만 해도 청소년이 어른 노래를 하는 데 굉장히 제약이 많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되레 반기는 분위기죠. 재능과 끼가 넘치는 10대 가수들이 나오는 건 정말 좋은데, 주위의 어른들이 너무 부추기는 건 아닌지, 염려가 드는 게 사실입니다. 돌아보면 만 15세 때 데뷔한 저는 어느 날 갑자기 ‘벼락스타’가 됐지요. 그래서 동심의 세계가 그리울 때가 많아요. 요즘 어린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부산이 고향인 문주란은 중학교 2학년이던 1965년 부산 MBC 라디오 노래 경연대회에 출연한 게 인연이 돼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66년 서울로 전학을 간 문주란은 그해 서울시민회관에서 진행된 한 시상식에서 ‘특별 게스트’로 무대에 섰다. 전혀 예정에 없던 말 그대로 깜짝 출연이었다. 문주란이 당시 최고 히트곡인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를 원음보다 한 키 낮춰서 부르자 여기저기서 ‘앙코르’를 외치는 등 객석에서는 난리가 났다.

문주란이 무대에서 내려오자 이미자의 대표곡 ‘동백 아가씨’를 작곡한 백영호 작곡가, 임종수 지구레코드 회장이 “당장 우리와 함께하자”며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얼마 뒤 문주란은 지구레코드에서 받은 계약금으로 백영호 작곡가 자택 근처에 전셋집을 얻어 살게 됐고, 그의 반주에 맞춰 데뷔곡 ‘동숙의 노래’를 연습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지만, 말릴 수 없었다. 가수는 그에게 숙명이었다.

가수로서 인생, 기쁨보다 슬픔 많았지만


▎1969년, 문주란이 만 18세일 때의 풋풋한 모습.
어린 후배들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요?

“요즘 어린 후배들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으니까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네요. 제 경우는 어렸을 때 친아버지처럼 생각했던 박춘석 선생님에게 인성 교육을 참 많이 받았던 거 같아요. 선생님은 ‘수많은 별 중에 진짜 스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노래 잘 부르는 건 기본이고 대중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인성과 인격을 갖춰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셨어요. 지금도 선생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네요. 선생님 말씀처럼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은 많아도 스타는 적습니다.”

데뷔 반백 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지나온 가수 인생을 되돌아보신다면.

“즐거움보다 아픔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공인으로 살아왔기에 제 개인의 아픔은 무대에서 표현할 수 없었거든요. 언제나 TV 시청자, 공연의 관객이 먼저였습니다. 나 자신은 잊은 채 살았다고 할까요? 공연 끝나고 텅 빈 객석을 볼 때면 늘 마음이 허전했지요. 가수 아닌 자연인 문주란은 슬픈 삶을 살았다고 봐야 할 것 같네요. 그게 저에겐 숙명인가 봅니다.”

가수로서 가장 큰 보람과 아쉬운 일은 무엇이었나요?

“1982년 제11회 도쿄음악페스티벌에서 최우수 가창상을 수상한 게 보람이라면 보람입니다. 도쿄음악페스티벌에서 최우수 가창상을 받은 한국 가수는 아직도 저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에 언론에 크게 보도되는 등 큰 이슈가 됐었죠. 반면 아쉬운 점은 ‘왜 내가 한창 바쁠 때 노래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나’ 하는 거예요. 다른 가수들은 박춘석 선생님께 좋은 곡 받으려고 줄을 섰을 때, 저는 노래하기 싫다며 연습을 게을리했어요. 어린 나이에 반항이라고나 할까요? 그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가수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 게 사실이에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저를 더 많이 알아볼 테고요(웃음).”

15세 때 벼락스타, 그만큼 상처도 컸다


▎문주란은 젊어서부터 유독 강아지를 좋아했다. 그는 “6개월 전쯤 보낸 아이(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문주란은 패티김(83)·이미자(80)·남진(76)·정훈희(70)·하춘화(66) 등과 함께 ‘박춘석 사단’의 일원이었다. 1960~70년대 대중가수들은 박춘석(1930~2010)에게 곡을 받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었을 만큼, 박춘석은 한국 대중가요에서 존재감이 컸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1927~95)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박춘석은 그는 1954년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시작으로 작곡가의 길에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가수 활동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요즘처럼 인터넷 댓글은 없었지만, 제가 한창 활동할 때도 악성 루머 같은 건 많았어요. 저와 관련된 안 좋은 스캔들이나 루머가 들릴 때면 너무 슬펐고, 살기 싫을 정도였어요. 가령 제가 언론매체와의 인터뷰 때 카메라 앞에서 작사가·작곡가나 동료 가수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면, ‘문주란이 ○○○와 사귄다더라’는 식으로 스캔들이 터졌던 거죠. 사실 저는 18세 때 음독자살을 하려 했었는데, 그때는 그런 스캔들이 너무 싫었고, 세상을 살기 싫었던 거죠.”

문주란은 데뷔 4년 차이던 1969년 음독자살 소동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문주란은 “아무 근거도 없이 풍선처럼 부풀려지는 스캔들 탓에 정말 살고 싶지 않았다”며 “열여덟 살, 그 어린 나이에 받은 상처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인터뷰 도중 문주란에게 실제 ‘나이’를 물었다. 포털사이트 등에서 검색하면 그의 출생연도는 1949년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주란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라며 “1951년 음력 5월생으로 올해 만 70세”라고 힘줘 말했다. 그는 이어 “(포털사이트 등에서) 내 생일이 1949년 9월 30일로 나온 걸 빌미로 어떤 역술가들은 내 사주풀이까지(엉터리로) 하더라”면서 “어떻게 완전히 틀린 생년월일을 가지고 사주를 풀어서 남의 인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말끝에 힘을 줬다.


▎1995년, KBS [빅쇼] 출연에 앞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문주란.
고희(古稀)가 지났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나요?

“아침에 눈 뜨면 부처님 앞에 절하며 기도합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살다 가게 해주시고, 치매 걸리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빌어요.”

앞으로 목표와 계획도 궁금하군요.

“목소리가 허락할 때까지 노래 부르고 싶어요. 거창한 목표나 계획은 없어요.”

이 대목에서 전경민 작곡가가 문주란이 직접 쓴 ‘삶이란 것은’이란 곡의 노랫말을 공개했다. 아직 세상의 빛을 보지 않은 미완성 작품이다. 전 작곡가는 “노랫말에 문주란 선생님이 인생 후반전을 관조하는 느낌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후배들아, 노래 부르더라도 공부는 해라”


▎문주란과 ‘파스’의 작곡가 전경민씨가 악보를 보며 곡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는 게 왜 이리 고된가요. 모두가 이런 가요, 아님 나만 이런가요. (…)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 기다리네요. 가야만 하는 길이 기다리네요. 계절은 바뀌어서 돌아오지만 너도나도 가는 길은 돌아올 수 없네요. 돌아오지 않네요.”

목소리가 잘 유지되려면 건강관리는 필수죠?

“원래 뭘 잘 안 먹는 편이에요. 그래도 과일·채소·우유·잡곡은 조금씩 챙겨 먹고 있어요. 대신 탄산음료나 백미는 멀리하죠. 그리고 또 하나, 아침과 저녁 매일 두 차례 체중 재는 일은 빼놓지 않아요. 목 관리를 위해서 레몬차나 즙을 자주 마십니다.”

가수의 길, 후회는 없나요?

“때로는 후회도 했었죠. 그런데 이게 운명이니까, 숙명이니까 잘 받아들여서 건강하게 오랫동안 팬들을 위해 노래하다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생이 있다면 공부 많이 해서 나라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돌아보면 가장 후회스러운 점은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하모니카도 제법 잘 불고, 피아노도 좀 치는데 공부는 많이 못했어요. 그게 굉장히 아쉬워요. 요즘 노래 부르는 어린 후배들에게 ‘노래는 부르더라도 반드시 공부하라’는 말을 전해주고 싶네요.”

가수로서도 국민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가 된 게 아닐까요?

“저는 많은 분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어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장기기증 같은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받은 사랑을 조금이라고 되돌려드릴 방법이 뭘까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끝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살기 힘든 분들을 위해서 ‘파스’ 열심히 붙이겠습니다(웃음). 팬들을 위해 더 열심히 노래하겠습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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