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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태 취재] 현실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세계 열풍 

재밌는데 가짜가 대수냐, 메타버스는 MZ세대 신 놀이 공간 

공개 코미디 폐지로 유튜브에서 다양한 세계관 보여준 게 신의 한 수
강력한 팬덤 덕에 실제 상품까지 내놓으며 콘텐트·캐릭터 인기 입증


▎MBC TV ‘놀면 뭐하니?’를 통해서 유재석은 다양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그는 연기를 뛰어넘어 세계관까지 흡수하며 각각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 / 사진:인스타그램 캡처
바야흐로 ‘부캐(부캐릭터)’ 전성시대다. TV에서는 MBC ‘놀면 뭐하니?’에서 유재석이 환불원정대를 제작한 전설의 제작자 지미유부터 그의 다섯 쌍둥이 중 하나로 MSG워너비를 탄생시킨 유야호까지 이름을 바꿔가며 활동 중이다. 김선영의 둘째 이모 김다비는 지난해 데뷔곡 ‘주라주라’의 히트에 힘입어 5월에는 후속곡 ‘오르자’로 각종 무대를 누비고 다닌다. 본캐 못지 않게 바쁜 행보다. 유튜브로 넘어가면 더 많은 부캐들이 있다. 개그프로그램 ‘코미디빅리그’에서 데뷔한 김해준은 본명보다 카페 사장 최준으로 더 유명해졌고, KBS 공채 개그맨인 이창호는 ‘김갑생 할머니김’ 미래전략본부장 이호창, 한사랑산악회 부회장 이택조, 아이돌 그룹 매드몬스터의 제이호 등 끊임없이 새로운 부캐를 생성한다. 어디까지가 ‘본캐’이고 어디서부터가 부캐인지도 알 수 없는 ‘메타버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비단 가상을 뜻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라는 복잡한 용어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제 사람들은 각각의 공간에 맞는 캐릭터로 변신하는 것에 익숙하다. 사무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일할 때와 카카오톡 등 메신저에서 이모티콘으로 대화할 때의 문법이 다르 듯 주어진 상황에 맞게 움직인다. 한 사람이 트위터·페이스북·인스타그램·틱톡 등 다양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하는 것은 물론 부계정·뒷계정까지 만들어 맞춤형 자아를 꺼내 쓰는 상황이기에 일상에서도 부캐는 필수 요소가 됐다. 되려 모든 플랫폼에서 같은 의사소통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은 지루할뿐더러 시대에 뒤떨어진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최근 등장한 부캐가 더 세밀하게 나눠진 것도 그 때문이다. 국내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샌드박스네트워크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은 다양한 소코너를 운영한다. B급 남자들과의 ‘B대면데이트’, 우리네 아버지들과 함께 하는 ‘한사랑산악회’, 2000년대 형들이 들려주는 ‘05학번이 돌아왔다’ 등 제목만 봐도 코너의 성격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카페 사장 최준은 과거 유행했던 안재욱의 쉼표 머리로 한쪽 눈을 가리고 느끼한 표정으로 “어? 예쁘다” 같은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린다. 반면 재벌 3세 이호창 본부장은 지적인 척하는 단호한 말투가 포인트다. 처음엔 비호감처럼 보이던 이들은 볼수록 오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잡아끌며 대세가 됐다.

피식대학, 빵송국… 공개 코미디 폐지가 낳은 진화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에서 카페 사장 최준(왼쪽)과 동대문 옷가게 사장 쿨제이, 김해준은 능청스러움과 디테일한 표현력으로 색깔이 뚜렷한 두 명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 사진:유튜브 채널
코너에 따라 부캐도 크게 달라진다. ‘B대면데이트’의 최준이었다가 ‘05학번이 돌아왔다’의 쿨제이가 되어 나타나는 식이다. 2000년대 중반 동대문에서 옷 장사를 하는 껄렁껄렁한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한 덕분에 본캐 김해준과 부캐 최준, 쿨제이가 모두 같은 사람인지 몰랐다는 반응도 많다. 2000년대 학번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동대에서 바가지를 쓴 에피소드에 “이건 개그물이 아니라 기록물”, “배우가 아니라 진짜 동대문 장사치 형들이다. 연기가 아닌 삶” 등의 댓글이 줄을 잇는다. ‘한사랑산악회’ 역시 우리 아빠랑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에피소드를 읊조리는 미친듯한 디테일이 생명이다.

부캐별로 워낙 빼어난 메소드 연기를 선보이다 보니 이를 지켜보던 구독자들 또한 부캐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호창 김갑생할머니김 본부장의 먹방, 갑질 등 새로운 영상이 올라오면 자신 역시 그 세계관으로 들어가 상황극에 동참한다. “이번에 김갑생장학재단에서 학비 지원을 받은 학생”부터 “김갑생할머니김 정직원 들어가려고 몇 년째 GGSAT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취업준비생”까지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댓글 유형 역시 “이마트몰 쓱배송으로는 주문이 안 되니 다양한 유통 채널을 개발해줬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 제안형부터 “3년 7개월 동안 회사 다니다가 본부장님 때문에 퇴사했다”는 폭로형까지 각양각색이다.

2019년 개그맨들이 주축으로 만든 ‘피식대학’이 유튜브에 자리 잡자 곽범, 이창호도 탄력받아 2020년 5월 ‘빵송국’ 채널을 개설했다. 피식대학 멤버들이 2017년 SBS ‘웃찾사’ 등 코미디 프로그램이 줄폐지되자 코미디얼라이브(스탠드업 공연)를 설립하고 유튜브로 넘어왔다면, 빵송국은 지난해 유일하게 남은 KBS2 ‘개그콘서트’ 폐지 후 건너온 케이스다. 두 채널의 구독자 수는 6월 10일 기준으로 124만, 34만 명을 돌파하며 새로운 생태계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온 가족이 함께 보는 TV 코미디 대신 혼자 보는 유튜브 채널 특성에 맞게 타깃은 좁히되 깊숙이 파고드는 작업을 병행했다.

‘빵송국’ 출신 신개념 아이돌 그룹 매드몬스터는 그야말로 대박이다. 탄과 제이호 2인조로 구성된 이들이 5월 발매한 싱글 ‘내 루돌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640만 회를 기록했다.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커다란 눈과 주먹만한 얼굴로 필터 사용 논란이 일자 Mnet ‘엠카운트다운’에 출연하는 응수를 뒀다. 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배경도 함께 일그러지고, 노래 중간중간 실제 개그맨 얼굴(본모습)이 보인다는 악플이 이어지자 소속사 매드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나서서 필터설은 사실무근, 악귀설은 무명 개그맨 두 명이 딥페이크(Deepfake) 기술로 장난을 친 것이라고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사실상 본캐인 곽범과 이창호는 “매드몬스터에게 죄송하다”며 사과(?) 영상까지 올렸다.

부캐가 한술 뜨면 댓글은 한술 더 뜨는 환상의 콤비


▎가상 캐릭터 매드몬스터(왼쪽)에게 죄송하다는 곽범, 이창호의 사과 영상이 조회 수 196만 회를 기록하며 화제가 됐다. 가상을 진실처럼 만들어가는 요즘 콘텐트는 소비자에게 큰 웃음을 안겨준다. / 사진:유튜브 캡처
최첨단 기술로 범벅된 이들의 세계관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앞서 언급한 ‘내 루돌프’는 매드몬스터의 네 번째 싱글인데 이전 곡들은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로 발매 후 매진돼 현재는 이용이 어렵다. 또, 그동안 순위와 상을 거부해 모르는 사람이 많을 뿐 포켓몬스터(매드몬스터의 팬클럽 이름) 숫자는 60억 명에 달한다고 한다. 타 아이돌처럼 안무·언박싱·인터뷰 영상 등을 차례로 올리지만 한국 포켓몬스터 팬들은 해외 팬의 유입을 결사적으로 막는다. 이들의 세계관을 노랫말처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설명하기 어려울뿐더러 이왕이면 ‘해외보다는 대기권 밖으로 수출하고 싶은’ 그룹이기 때문이다. K팝 아이돌 그룹의 클리셰를 하나씩 비틀어가는 재미도 상당하다.

부캐에 임하는 이들이 진심일수록 지켜보는 팬들도 진심이 된다. 하나의 설정을 둘러싼 또 다른 설정을 덧대면서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이를테면 역시 필터를 적용한 매드엔터테인먼트 대표 얼굴 뒤편에 보이는 구조물이 왜곡된 모습을 보고 팬이 대신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사옥을 디자인한 것”이라고 변명해주는 식이다. 이호창 본부장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흉터 사진을 보고 “강도를 제압하다 생긴 상처”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재벌”이라고 치켜세운다.

이 같은 하이퍼 리얼리즘은 부캐의 분화와 공존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2018년 Mnet ‘쇼미더머니 777’을 강타한 래퍼 마미손 이후 숱한 부캐가 등장했지만 지금까지 활동하는 부캐는 많지 않다. 포스트 뽀로로를 꿈꾸며 남극에서 한국까지 헤엄쳐온 EBS ‘자이언트 펭TV’ 연습생 펭수 정도는 돼야 이야기가 가지치기를 하며 발전해나갈 수 있는 탓이다. ‘놀면 뭐하니?’에서 ‘유(Yoo)니버스’를 구축하고 있는 유재석조차 카놀라유나 러브유 등 몇몇 캐릭터는 단발성으로 그쳤다. 트로트 가수 유산슬이나 댄스 가수 유두래곤처럼 분명한 설정이 없으면 롱런이 불가능하다. 결국 얕은 설정을 가진 부캐는 곧 사라지지만 촘촘한 설정을 가질수록 더 오랜 생명력을 갖는다.

오랜 시간 공개 코미디를 해온 개그맨들은 이 같은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카페 사장 최준의 전신은 tvN ‘코미디빅리그’에서 선보인 복학생 캐릭터이고, 이호창 본부장은 ‘개그콘서트’의 코너 속 잘 나가는 남자 배우들을 연기하던 시절이 모티브가 됐다. TV에서는 스치듯 지나가며 빛을 보지 못했던 캐릭터들이 디테일을 비출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유튜브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이호창은 잡지 ‘보그’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무대형 공개 코미디가 딱딱하고 평면적인 레고라면, 유튜브형 코미디는 찰흙으로 만든 인형에 비유했다. 전면뿐 아니라 사방에서 관찰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입체적인 플랫폼을 만난 이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거리고 있다.

광고면 어때? 재밌으면 그만, 팬덤 따라 어디든 간다


▎가상의 제품이던 김갑생할머니김은 최근 성경식품과 협업해 실제로 온·오프라인에서 판매 중이다. / 사진:Much Merch 사이트 캡처
광고업계에서 이들을 주목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TV 광고에서는 누구나 아는 국민배우, 국민가수를 모델로 기용하는 것이 유리하겠지만 유튜브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해당 채널에서 영상을 시청하는 구독자와 제품 사용자 타깃이 일치한다면 더 저렴한 비용으로 고효율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 덕분이다. 더구나 지난해 일부 유튜버들이 광고임을 표기하지 않고 일반 콘텐트처럼 영상을 만들어 올린 뒷광고 후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터라 집행 과정이 투명한 앞광고를 원하는 성향이 뚜렷해졌다. 이를 웃음 코드로 승화할 수 있으면 금상첨화. 부캐를 운용하는 본캐 입장에서도, 콘텐트를 소비하는 구독자 입장에서도 윈윈할 수 있는 전략이다.

현실에서도 매진 행렬이 이어질 만큼 반응이 뜨겁다. 김갑생할머니김을 출시해달라는 요청이 꾸준히 이어지자 피식대학은 성경식품과 협업해 재래식탁김과 참돌자반 2종 상품을 출시했다. ‘피식대학’에서는 이호창 본부장이 성경식품 직원들과 공장 시찰을 하고, 11번가에서는 실제 판매가 이뤄지며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다시 한 번 무너뜨렸다. 매일유업 커피 브랜드 바리스타룰스와 전략적 제휴를 맺는 등 다른 업종 시찰도 간다. 댓글에서도 “광고 영상을 외울 때까지 보는 건 처음”, “기안 올린 직원도 대단하지만 결재한 차장, 부장, 임원도 참 열린 사람”이라며 칭찬 일색이다. 내가 좋아하는 콘텐트를 잘 활용할 줄 아는 브랜드까지 호감이 확장되면서 기꺼이 지갑을 여는 것이다.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라 불리는 MZ세대에게 어떤 게 진짜고 어떤 게 가짜인지는 큰 의미가 없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성세대는 인터넷을 가상공간으로 여기지만 MZ세대에게는 그 또한 현실”이라고 짚었다. 메타버스 속 부캐가 나 대신 사무실에 출근하고 회의하는 세상에서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고 그것이 다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얘기다. 이어 정덕현 평론가는 “예전에는 하나의 콘텐트를 관람하고 끝이었다면 지금은 하나의 콘텐트가 성공하면 관련 팬덤이 생겨나고 이를 다시 소비하면서 콘텐트를 향유하는 목적 자체가 바뀌었다”고 덧붙였다. 영상 이용자 중 댓글부터 먼저 확인하고 영상을 본다거나 댓글 모음 등을 찾아보는 사람도 많아졌다.

[트렌드 코리아 2020]에서 올해의 키워드로 꼽은 ‘멀티 페르소나’와 ‘팬슈머’는 [트렌드 코리아 2021]에서 ‘자본주의 키즈’와 ‘롤코라이프’ 등으로 진화했다. 컴퓨터에서 Alt와 Tab 키를 동시에 누르면 프로그램이 바뀌듯 모든 사람이 순간 전환 모드를 내장하고 살아가는 시대에서 취향 공동체와 캐릭터를 함께 키워나가는 즐거움을 나누던 이들이 이제는 더 재미있는 ‘밈’을 좇아 우르르 몰려다니며 짜릿한 진폭의 재미를 즐기고 나면 곧바로 다음 재미를 찾아 나서는 보다 능동적인 소비자가 됐단 얘기다. 재미가 최우선인 이들에게 편견은 없다. 순간적인 만족을 줄 수 있다면 그 대상이 넷플릭스 웰메이드 드라마가 됐든 유튜브 B급 광고가 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경계를 넘나드는 콘텐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

- 민경원 중앙일보 기자 storymin@joongang.co.kr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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