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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포럼 명사 인터뷰] 임은경 식품안전정보원장 

기술발달로 편의 증진됐어도 여전히 소비자는 보호받아야 

“키오스크 늘면서 사용법 몰라 밥 못 먹는 노인 생겨나”
30년간 소비자 보호 ‘현장’에서 활동가로 일한 베테랑


▎임은경 식품안전정보원장은 “기술 발전과 제품의 세분화·다양화로 소비자는 편리함을 추구하면서 안전해지려고 한다”며 “소비자를 어디까지 만족하게 할 수 있고 또 어디까지를 목표로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소비자는 집단행동으로 기업을 혼쭐낸다. 소비자들이 똘똘 뭉치면 기업 총수가 나서서 사과하는가 하면 제품을 전량 회수하는 조치가 이뤄지기도 한다. 하지만 한계도 있다. 고도화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생산된 제품의 문제점을 소비자가 쉽게 알아내기는 힘들다. 기기 오작동은 물론 안전 문제에 위험성이 있어도 마땅히 뭐가 잘못됐다고 지적할 수 없는 정보 격차가 존재한다. 위험성을 입증하고 보상을 요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임은경 식품안전정보원장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는 제품 생산과 소비자 활동에 보조를 맞추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복잡한 산업 구조와 국가 간 이해관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는 법체계 때문에 어디까지를 소비자 보호 영역으로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고 털어놨다. 30년 넘게 소비자 보호 활동가로 살아온 임은경 식품안전정보원장을 지난 5월 27일 만나 국내 소비자 보호 운동의 현실을 들어봤다.

30년 세월을 소비자 보호에 매진해오셨다고 들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국내에서는 ‘소비자’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다. 제가 활동을 시작한 1990년대 무렵에 기업들이 ‘고객’·‘고객만족’ 등의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비자와 사업자라는 카테고리가 지금처럼 익숙한 단계는 아니었고 이를 대신해 ‘사용자’·‘이용자’·‘고객’ 등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불렸다. 당시에는 소비자라는 낯선 범주만큼이나 소비자들의 지위나 보호도 낯설고 걸음마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때 소비자 보호 활동은 화장품을 직접 발라보며 수은 중독이 나타나는지를 점검하던 시절이었다. 그 때와 비교해 보면 격세지감이다.”

당시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어떤 소비자가 냉장고를 산 뒤에 소음이 너무 심하다는 불만 사항을 우리에게 접수했다. 제조사에 ‘이런 엉터리 제품을 팔았느냐’고 항의하고 공문도 보내면서 당시 우리 단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랬더니 어느 날 판매 업체에서 ‘직접 그 집에 가서 보고 소음을 들었느냐’는 전화 연락이 왔다. 저는 ‘안 가봤다. 당연히 소비자가 소음이 들리니 신고를 한 거지, 왜 의심을 하느냐’고 몰아붙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비자의 집이 아주 작았다. 작은 집인 데다가 외부와 막힌 구조에서 대형 냉장고를 설치하니 상대적으로 소음이 크게 들린 것이었다.”

임 원장은 당시, 소비자 인권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라서 소음의 이유가 차마 ‘집의 크기’ 때문이라고 소비자에게 전달하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은 그 때와 천양지차다. 거주 환경과 예상 사용 인원을 고려한 다양한 제품의 냉장고가 출시되는 세상이다.

취약계층 늘어나 소비자 보호 영역 확대돼

그러고보면 시대 변화에 따라 소비자 보호 영역도 변화하는 것 같다.

“‘배달의민족(배민)’을 예로 들면 소비자 입장에서는 휴대전화로 클릭만 하면 돼서 편리하지만 정작 이 식당이 제대로 된 곳인지, 위생은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소비자 불안감이 커지는데 배민은 중계 플랫폼이다. 소비자와 식당을 연결해주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인데 이 플랫폼에 소비자 불안을 잠재울 만한 기준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기도 어렵고 플랫폼도 그런 의무가 없다. 다만 지속적인 소비자 보호 활동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처와 배민이 MOU를 맺어 업체 가입 시 사업자등록번호 등록을 의무화했다. 또한 음식점 위생 등급도 보일 수 있도록 반영했다. 예전에는 소비자가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그 식당에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면 되지만 요즘에는 전자상거래까지도 범위가 확대된다.”

세대별로도 소비자 보호 영역이 다른가?

“취약 계층이 지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노인이다. 은행의 점포가 갈수록 줄고 있다. 어르신들은 누군가 천천히 이야기해주고 설명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소비자 보호 단체가 은행 직원을 대상으로 한 ‘느린 말 서비스 교육’의 필요성을 은행 측에 주장하는 이유다. 언택트 시대와 맞물려 식당에 등장하는 ‘키오스크’도 큰 문제다. 사용법에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은 주변에 물어볼 직원이 없어 배가 고파도 음식을 사 먹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휴대전화 결제 시스템 측면에서 살펴보면 청소년이 취약 계층이다. 지금은 스마트폰에서 너무 쉽게, 편하게 게임, 방송 콘텐츠를 결제할 수 있게 돼 있다. 소비자 편의성만큼 그 안에 도사리는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청소년도 어떤 의미에서는 취약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자 지위는 과거에 비해 강화되었나

“1980년에 소비자보호법이 만들어졌다. 2006년에는 소비자 기본법으로 바뀌면서 소비자의 지위가 단순히 보호받는 차원이 아니라 더 주체적으로 변화하고 적극적으로 확대됐다. 소비자 주권이 강화됐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유럽에서는 최근 소비자를 다시 ‘보호’의 주체로 되돌려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소비자가 ‘중심’인 사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이 다시 강조돼야 한다는 취지다.”

임 원장은 요즘에는 자신도 갈수록 위력이 커지는 자본에 종속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소비자의 편의에 맞게 다양한 제품이 나온다. 냉장고만 해도 와인 냉장고, 화장품 냉장고 등 영역이 계속 세분돼 소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얼핏 보면 소비자 ‘중심’ 사회가 된 것 같지만, 소비자를 보호해야 할 영역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시급


▎임은경 식품안전정보원장은 올해 2월까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으로 30년간 소비자 보호 ‘현장’에서 활동가로 근무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국가기관인 식품안전정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은 2020년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 사진: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제공
소비자 편의가 증가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소비자 책임이 확대되는 것 아닌가.

“소비자단체들이 ‘한 장’ 약관 운동을 했었다. 종이 한 장에 소비자가 보기 좋게, 읽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계약 약관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어떻게 바뀌었나. 소비자가 서명할 곳에만 빨간 줄을 긋거나 큰 글씨로 해 놓고 동그라미 표시를 해주면서 거기에만 사인을 하라고 한다. 소비자에게 계약 내용을 제대로 알려주라는 취지였는데 기업 입장에서는 쉽고 간단하게 만들어줬으니 직접 읽어보고 편안하게 사인만 하라는 식으로 바뀌었다. 과정은 간소화됐지만 결국 모든 책임은 소비자가 져야 한다. 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있는 꼴이 됐다.”

끝내 해결하지 못한 소비자 문제도 있었나.

“1급 발암물질인 ‘라돈’ 침대 사태가 기억난다. 사태가 발생하자 해당 업체에서 침대 내부 철제 프레임은 둔 채 매트리스만 수거했다. 그러면 소비자는 어떻게 잠을 자라는 것이냐? 업체 내부 사정으로 매트리스를 수거하지 않는 상황도 발생했다. 라돈이 방사성 물질이다 보니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나섰다. 소비자 문제가 발생했으니 공정거래위원회도 따라 붙었고 나중엔 식품의약품안전처도 가세했다. 소비자에게 필요한 것은 빠른 수거, 환불, 보상, 교환 등이었는데 문제의 전문성과 영역이 중첩되면서 시간이 지연됐다. 이 과정에서 어떤 소비자는 교환·보상을 기다리기보다는 새 침대를 사고는 문제를 끝냈다.”

임 원장은 소비자 피해를 해결하는데 어려운 요소로 ‘소비자 결집’의 강도와 ‘시간’을 꼽았다. 예를 들어 홈플러스는 경품행사 등으로 모은 고객 개인정보 2400여만 건을 라이나생명·신한생명에 유출하고 그 대가로 231억7000만원의 불법 수익을 올렸다. 사건 발생 이후 임 원장이 당시 속한 소비자보호단체는 2015년 소송을 진행했고 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10만원~20만원의 배상액을 지급하라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5년이란 시간과 적은 배상액도 문제지만 5년이 지난 시점에서 해당 소송에 참여한 283명 소비자와의 연락 조차도 어렵더라고 토로했다.

현재 보완이 필요하거나 시급히 제정·개정돼야 할 소비자 관련 법률은?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시급하다. 홈플러스 사례만 보더라도 피해자 200~300명을 설득해서 집단소송을 해봐야 그 분들 손에 쥐어지는 것은 10만원 정도다. 이 돈은 인지대로 사용한다. 소비자 피해 규모는 방대한데 개인으로 보면 소액이다. 소비자들이 피해를 당해도 잘 나서지 않는 이유다. 반대로 기업은 사활이 달린 일이다. 개인 소비자와 거대 기업이 맞붙는 게 소비자 피해 구제 영역이다.”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중 한 사람 또는 일부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하면 다른 피해자들은 별도 소송 없이 그 판결로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훨씬 더 많은 손해배상을 부과하는 제도다.

“소비자 눈높이에서 올바른 정보 공유하는데 힘쓸 것”

임 원장은 1994년 서울YMCA 생활협동운동 사무국 교육 담당으로 소비자 보호 활동을 시작했다. 올해 2월까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총장으로 30년간 소비자 보호 ‘현장’에서 활동가로 근무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산하 국가기관인 식품안전정보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 2월부터 식품안전정보원장을 맡고 있다.

“소비자단체 활동가로서 소비자의 눈높이로 행하던 일들을 식품안전정보원이 기존에 하고 있던 업무와 접목해 발전시키고 안착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임기 내 특별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다. 그동안 식품안전정보원이 공급자·운용자의 입장에서 업무를 수행했다면 소비자·사용자의 눈높이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힘을 쏟을 예정이다.”

식품안전정보원은 식품계의 ‘국가정보원’으로 불린다고 들었다.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올바른 정보가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식품, 의약품, 생활용품 등의 안전 문제를 다루면서 Risk Communication(위해 정보 교류)이 Risk Assessment(위험 평가)나 Risk Management(위험 관리)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가짜 뉴스가 횡행하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편향된 정보가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지속해서 소비자 눈높이에서 제대로 된 팩트 체크와 올바른 정보를 공유하고 제공하는 일이 중요하다. 식품안전정보원도 그러한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30년 소비자 보호 활동가로서의 소회를 묻고 싶다.

“소비자 보호나 소비자 권익 증진이 너무 어렵다. 기술도 발전하고 제품도 세분화·다양화되는데 소비자는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도 더 안전해지려는 양면적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소비자를 어디까지 만족하게 할 수 있고 또 어디까지를 목표로 해야 하느냐에 대한 고민이 많다. 그동안 발생한 문제, 현안을 쫓아다니기에 급급한 게 아니었냐는 반성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원장으로 취임하기 전에 하던 소비자 개인정보 보호 문제를 펼쳐 놓기만 하고 정리하지 못하고 온 느낌도 있어서 그 문제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J포럼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소비자 한 분야에서만 활동하는 활동가로서 사회의 변화를 보면서 석학들은 어떻게 한국 사회를 진단하고 미래를 조망하는지 그 이론과 배경을 배우고 싶었다. 사회 각 분야를 망라하는 다양한 사회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고 오피니언 리더들의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교육과정이 있다면?

“이정동 서울대 교수의 ‘코로나, 4차 산업혁명 그리고 국가의 일’이라는 수업과 최현만 미래에셋대우 수석부회장의 ‘언택트시대 자본시장 패러다임의 변화’가 재밌었다. 황세희 국립중앙의료원 건강증진예방센터장의 ‘COVID19 팬데믹 시대’도 기억에 남는다.”

※ J포럼은 - 2009년 국내 언론사 중 중앙일보가 최초로 시작한 최고경영자과정이다. 시사와 미디어·경제·경영·역사·예술 등 각 분야 최고 전문가들의 강좌와 역사탐방, 문화예술 체험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로 13년째를 맞이한 J포럼은 매년 두 차례(봄·가을) 원우를 선발하여 진행된다. 그동안 졸업생 약 1000여 명을 배출해 국내 최고의 오피니언 리더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학습과 소통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의·접수: J포럼 사무국(02-2031-1018), http://ceo.joongang.co.kr)

- 글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cho.kyuhee@joongang.co.kr /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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