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Home>월간중앙>사람과 사람

[성호준의 ‘골프와 인생’] 김승배 전 효성 메타넷 부회장 

“목표 없이 연습하면 허사, 인생도 그렇다” 

균형 잡힌 몸에 독한 연습, 70대 중반에도 블루티서 70대 타수
회사 일도 완벽주의, 적당히 하는 것 용납 안 해 ‘크렘린’ 별명


▎김승배 회장은 화이트티에서 치면 이븐파 언저리를 치지만 아직 화이트로 갈 나이가 안 됐다고 여긴다. 블랙티에서 내려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 사진:성호준
"40~50대 젊은 사람들이 왜 화이트티에서 공을 치는지 이해가 안 된다.”

김승배(76) 전 메타넷 부회장의 부인 박근희씨가 라운드 도중 몇 차례 얘기했다. 40대인 그의 아들이 최근 80타를 쳤는데 화이트티에서 쳤기 때문에 ‘싱글’로 인정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박 씨는 눈이 높다. 1945년생으로 70대 중반의 남편이 아직도 블루티에서 70대 타수를 기록하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김승배 회장을 10일 천룡 골프장에서 만났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통에 첫 홀 티샷을 실수, 더블 보기를 했는데 76타로 끝냈다. 티샷이 210m 정도 나갔다. 7번 아이언은 145m였다. 그린 주위의 칩샷과 퍼트는 더 정교했다. 스코어만이 아니다. 골프를 제대로 배운 젊은 골퍼들처럼 스윙, 특히 피니시 자세가 맵시 있었다. 김 회장은 군더더기 없는 체형에 허리가 곧고 어깨가 넓어 뒤에서 보면 20~30대 청년 같기도 했다.

그는 화이트티에서 치면 이븐파 언저리를 치지만 아직 화이트로 갈 나이가 안 됐다고 여긴다. 블랙티에서 내려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블루티에서 치면 80% 정도 에이지 슈트를 한다고 했다. 그는 “얼마 전 홀인원 보험을 들은 후 그 보험금을 타기 위해 핀을 보고 직접 쏘기 때문에 에이지 슈트 확률이 줄었다”며 웃었다.

요즘 의학이 발전하고 건강관리를 잘하는 사람이 늘어 70대 나이에도 좋은 스코어를 내는 아마추어 골퍼가 있다. 주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골프에 투자하는 사람들이다. 김 회장은 골프에 많은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한국엔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있다. 나라 발전의 씨앗이 될 외화를 벌기 위해 중동에 다녀온 사람들도 있다. 김 회장은 베트남전에 참전하고 중동에도 다녀왔다. 어려운 한국의 현대사를 겪은 사람을 소재로 한 영화 ‘국제시장’이 있는데 김 회장이 이에 못지않다. 베트남전과 중동 건설 등을 겪은 한국 경제의 역군 중 아직도 골프 70대 타수를 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김 회장은 워낙 건강해 꽤 오랜 기간 70대 타수를 유지할 것으로 보였다.

베트남전 참전하고 중동 건설현장도 다녀와


▎천룡 골프장에서 라운드할 때면 그의 카트에는 시니어 챔피언이라는 표지가 붙는다. 정작 김 회장은 카트에 거의 타지 않고 걸어서 라운드한다. / 사진:성호준
김 회장은 강원도 삼척 출신으로 중앙대 건축과를 나왔다. 대학 시절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입주 과외를 했다. 대학과 대학원 6년 동안 한 집에서 일했다. 그는 “열심히 가르치기도 했고, 시키지 않은 가욋일도 했다. 밤에 문단속하고 화단을 관리하고 개도 내가 돌봤다. 그냥 과외 선생님이 아니라 여러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가족들의 신뢰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대학 한 학기를 마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김 회장은 “힘들지만, 당시 해병대는 복무 기간이 일반 병보다 짧은 30개월이어서 전역 후 복학하기에 좋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벌써 반세기 전이니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는 “해병대 동료 중 대학생은 나 혼자였고 주먹패·깡패·기도 등 전과자가 많았다. 당시 해병대에 입대하면 사회에서의 전과를 지워줬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과 부대끼고 함께 훈련하면서 깡이 쌓였다. 자신감이 생겼다. 이후 무서운 게 없어졌다”고 말했다.

월남전에도 지원했다. 그는 “파월 명령을 받으면 3개월 동안 매우 고된 훈련을 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건 훈련도, 정글 수색 작전도 아니었다. 배를 타고 베트남 다낭 항에 다가갈 때 멀리서 포성이 들리는데 마치 지옥에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왜 왔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전쟁은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을 겪을 거라는 공포가 가장 두렵다”고 했다.

첫 전투, 베트콩이 몰려올 때 참호 안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옆 전우가 죽어 나가자 피가 끓고,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돌격 앞으로 명령이 떨어질 때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려움이 없어지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다.

파병 기간이 1년인데 6개월을 더 연장했다. 그는 “죽음의 공포만 없다면, 군인의 천국이 전쟁터다. 음식도 잘 주고 얼차려도 없다. 고참이든 졸병이든 똑같이 목숨을 걸고 살고, 괴롭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아파트에 일 년 내내 태극기를 게양한다. 집에 오는 사람에겐 “차렷! 국기에 경례!”를 시킨다.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는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직도 느끼고 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해 1977년부터 사우디와 바레인에서 5년을 지냈다. ‘중동 1세대’라 벌이가 괜찮았다. 첫해 1년 번 돈으로 한국에서 2층 집을 살 수 있었다. 집값이 올라 이듬해는 연봉으로 단층집 살 돈 정도가 됐고, 그다음 해에는 전셋값 정도였다.

사막은 권태롭다. 가족도 없고 술도 없고, 한국 TV도 없다. 여름 평균 기온이 43도다. 김 회장은 고향이 그리울 땐 공항에 나가 노동자로 입국하는 한국인 인부들을 보면서 마음을 달랬다.

골프를 중동에서 알았다. 바레인에는 샌드(sand) 코스가 있었다. 영국인 석유 기술자들이 만든 곳이다. 물이 부족해 잔디로 된 코스를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그들은 간석지의 딱딱한 흙을 가져와 평평하게 다져 그린으로 썼는데 표면이 매끄럽지 않아 볼 구름이 불규칙했다.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브라운(brown)을 만들었다. 모래와 석유를 섞은 흙으로 적당히 딱딱하고 적당히 부드러워 공이 잘 구르고, 많이 튀지도 않았다. 사막에서도 골프를 치겠다며 코스를 만든 이들이었지만 페어웨이에서 매번 벙커샷을 하는 데는 질려 버렸다. 그래서 매트 위에서 샷을 할 수 있도록 룰을 개정했다.

대사관 직원이 골프를 해보라며 벤 호건의 책 [모던 골프]를 빌려줬다. 그 책을 복사해 열독했다. 책에 나온 대로 일주일에 하루 두 시간씩 그립을 잡고 있었다. 큰 거울을 사서 책에 나온 그림과 맞는지 비교도 했다.

1981년 한국에 돌아왔다. “첫 라운드에서 100개를 쳤다”는 김 회장은 오기가 생겨 매일 출근 전 새벽과 밤에 연습했다. 8개월 만에 안양 골프장에서 2오버파 74타를 쳤다.

김 회장은 “원래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고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연습했다. 작은 타깃을 표적으로 놓고 연습했다. 연습장의 찢어진 네트를 타깃으로 삼기도 했는데 공이 그 틈으로 들어가 인근 집 유리창이 깨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회사 일에서도 완벽주의자였다. 몇 달 공부해 건축 기술사가 됐다. 1년에 10여 명만 뽑는 시험이었지만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했고, 중동에서도 빈틈없이 일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의 별명은 크렘린이었다. 적당히 하는 걸 용납하지 않아서다. 후배들은 그를 무서워했지만, 미워하지는 않았다. 많이 가르쳐주고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 리더였다. 김 회장은 효성 건설 CEO와 효성 그룹 관련사인 효성 메타넷에서 부회장을 했다.

직장 후배들이 무서워했지만 미워하진 않아


▎김승배 회장의 피니시는 젊은 골퍼 못지않게 균형이 잡혀 있다. 40대에 일주일에 5일간 수영과 에어로빅을 했고 지금도 하루 한 시간씩 헬스클럽에서 시간을 보낸다. / 사진:성호준
미드 아마 고수들은 골프를 통해 많은 것을 얻는다고 했다. 골프를 잘하니 좋은 네트워크가 생기고 사업에서도 도움을 많이 받는다는 거다. 김 회장은 “골프 때문에 이득 본 건 없고 오히려 큰 손해를 볼 뻔했다”고 했다. 1994년 한원 골프장의 클럽 챔피언이 됐다. 클럽 챔피언이 되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실력이 좋은 그에게 누군가 “클럽 챔피언십에 나가면 풀백티에서 칠 수 있다”고 해 휴가를 내 나갔다가 덜컥 우승했다. 당시엔 클럽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 골프 잡지사에서 인터뷰 기사를 냈다. 그걸 본 회사의 지인이 축하 연락을 했다.

아차 싶었다. 소문이 나면 일을 안 하고 골프만 친 것으로 여길 것으로 걱정됐다. 이후 일 년간 골프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골프 고수라는 소문이 나면서 회사 오너를 비롯한 회사 중역들이 라운드에 초대했다. 일부러 타수를 높여야 했다.

김 회장은 “퍼트를 일부러 빠뜨리면 동반자는 다 안다. 건방져 보일 수 있다. 그래서 티샷을 일부러 위험한 곳으로 쳤는데 그날따라 더 좋은 곳으로 가더라. 식은땀이 났다. 결국 방법을 찾았다. 벙커에 빠뜨린 후 거기서 다른 벙커로 치니 잘 모르더라. 그러면서 79타를 쳤다. 나는 골프 못 치는 것처럼 보이려고 엄청 고생했는데 높은 분이 ‘왜 이렇게 잘 치느냐’고 하더라”며 웃었다.

김 회장이 다시 클럽 챔피언십 등에 나간 건 CEO를 끝으로 효성그룹에서 나온 후다. 2006년 제48회 월드 시니어 챔피언대회에도 나갔다. 눈치 안 봐도 될 때라서 철저히 대회를 준비했다. 그는 개인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듬해 열린 국가대항전에서는 미국을 누르고 우승했다. 개인전에서는 또다시 준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제39회 한국 시니어아마추어대회에는 처음 출전해 우승했고, 이후 시니어 대회 출전도 그만뒀다.

현재는 천룡 골프장 시니어 챔피언이다. 그는 천룡 골프장을 가장 좋아한다. 클럽 챔피언이 되면 부킹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대회에 나갔다. 60대 초반에 시니어 부문에 나갔는데, 다른 참가자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실력 차가 난다고 했다. 그래서 한동안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70대 들어선 이후 실력이 무뎌졌을 것으로 보고 이제는 참가해도 될 것 같다는 사인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그가 챔피언이다.

그가 나이가 들어서도 뛰어난 성적을 내는 건 당연히 철저한 건강관리다. 40대에 8년간 일주일에 세 번 에어로빅, 두 번 수영했다. YMCA 수영대회에서 4관왕을 했다. 대충 하지 않고 책을 사서 연구하면서 운동했다. 김 회장은 “ 모든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골프도 공을 많이 굴려본 사람이 잘한다”고 했다. 요즘은 아침 헬스 1시간씩이 생활화됐다.

최저 66타, 알바트로스 한 번, 홀인원 6번


▎김 회장은 베트남전쟁과 중동 건설 현장을 겪었다. 노력하면 미래는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다. 마음대로 잘 안 된다는 골프와 자식 농사도 훌륭하게 일궜다. / 사진:성호준
마음대로 안 된다는 두 가지, 골프와 자식 농사를 다 잘 지었다. 그의 아들은 주가 총액 1조원이 넘는 유명 IT 벤처 기업 CEO다. 딸은 글로벌 IT 기업의 아시아 지사장이다. 둘 다 서울대 단과대를 수석 졸업했다. 김 회장은 “딸은 고3 때 워낙 성적이 좋아 학력고사 전국 1등을 할 뻔했다. 전국 1등을 하면 팔자가 사나워질까 봐 1등을 하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했다.

김 회장은 “아이들에게 한 번도 큰소리를 치거나 매를 들지 않았다. 어려서는 중동에서 5년을 보내 신경을 많이 쓰지도 못했다. 아이들에게 ‘알아서 잘해라, 잘 되면 네가 좋은 것이다. 나는 기분 좋은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제일 쉬운 게 공부라고 했다. 공부는 열심히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되는 단순한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 천지라고 가르쳤다. 모범을 보이는 게 중요하다. 아들의 고등학교·대학교 때 꿈이 아버지만큼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반에 부모님을 존경한다는 학생이 2~3명뿐이었는데 우리 아들이 그랬다”고 했다.

그의 최저타는 6언더파 66타다. 알바트로스를 한 번 했고, 홀인원은 6번이다. 비결은 뭘까. 그는 골프 스윙도 철저히 연구하는 스타일이지만 “나보다 뛰어난 선생님 얘기를 듣는 게 낫다”며 팁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자신에게 잘 맞는 레슨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김 회장은 “신지애는 퍼트를 겨드랑이로 한다고 한다. 허석호는 등뼈로 하라고 한다. 어느 유명 퍼트 전문 레슨 프로는 옆구리 뼈로 하라고 한다. 그걸 다 해보면서 어느 게 자신과 맞는 건가 찾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 회장은 “가장 실수가 적은 스윙을 찾고, 타수를 잘 내려면 욕심을 줄여야 한다. 몸을 다칠 정도로 과하면 탈 난다. 그런 게 골프뿐 아니라 인생의 지혜”라고 했다. 그가 골프를 잘하는 이유는 인생에서 성공한 원인과 같다. 김 회장은 “4라운드 경기를 해도 한두 타 차이로 승부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매 샷이 중요하다. 4라운드 280여타를 칠 때 한 타 한 타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연습이 없다. 단 한 타도 연습이 없다”고 했다.

김 회장은 “정확한 목적이 없는 연습은 노동에 불과하다. 아이언 샷도 10개 중 8개 이상이 목표에 적중할 때까지 치는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하다. 퍼트도 마찬가지다. 심심풀이로 쳐 봐야 실전에서는 아무 소용없다. 공 5개를 놓고 목표에다 집어넣을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하라”고 했다.

※ 성호준 골프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사회부와 스포츠부를 거쳐 골프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중앙SUNDAY. 네이버에 ‘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골프 진품 명품’ 등의 칼럼을 연재했다. JTBC골프 채널에서 [JTBC골프 매거진] [LPGA 탐구생활] 등을 진행했다. 저서로 [타이거 우즈 시대를 사는 행복][맨발의 투혼에서 그랜드슬램까지] 등이 있다.

202107호 (2021.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