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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의 ‘자줏빛 인생' 

“반평생 와인 탐사의 서사를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었죠” 

세계 돌며 방대한 와인 정보·지식 수집, 佛 ‘와인MBA’ 취득하기도
와인의 매력 나누려 30년 여정 집대성한 [와인 오디세이아] 펴내


▎송점종 대표는 와인을 “물성과 감성이 50대 50으로 결합된 자연의 선물”이라고 정의했다.
6월 14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회나무로 경리단길 중턱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가야랑 3층의 오픈갤러리 G컨템퍼러리에 들어서자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드넓은 포도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탈리아 4대 와인으로 꼽히는 바롤로의 와이너리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착각이 든다. 녹색의 싱그러움이 후텁지근한 날씨마저 잊게 해준다.

갤러리 안에는 사방이 와인에 관한 사진과 그림으로 가득했다. 벽마다 와인의 나라들인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와인 정보가 채워져 있다. 테이블에는 와인 관련 다양한 소품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오래된 희귀 와인병도 있다. 군더더기 없는 집주인의 취향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스카프를 목에 두른 신사가 밝은 표정으로 사진과 소품을 하나씩 설명한다. 자신이 직접 유럽 곳곳의 와이너리를 찾아다니며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 국내 와인업계와 애호가들 사이에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요즘 말로 ‘인싸(인사이더)’다.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대학 시절 와인을 접한 뒤 반세기를 와인 탐구에 관심을 쏟았다고 했다. 와인에 관해 국내에서 그와 어깨를 견줄 만한 이가 없을 만큼 해박하다. 프랑스 보르도 경영대학원(École de Management Bordeaux)에서 2001년에 국제적으로도 처음 개설된 와인산업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땄다. 와인MBA 학위를 가진 사람은 지금까지도 국내에 세 사람뿐이다. 국제적인 와인 애호가들의 모임인 International Wine & Food Society의 서울 디캔터 회장을 맡고 있다. 국내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후학도 양성했다. 그에게 와인은 인생 그 자체나 다름없는 셈이다.

송 대표의 와인에 관한 지식은 활자로 익힌 게 아닌 체험의 결정체다. 그는 “와인을 좇아 27개국을 다녔다”고 했다. 수십 년간 유럽의 와이너리를 오간 거리만 해도 20만㎞에 이를 정도다. 지구를 다섯 바퀴 돈 것과 맞먹는 거리다.

와인에 빠져 시작한 ‘지구 다섯 바퀴’ 대장정


▎송점종 대표는 30년에 걸친 와인 탐사 여정을 두 권의 책 [와인 오디세이아]로 집대성했다. 와인에 얽힌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집약된 송 대표 인생의 결정체다.
본격적으로 와인을 탐미(耽美)하기 시작한 건 대우그룹에 입사해 해외 지사 근무를 하면서부터다. 비즈니스상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고 직접 와이너리를 찾아다닐 기회가 생기면서 단순히 맛을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미묘한 차이의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송 대표는 “와인과 함께한 매 순간이 순수하고 행복했다. 그렇지 않은 시간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고 했다.

송 대표는 보여줄 게 있다며 기자를 이끌었다. 그의 손에 이끌려 돌아본 건물 곳곳은 와인의 흔적이 없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였다. 빈 와인병부터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와인잔, 코르크 마개와 와인 보관상자까지 30년 넘는 탐험의 흔적이 마치 전리품처럼 장식했다. “내가 전생에 유럽 어느 마을에서 포도원을 일구는 농장주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송 대표의 말이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심’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송 대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와인 예찬을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와인에 대한 정의”라고 했다. 헤밍웨이는 1932년 스페인 마드리드의 투우 경기에서 영감을 얻어 [오후의 죽음]이란 소설을 썼다. ‘오후의 죽음’은 해 질 녘 황소의 숨을 끊어 그 고기로 만찬을 벌이는 투우의 전통에서 따온 제목이다. 갓 도축한 황소 고기에 곁들인 와인의 맛은 어땠을까. 그 경험을 헤밍웨이는 이렇게 적었다.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문명화된 것 중 하나이며, 동시에 가장 자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송 대표는 “와인은 포도 자체의 생화학적인 작용에 의해 탄생한 알코올 음료지만, 헤밍웨이의 표현처럼 감성이나 각자의 의식에 따라 무한히 가치가 확장되는 문화상품이기도 하다”고 했다. 와인은 인위적인 개입이 거의 없이 오로지 포도와 천연효모에 의해 만들어진다. “품종과 재배 농법, 토양, 기후 등 자연환경이 만들어내기에 ‘신의 음료’에 비유하는 것”이라는 송 대표의 설명을 들으니 ‘시간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선물’이란 생각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과 나눌 때 진가 발휘하는 소통의 술”


▎송점종 대표는 세계 구석구석을 다니며 와인의 모든 것을 탐사하고 있다. 이탈리아 북쪽 지방 발폴리첼라의 고급 와인 아마로네의 대부로 불리는 산드로 보스카니 마지와이너리 회장과 함께 찍었다. / 사진:송점종
송 대표가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와인에 문외한인 기자도 그의 설명을 들으며 수집품들을 둘러보는 동안 마침 전에 없던 호기심이 발동한 터였다. 어두컴컴한 지하로 들어서 문을 열자 마치 이국의 어느 지하 동굴에 온 듯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옆으로 뉜 와인 천여 병이 한쪽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와인 탐험의 결정체, 와인 저장고다. 온습도 조절기까지 갖췄으니 예사 와인은 아니란 건 단박에 알아차렸다.

벽에 쌓인 와인을 바라보는 송 대표의 얼굴은 보물창고를 자랑하는 소년의 모습 같았다. ‘와인과 사랑에 빠진다면’ 바로 이런 표정일 것이다. 아치형 벽돌로 장식한 벽과 고풍스러운 타원형 테이블. 내부 장식마저 마치 유럽의 와이너리를 옮겨다 놓은 듯 꾸몄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여기에서 비싼 게 어떤 건가요?”

송 대표는 주저 없이 와인 서너 병을 꺼냈다. 하나같이 낡고 빛바랜 레이블이 비범함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네콩티(Romanée-Conti, DRC)가 한 병 있었는데 먹어버려서 빈 병만 있다”고 했다. 프랑스 부르고뉴산이며 빈티지에 따라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다.

송 대표가 소개한 와인 중 이우환 화백의 작품이 들어간 레이블을 단 샤토 무통 로칠드 2013 빈티지가 눈길을 끌었다. 로칠드(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샤토 무통 로칠드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5대 특급 와이너리 중 하나로 꼽힌다. 실물을 본 것만으로도 상당한 행운이었다. 함께 보여준 와인들도 하나같이 명품으로 평가받는 것들이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7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안티노리(Antinori) 가문에서 생산한 솔라이아(Solaia, 2003 매그넘)와 같은 볼게리 지방의 수퍼토스칸 와인 사시카이아(Sassicaia), DRC의 라타쉬(La Tache), 리쉬브르(Richebourg), 그랑 에세조(Grands Échézeaux, 2006). 수십 년 노력 끝에 완성한 컬렉션을 너무 쉽게 눈 호강하는 것만 같아 미안함이 들었지만, 송 대표의 표정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송 대표는 와인마다 깃들어 있는 사연들을 막힘없이 풀어 냈다. 송 대표의 와인 저장고는 밤새 들어도 다 듣지 못할 무궁무진한 이야기 창고인 셈이다. 그가 와인에 빠진 것은 그 안에 담긴 수천 년의 이야기와 철학, 감성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와인은 단지 알코올에만 집중하지 않는 절제의 술이자, 조화로운 음식이나 좋은 사람과의 대화가 곁들여질 때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관계와 소통의 술”이라고 했다.

그가 또 다른 와인 한 병을 꺼냈다. 그가 소개한 것은 프랑스 부르고뉴의 샹볼 뮈지니 레자무뢰즈(Chambolle-Musigny Les Amoureuses) 2017 빈티지. 250유로 안팎의 비교적 중고가 와인인데 무슨 사연인지 궁금했다. 세계 최고의 와인 평론가로 꼽히는 잰시스 로빈슨의 운명을 바꾼 와인이라고 한다. 로빈슨이 옥스퍼드대 재학 시절 우연히 이 와인 한잔을 접하면서 와인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경북대 법학과 재학 시절 우리나라 최초의 애플 와인인 ‘파라다이스’를 만난 뒤 와인 애호가의 길을 걷게 된 그에게 샹볼 뮈지니를 만난 로빈슨의 심정은 결코 다르지 않았으리라.

국내에서 와인은 평범한 이들에게 낯선 게 사실이다.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고급 와인을 맛보는 식의 고상한 취향에 대중은 섣불리 다가서지 못한다. 일부는 과시용으로, 또는 재테크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송 대표가 와인을 탐미하고 꾸준히 컬렉션을 만들어가는 이유가 궁금했다. 혹시 사업의 수단은 아닐까.

“돈 벌려고 와인을 배우는 게 아닙니다.” 송 대표의 대답은 단호했다. “와인을 업으로 삼지 않은 건 열정의 순수성을 지키고 싶어서”라고 그는 말했다. “지금까지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전 세계의 와이너리와 와인을 찾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시간과 비용을 계산해본 적은 없다”고 덧붙인다.

값이 비쌀수록 좋다? 자기 취향에 맞아야


▎송점종 우리자산관리㈜ 대표에게 와인은 인생의 전부나 다름없다.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로 꼽으라면 송 대표는 주저하지 않고 와인을 첫손가락에 꼽는 마니아이자 전문가다.
장난기 어린 호기심이 들어 질문을 던졌다. “어떤 와인이 좋은 건가요?”

“값이 비쌀수록 좋다”는 김빠지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비싼 게 물론 좋지만, 그게 내 취향에 맞느냐는 다른 문제다. 와인의 가치는 감성과 물성이 50 대 50이다. 만원짜리가 만족스러우면 그게 가장 좋은 와인이다.” 그는 “물론 100만원짜리 와인이 만원짜리보다 100배 맛있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아주 미세한 맛의 차이를 느끼며 더 좋은 와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송 대표가 지난 30여 년 동안 해온 탐사도 닿을 듯 말 듯한 희열을 찾아가는 여정이었을 거다.

송 대표는 30년 와인 탐사를 통해 얻은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책 두 권으로 집대성했다. 프랑스 편과 유럽 편으로 나눴는데 무려 1160쪽에 달한다. 책에 수록된 사진 수백 장은 송 대표가 직접 찍은 것들이다. 자료를 찾아 적당히 정리한 여느 와인 교양서와는 비교 불가다. 송 대표는 책을 쓰면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향한 10년의 여정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책을 [와인 오디세이아(Wine Odysseia)]로 명명했다.

“와인은 문화상품”이라는 말에 걸맞게 그의 책은 유명 와이너리를 소개하거나 특징을 정리한 기행문에 머물지 않는다. 유럽의 문화와 역사, 예술이 와인을 만나 책의 재미를 더한다. 굳이 송 대표의 와인 저장고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 와인에 입문하려는 이들이나 조금 더 견문을 넓히고 싶은 애호가에게 제격이다.

인생의 한 페이지를 정리하고 나면 쉬고 싶을 법도 한데 송 대표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이번에 펴낸 건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일부 나라일 뿐 독일을 비롯한 동유럽과 신대륙의 와인 이야기가 아직 남아 있단다. 그의 와인 탐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기본적으로 알면 좋은 와인 에티켓을 물었다. 그가 알려준 에티켓은 이렇다. ▷와인잔은 오른쪽에 두고 오른손을 사용할 것 ▷와인을 따를 땐 여성 먼저 ▷레스토랑에서 시음한 와인을 변경할 땐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라 변질됐을 때 요구할 것 등이다.

- 글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202107호 (2021.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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