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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MZ세대의 LP 사랑 

“빽판이 아니라 바이닐이죠… ‘지지직’ 소리가 주는 감성, 신선해요” 

코로나19 장기화 따른 ‘집콕 문화’와 복고 열풍 힘입어 LP문화 부활
아날로그 감성에 매료된 10~30대, 문화상품으로 새로운 가치 부여


▎서울 한남동 현대카드 ‘바이닐앤플라스틱’에서 아이돌 그룹 ‘빅뱅’의 스페셜 LP를 청음하고 있는 2030 이용객들. LP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말이 나온다.
"위이잉~”

회색 기계가 턴테이블 위에 LP를 옮긴다. 천장에 달린 360도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 선율이 매장 안을 가득 채운다. 벽면에는 각종 LP 아트워크가 빼곡하다. 가게 한쪽엔 청음 공간이 마련돼 있다. 큐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음악 취향에 맞는 LP 음반을 소개해주는 서울시 을지로3가에 있는 음반 매장 ‘다이브레코드’의 풍경이다. 이곳의 주 고객층은 의외로 오래된 LP보다 디지털 음원에 익숙할 법한 젊은이들이다.

1976년부터 명맥을 이어온 종로3가의 LP숍 ‘서울레코드’에도 젊은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청춘 남녀의 연애 시뮬레이션 예능 프로그램인 <하트시그널3>의 데이트 배경이 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황승수 서울레코드 대표는 “전혀 발걸음이 없던 젊은 손님들이 3~4년 전부터 크게 늘었다”며 “가게를 구경하러 오는 손님도 있지만 실제 구매를 하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역사가 깊은 회현역 지하상가에 자리 잡은 ‘LP러브’ 김지윤 대표는 “예전에는 한 명도 볼 수 없었던 2030세대가 이제는 전체 손님의 절반 이상”이라고 말했다. 평소 LP 중고 거래를 많이 하는 20대 오충석씨는 “요 근래 중고 거래를 하는 젊은 분이 부쩍 늘었다”며 “최근 거래한 10명 중 6명이 20~30대였고 10대도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요즘 LP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한때 국내 LP업계는 MP3 플레이어의 등장과 디지털 시대 도래로 바닥까지 내몰렸었다. 2004년 국내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레코드 공장인 ‘서라벌레코드’가 문을 닫았고, 2011년 야심 차게 등장한 ‘LP팩토리’도 폐업했다. 25년간 젊은이의 거리 신촌을 지켰던 ‘향음악사’도 문을 닫았다. 하지만 근래 중장년층의 향수에다 젊은 세대의 뉴트로 열풍으로 LP 수요가 되살아나고 있다.

LP 부활은 2011년부터 꾸준히 개최된 ‘서울레코드페어’에 힘입은 바가 크다. LP 수요가 생겨나자 2017년에는 ‘마장뮤직앤픽처스’에서 LP 제작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LP의 국내 생산과 함께 업계도 기지개를 켰다. 2016년에 100억원 수준이던 매출액이 2019년 400억원, 2020년 750억원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국내 음반기획사 ‘사운드트리’의 박종명 부사장은 “올해 국내 LP업계 매출액은 온라인 음반 업체와 턴테이블 판매량을 기준으로 최소 1200억원에서 1300억원까지 내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LP 부활을 넘어 호황이다.

해외에서도 LP의 부활은 두드러진다. 미국 빌보드와 음반 판매량 조사회사 ‘MRC’의 데이터에 따르면 작년 미국 LP 판매는 2754만 장으로 30년 만의 최대치다. 미국 레코드산업협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LP 판매량은 전년 대비 30% 늘었다. 1986년 이후 최초로 CD 판매량을 앞질렀고, 매출액은 한화로 약 7000억원대로 집계됐다.

요즘 LP 시장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특징은 20~30대의 구매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국내 음반 판매사이트 ‘예스24’의 2020년 LP 구매 비중 집계에 따르면 30대가 31.7%, 20대가 21.2%로 절반을 넘는다. 이들 MZ세대는 남과 차별화되는 이색적인 경험을 선호한다. MZ세대는 턴테이블로 LP를 들어본 경험이 없다. 따라서 이들이 LP를 소비하는 것을 ‘향수’나 ‘복고’로 보기는 어렵다. 대신 그들에게 LP는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감성 소비’의 소재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날로그적인 작동 방식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것이다. 서울시 강동구에 사는 직장인 김모(30) 씨는 LP에 이제 막 관심을 갖기 시작한 입문자다. 그가 가진 LP는 단 한 장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애착이 점점 깊어지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김씨는 “흐릿한 필터카메라에 그것만의 감성이 있는 것처럼 LP도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주는 감성이 있다”며 “일상과 다른 방식의 경험을 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라고 말했다.

MZ세대의 LP 사랑은 ‘바이닐 감성’


▎서울 을지로 ‘다이브레코드’(왼쪽)와 회현역 지하상가의 한 LP 음반가게(오른쪽). LP가 진열된 모습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다. / 사진:손준영
한 가지 특이한 건 이들이 LP를 부르는 용어다. LP(longplaying record)는 기성세대에게 ‘LP판’, ‘빽판’ 등으로 불리지만 MZ세대에겐 ‘바이닐’이란 용어가 좀 더 익숙하다. 바이닐(Vinyl)은 PVC(염화비닐)를 말한다. LP판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과거나 지금이나 LP를 부르는 명칭에 절대적인 룰이 있는 건 아니다. ‘빽판’이란 단어가 주는 감성은 LP가 빽빽이 꽂혀 있는 DJ 부스를 아는 기성세대라야 제대로 느낄 수 있듯이, MZ세대가 공유하는 LP의 감성은 ‘바이닐’이라는 단어에 함축돼 있다. ‘힙하다’는 말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의 감성과 문화를 상징하는 데 ‘바이닐’만큼 적당한 용어도 없다. 복고와 향수의 범주에서 벗어나 젊은 세대만의 어휘와 문법이 바로 ‘바이닐 문화’에 녹아 있는 셈이다.

2016년 전후로 이런 문화가 본격적으로 꽃피워 감각적인 공간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2016년 한남동에 개장한 현대카드의 ‘바이닐앤플라스틱’을 비롯해 음반 구매와 청음이 가능한 젊은 감각의 전문 숍이 곳곳에 생겨났다. 단순히 음반만 파는 게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티셔츠, 포스터, 스티커 등 다양한 굿즈를 취급하는 게 특징이다.

과거에는 10곡 이상 담을 수 있는 지름 12인치짜리 LP판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 출시되는 ‘바이닐’은 더 다양한 개성을 뽐낸다.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수록된 곡이 한두 개뿐인 ‘7인치 싱글’도 많이 등장하고, 곡 수가 네 개 미만인 음반이 많아졌다. LP 한 장에 가능한 한 많은 곡을 담아 가성비를 극대화했던 과거와 다르게, 수록곡 수와 관계없이 LP 자체가 하나의 굿즈로 자리 잡았다. 최규성 한국대중가요연구소 대표는 “보통 곡 수가 6개 이상인 미니앨범 정도는 돼야 LP라고 부른다”며 “요즘의 다양한 형태의 앨범을 포괄할 수 있는 용어로 바이닐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MZ세대는 바이닐의 어떤 면에 끌리는 것일까? 우선 음악을 보고 만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MZ세대들은 입을 모은다. 이는 디지털 음원과 가장 큰 차이다. 바이닐을 수집하는 진우형(27)씨는 “스트리밍 사이트의 플레이리스트와는 다르게 바이닐은 실제 형체가 있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2030세대 모두 물성이 있는 것으로 음악을 들은 경험이 많지 않다”며 “시각적인 효과와 소장 가치가 두드러지는 LP가 강세를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LP와 비슷한 것으로 CD를 꼽을 수 있지만, CD는 플레이어 안에 있어 돌아가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아트워크가 작다. 하지만 LP는 다르다. 저마다 이색적인 아트워크와 표지를 갖고 있고, 화려하고 강렬한 색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통상 겉면이 검은색인 ‘블랙판’이 음질 부분에서 더 좋지만, 시각적인 매력을 중요시하는 요즘은 ‘컬러판’도 많이 나온다.

음악을 듣기까지 섬세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LP만의 번거로움도 MZ세대에게는 오히려 매력 포인트다. 턴테이블에 LP를 걸고, 바늘을 들어 원하는 곳에 조심히 내려놓는 일련의 과정이 신선한 경험이자 음악을 듣기 위한 의식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지난해 시각디자인학과를 졸업하면서 LP 컬러판으로 졸업 작품을 만든 뒤 LP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 박은경(22)씨는 “음악을 듣기 위한 과정이 더 까다롭기 때문에 오히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음악을 보고 만지고 듣는, LP만의 매력

연남동에 거주하는 20대 음반애호가 박금진씨는 바이닐의 매력을 이렇게 말한다. “귀찮은 점도 있다. 먼지도 다 닦아줘야 하고 관리가 쉽지 않다. 하지만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휙휙 넘겨 들을 때와 다르게 만들어질 당시의 문화가 담긴 아카이브와 같은 LP의 성격에서 시대적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MZ세대의 바이닐 소비는 단지 음악을 감상하는 도구에만 그치지 않는다. 집에 턴테이블이 없어도 소장 욕구 충족을 위한 수집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현실의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아티스트에 대한 애착을 표출할 수 있고, 직접 보고 만질 수 있는 성격이 마치 ‘컬렉션’ 개념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실제로 ‘예스24’에서 가장 많이 팔린 백예린의 ‘Every letter I sent you’는, 한정 음반 2000장이 발매되자마자 순식간에 동났고 서둘러 추가 발매한 1만3000장도 완판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런 트렌드를 고려해 최근 발매되는 바이닐은 ‘패키징’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음반 외에 스티커, 화보집 등의 ‘굿즈’를 묶어서 소장 욕구를 자극한다. 특히 큰 팬덤을 보유한 아이돌과 스타 가수의 앨범은 음악 감상 목적보다 굿즈 개념으로 사고파는 경우가 많다. 아이돌 그룹 블랙핑크의 공식 팬클럽 ‘BLINK’ 회원인 김모(23) 씨는 아예 음반을 두 개 구매해 하나는 음악 감상용으로 개봉하고, 하나는 개봉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다. “팬이기 때문에 굿즈나 음반은 발매되면 무조건 산다”며 “특히 이번 앨범은 한정판으로 1만8888장 밖에 발매되지 않아 소장 가치가 커서 구매했다”고 말했다.

연예 기획사들도 이런 ‘팬심’을 한정판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방탄소년단(BTS)의 앨범 <다이너마이트>와 <버터>의 LP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주요 소비층인 10~30대는 구매에 성공한 바이닐을 SNS에 올리며 자신의 ‘팬심’을 과시한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국내 LP 앨범은 소량 제작되고, 한정판 성격을 띠게 된다. 이는 국내 공장 사정에 따른 수급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부러 희소성을 높여 구매욕을 자극하는 마케팅 요소 또한 강하다.

LP 유행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음악을 감상하는 취미 생활의 하나로 턴테이블 애호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턴테이블 판매량이 2019년보다 35% 증가했다고 분석한다. 올해 전체 국내 LP 발매 계획이 3, 4월에 이미 예약이 끝났을 정도다. 가요와 클래식 명반을 재발매하는 것으로 연명해온 LP 시장은 이제 신보를 발매하는 흐름으로 바뀌었다. 올해 2월 ‘제18회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자로 호명된 백예린, 선우정아, 이날치, 조동익 모두 LP를 발매했고, 인디 뮤지션들도 점차 CD 앨범 없이 디지털 음원과 LP만을 제작하는 추세다.

지나친 팬덤 의존, 가격 거품은 LP 대중화 걸림돌


▎아이유의 꽃갈피 LP 중고 음반은 200만원의 리셀 가격에 올라와 있다. / 사진:네이버쇼핑 캡처
다만 최근 품절 사례가 늘면서 웃돈을 얹어 되파는 ‘리셀’ 문제가 나오고 있다. ‘네이버쇼핑’에 올라온 아이유의 [꽃갈피] 중고 LP 음반의 가격은 200만원에 이르는데, 200명이 ‘찜하기’를 눌러 놓은 상태다. 이소라의 6집 [눈썹달]은 100만원, 앞서 언급한 백예린의 품절된 음반은 60만원에 이른다. 신작 앨범이 발매되면 대량으로 사들이는 전문 리셀러도 등장했다. 정민재 평론가는 “리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바이닐의 인기를 방증하지만, 그런 심리를 이용해 폭리를 취하는 리셀러에 의해 시장이 교란되는 것은 장기적으로 시장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비층이 일부 가수의 팬덤에 집중된 것도 외연 확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다. 기획사가 아예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다. 화보집과 포토카드가 같이 들어 있는 인기가수 청하의 한정 음반 [케렌시아(Querencia)]는 11만8300원(할인가 9만5800원)에 가격이 책정됐다. LP와 굿즈를 묶음 판매해 가격을 높이는 식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아이돌 음반의 주요 소비층은 아직 경제적 여력이 부족한 10~20대다. 팬덤을 등에 업고 젊은 세대의 주머니를 터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에 LP 제작 업체가 부족하고, 수요 자체가 적다는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음반의 ‘굿즈화’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민재 평론가는 “LP 시장은 현재 가격 면에서도 거품이 끼어 있는 상태”라며 “한정 판매 대신 예약기간 안에 모든 사람이 구매할 수 있도록 해야 건강한 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했다.

- 손준영 월간중앙 인턴기자 storkism@naver.com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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