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0)] 인왕산 자락 암벽 위의 누각 세심대(洗心臺) 

사도의 아들 정조, 애끓는 사부곡(思父曲) 들리는 듯 

아버지 사당 터 내려다보이는 곳, 자주 올라 마음 달래
바로 아래 세심궁엔 할머니 사당, 비운의 가족사 흘러


▎세심대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왕산은 과거 필운산으로 불렸다. / 사진:이성우
영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정조는 매년 봄 세심대에 행차해 꽃구경하고 활을 쏘며, 시를 짓는 등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하지만 정조는 단순히 신하들과 활쏘기나 하기 위해 세심대에 오른 것이 아니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사당 사도묘가 세심대 아래에 있던 세심궁에 세워졌다가 이건됐기 때문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여읜 애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세심대에 올랐다고 [정조실록] 15(1791)년 3월 17일의 기록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조가 자주 올랐다는 세심대는 어디에 있었을까?

“만(萬) 소나무 그늘져서 서쪽 기슭 창창한데 솔숲 사이에 있는 석대(石臺)는 사람 맘을 맑게 하네. 좋은 자리 맛있는 술 빈객들은 즐거운데 다시 거문고와 노래 있어 마주 대해 술 따르네. 그 원림(園林)이 난리 겪은 뒤에 적막해졌는데 밝은 달은 전과 같이 예와 지금 비추누나. 우리 집은 삼대(三代)토록 같은 동리 살았거니 어느 날에 돌아가서 모수(某樹) 가르키나.”

17세기 김상헌의 시에도 세심대 등장


▎영화 사도에서 어린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에 물을 갖고 온 장면. 정조는 아버지를 여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세심대에 올랐다. / 사진:쇼박스
위의 시는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에 수록돼있는 근가십영(近家十詠) 중 세심대에 대해 읊은 시다. 세심대의 근처인 지금의 청운동에서 살았던 김상헌이 집 가까이에 있는 10곳의 경승지를 대상으로 지은 시 가운데 하나다. 이를 통해 세심대가 적어도 17세기에도 알려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세심대가 건축물인 세심정이라는 명칭과도 관련 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심수경이 쓴 [견한잡록(遣閑雜錄)]을 살펴보면 “서울에 이름이 있는 정원이 한둘이 아니지만, 특히 이향성의 세심정은 가장 경치가 좋다. 정원 안에는 누대(樓臺)가 있고 그 누대 아래에는 맑은 샘이 콸콸 흐르며, 그 곁에는 산이 있어 살구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봄이 되면 만발해 눈처럼 찬란하고 다른 꽃들도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임진년 초봄 어느 친우의 집에 갔는데 이향성의 여종이 거문고를 타고 있기에 시 한 수를 지어 이향성에서 전하라고 했다. 그 시에는 여종이 스스로 세심대 하인이라고 말했다고 하면서 그 후 병란(兵亂)으로 세심대의 경치도 다시는 감상하지 못했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심수경은 ‘세심정’과 ‘세심대’를 이향성의 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정원에는 누대가 있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르며 곁에는 산이 있는데 그곳의 대(臺)가 세심대라는 것이다.

백사 이항복의 [백사집(白沙集)]에서도 세심정의 주인인 이향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백사집] 제3권 중 ‘고통훈대부 홍산현감 이공 묘표’에 따르면 “이항복이 젊었을 때 필운산 아래서 노닐다 아름다운 나무 수십 그루가 담장 주위에 빙 둘러 있고 그 숲 사이에 가려진 집이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가 이향성을 봤는데, 며칠 뒤 찾아온 이향성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로부터 31년 후인 을묘년에 향성의 3남 이정민의 요청으로 아버지인 이향성의 묘표를 짓게 됐다”고 했다. 묘표란 품계나 벼슬, 이름 등을 적어 무덤 앞에 세우는 푯돌을 말한다.

[백사집]에서 언급하고 있는 필운산은 지금의 인왕산을 말하며, 홍산이란 곳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홍산면 지역이다. 이향성은 사산감역을 거쳐 사평에 뽑혀 제수됐다가 홍산현감으로 나갔었다. 이후 노년에는 필운산 근처에서 세심정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으나, 임진년의 난리를 만나 지금의 충남 홍성인 홍양의 임시 거처에서 향년 69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향성과 이항복의 사망 시기는 각각 1592년, 1618년이므로 위 [백사집]의 을묘년은 두 사람의 사망 사이인 1615년이 되는 셈이다. 이항복이 이향성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던 31년 전은 1584년으로 이 무렵 이향성은 세심정에 살고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조선 중기의 문신 월사 이정귀의 저서 [월사집(月沙集)]에서도 이향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묘갈이란 머리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을 말하는데, [월사집] 제46권 묘갈 편의 ‘홍산현감 증 승정원 좌승지 이공 묘갈명’을 살펴보면 “홍산현감으로 출사해 5년간 고을을 크게 다스렸으나 질병을 핑계 삼아 돌아가서는 인왕산 기슭에 집을 지었는데 연못과 누대와 꽃들로 경치가 훌륭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 관리직 맡았던 무관 이향성, 노년에 집 지어


▎[세심궁도형]의 북서쪽에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 ‘세심대’라는 글자가 보인다. / 사진:국립문화재연구소
이 기록들로 볼 때 세심정은 이향성이 홍산현감을 지낸 이후 지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왕산 아래에 집을 지었는지, 그때가 언제였는지 구체적 시기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어렴풋이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백사집]이나 실록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백사집]에서는 “이향성이 사산감역과 사평을 지낸 후 홍산현감으로 나갔다”고 하고 있다. 이향성의 생존 당시 홍산현감이 언급된 실록의 기록으로는 “홍산현감은 박학서였는데 파직당했다”고 하는 [중종실록] 39(1544)년 5월 4일의 기록이 유일하며, “홍산현감 서집은 잉임시키고”라는 [선조실록] 27(1594)년 9월 7일의 기록은 사후 2년이 지난 시기다.

한편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현일의 시문집 [갈암집(葛菴集)] 별집 제5권 묘갈명 중에도 이향성 생존 당시의 홍산현감 중 한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 “통훈대부 예빈시 부정 예곡 곽공의 묘갈명을 보면 곽공, 즉 곽율이 선조 19(1586)년 봄 사포서 별제에 제수된 얼마 후 외직으로 나가 홍산현감이 됐다”라고 해 곽율이 1586년 이후 홍산현감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1586년은 이향성이 63세 되는 나이이기에 곽율보다는 당연히 이른 시기에 홍산현감을 지냈다고 봐야 한다. 또한 [백사집]에서 이항복이 이향성과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던 을묘년으로부터 31년 전은 1584년이다. 만일 1524년생인 이향성이 박학서의 뒤를 이어 1544년부터 5년간 홍산현감을 지낸 뒤 곧바로 세심정을 지었다고 한다면야 세심정은 1549년쯤 완공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향성은 사산감역과 사평을 거친 후 홍산현감을 나간 것이고, 노년에 필운산 근처에 집을 지었다고 하고 있기에 젊었을 때보다는 좀 더 세월이 흐른 후부터 61세인 1584년 사이 언제인가에 세심정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심정의 건립 시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또 다른 내용으로는 심수경의 [견한잡록] 중 세심정 관련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견한잡록]에는 “상사 이굉이 세심정을 구경하고자 그 집에 갔는데, 주인 이향성이 마침 병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굉이 세심정을 갔을 때 이향성은 이미 홍산현감을 마치고 세심정을 지어서 살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상사란 유생 가운데 생원·진사에 합격한 자를 말한다. 이굉의 생몰 연도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향성의 생존 시기에 실록 기록을 확인해 보면 명종 20(1565)년 4월 25일 “보우의 죄를 청하는 성균관 진사 이굉 등의 상소”와 선조 6(1573)년 7월 27일 “전생서 참봉 이굉이 감히 그릇된 소견으로 경솔히 헌관에게 고해”라고 나와 있다. 1565년은 이향성이 42세 때, 1573년은 50세 때이므로 [견한잡록]의 이굉이 위 실록의 이굉과 동일인물이라면 이굉이 세심정을 방문했던 시기는 1565년과 1573년 사이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때 세심정이 건립돼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향성은 어떻게 여러 사람이 극찬해 마지않는 풍경과 지세를 갖춘 장소를 선정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향성이 사산감역이란 벼슬을 했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사산감역이란 한양 도성을 연결하는 내사산인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의 성첩과 송림을 지키던 종9품의 무관직 벼슬자리인데, 네 명을 둬 각 산을 나눠 맡았다. 그런데 인왕산과 크게 연고가 없어 보이는 이향성이 노년에 인왕산 근처에 세심정을 짓고 살았다는 것으로 보아 이향성이 사산감역관으로 재직하던 중 인왕산 지역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이때부터 인왕산 밑에 있는 세심정 지역을 눈여겨 봐뒀을 가능성이 있다.

광해군, 관직 주고 왕실 소유로 만들어


▎[제생원 양육부 이축 공사배치도] 북서쪽의 넓은 공간이 세심대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 사진:국가기록원
어쨌든 이향성의 세심정은 심수경의 기록처럼 임란을 겪으면서 소실됐고, 소실된 것을 당진현감을 역임한 3남 이정민이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정민의 묘갈에 따르면, 수석의 아름다운 경치가 도성 안에서 으뜸이었던 본인의 거처 세심대를 광해군이 관직으로 보상하는 대신 빼앗아 갔다고 하고 있다.

이후 세심대는 한동안 기록에 등장하지 않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 다시 등장한다. 이때는 이미 왕실 소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의조별등록] 제1책 기사년(己巳年) 10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숙종의 제1 계비였던 인현왕후가 폐위돼 서인의 신분으로 있을 당시 몸을 조리하던 질병가(疾病家)로 사용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보다 하루 전인 [숙종실록] 15(1689)년 10월 18일 기록에는 “지금의 질병가는 폐출된 후궁과 내인이 의탁하는 곳으로 삼았던 자수원(慈壽院)의 옛터”라고 기록하고 있어 비록 두 지역 간 거리의 차이는 크지 않더라도 구체적 장소에 대한 기록의 차이는 보인다.

인현왕후와 인원왕후 사후 영조의 명에 의해 용도 폐기된 궁들은 호조(戶曹)의 비용절약 차원으로 모두 내수사 소관이 됐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지 약 한 달 후인 영조 38(1762)년 6월 15일 세심궁에 들러 사도의 탈상 후 세울 사당 자리로 세심궁을 지정했다. 사도묘는 영조 40(1764)년 2월 18일 공사를 시작해 3개월 만인 5월 19일에 마치고 수은(垂恩)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으나, 영조의 명으로 다시 옮겨져 창경궁 홍화문의 동쪽, 지금의 서울대학병원 자리에 수은묘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사도묘 이건 약 3년째 되는 영조 42(1766)년 7월 26일 사도세자의 친어머니 사당인 의열궁(義烈宮)이 새롭게 건립됐다.

영빈 이씨의 사당 선희궁은 이건과 환안을 반복하다 순종 2(1908)년 지금의 칠궁 내 육상궁 별묘 지역으로 최종 이건 됐다. 칠궁으로의 이건 4년 후 선희궁 자리에는 1912년 조선총독부 산하 의료기관인 제생원의 양육부가 들어섰다. 이미 1910년 체결된 경술국치(國權被奪)로 국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의 제생원은 조선 초기 서민들의 질병 치료를 관장했던 의료기관이었으나, 세조 5(1459)년 혜민국에 합병됐다. 고종 대의 제생원은 당시 이필화가 1905년 9월 사재를 털어 한성부 중부, 지금의 관철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가옥을 매입 후 경성고아원의 전신인 보생고아학교를 설립한 것이 기원이다. 보생고아학교는 한국인이 고아를 위해 설립한 최초의 시설이었으며, 아직 고아원이란 개념이 생소하던 시절이었기에 설립 당시부터 많은 사회적 관심을 받았다. 대한제국과 일본 양국의 황실을 비롯한 각계각층으로부터 적지 않은 후원을 받았음에도 창립 3년째에 고아가 200여 명에 달하면서 지속적인 경영난에 시달렸다. 고아원이라는 용어는 1906년 후반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1906년 12월 20일 [대한매일신보] 기사와 같은 날 [황성신문]의 기사에 보생고아학교를 고아학교 또는 고아원으로 기록하고 있어 이 무렵에는 경성고아원이라는 명칭으로 운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만세보] 1907년 1월 30일 ‘고아원기념식’ 제하의 기사에는 “2월 2일 고아원 개원 1기 기념식이 열린다”고 하고 있어 고아원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도 많이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관철동 지역에 있었던 경성고아원은 1910년 11월 15일 옛 서묘 자리로 이전했다. 당시 원장이었던 유길준이 서묘 자리로 이전할 수 있도록 1910년 6월 한성부에 청원해 허락을 얻었다. 서묘는 서대문구 천연동에 있었던 관우 장군을 제사 지내는 사당이었다. 하지만 1908년 7월 23일 제사 제도에 관한 순종의 칙령 제50호 ‘향사이정에 관한 건’이 반포되면서 제사의 축소·폐지와 함께 국유로 환속 됐으며, 1909년 4월 동묘에 합사된 이후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전이 가능했다.

일제, 옛 선희궁 개조해 고아원 등으로 사용


▎옛 선희궁 전경 사진. 왼쪽으로 경사져 올라가는 산줄기 제일 상단부에 세심대가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대정 10(1921)년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제생원 요람]에 의하면 명치 44(1911)년 6월 조선총독부령으로 제생원이 창립돼 경성고아원의 사업을 계승하고, 같은 해 9월 1일 양육부라는 명칭으로 고아 교양 사업이 시작됐다. 이어 명치 45(1912)년 4월 칙령 제43호로 ‘총독부 제생원 관제’를 공포했다고 한다. 또한 [매일신보] 1911년 6월 23일 ‘제생원의 신설’ 제하의 기사에서도 “조선 고아의 양육, 맹아자의 교육 등을 목적으로 하는 제생원의 규정을 부령 제77호로 재작일(6월 21일)에 반포했다”고 하고 있어 경성고아원은 서묘로 이전된 지 불과 6개월 만인 1911년 6월 총독부령으로 설립된 제생원으로 흡수돼 고아 관련 사업 일체가 총독부 소관으로 넘어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총독부 제생원 요람]에 따르면 “제생원은 양육부와 맹아부로 구성돼 있으며, 양육부는 명치 45(1912)년 4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하고, 맹아부는 그보다 1년 후인 대정 2(1913)년 4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양육부는 주로 고아를 양육 보호하는 기능이었고, 맹아부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에게 침술 및 안마를 중심으로 한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천연동에 있었던 양육부는 1912년 들어 옛 선희궁 터로 이전됐다. 1912년 5월 29일 자 [매일신보] ‘제생원 양육부’ 제하의 기사에는 “사직동 선희궁 개조를 낙성했으므로 서대문 외 천연정에 설치한 제생원 양육부를 이전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제생원 요람] 사업 개황을 보면 양육부는 명치 45(1912)년 4월 1일 경성부 신교동 1번지 원선희궁적, 즉 옛 선희궁 터에서 업무를 개시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단 사업 개황의 기록처럼 옛 선희궁터의 건물 일부를 이용해 ‘고아를 교육하는 기능’만 먼저 옮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제생원 요람] 보다 17년 후인 소화 13(1939)년에 발행된 [조선총독부 제생원 사업 요람]에는 “옛 선희궁의 대수선을 마치고 명치 45(1912)년 12월 제생원 양육부가 이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전체 양육부의 이전은 1912년 12월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생원 양육부는 맹아부의 확장으로 소화 6(1931)년 4월 맹아부와 위치를 맞교환해 옛 서묘 자리로 이전한 후 1933년 12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노원구 공릉동)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했다. 옛 선희궁 터로 이전한 맹아부는 광복 이후 국립맹아학교로 개칭됐으며, 이후 농학교와 맹학교로 분리돼 지금의 국립서울농학교와 국립서울맹학교로 이어졌다.

1912년에 조사한 경성부 북부 신교동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옛 선희궁 터의 면적은 10,476평으로 조사됐다. 또한 [조선총독부 제생원 요람]에도 “옛 선희궁 터에 이전한 제생원 양육부는 부지 10,476평, 건평 587.42평으로 구 선희궁의 건물 전부를 충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희궁의 건립 당시의 과정이나 건물 등은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최초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912년 이후 제작된 제생원 양육부 이전 초창기의 도면이나 사진 등을 통해 선희궁의 배치나 규모를 대략적이나마 추정할 수는 있다. [제생원 양육부 이축 공사배치도]를 살펴보면 건물들은 주로 남동쪽으로 배치돼 있으며, 가파른 급경사지인 북서쪽의 제일 상단부는 비교적 넓은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총독부 제생원 양육부를 촬영했다는 [옛 선희궁 전경] 사진에도 나와 있다. 사진의 뒤쪽으로 보이는 산이 백악산이다. 그 아래 큰 나무는 [조선총독부 제생원 요람]에서 말하는 공손수, 즉 은행나무다. 은행나무로부터 왼쪽(북서쪽)으로 경사져 올라가는 산줄기가 보인다. 이 산줄기 제일 상단부는 정조가 매년 올랐다는 세심대가 있던 자리로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영조 40(1764)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세심궁도형]이라는 간가도(間架圖) 형식의 그림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간가도란 건물 기둥과 기둥 사이의 한 칸을 기준으로 삼아 그리는 간결한 평면도를 말하는데 간(間)은 측면 칸을 뜻하고, 가(架)는 정면 칸을 뜻한다. 간가도를 보면 건물의 규모와 배치 현황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한옥의 경우 통상 정면 몇 칸, 측면 몇 칸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석천(石泉)’ 새겨진 암벽 위에 세심대 있었을 가능성


▎세심대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암벽 아래에서 ‘석천(石泉)’이라는 각자를 확인할 수 있다. / 사진:이성우
[세심궁도형]을 자세히 보면 동서남북의 네 방위가 한자로 표기돼 있으며, 건물을 둘러싼 왼쪽 아래쪽 담장에 ‘세심궁 외담’이란 글씨가 있어 이 도면이 세심궁을 그린 것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세심궁도형]이 그려졌다는 영조 40년 무렵이면 사도세자의 탈상 후 사도묘를 건립하는 시기로 [세심궁도형]은 사도묘를 건립하기 전 세심궁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린 도형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세심궁의 북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데 그 아래에서 ‘세심대’라는 작은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래의 [한경지략]이나 [열양세시기], [정조실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세심대의 위치, 그리고 [한양도성도]나 [수선총도]에 표기된 세심대의 위치와 유사하다.

[한경지략]은 한성부의 역사와 지명 등에 관해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정조 연간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책에는 “세심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육상궁 뒤의 석벽에 ‘세심대’라는 글자를 새겼는데, 꽃나무가 많아서 봄철에는 구경하기에 적당하다”고 기록한 내용이 등장한다. 또한 순조 때 김매순이 지은 [열양세시기]에는 “필운대와 같이 꽃나무가 많아서 봄의 꽃구경은 장관이다. 영조, 정조, 순조, 익종이 여기에 자주 거둥하고 한 달 동안 사람들이 구름같이 구경했다. 세심대는 선희궁 뒤 산줄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세심대가 선희궁의 뒤쪽 산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양세시기]는 열양, 즉 한양의 연중행사를 기록한 세시 풍속 자료집이다.

또한 [정조실록] 15(1791)년 3월 17일 기록에는 “선희궁 북쪽 동산 뒤 약 100보(步)가량 되는 곳에 세심대가 있다”고 해 세심대의 위치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영조 46(1770)년경에 그린 [한양도성도]에는 선희궁의 북서 방향으로, 19세기 중엽에 만든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수선총도]에는 선희궁의 북쪽에 세심대가 있다고 뚜렷이 표기돼 있어 세심대는 선희궁의 북쪽이나 북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심대에 관한 기록들은 제법 찾을 수 있으나, 현재 세심대라는 각자는 물론 누각 터 역시도 찾을 수 없다. 필자는 수십 년 전 옛 선희궁 정당이 남아 있는 지역을 수차례 답사하면서 세심대 각자를 찾아본 적이 있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세심대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암벽 아래에서 ‘석천(石泉)’이라는 각자를 발견하고 탁본을 해 공개한 바 있다. 언뜻 봐서는 임금이나 후비(后妃)를 뜻하는 ‘후(后)’처럼 보이지만, 한자 어원을 확인하면 탁본의 글자는 후가 아닌 ‘석(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심궁도형]에서 우리는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 아래에 세심대라고 쓰여 있는 작은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글자가 남아 있다는 가정 하에 향후 기회가 돼 “지금 흙으로 덮여 있는 암벽 하단부를 걷어 낸다면 세심대라는 각자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져 본다. 교사(校舍)에 둘러싸인 채 무심하게 비어 있는 선희궁 정당만이 과거 이곳이 가슴앓이 끝에 세상과 인연의 끈을 놓았던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사당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8호 (2021.07.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