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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5)] ‘금오산의 백이·숙제’ 야은(冶隱) 길재 

고려의 신하, 조선 관료의 본보기 되다 

이색·정몽주 등에게 배워, 3년 벼슬 한 뒤 고려 멸망 예감하고 낙향
태종 이방원의 회유 죽음 각오하고 고사, 충절 표상으로 추앙 받아


▎야은 길재를 기리는 구미 금오서원 앞에 후손과 후학들이 섰다. 왼쪽부터 금오서원 류회붕 재유사, 후손 길화수, 구미시 오흥석 문화재계장. / 사진:송의호
"상왕(上王)이 세자(世子)가 되자 불러들여 봉상박사(奉常博士)의 직을 제수하니, 재(再)가 전문(箋文)을 올려 진정하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였는데, 신은 초래(草萊, 황폐한 땅) 태생으로 위조(僞朝, 고려)에 신하 되어 벼슬까지 받았으니, 다시 또 거룩한 조정에 출사하여 풍교에 누(累)를 끼칠 수 없습니다.’ 상왕이 그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후한 예로 대접해 보내고 그 집안에 대해 복호(復戶,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여 주던 일)해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원년(1419년) 4월 조(條)에 나오는 기록이다. 여기서 상왕은 태종이다. 그리고 ‘재(再)’는 고려 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을 가리킨다. 왕조실록이 남긴 야은의 졸기(卒記)다.

6월 18일 야은 선생의 흔적과 이야기를 찾아 경북 구미시를 찾았다. 금오산(金烏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구미시가 조성한 야은역사체험관이 있었다. 선생의 17대 후손으로 체험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는 길화수씨가 관련 일화를 언급했다. 그 무렵 야은은 금오산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고려 멸망 직전 개경에서 낙향한 지 10년 만인 1400년 조선 조정이 그를 부른 것이다. 야은과 이방원(태종)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야은이 개경에 머물던 시절 두 사람은 한동네에 살았다. 조선이 개국한 뒤 이방원은 길재를 불러들여 그의 형인 정종(定宗)에게 봉상박사 임명을 건의한다. 이방원은 앞서 서연관(書筵官)들과 함께 뜻 있는 선비를 찾고 있었다. 그때 정자(正字) 전가식이 길재와 같은 고향이라 그가 효행을 다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했다. 이방원은 기뻐하며 삼군부(三軍府)에 통첩을 내려 길재를 부르도록 했다.

야은은 뜻밖의 부름을 받고 처음에는 거절한다. 그러나 명령을 받은 고을 벼슬아치들의 성화를 무시할 수 없어 한양으로 올라가 이방원에게 고사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방원은 그 말을 듣고 “의(義)로 보아 그대 뜻을 빼앗기 어렵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부른 것은 나지만 벼슬을 내린 것은 임금이니 직접 아뢰는 것이 옳다”고 덧붙였다. 길재는 다시 정종에게 “여자에게는 두 지아비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이성(二姓)을 섬기지 않았다는 지조를 지키고 노모를 봉양하다 생애를 마치도록 해 주소서”라고 상소했다.

뜻밖의 벼슬 사양에 정종은 경연에서 권근에게 묻는다. 권근은 “선비는 본래 뜻이 있고 이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고 했다. 권근은 개경 시절 길재의 스승이었다. 정종은 그 말을 듣고 길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길재의 충절이 널리 알려졌다. 길재는 정몽주와 달리 이렇게 불사이군(不事二君) 하면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야은역사체험관으로 구미시의 오흥석 문화재 계장이 찾아왔다. 금오산에서 시가지로 내려가는 도로 왼쪽 바윗돌에 누구나 한번은 들었을 ‘회고가(懷古歌)’가 새겨져 있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야은은 고려가 망한 뒤 말 한 필을 타고 개경을 돌아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읊었다. 금오산에 은거하던 그가 조선 왕조가 내린 벼슬을 뿌리치기 위해 한양에 올라간 뒤 내친김에 개경을 찾았을 것이다.

길재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다. 해평은 경북 구미시다. 일행은 해평 길씨의 본거지인 구미시 도량동 밤실(栗里)을 방문했다. 일대엔 해평 길씨 30여 가구 100여 명이 모여 산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삼은을 기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을 안쪽에 문중이 야은의 영정(影幀)과 신주(神主)를 모신 영당(影堂)이 있었다. 영당의 휘장을 걷자 눈에 익은 초상화가 나타났다. 그림의 각도가 정면에서 벗어나 왼쪽 귀가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신주는 재질이 옥(玉)이다. 길화수 관장은 “여기서 자손들이 지금도 불천위 제사를 모신다”고 말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최소 인원만 모였다.

초상화의 모습을 두고 문중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방원이 정종에 이어 조선의 3대 임금이 되었다. 왕자의 난 등으로 왕권은 흔들리고 있었다. 태종은 길재가 자신이 천거한 벼슬을 거절한 걸 떠올리고 문득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낙향한 길재에게 새 왕조를 섬기지 않은 죄를 묻고 싶었다. 또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떠보려고 관리를 보내 그의 목을 베어 오라고 지시했다. 길재가 순순히 목을 내밀면 귀 한쪽만 자르고 목을 움츠리면 목을 베라는 것이었다. 그 뒤 선산에서 올라온 집행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태종은 길재의 흔들리지 않는 충절에 감탄했다고 한다. 초상화에 야은의 그런 정신을 담았다는 뜻이다. 태종이 이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당 오른쪽에 재실 충효당이 있었다. 주변엔 대나무와 배롱나무가 많았다. 재실에 숙종이 야은의 충절을 기리는 어필이 걸려 있다.‘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하니/ 청렴한 기풍은 엄자릉(嚴子陵)에 비하리라/ 성주께서 그 미덕을 찬양하심은/ 후인들에 절의를 권장함일세’

길 관장은 종손이 살다가 고쳐 다른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안내했다. 한때 99칸이었다는 야은종택의 흔적이다. 마을 가운데는 2017년 길재의 생애를 가로로 길게 동판에 새긴 야은정원이 있었다.

밤실을 나와 북쪽으로 9㎞쯤 떨어진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金烏書院)으로 이동했다. 야은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는 공간이다. 금오서원 운영을 맡고 있는 류회붕 재유사가 맞이했다. 금오서원은 본래 1572년 금오산 자락에 세워져 3년 뒤 사액(賜額)되었으나 임진왜란 시기 소실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후 점필재 김종직 등 4현이 추가 배향되고, 금오서원은 대원군 시기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으로 남았다.

서원 문루인 읍청루(揖淸樓)를 들어서니 동·서재 뒤로 강당인 정학당(正學堂)이 보였다. 3칸 마루가 널찍했다. 금오서원은 지난해 말 정학당과 강당 뒤쪽 상현묘(尙賢廟)가 보물로 지정되면서 활기를 찾고 있었다. 사당인 상현묘는 위패가 맨 왼쪽 야은에서 오른쪽으로 4현이 차례로 배치된 열향(列享)이었다. 주향(主享)은 시호를 생략한 채 ‘冶隱吉先生(야은길선생)’으로만 적혀 있다.

새 장가든 아버지에 원망 대신 자식 도리


▎구미시 도량동 영당(影堂)에 모셔진 길재 초상화와 신주. / 사진:송의호
길재는 고려 공민왕 2년(1353) 밤실 인근 경북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길원진은 임지를 옮겨 다니는 관료였다. 소년 길재는 글 배우기를 좋아하고 천성도 착해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길재가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보성대판이 되자 어머니만 따라갔다. 시골 벼슬이 녹봉이 변변찮아 길재는 외가에 맡겨졌다. 홀로 남은 길재는 부모를 그리워했고 특히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한번은 남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가재 한 마리를 잡아들고 시를 지었다.

‘가재야 가재야/ 너도 어미를 잃었느냐/ 나는 너를 삶아 먹고 싶지만/ 네가 어미를 잃은 것이 나와 같기로/ 너를 놓아준다’

그리고 가재를 물속으로 던진 뒤 서럽게 울었다. 이를 지켜본 노파가 길재의 집안 어른들에게 알렸고 이야기는 퍼졌다.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히며 길재의 영특함에 감탄했다. 얼마 뒤 아버지는 개경으로 옮겨가고 어머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길재는 열한 살 때 도리사로 들어가 문장을 익히기 시작한다. 이 무렵 아버지는 개경에서 노씨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그때부터 길재의 어머니는 날마다 남편을 원망했다. 이를 지켜본 길재가 어머니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내가 남편에게나, 자식이 어버이에게 비록 불의(不義)한 일이 있어도,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조금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인륜에 괴변은 옛 성인(聖人)도 면하지 못했으니, 다만 바르게 처사하여 정상으로 돌아올 때를 기다릴 따름입니다.”

길재는 18세에 상주 사록(司錄) 박분(朴賁)을 찾아가 [논어] [맹자] 등 경서를 배우고 처음 성리학을 접했다. 그 뒤 길재는 짐을 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다.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니, 자식 된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는 스승 박분을 따라 아버지가 있는 개경으로 떠났다. 새 어머니 노씨는 길재를 박대했다. 그러나 그는 친어머니를 대하듯 공경했다. 마침내 노씨도 감복해 그를 친자식처럼 대했다. 길 관장은 그 대목에서 “새어머니 노씨는 자식을 두지 않아 후손은 한 갈래뿐”이라고 설명했다.

길재는 개경에서 당대 석학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양촌 권근 등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성리학의 크고 넓은 세계를 접한다. 이 시기 길재는 14년 아래인 이방원과 한동네에 살면서 정을 쌓고 학문을 토론했다. 이방원은 길재의 강직함과 학문하는 자세에 이끌린다. 길재도 자신을 따르는 이방원을 아꼈다. 길재는 상경한 지 5년 만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1세에 사마감시에 급제한다. 그해 아버지는 금주지사로 재직했다. 길재는 아버지의 임지 금산으로 찾아가 지내던 중 중랑장 신면의 딸과 혼인한다. 이듬해 아버지는 금산에서 별세했다. 길재는 새로운 유교식 예법에 따라 장사 지내고 삼년상을 치렀다.

“두 임금 섬길 수 없다” 백이·숙제처럼 은거


▎구미 금오산 입구에 위치한 채미정(菜薇亭). 길재가 고려가 망하자 금오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은거했다는 절의를 기리는 정자다. / 사진:송의호
1387년 길재는 35세로 첫 관직인 성균학정(成均學正)에 오르고 다음해 순유박사(諄諭博士), 그해 겨울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된다. 이듬해엔 종7품 문하주서(門下注書)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게 벼슬살이의 끝이었다. 공양왕 2년(1390) 길재는 노모 봉양을 핑계로 불과 3년간 몸담은 관직을 던지고 낙향한다. 벼슬길은 열려 있었지만 이성계가 임금과 최영을 배반하고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을 공격하는 회군(回軍)을 지켜보며 그는 고려 왕조의 멸망을 직감한 것이다. 그 무렵 지은 ‘성균관에서 우연히 읊음’이란 시에 은나라 백이·숙제의 길을 따르려는 다짐이 담겨 있다. 낙향한 길재는 금오산 산중 마을 대혈동으로 들어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은 백이·숙제처럼 은거했다.

길재는 그곳에서 홀로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흠모하는 후진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그는 하는 수없이 양반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글을 가르치고 선비들과는 성리학을 토론했다.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一善, 구미)에 있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그만큼 많은 인물이 이 지역에서 나고 공부하고 또 제자를 길렀다는 것이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와 이곳에서 부사를 지내며 후학을 가르친 김종직,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장현광 등이 대표적이다. 김숙자는 12세에 길재를 찾아가 [소학]과 경서를 배웠다. 그 아들 김종직은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을 길러 조선 사림의 기틀을 마련한다. 이들 학맥은 길재로 이어진다. 길재는 충(忠)과 효(孝)를 바탕에 둔 [소학]을 중시하고 평소 실천하며 가르쳤다.

일행은 금오서원을 나와 야은역사체험관으로 돌아왔다. 세종은 야은을 삼강행실도에 충신으로 추가했다. 차 한 잔을 마신 뒤 길 건너 채미정(採薇亭)을 찾았다. 채미정은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것처럼 길재도 금오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고 살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채미정은 조선 영조 44년 처음 지어져 이후 쇠락해진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정비하고 성역화했다. 구미시에서 공무원을 지낸 길화수 관장은 박 대통령이 공단 조성과 함께 선현의 흔적을 문화공간으로 담아내는 100년을 내다본 안목을 높이 평가했다. 채미정 왼쪽에는 야은 초상화와 숙종 어필을 배치한 추모 공간 경모각(敬慕閣)이 있다. 다시 그 왼쪽 후학들이 공부한 구인재(求仁齋)에선 한 여성이 이름 모를 전통 악기를 불고 있었다.

길 관장은 한 곳을 더 안내했다. 채미정 인근 지난해 10월 개관한 구미 성리학 역사관이다. 구미시판 국학진흥원이었다. 류영철 관장이 첫 번째 기획전 ‘금오서원 나라의 보물이 되다’를 설명했다. 문중이 기탁한 [야은집] 목판 등이 전시돼 있었다. 구미시는 공업도시 이미지에서 벗어나 길재에서 시작된 조선 전기 사림의 중심임을 알리고 싶어 했다.

구미공단을 품은 야은 묘소


▎‘회고가’ 시비. 길재는 고려 멸망 뒤 개경을 찾아가 세월의 무상함을 읊었다.
야은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600년이 지났다. 구미시 오태동 소나무로 둘러싸인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안온한 그곳에선 스마트폰·디스플레이 등을 생산하는 구미공단이 멀리 보였다. 묘소 길목에 류운룡이 야은의 충절을 기려 ‘砥柱中流(지주중류)’ 네 글자를 새긴 거대한 비가 서 있었다. 동생 류성룡은 이 비 뒷면에 ‘지주중류’의 뜻과 교훈을 남겼다.

야은은 돌아보면 벼슬이 높지도 않았고 낙향해서도 숨어 살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남은 글도 거의 없다. 고려가 망한 뒤 불사이군의 길을 간 사람은 개풍 두문동(杜門洞)에 72명이 모여 있었을 만큼 많았다. 다른 점이라면 야은의 충절과 효행은 낙향 이후에도 한결같았다. 그는 변함없는 학식과 덕망으로 제자들을 이끌었다. 거기에 이방원은 길재의 명성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를 존경한 이방원은 벼슬을 권했지만, 야은은 끝내 회유를 뿌리치며 조야(朝野)에 본받을 선비로 남았다. 야은은 끝내 고려의 신하로 남았지만 역설적으로 조선 관료의 본보기가 됐다. 그가 걸어간 조촐한 삶은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 사회에 선비의 표상으로 떠올랐다.

[박스기사] 유배 가고, 피살 되고, 숨어 살고… 이색·정몽주·길재, 절의 지킨 고려말 삼은(三隱)

고려 말 삼은(三隱)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96)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92),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일컫는다. 삼은은 생전 가까운 사이였다. 길재는 18세에 개경으로 올라가 이색과 정몽주를 만나 성리학을 배우면서 제자가 된다. 이 중 이색은 길재보다 25년 연장(年長)으로 정몽주 등 고려 말 신진 사대부의 큰 스승이었다.

길재는 31세에 사마감시에 합격한다. 1387년 35세에 첫 벼슬 성균학정에 오르고 다음해 순유박사와 성균박사를 거친다. 1389년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공양왕 2년(1390) 노모를 봉양해야 한다며 관직을 던지고 낙향한다.

야은은 장단현을 지나면서 스승인 목은을 찾아간다. 목은은 정중하게 제자를 대하며 시를 짓는다. ‘문생 길 주서가 얼마 전 집으로 찾아왔다. 노소를 이끌고 선주(善州, 선산)로 돌아가는 길에 작별하러 왔다면서 하룻밤 자고 갔다’라는 긴 제목이 붙어 있다.

‘성균관에 노닐 때는 경전에 통달했단 소리 듣고/ 급제해 주서돼도 새파랗게 젊기만 한데/ 가족들 이끌고 고향으로 간다면서 작별하러 왔으니/ 내 대답이야 쓰디쓰게 정중할 수밖에 없네/ 글 읽는다는 건 옛 어진 이 자취 따르고/ 나라 위한 경륜이 천자의 뜰까지 미쳐야 하거늘/ 높은 벼슬 우연히 와도 덥석 받을 바가 아니라/ 날아가는 기러기 한 마리 아득하게 멀어져 가네’

당시 이색 역시 운신(運身)이 어려운 처지였다. 이성계 일파의 공세로 그는 길재가 다녀간 한 달 뒤 유배형을 받았다. 야은의 또 다른 스승인 정몽주는 유교 경전에 밝아 성균관에서 유생을 가르치고 깊이 연구해 ‘동방이학지조(東方理學之祖)’가 됐다. 야은은 정몽주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영남 사림의 기틀을 다진다.

1390년 낙향한 길재는 금오산에서 귀를 막고 지내려 했지만 슬픈 소식이 잇따라 전해졌다. 그해 스승 이색은 유배되고 이듬해엔 강릉에 유배중이던 우왕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이듬해인 1392년에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계략으로 피살되고 뒤이어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 왕조가 세워졌다는 비보를 들어야 했다. 야은은 이색이 별세하자 마음으로 예를 갖추는 심상(心喪) 3년을 보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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