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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5)] 전쟁 범죄 책임 외면하고 패전 부인하는 나라 

전후 번영에 취해 군국주의 망령 꿈틀 

철저한 대미 종속으로 부흥 이루자 전범 후손들 활개쳐
디지털 시대 성장 한계, 이웃 국가 향해 다시 증오 표출


▎2006년 당시 일본 왕실에서 41년 만에 아들이 태어나자 시민들이 일장기와 축하 현수막을 들고 일왕 거처인 교쿄(皇居) 앞을 행진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켜 패전을 당한 국가 총리의 발언이다.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의 책임은 애써 회피하고, 자신들의 피해는 강조하면서도 남의 나라의 비극을 자신들의 선물로 여기는 나라의 리더가 한 말이다.

특히 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당사국 최고 권력자의 망언이라 더 용납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냉전시대에 접어들자 한국은 냉전의 최전선에서 싸웠고, 일본은 냉전의 열매를 거둬들이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된다. “하늘에 도가 있느냐”고 묻던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외침이 떠오른다.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였다.

“한국전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이라는 망언의 주인공은 전후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 그는 일본의 패전 후 외무대신을 거쳐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일본이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내각 총리대신에 5번이나 지명되는 등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전후 혼란을 겪던 일본을 살리고, 전후 일본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넉넉한 풍채와 함께 여송연(呂宋煙, 시가)을 특별히 사랑한 요시다 시게루는 ‘일본의 처칠’이라고도 불렸다.

결국 일본 발전의 초석이란 대미 종속에 따른 경제적 풍요였다. 미국과 여러 이해가 맞아떨어진 덕분에 일본은 패전으로 인한 빈곤을 이른 시일 안에 극복하고, 다시 동아시아의 강자를 넘어 세계적인 경제 강국으로 떠오르게 됐다. 이런 일이 과연 그들의 진정한 실력이었을까?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라는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냉전 전략의 산물, 일본 경제 부활 이끈 미국


▎전후 일본 발전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는 요시다 시게루.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일본은 새로운 나라로 거듭났다. 우리는 이날을 광복절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은 종전 기념일이라고 부른다. 엄격히 말하면 공식적인 항복 문서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이었다. 항복 문서 조인은 과거 대일본제국에서 명분상 민주주의를 기조로 하는 평화주의 일본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그러나 패전국이 경제 자립을 할 수 있는, 독립국으로 가는 길은 절대 쉽지 않았다. 전쟁으로 남겨진 건 대부분이 폐허로 변한 도시, 남자 손이 귀해지면서 피폐해진 농촌, 그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쥔 국민이었다. 비록 전쟁에서 죽지는 않았더라도 치열한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국가 권력을 믿을 수 없는 백성은 각자도생의 시대를 맞이했다.

전쟁으로 인한 일본의 인적 피해는 일반 국민을 포함해 268만 명(사망자+실종자), 자산 피해(당시 돈으로 약 653억 엔)는 생산재·소비재·건축물 등 전체의 25%에 이르렀다. 또 전쟁 전 약 1400만 호였던 주거용 가구는 1135만 호로 감소했다.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일본 점령 통치는 철저한 비군사화와 민주화가 골자였다. 파격적인 점령 통치가 진행되면서 일본은 민주국가의 기반을 닦게 됐다. 동서냉전이라는 전후 세계의 양극 구조 속에서 일본은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을 동아시아의 빈국으로 만들어 미국에 짐이 되게 하는 것보다 자유주의 진영의 유력 파트너로 키우는 것이 전략상 유리했다.

전후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식량난은 일본 국민을 크게 괴롭혔다. 고도의 인플레이션에 종지부를 찍은 건 일본 경제 안정을 위한 경제 9원칙의 실시였다. 경제 9원칙이란 1948년 12월, 미국 정부의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GHQ를 통해 일본 정부(요시다 시게루 내각)에 내려진 강력한 인플레이션 수습책이었다.

그 내용은 ①재정 지출 엄격 관리 및 예산 균형 도모 ②세수 계획 시행 촉진 및 탈세자에 대한 철저한 형사소추 조치 ③융자는 경제 부흥에 공헌하는 사업으로 한정 ④임금 안정 실현 ⑤가격 통제 계획의 강화 ⑥외국 무역 통제 사무 개선과 외환 통제 강화 ⑦수출 무역 진흥을 위한 할당 및 배급 제도 개선 ⑧중요 국산 원료와 공업제품의 생산 증대 ⑨식량 공출 계획의 능률 향상이었다.

이 같은 경제 9원칙은 이듬해 닷지라인(Dodge Line), 샤우프(Shoup) 권고에 근거한 세제 개혁으로 계승됐다. 미국이 경제 고문으로 일본에 파견한 조지프 모렐 닷지 공사는 일본 경제가 미국의 원조와 정부 보조금이라는 두 개의 죽마(竹馬)를 버리고 발을 땅에 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경제가 미국의 원조 없이 자력으로 자본을 축적해서 부흥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1949년 일본은 인플레이션 등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경제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디플레이션(상품·서비스 가격의 지속적 하락 현상)이 일본 경제를 괴롭혔다.

이를 일거에 해결한 것이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막대한 특수가 발생했다. 이 같은 특수는 1955년까지 약 36억 달러 규모로, 미국의 대일원조 30억 달러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특수 덕분에 일본 경제는 완전히 회복됐고, 일본은 경제 대국으로 가는 길목으로 들어섰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1950년 10월에 전전(戰前) 수준을 돌파했고, 실질 국민 총생산도 1951년에는 전전 수준을 회복했다.

한편 1947년 5월 국민주권·평화주의·기본적 인권 존중을 골자로 하는 신헌법이 시행된 데 이어 1952년 4월에는 강화조약,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새로운 나라의 기본과 국제적 지위가 명확해졌다. “기대려면 큰 나무에 기대자”는 말은 일본의 속담으로 요시다 시게루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이자 그의 대미관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 당시 일본에 미국은 철천지원수가 아닌 기댈 수 있는 큰 나무였다.

전쟁 범죄 청산 안 해 패전의 역사 왜곡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사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잿더미가 됐던 일본은 지금까지도 패한 상태에 있다. 대의명분도 승리 가능성도 전혀 없었던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책임을 아무도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반성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패전의 부인’ 논리로부터 전후 일본 사회를 풀이한 시라이 사토시(白井聰)의 [영속 패전론(永續敗戰論)]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3년 3월 출간된 이 책은 정치철학이나 사회사상의 테두리를 넘은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되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자신의 저서에 대해 “일본의 내셔널리즘을 비판적 시각에서 분석한 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범 국가인 일본이 왜 아직도 반성 없이 동아시아 이웃 국가들에 뻔뻔하게 구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할 세력에 대한 명쾌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세력이 다시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그 대가로 대미 종속을 강화했다. 대미 종속 강화를 통해 지배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굳힘으로써 패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애초 이 대미 종속을 대전제로 하는 ‘영속 패전 체제’의 일등공신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경애해 마지않은 그의 외할아버지였다. 아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A급 전범 피의자이면서도 내각 총리대신을 두 차례나 지낸 ‘쇼와의 요괴’로 불렸다. 일본 제국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괴멸적 패배를 당해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기시 노부스케 등 당시 집권 세력을 계승한 후계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되레 망언을 일삼고 있다.

일본이 전후 제대로 사과·반성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갈 수 있었던 데는 일본 본토에서 대전(大戰)이 벌어지지 않았던 게 주요인으로 꼽힌다.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폭 투하는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대체로 보전됐기에 일본은 전후 미국의 전략에 따라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냉전 체제에서는 2차 대전에 대한 책임 소재가 중요시되지 않았기에 그나마 의회제 민주주의의 외관을 정돈할 수 있었다.

아시아로 향한 극우 내셔널리즘


▎1952년 6·25 한국전쟁 당시 한강의 모습.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무책임 체계’가 일본 사회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음이 다시 한번 명백해졌다. 대참사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본은 태평양 전쟁 종식 후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던 모습의 데자뷔였다. 이에 국제사회는 ‘과거 청산’에 진정성을 보인 독일과 일본을 비교하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시라이 사토시는 ‘상속 유산’에는 자본과 더불어 부채도 있는데, 과거의 ‘평화와 번영’이 사라진 현대의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지금은 30년)을 겪으며 패전의 부채만 남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그런 유산은 필요치 않으며, 차라리 상속을 포기하겠다”는 목소리가 현재의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목소리대로라면 패전을 부인하고 미국과 다시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둬야 하는데, 현실은 대미 종속 체계에서 좌절된 내셔널리즘이 아시아를 향해 분출된다고 시라이 사토시는 분석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과 연합국 48개국과의 사이에 맺어진 제2차 대전 종결을 위한 평화 조약이다. 양측은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했고, 1952년 4월 28일 발효됐다. 일본 대표는 요시다 시게루였다. 전문 외 27개 조로 이뤄진 조약은 일본의 주권·평등을 승인하면서도 외국 군대의 일본 주둔 지속을 인정했다. 또 한국의 독립과 함께 타이완 팽호제도(澎湖諸島)·쿠릴·가라후토(南樺太)의 포기를 규정했지만, 귀속처가 불명확한 탓에 분쟁의 씨앗을 남겼다.

국제연합의 신탁 통치 편입이 예정됨에 따라 오키나와(沖縄)·오가사와라(小笠原)를 미국의 지배하에 두게 됐다. 이는 중국·인도·버마·유고·소련·폴란드·체코와는 체결하지 않는 일방 강화조약이며, 동시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조약과 함께 일본을 대미 종속 하에 두는 장치가 됐다. 다음 해인 1953년 일본은 중화민국(국민당 정부)과 중일평화조약을 맺고 인도 등 6개국과도 1957년까지 국교를 회복했다.

이로 인해 본격적인 현대 일본이 시작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전까지 일본은 미 군정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조약 발효 이후 일본은 주권을 회복하고 본격적인 현대 일본 시대를 열었다. 이 조약에는 한국 등 일제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또 을사늑약·한일합방조약 등을 모두 무효로 함에 따라 법적으로 한국은 진정한 광복을 맞이했다.

평화헌법의 조문(條文)은 하나뿐이며, 전쟁 포기, 전력의 불보유, 교전권의 부인(不認)이 규정돼 있다. 평화헌법은 제9조에 의해 ‘비전 헌법’, ‘전쟁 포기 조항’으로 불린다. 또 제9조는 헌법 전문과 함께 평화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평화헌법의 조문은 제9조 제1항의 내용인 ‘전쟁의 포기’, 헌법 제2항 전단의 내용인 ‘전력의 불보유’, 제9조 제2항 후단의 내용인 ‘교전권의 부인’의 세 가지 규범적 요소로 구성돼 있다. 일본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헌법 전문 기술 및 제9조에서 유래했다.

군대 아닌 군대 ‘자위대’의 실체


▎[속국 민주주의론]의 표지. 시라이 사토시·우치다 다쓰루의 공저다.
제9조 [전쟁의 포기, 전력 및 교전권의 부인]

①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및 그 밖의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1954년 치안 유지 명목으로 일본이 창설한 조직인 자위대.
일본은 평화헌법에 기초해 오늘날까지 천황이 존재하고 군대가 없는 나라로 남아 있다. 천황제 유지를 목표로 했기에 연합국 측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이런 조항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일본 자위대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나치 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동급의 전범기인 ‘욱일기’(旭日旗)를 사용해 논란을 일으켰다. 또 오늘날 일본의 정치권은 평화헌법 ‘9조’의 개정을 이야기하며 국제사회를 도발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아베 신조 등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전범 세력의 후손들이 존재한다. 전쟁의 반성도 없이 역사적 사실도 숨기면서 전쟁이 가능한 나라를 꿈꾸고 이웃나라를 겁박하려 하고 있다.

1955년에 시작된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 등 양대 정당이 일본 정당 정치 운영의 기본 구조다. 좌우로 분열돼 있던 일본사회당이 1955년 통일을 이루자, 보수진영의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연합으로 자유민주당이 탄생했다. 이후 ‘55년 체제’는 38년간 지속했다.

이렇게 출범한 자유민주당 정권은 1976년의 록히드 사건, 1980년대의 리크루트 사건, 1992년의 도쿄 사가와 익스프레스 사건과 금전 스캔들 등에 대처하지 못하더니 1993년 7월의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과반수가 무너졌고, 일본사회당도 참패했다. 이로써 55년 체제가 무너졌다.

돌아보면 일본은 한국전쟁 발발과 더불어 한국에 보낼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거점이 됐다. 일본제국 시절부터 있었던 세계적인 수준의 과학·기술력과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으려는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극복하고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진무경기(神武景氣)란 일본의 고도 경제성장이 시작된 1954년 12월부터 1957년 6월까지 발생한 호경기의 통칭이다. 일본 초대 천황인 진무천황이 즉위한 해(기원전 660년) 이래 유례없는 호경기라는 의미로 명명됐다. 이 호황은 1950~1953년 한국전쟁 중 한반도에 출병한 미군에 대한 보급물자 지원, 파손된 전차와 전투기 수리 등을 일본이 대대적으로 도급받음으로써 경제가 크게 활성화됐기에 가능했다.

대미 종속 길어져 스스로 사유하는 힘 없을지도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맥아더를 찾아간 히로히토 일왕. 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되던 히로히토가 맥아더 옆에 초라하게 서 있는 모습은 일본 국민에게 충격을 줬다.
이 호황 덕분에 일본 경제는 전쟁 전인 1940년의 최고 수준을 웃도는 정도까지 회복했다. 1956년의 경제 백서에는 ‘이젠 전후가 아니다’고까지 기록되는 등 전후 부흥의 완료가 선언됐다. 호경기 영향으로 내구 소비재 붐이 일었고, 이른바 3종의 신기(냉장고·세탁기·흑백 TV)가 출현했다.

1950년대 일본은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빠른 속도로 고속경제 성장기에 돌입했다.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기를 이끌던 3대 상품 흑백 TV·냉장고·세탁기를 일본 천황가의 삼종신기(한국의 천부인 격)에 빗대어 ‘일본 가정의 삼종신기’라고 불렀다.

1960년대 중반에는 컬러 TV·에어컨·자가용을 ‘신 삼종신기’라 불렀고, 일본 경제는 이런 삼종신기, 공업제품들의 수출 등에 힘입어 1989년까지 미친 듯이 성장한다. 1960년대는 일본인들에게는 따뜻한 추억이자 영광의 시대였다. 1960년 대 일본은 서독을 제치고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경제 규모 3위에 도달했다.

고속경제 성장에 힘입어 마을마다 훈훈한 인정이 넘쳤고, 1964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고속철도 시스템인 ‘신칸센(新幹線)’이 개통됐으며 그해 도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돼 일본 경제 부흥을 세계에 알렸다. 이 시기는 일본 현대사의 전설적인 시기로 컬러 TV 시대 개막, 위성중계 등 엄청난 발전을 이뤘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좀처럼 일본의 허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며 장기침체에 들어서자, 일본은 사회의 체질 개선은 방치한 채 평화헌법의 개정을 통한 군사력의 확보에만 열을 올렸다.

[미국은 어떻게 동아시아를 지배했나]라는 책을 쓴 마고사키 우케루(孫崎享)는 한술 더 떠 미·일 관계를 노예제도에 비유했다. 일본이 미국의 압력에 약한 이유가 미국이 대미 자주노선을 택한 정치인을 배척하는 공작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마코사키 우케루는 점령군의 수장인 맥아더가 볼 때 천황이나 수상도 그저 노예에 불과하며, 일본 사회는 상급 노예(지배층)가 하급 노예(일반 시민)를 지배할 뿐이라고 외쳤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이나 역사에 올바른 길은 없을지 모른다. 다만 부침과 흥망이라는 시련과 도전이 있을 뿐이다. 일본은 이제까지 큰 성공과 패배를 경험하고, 또 커다란 경제적 성공을 이뤘으나, 차원이 다른 디지털 시대를 맞아서는 맥을 못 추고 있다. 대미 종속이 길어지다 보니 스스로 사유하는 힘이 없을 수도 있고, 운이 좋게 맞이한 근대화와 산업화 시대의 영광에 취해서 교만했을 수도 있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108호 (202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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