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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의 평양리포트] 남북 통신연락선 복원에 얽힌 남북한 속내 

서울은 저팔계이고 평양은 사오정이다? 

북한, 통신선 복원 대가로 ‘한·미 연합훈련 중단’ 압박하며 남남갈등 유도
文 정부, 남북 정상회담 조바심… 한·미 동맹 해체하려는 北 전략 경계해야


▎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전격 복구돼 남북관계 개선의 희망을 보이는 듯했으나,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북한의 반발로 관계 개선 전망이 다시 불투명해졌다. 경기도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는 평소처럼 바리케이드가 북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무더위를 달래기 위해 중국의 4대 기서(奇書)를 집어 들었다. [삼국지], [수호지], [금병매]와 함께 4대 기서인 [서유기(西遊記)]에서 삼장법사와 동반자 3명은 천축(인도)으로 불법(佛法)을 구하러 가는 여정에서 81난(難)을 동고동락한다. 마력을 지닌 손오공, 둔하고 덤벙거리는 저팔계(豬八戒), 약삭빠른 사오정(沙悟淨)이 삼장법사의 손바닥에서 희극적·모험적·신마적(神魔的) 기행을 전개하며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16세기 명나라 시대에 출간된 [서유기]는 인간 사바세계의 우매함과 희로애락을 그리고 있다. 여색을 밝히는 저팔계, 제멋대로 인삼을 따 먹는 손오공, 정체가 불분명한 사오정,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삼장법사 등은 우리 모두의 군상(群像)이다.

[서유기]를 삼복더위 숲속 그늘에서 집어 든 다른 이유는 시진핑 중국 주석의 특이한 발언 때문이었다. 시 주석은 7월 1일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 ‘중화민족 부흥’을 강조하면서 “누구든 중국을 괴롭히고 압박하거나 노예로 삼겠다는 망상을 품으면 14억 중국인의 피와 살로 쌓아올린 강철 만리장성에 부딪혀 머리가 깨지고 피 흘릴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고지도자로서는 과격한 발언이라 검색을 해보고 중국 친구들에게 문의했더니 조성원 KBS 베이징 특파원이 출처를 전해줬다. 중국의 포털 사이트 ‘바이두’를 검색했더니 원전이 [서유기]로 명시돼 있다.

悟空要求道士把这500和尚都放了, 道士不干 悟空取出金箍棒把道士打得头破血流…

손오공이 도사에게 스님 500명을 풀어주라고 요구했지만, 도사가 듣지 않았다. 손오공이 여의봉을 꺼내 도사가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르도록 때렸다….


2021년 8월 남북관계에서 서울은 저팔계이고 평양은 사오정이다. 서울은 덤벙거리고 앞뒤를 분간하지 못한다. 평양은 손오공의 꾀와 사오정의 영악함으로 임기 말 정상회담에 목이 매여 갈팡질팡하는 서울을 자신의 의도대로 쥐었다 폈다 한다. 남북 간 통신연락선 복귀를 발표한 지 4일 만인 8월 1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손오공처럼 청와대에 한·미 연합 군사훈련 취소를 요구하며 남남갈등을 유발했다. 김 부부장은 사오정처럼 “우리는 합동군사연습의 규모나 형식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며 “희망이냐 절망이냐? 선택은 우리가 하지 않는다”고 압박했다. 연합훈련 축소 실시가 아닌 전면 취소를 요구한 것이다.

정부와 여권은 걷잡을 수 없이 자중지란에 빠져들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4일 한·미 연합훈련과 관련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 (미국 측과) 신중하게 협의하라”고 말했다. 군 주요 지휘관으로부터 국방 현안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한·미 연합훈련과 관련해 현재 코로나 상황 등 현실적 여건을 감안해 방역당국 및 미국 측과 협의 중’이라는 서욱 국방부장관의 보고에 대한 답변이었다. 도대체 헌법상 대한민국의 최고 군 통수권자는 누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유체이탈 화법이었다. 훈련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발언이다. 범여권 국회의원 70여 명은 훈련 취소를 주장했다. 국정원과 통일부는 훈련 취소를, 국방부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원론적인 훈련 실시만 언급했다. 실제 병력을 동원한 야외 기동훈련도 아니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지휘소 훈련을 두고 김여정 말 한마디에 정부와 여당이 우왕좌왕하고 사분오열됐다.

김여정 한마디에 한·미 연합훈련 놓고 자중지란


▎7월 27일 남북 간 통신연락선이 복원된 뒤 군 관계자가 서해지구 군 통신선을 활용해 시험 통화를 하고 있다. 그러나 8월 10일 한·미 연합훈련 사전연습이 시작되자 북측의 불응으로 연락 채널 복원 2주 만에 다시 불통됐다. / 사진:연합뉴스
이미 한·미 연합훈련은 ‘무늬만 훈련’으로 유명무실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청소년들이 즐기는 비디오 게임인 ‘배틀그라운드’ 수준으로 추락했다. 한·미 연합훈련의 지휘소 훈련과 크래프톤에서 발행한 서바이벌 슈팅 비디오 게임인 배틀그라운드의 차이점은 전자는 군인들이 벙커에서 하고 후자는 청소년들이 모바일로 어디서든지 즐긴다는 점뿐이다. 김 부부장의 요구대로 한·미 연합훈련을 취소한다면 결과적으로 미국 바이든 행정부마저 ‘김여정 하명’ 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작지 않았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까지 끼어들었다. 현재 한·미 연합훈련은 건설적이지 않다며 훈련 중단을 요구했다. 졸지에 한·미 연합훈련이 동북아 국제정치의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봄부터 남북 정상 간 비밀리에 열 차례 가까이 연락과 친서를 주고받더니 7월 27일 휴전협정일을 맞이해 통신연락선을 전격 복구했다. 북한이 지난해 6월 남북 간 통신연락선을 차단하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전격 폭파한 지 413일 만이다. 북한은 당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를 통해 대북전단 살포를 맹비난하면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와 개성공업지구 완전 철거, 9·19 남북군사합의 파기 등을 거론하고 통신연락선 차단을 시작으로 대남 압박을 본격화했다. 이후 남북 간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른 뒤 남북관계는 줄곧 교착상태에 빠졌다.

개성에서 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413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손오공처럼 신출귀몰(神出鬼沒)한 평양의 요술이 시작되고 서울은 왜 저팔계가 됐을까? 10여 차례의 연락과 친서는 어디서, 누가 주고받았을까? 친서의 내용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포함되고 무슨 약속을 했기에 평양은 갑(甲)처럼, 서울은 을(乙)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통신연락선이 복원되면 남북관계는 국가 예산이 투입된 연락사무소 폭파와 서해 공무원 피살 등 모든 과거는 덮어두고 무조건 밝은 미래를 담보하는 것인가? 백신과 쌀은 어느 정도를 어떤 조건에서 지원하겠다는 건지? 향후 문재인 정부 남은 임기 7개월은 오직 평양과의 해후를 기다리는 시간인지…. 조망할 주제가 한둘이 아니다. 통신선 복원에서 시작된 임진강의 작은 물길이 식량, 백신 지원, 이산가족 상봉으로 강물을 이뤄 비대면 및 대면 정상회담으로 확대하는 것이 청와대의 복안이다. 최종적으로 내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시진핑 주석 옆에 앉아 남북 단일팀 경기를 응원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이 노리는 통신선 복원의 대가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등 83개 종교·시민 단체 모임인 ‘광복 76주년 한반도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대회 추진위원회’는 7월 26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촉구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6월 개성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된 뒤 6개월 동안 남북관계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해가 바뀌어 연초부터 국정원으로 지칭되는 세곡동팀이 부지런히 움직였을 것이다. 남북연락사무소, 동·서해지구 군 통신선, 판문점 남북통신시험선, 청와대·노동당 중앙위 본부 직통통신선 등 5개의 남북 연락 채널 중에서 국가정보원·통일전선부 핫라인이 가동됐을 것이다. 정보팀은 북한을 유인하고 달래는 데는 전문 노하우가 축적돼 물밑 접촉에 제격이다. 정보팀은 언론을 철저히 따돌렸다. 판문점은 물론 제3국에서 친서 교환을 목적으로 다양한 협의를 진행했을 것이다. 시기는 지난 1월 북한이 제8차 노동당 대회를 마친 뒤로 보인다. 2월에는 협의가 여의치 않았는지 김여정의 ‘욕설 담화’도 나왔다. 3개월 동안 신출귀몰한 접촉 끝에 4월 들어 청와대와 주석궁의 서명이 들어간 친서를 교환했다. 드디어 북한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8월 3일 정보위 전체회의에서 통신선 복원에 대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요청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누가 먼저 요청했는지 여권 내부에서도 무슨 이유인지 의견이 일치 않는다. 청와대와 통일부는 남북 정상이 요청한 것이라고 정정했다. 박지원의 국정원과 이인영의 통일부 간에 대북 협상을 두고 주도권 장악을 위한 알력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사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명약관화하다. 김정은은 남측의 각종 제안에 대해 이득이 있다고 판단해서 합의했을 것이다. 아무 당근도 없이 김정은이 일방적으로 요청했다는 팩트를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

북한의 다급한 사정도 북한이 단기에 협상장에 복귀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4월부터 남북 간 물밑 교섭을 슬금슬금 외부로 흘리기 시작했고, 5월에는 박지원 원장이 방미(訪美)해 북한의 요구사항을 미국과 조율하면서 구체화했다. 박 원장은 8월 3일 정보위에서 북한이 북·미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광물 수출, 정제유 수입 및 생필품 수입 허용을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생필품에는 평양 상류층 배급용인 고급 양주와 양복도 포함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유엔 대북제재로 북한이 아파하는 품목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은 박지원 라인에 두 가지를 요청했을 것이다. 서울에는 한·미 연합훈련 전면 중지, 워싱턴에는 대북제재 해제와 조속한 북·미 회담 재개다.

청와대가 두 가지 사전 조건을 충족하는 데 노력하기로 친서를 통해 확약함에 따라 김정은은 통신선 복원에 합의했다. 하지만 한·미 연합훈련이 반쪽짜리나마 예정대로 진행되자 김여정은 8월 10일 김정은의 위임을 받아 “남조선 당국자들의 배신적인 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한다”고 비난했다. “남측은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약속 불이행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복원된 남북 통신선을 일시적으로 다시 끊었다. 또 김여정은 국가방위력과 강력한 선제 타격 능력을 보다 강화하겠다며 향후 대미 협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를 대비해 도발의 명분을 축적했다. 그 밖에 중국의 전략적 입장에 맞춰 주한미군 철수까지 언급했다. 중국은 미국에 대응한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들먹이며 북한과 보조를 맞췄다. 박 원장은 물밑 접촉에서 평양의 요구사항을 받아 워싱턴에 전달했다. 지난 2018년 3월 정의용 대북 특사가 평양에서 북한의 요구사항을 받아 와 워싱턴에 전달해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로드맵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허울뿐인 한·미 연합훈련, 북측 양해 구하기용?


▎하반기 한·미 연합훈련은 코로나19 여파로 훈련 규모가 축소되고 야외 기동훈련을 하지 않는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실시된다. 경기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 헬기들이 늘어서 있다. / 사진:연합뉴스
미·중 갈등 속에 대만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워싱턴은 남북 간 물밑 접촉에 열린 입장을 내놨다. 미국이 조기에 북한과 회담할 여건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한국의 대북 협상을 반대할 필요는 없다. 커트 캠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조정관은 7월 27일 “미국은 남북 대화와 관여를 지지하고, 통신선 복원 발표를 물론 환영한다”고 밝혔다. 다만 한국이 과속해 한·미 연합훈련 전면 중지 등 한·미 동맹의 정신을 간과하는 행동만은 예의주시할 것이다. 워싱턴과 도쿄에서는 이미 7월 초부터 7월 27일 휴전 협정일에 서울과 평양이 모종의 합의를 발표할 것이라는 추측이 돌았다.

1971년 남북 직통전화가 가동된 이후 7차례의 단절과 복원이 있었다. 북한은 일방적인 연락선 단절을 불만을 표출하고 요구를 관철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북한이 일방적으로 통신연락선을 복원한 만큼 그 저의 분석이 필요하다. 우선 북측은 임기 말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확실한 지렛대를 갖게 됐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와 거래할 시간은 7개월 미만이지만 여전히 쓸모 있다는 것이 평양의 복심이다. 북한은 예상대로 당장 8월 16~26일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 중지를 요구했다. 한·미 군 당국은 훈련을 시행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훈련은 당초 계획의 20% 수준으로 추락했다. 4년째 한미연합사령부에 근무했어도 작전계획 경험이 없는 영관급 장교들이 군 수뇌부에 수두룩하다. 한·미 연합작전 시스템은 함께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운 상태로, 사실상 붕괴되고 있다.

확고한 연합방위태세 유지를 위해서는 정례적인 연합훈련이 필요하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최고위에서 “이번 훈련은 김 부부장이 염려한 적대적인 훈련이 아니라 평화 유지를 위한 방어적 성격의 훈련이며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형식적으로는 훈련하는 척하면서 벙커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동하는 수준으로 하겠다고 북한에 이미 통보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통신선 복원에 대한 조건으로 사전에 합의가 이뤄졌는지도 모른다. 10여 차례의 소통과 친서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이상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조만간 김여정이 지난해 요구해 제정된 대북전단금지법안과 같이 ‘한·미연합훈련중지법안’이 국회에서 논의될지 모른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박지원 원장도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는 최근 김여정 부부장의 한·미 연합훈련 관련 담화 발표에 대해 “북한이 근본 문제로 규정한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선결 입장을 재차 강조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한·미 연합훈련을 중단할 경우 남북관계 상응 조치 의향을 표출한 것”이라며 “북한은 한·미 간 협의와 우리 대응을 예의주시하며 다음 행보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보기관장이 북한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기 위한 잰걸음에 나선 모양새였다. 여기에서 의문점이 제기된다. 설사 우리가 훈련을 중단했다고 해서 북한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을까? 결론적으로, 북한은 남한의 연합훈련 실시 여부에 상관없이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할 뿐이다. 지난 4년간 평양 문화교류국(225국)에서 2만 달러 이상의 공작금을 받고 지령을 받은 청주지역 간첩행위자들에게조차 간첩죄를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포섭대상자만 60여 명에 이르지만 사건의 전모를 정확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F-35 최신예 전투기는 물론 궁극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위한 공작이 물밑에서 진행된 셈이다.

北 요구조건 들어주려 명분 만들어주기 나선 南


▎평양의 한 초급중학교에서 마스크를 쓴 학생들이 체온을 재고 있다. 북한 당국이 코로나19 발생자가 없다는 입장이어서 남측의 코로나19 백신 지원 방안은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사진:연합뉴스
다음은 식량과 백신 지원 요청이다. 인도적 명분을 들어 대북 지원이 물밑에서 논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게 한·미 연합훈련 중단이 무형의 이득이라면 식량 지원은 유형의 이득이다. 19개월째 지속된 코로나로19 인한 북·중 국경 봉쇄는 북한의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식량 부족사태로 장마당에서 곡물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박지원 원장은 북한의 경제 동향과 관련해 “금년도 곡물 부족 사정이 악화하자 전시 비축미를 절량세대(곡물이 끊어진 세대)를 비롯해 기관, 기업소 근로자에게까지 공급하고 있다. 주민들이 민감해하는 쌀 등 곡물 가격을 통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어려운 경제사정은 역설적으로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한 여론 조성에 기여한다. 통일부의 복안은 식량 지원을 이산가족 화상 상봉과 연계하는 것이다. 통일부는 7월 29일 복원된 남북 연락사무소 채널을 통해 북측에 남북 영상회담 시스템을 구축하자고 공식 제안했다. 정부는 북측이 호응하는 즉시 의제 정리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통일부 자체적으로 북측과 논의할 30가지 의제 목록을 정리 중이다. 9월 하순 추석을 계기로 한 이산가족 상봉과 개성공단 재가동 및 대북 식량 지원 방안 등이 포함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민간단체의 대북 인도적 협력 물자 반출 신청 2건을 승인했다.

대북 식량 지원의 변수는 여론의 향배다. 정부 차원의 대북지원은 수만 톤 이상의 물자를 지원할 수 있지만,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교추협)’ 등의 절차를 밟아야 하고 정부가 대북 지원의 주체가 되는 상황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셀 수 있다. 특히 한·미 연합훈련이 김여정의 하명으로 축소되고 있어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국은 국민 호응도가 높은 이산가족 상봉으로 퇴로를 열려고 시도할 것이다.

백신 지원은 쉽지 않은 카드다. 북한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박지원 원장은 “북한 내 코로나19 발생 징후는 아직까지 없다”고 말했지만 두 가지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진짜 파악을 못하는 것이거나 환자 발생 여부를 파악하고 있지만 ‘코로나19 청정국’이란 북한 주장을 인정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조(兆) 단위 예산을 사용하며 북한을 파악하는 요원을 수천 명 두고 있는 국정원이 북한의 코로나19 발생 여부 자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어불성설이다. 후자라면 다행이지만 전자라면 ‘외눈박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김정은은 7월 27일 노병대회에서 이례적으로 ‘보건 위기’를 토로했다. 그는 “세계적인 보건 위기와 장기적인 봉쇄로 인한 곤란은 전쟁 상황 못지않은 고비”라고 언급했다. 북한도 당연히 백신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백신 제공은 인도주의적 의제이면서 의외로 복잡한 문제다. 백신 지원은 식량 지원과 달리 서울과 평양에 각각 문제가 잠복해 있다. 우선 백신 가뭄에 시달리는 서울은 평양에 지원할 백신이 없다. 8월 10일 기준으로 1회 백신 접종률이 41%, 2회 접종 완료자 15%에 그치고 있다. 여전히 백신 예약이 여의치 않아 국민의 백신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8월 8일 기준 한국의 백신 접종 완료율은 1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다는 집계 결과도 나왔다. OECD 유일하게 세계 평균 아래다. 한국처럼 접종을 지난 2월에 시작한 일본과 콜롬비아의 접종 완료율은 각각 32.9%, 25%로 격차를 더 벌리고 있다. 백신 대북 지원은 우리 국민의 2차 접종률이 70% 이상으로 집단면역이 거론돼야 검토해볼 수 있다.

청와대, 대면 안 되면 화상 정상회담에 주력할 가능성


▎지난 5월 21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워싱턴D.C.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정상회담에서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 사진:연합뉴스
평양 역시 주체의학을 내세우고 있는데, 남한에서 백신이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지난해 1월 26일 이후 국경 봉쇄를 단행한 북한이 외부에 백신을 공식적으로 요청한 사례는 전무하다. 간혹 남한을 비롯한 제약사를 대상으로 백신 정보에 대한 해킹 시도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중국의 시노팜 백신 제공 의사에도 묵묵부답이다. 코로나19 청정국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공개적으로 백신을 구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결국 여권에서는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 국제 백신 공유프로젝트)를 통해 북한에 백신을 지원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대미 지렛대 확보 차원이다. 임기 말 문재인 정부지만 평양을 위해서라면 워싱턴을 조르고 압박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청와대는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이라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한·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에 평양·판문점 선언을 포함하는 데 올인했다. 평양의 관심은 바이든 행정부와의 진검승부다. 이미 평양은 2019년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북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도 전진할 수 없다는 점을 철저하게 인식했다.

임기 말 레임덕이 시작된 문재인 정부로서는 남북관계라는 메가 이슈를 통해 정국 주도를 시도할 것이다. 여야 차기 잠룡들의 이전투구가 시작된 상황에서 정상회담은 임기 마지막까지 핵폭탄급 카드가 될 수 있다. 청와대는 남북 정상 간 핫라인 복원에 대해서는 “차차 논의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당연히 청와대는 후속 일정으로 1단계 화상 정상회담 성사에 주력할 것이다.

하지만 화상이건 대면이건 임기 말 정상회담은 조심해야 한다. 역대 남북정상회담은 남측의 요구로 북측이 시혜를 베풀어 개최에 동의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특히 2007년 10·4 정상회담처럼 임기 말 정상회담이 가져온 폐해는 차기 정부가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다. 임기 5년의 단임 대통령이 종신 독재자를 상대로 한 대북 협상은 한계가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식의 정상회담이 남북 현안을 푸는 손오공의 도술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민심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만이 유일하게 치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올인에 나서고 있다.

결과적으로 하산 길이 시작된 문 대통령이 정상회담에 연연한다면 그 피해는 국민과 차기 정부에 갈 수밖에 없다. 갑을(甲乙) 관계의 정상 간 만남에는 이면 거래 및 약속 등 다양한 부작용이 수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서해 공무원 피살사건,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한의 만행에 대해 어떤 사과나 유감 표명 없이 통신선 복원에 감지덕지하며 북한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한다면 부쩍 대선 표심에 관심을 보이는 MZ세대가 강조하는 ‘공정’ 키워드에도 맞지 않는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불공정한 정상회담은 역풍을 맞거나 남남갈등의 소재로 전락할 것이다. 북한이 해수부 공무원 피격 사건에 대한 공동 조사 요구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북 물자 반출을 재개하는 것이 국민 정서에 부합하는지도 의문이다. 특히 400억원가량의 정부 예산이 투입된 연락사무소 폭파 충격이 여전한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통신선 복원에 신이 나서 움직이는 당국의 행태는 이해 불가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동맹은 70여 년 전 전장에서 어깨를 맞대고 함께 싸우면서 다져졌다. 공동의 희생으로 뭉쳐진 우리의 파트너십은 이후 수십 년 동안 평화 유지에 기여함으로써 양국 및 양국 국민의 번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우리는 철통 같은 동맹에 대한 공약을 재확인한다.”

북한에 끌려가는 정상회담 국민 정서에도 맞지 않아

지난 5월 21일 워싱턴에서 발표된 한·미 공동성명의 시작 부분이다. 더는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최고 수준의 한·미 동맹 정신과 기조를 확인한 지 3개월도 안 돼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의 한·미 연합훈련조차 김여정의 말 한마디에 휘청거렸던 모습이 한·미 동맹의 현주소다. 일구이언은 불신의 씨앗이다. 오히려 청와대는 불신을 유발해 한·미 동맹의 가치 폭락을 의도하는지도 모르겠다.

전임 원장은 물론 8월 신임 국립외교원장에 임명된 인사는 ‘반미(反美)’가 체화된 인사들이다. 직업 외교관 교육에 ‘반미 코드’를 강화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 77년 전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되자마자 소련의 지령을 받은 좌익 세력의 선동과 술수로 대한민국이 둘로 갈라졌던 역사가 어제 같은데, 여전히 김일성의 주체 사회주의가 유령처럼 한반도 남쪽을 떠돌고 있다. 지금부터 내년 2월 베이징올림픽 개막 전까지 남북관계의 막전막후는 최근 개봉돼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는 영화 [모가디슈]의 소말리아 내전 당시 남북 외교관 동반 탈출극 못지않게 흥미진진할 것이다.

-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前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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