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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1)] 생이별 ‘아픈 사랑’ 서려 있는 인왕산(仁王山) 치마바위 

폐출 단경왕후, 중종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생생 

후환 우려한 반정공신들 중궁 책봉 반대로 남편 즉위 8일 만에 출궁
왕이 산기슭 본다는 소문에 매일 올라 치마 걸쳐 놓았다는 전설 남아


▎경복궁 경회루에서 보이는 인왕산의 모습. 인왕산에는 단경왕후가 중종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그가 볼 수 있도록 바위에 치마를 걸어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사진:이성우
서울의 종로구와 서대문구 사이에 위치한 높이 약 338m의 인왕산, 북악·인왕·낙산·남산 등 서울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 중 주산(主山)인 북악산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이 바로 인왕산이다. 이 인왕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바위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담은 채 산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중에는 치마바위라고 불리는 바위도 있다. 인왕산의 치마바위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때는 연산군 12(1506)년 9월 1일, 이날 연산군은 문소전(조선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사당)·혜안전(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사당)에 친제하고 돌아와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긴 대비에게 잔치를 올렸다. 그리고는 “연회 때 승지들은 땅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지 말고 꿇어앉아서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자세히 살펴서 적발하라”고 전교를 내린다. 연산군은 이날이 임금으로서의 마지막 날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1506년 9월 1일 급박했던 반정의 날


▎국보 제216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중 인왕산 정상의 암벽(치마바위) 부분.
9월 1일 저녁 평성군 박원종과 전 이조참판 성희안,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폭정을 참지 못한 장수와 무사 등이 거사를 위해 훈련원에 모였다. 반정(反正)의 시작이었다. 무사들에 의해 임사홍과 신수근, 신수영은 집 근처에서, 신수겸은 개성에서 죽임을 당했다. 장수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 모든 옥에 죄수들을 풀어주고 종군하게 했다. 그때가 벌써 3경(밤 11시~새벽 1시)이었다. 한편 반정군 측에서는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후일 중종)을 임금으로 옹립하기 위해 진성대군의 사제(私第, 개인 집)로 향했다. 사제에 도착한 그들은 거사한 사유를 아뢰면서 무사 수십 명이 비상에 대비하도록 호위했다. 창덕궁 돈화문 근처에서 진을 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던 박원종 등 반정군은 승지를 통해 변고가 발생했음을 알게 된 연산군으로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연산군을 동궁으로 옮기도록 했다.

여명이 지나 날이 밝으면서 궁문이 열리자 반정군은 대비(정현왕후)가 머물고 있던 경복궁으로 나아가 대비에게 “모든 신하가 의지(대비의 명령)를 받들어 진성대군을 맞아 대통을 잇고자 한다”고 아뢨다. 이에 진성대군은 9월 2일 신시(오후 3~5시)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했다. 그가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이다. 반면 대비의 명에 의해 폐위된 연산군은 9월 2일 당일로 교동현(지금의 강화군 교동면)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으며, 왕비 신씨도 폐해 사제(私第)로 내쳐졌다. 세자 이황 및 연산군의 다른 왕자들도 각 고을로 옮겨졌다. 이 정변이 조선 최초로 신하가 왕을 바꾼 사건인 중종반정(中宗反正)이다.

9월 1일 한밤중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이 진성대군의 사제로 몰려들자 진성대군은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고 무사들을 보낸 줄 알고 스스로 목숨이 끊으려 했다. 연산군은 이미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 숙의 엄씨와 숙의 정씨 및 두 이복동생을 사사한 전력이 있으니 진성대군은 ‘형님인 연산군이 나도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그때 부인 신씨는 “말머리가 우리를 향해 있다면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고, 우리를 지키러 왔다면 말의 꼬리가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니 말머리의 방향을 확인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며 옷소매를 붙잡고 진성대군을 말렸다. 진성대군이 사람을 보내 살펴보니 말머리의 방향은 부인의 말대로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에 진성대군은 문을 열고 무사들을 맞이했다.

반정의 성공으로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진성대군은 하루아침에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중종이 즉위하자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은 부인 신씨를 내칠 것을 요구했다. 그 이유는 거사일 살해한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 때문이었다. 반정공신들은 반정을 일으키면서 신수근 형제를 먼저 제거했다. 신수근은 단경왕후의 아버지이자 연산군의 처남이다. 즉, 신수근의 누이동생이 연산군의 부인으로, 당시 신수근은 임사홍과 더불어 연산군의 최측근이었다.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된다면 향후 어떤 후유증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정공신들 입장에서는 불과 2년 전인 연산군 10(1504)년 발생한 갑자사화에 대한 기억이 몸서리치도록 생생했다.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였던 윤씨가 사사된 것을 알게 되면서 그 과정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2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사건이 갑자사화였다. 반정공신들은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한 신수근을 처음부터 제거할 생각은 아니었으며, 거사를 일으키기 전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알아보고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서당 이덕수가 쓴 [서당사재(西堂私載)]에는 이와 관련한 기록이 등장한다.

“박원종이 우의정 강귀손을 비밀리에 좌의정 신수근에게 보내어 넌지시 그 뜻을 묻기를, ‘누이와 딸 중 어느 쪽이 더 정이 가는가?’ 하니, 신수근이 얼른 그 뜻을 알아차리고 대답하기를, ‘다만 세자의 영명함을 믿을 뿐이다’ 하였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박원종이 직접 신수근을 만나서 은근히 그의 뜻을 탐색하였다. 신수근은 박원종의 제의를 거절하기를, ‘내가 이미 임금으로 섬겼는데, 매부를 폐위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나는 못하겠다’ 하였다. 다음 날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가서 함께 장기를 두다가, 일부러 장을 집어서 궁 자리에 놓았는데, 궁은 임금을 뜻하므로, 장기판에서 장으로써 궁을 바꾸는 것은 박원종의 임금을 바꾸자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신수근이 장기판을 밀치고 벌떡 일어나면서, ‘차라리 내 목을 잘라라’ 하니, 박원종이 신수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돌아섰다.”([서당사재] 권11 좌의정 신공시장)

진성대군 하루아침에 임금으로


▎영조가 단경왕후를 복위하면서 능호의 이름을 온릉으로 정했다. 사진은 단경왕후 온릉의 모습. / 사진:문화재청
이를 보듯이 신수근은 미래 권력일 수도 있지만, 불확실한 사위 쪽보다는 현재 안정적이고 확실한 권력인 매부 연산군 쪽을 택했다. 박원종 등은 결국 신수근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를 9월 2일 새벽 제거했다. 이긍익이 지은 조선시대 사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을 살펴보면 신수근이 제거되는 과정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신윤무를 시켜 용사(勇士) 이심(李)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연산군을 꾀어서 악한 짓을 하게 한 신수영을 먼저 쳐 죽이고 그다음은 임사홍 좌참찬과 신수근 좌의정 등을 쳐 죽이게 했으니, 신윤무는 이심을 시켜 쇠몽둥이를 가지고 길 왼쪽에 숨어 있게 하고, 한편 별감 한 사람을 시켜 명패(임금의 소집 신패)를 가지고 가서 대궐에 가도록 그들을 재촉하게 하였다. 그들이 놀라서 창황히 대궐로 가는데 이심이 힘껏 내려쳐서 신수근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신수근이 맞아서 땅에 떨어지니 종 하나가 그 위에 엎드려 제 몸뚱이로 쇠몽둥이를 막았다. 이에 이심은 드디어 종까지 함께 쳐 죽였다.”([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 고사본말’ 중)

중종 1(1506)년 9월 9일 중종은 하성위 정현조의 집을 수리해 단경왕후를 궁에서 내보냈다. 조선 왕실의 족보에 해당하는 [선원보략(璿源譜略)]에서는 “병인년(1506년) 9월 9일 을유에 왕비 신씨가 사제로 쫓겨나갔다”라며 신씨를 왕비로 기록하고 있으나, 중종실록에서는 “신수근의 딸을 궁 밖으로 내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종은 거사 다음 날인 9월 2일 즉위하였으며 단경왕후는 중종 즉위 8일째 되는 날 출궁 당했다. 그러면 이 기간 단경왕후의 신분은 왕비였을까?

[연려실기술] 제7권 ‘중종조 고사본말’을 살펴보면 단경왕후는 “중종 1(1506)년 9월 2일 중전이 되었다가 9월 9일에 사제로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조보감] 제18권 ‘중종 1(1506)년’에서도 “상이 면복을 갖추고 근정전에 나아가 즉위하고, 부부인(府夫人) 신씨를 책봉하여 왕비로 삼았으며”라고 나온다.

반면 같은 [국조보감] 제18권 ‘중종 2(1507)년’에서는 숙원 윤씨(장경왕후)를 왕비로 책봉하면서 신하들이 단경왕후에 대해 “지금 만약 신수근의 딸이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면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기고 의심할 것이니”라며 중전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명종·선조 때의 문신 이정형이 지은 [동각잡기(東閣雜記)]에도 “중종이 즉위한 다음 날인 9월 3일부터 반정공신들과 육조 참판 이상의 관리들이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정한다면 인심이 위태롭고 의심할 것으로 종묘사직에 관계되니 내보낼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고”라는 기록이 나온다. [동각잡기]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정치와 명신들의 행적을 기록한 야사집이자 역사서다. 중종 1(1506)년 9월 9일 자 [중종실록]에서도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삼지 말고 궁 밖으로 내쳐야 한다고 신하들이 요구하자 ‘조강지처인데 어찌하랴?’라고 하면서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쫓아 궁 밖으로 내쳤다”고 기록해 보는 사람의 관점과 시대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경왕후는 반정 때 죽은 신수근의 딸


▎[국조기사]에는 “임금이 하는 수 없이 (단경왕후를) 별궁에 내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 사진:고려대 도서관
중종은 즉위 다음 날인 9월 3일 “중궁 책봉에 관한 일을 속히 마련해 대비께 아뢰고 분부를 받으라”고 했는데, 당연하게도 단경왕후를 중궁으로 책봉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전교를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후폭풍을 염려한 공신들이 단경왕후의 중궁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정형의 [동각잡기]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단경왕후의 폐출 문제는 중종이 중궁 책봉 일정을 준비하라고 전교를 내릴 때부터인 듯하다. 임금과 신하들과의 줄다리기로 일주일이 지났고, 등 떠밀려 임금 자리에 오른 중종은 더는 단경왕후의 중궁 책봉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출궁 바로 다음 날인 9월 10일 중종은 신하들의 의견대로 처녀를 간택해 중궁으로 책봉하라는 전교를 내린다. 물론 중종의 즉위식 당시 ‘비(妃)’도 정위(正位)에서 하례를 받았다는 기록을 [명종실록] 12(1557)년 12월 7일 ‘폐비 신씨의 졸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종의 즉위식에서 하례를 같이 받았다고 해 중궁이 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책례(冊禮)라는 책봉의식이 있다. 세자·세자빈·세제·세제빈·세손·세손빈, 심지어 공주의 남편이 되는 부마까지도 책례 대상에 포함되며, 이를 거쳐야만 ‘비(妃)’에 해당하는 자격이 주어진다. 따라서 반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임에도 대군의 부인이 자동으로 왕비가 되는 구조가 아닌 셈이다. 이런 과정을 보면 단경왕후는 궁에 있었던 8일간 왕비로서의 대우는 받았을지 모르나, 중궁 책봉은 받지 못했다. 지금의 개념으로 본다면 ‘중궁 대우’를 받았을 것이라 사료된다. 이에 대한 논쟁은 신씨가 영조에 의해 단경왕후로 복위될 때까지 계속된다.

공식적인 중궁 책봉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중종 2(1507)년 8월 4일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책봉례를 받은 주인공은 후일 인종의 생모인 장경왕후 윤씨였다.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장경왕후는 친가와 외가가 왕실과 이중, 삼중의 혼인 관계로 맺어진 명문가다. 더불어 반정공신 박원종이 장경왕후의 외숙부다. 다른 후궁에 비해 왕비 책봉에 유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출궁 당한 후 단경왕후는 어디서 살았을까?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인왕산의 치마바위에는 단경왕후와 관련된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그 가운데 하나인 [종로구지(鐘路區誌)]에 수록된 내용이다.

“부인 신씨는 인왕산 아래 옛 거처로 쫓겨나 살게 되었다. 유난히 금실이 좋아 함께 고락을 나누며 살아왔던 중종은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부인을 잊을 수가 없어 경회루에 올라 신씨가 있는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는데 이 소문이 신씨의 귀에 들어가자 아침 일찍 인왕산 치마바위에 올라가 함께 살 때 자주 입었던 치마를 널어놓고 저녁이면 거두었다.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신씨가 치마를 걸쳐 놓았던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불렀다.”([종로구지] 하권 977면)

[중종실록]에 의하면 “출궁 당일 초저녁 교자를 타고 건춘문을 나와 급히 수리하고 청소를 마친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우거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정현조는 누구이며 중종이나 단경왕후와는 어떤 관계기에 중종은 정현조의 집으로 단경왕후를 보냈을까?

정현조의 부친은 하동부원군 정인지다. 세종 당시 훈민정음 창제에도 관여한 대학자로서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에 동조해 상신의 반열에 올랐다. 세조는 일찍이 정현조의 재능을 알아보고 단종 3(1455)년 자신의 딸을 그에게 하가(下嫁)했다. 그녀가 예종의 누이인 의숙공주다. [세조실록] 10(1464)년 1월 20일 기록에 의하면 “세조가 중궁인 정희왕후와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거둥했는데, 이곳은 잠룡 때의 구저”라고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세조는 의숙공주를 정현조에게 시집보낸 후 자신이 대군 시절 살았던 집이자 의숙공주가 태어난 집을 물려준 것이다. 의숙공주는 성종 8(1477)년 12월 3일 37세를 일기로 후손 없이 사망했다. 후손 없이 죽은 의숙공주의 제사를 모신 사람이 바로 대군 시절 중종이다. 이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가 하성위 공주인데, 공주가 무후(無後)해 중종대왕이 잠저에 있을 때 그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는 [명종실록] 21(1546)년 2월 4일 기록에 나온다. 물론 하성위에게 자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성위는 의숙공주 사후 5년 쯤인 성종 13(1482)년 이미 재혼했음이 실록에서 확인되며, 9남 1녀를 뒀다. 그러나 과정이 문제였다. 자신의 장모이자 의숙공주의 생모인 정희왕후에게 양민 출신의 첩을 얻는다고 속이고 양반인 충찬위 이징의 딸을 재취로 맞이했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성종은 노여워하며 두 사람의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이씨 부인은 정실부인이 아닌 첩으로 간주됐다. 이 바람에 자손들도 서자로 간주돼 벼슬길이 막히고 제사도 모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출궁 후 임시 거처는 세조의 잠저 가능성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의 묘 전경.
이런 연유로 중종이 제사를 모셨기에 급한 대로 궁 밖으로 내쳐지는 단경왕후의 임시 거처로 하성위의 집을 지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성위는 중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연산 10(1504)년의 갑자사화에 연루돼 유배지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따라서 중종이 지정한 하성위의 집은 비어 있었다. 다만 중종 즉위 15년 전쯤 하성위는 이미 재혼을 한 상태였기에 실록에 등장하는 하성위의 집이 세조의 잠저와 같은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연려실기술] 제7권 ‘중종조 고사본말’ 중 동각잡기(東閣雜記)에서 발췌한 내용에는 “그날 밤으로 신씨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나가 머물렀다” 하며, [신보(愼譜)]에서 발췌한 내용에는 “하성위의 집에서 거처를 죽동궁으로 옮겼다”고 나온다. 그런데 이어지는 [국조기사(國朝記事)]의 내용 중에는 “임금이 하는 수 없이 따라서 별궁에 내보내기는 했으나”라고 하고 있다. 별궁이란 주로 임금 또는 세자가 비(妃)를 맞아들이기 위해 특별히 마련한 궁인데, 임금의 잠저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제1권 경도(京都)에는 “별궁은 곧 세조의 잠저다”라고 별도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고, 영희전에 대해서도 “원래 의숙공주의 집이었는데 중종 1(1506)년에 단경왕후가 손위(폐위) 때 궁이 됐다”고 한다. 또 조선 후기의 문신 이유원의 문집인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4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는 영희전에 대해 “단경왕후가 손위한 뒤에 궁이 됐다”라고 하고 있다. 이 기록들이 사건이 있고 몇백년 후에 작성된 것이라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출궁 당일 실록의 기록과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단경왕후의 임시 거처로 중종이 지정했던 하성위의 집은 하성위 사망 후 비어 있던 세조의 잠저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실록에 단경왕후가 폐출된 후 어디서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동국여지비고] 제2권 한성부(漢城府)에는 신수근의 집이 소의문안, 지금의 서소문 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알려진 인왕산 쪽의 사가(私家) 위치에 대한 사실적 근거는 확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중종은 단경왕후의 근황에 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조보감] 제19권의 중종 12(1517)년 4월 기록에 “상이 직접 계잠을 써서 원자에게 줬다. 이때 원자의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다. (중략) 신비가 하성군 정현조의 집에 있다 해 원자를 나가 우거하게 하도록 명했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언제부터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 무렵 단경왕후는 하성위의 집에 살고 있었다. 중종 12(1517)년 4월 13일 실록에도 “원자가 초 열흘날 뵈러 들어와 대비전에 머물다가 이날 하성위 집에 있으려고 도로 나가는데”라고 해 원자가 이미 하성위의 집에 보내져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원자는 중종 10(1515)년 2월 25일 태어난 장경왕후의 아들, 즉 인종이다. 실록에 의하면 인종은 출생 이후 좌의정 김응기의 집을 비롯해 궁 밖 이곳저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 세 살이 된 원자는 하성위의 집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아버지 중종과 할머니였던 정현왕후를 뵈러 왔다. 이후 중종 13(1518)년 8월 17일 대궐로 들어올 때까지도 하성위의 집에 있었던 것으로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다만 단경왕후가 그 후 언제까지 하성위의 집에서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구체적인 장소가 확인되는 것은 출궁 후 20년도 더 지났을 중종 23(1528)년이다.

베일에 감춰진 폐출 후 단경왕후 삶의 궤적

“어의동 폐비 신씨 집의 수직 군사를 단지 4명만 정했는데, 매우 부족해 근일 도둑이 출입한 일이 있었다. 6명으로 늘려 지키도록 하라”는 중종의 전교가 실록에 등장한다. 이어 “이곳은 바로 금상의 잠저 때의 집이다”라고 하고 있어 중종이 대군 시절 살았던 집에 단경왕후가 살고 있었다. 중종 23(1528)년 1월 29일 실록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보다 6년 전인 중종 17(1522)년 12월 16일 실록에는 “사복시의 길들여진 말 한 필을 틀림없이 비는 데 쓰게 하려고 하니 시급히 어의동 본궁으로 보내야 한다”며 “어의동 본궁은 대비의 본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비는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를 의미한다. 정현왕후는 이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여러 처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는데, 쾌유를 기원하며 숙마 한 필을 보내는 것도 처방의 한가지였을 것이다.

성종 19(1488)년 3월 5일생인 중종은 7세가 되던 성종 25(1494)년 4월 6일 진성대군으로 진봉됐으며, 12세가 되던 연산 5(1499)년 13세의 단경왕후와 혼인했다. 인종 1(1545)년 1월 24일 이조참의 홍춘경이 지은 대행 대왕(중종)의 지문을 보면 “당초 왕이 잠저에 계실 때 신수근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신수근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에 폐출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잠저가 정현왕후의 본궁인 어의동 본궁으로, 중종의 잠저이며 실록의 내용처럼 폐출된 단경왕후가 언제부터인가 살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잠저는 중종반정 당시 살고 있었던 잠저와는 다른 장소로 보인다. 중종반정 당시의 잠저는 중종의 혼인 후 출합을 위해 연산 6(1500)년부터 연산 8(1502)년 사이에 연산군이 지어준 잠저인데, 중종 16(1521)년 11월 인종의 누이인 효혜공주를 연성위 김희에게 하가하면서 내줬다.

단경왕후는 폐출 이후 단 한 번도 남편인 중종을 보지 못하고 명종 12(1557)년 12월 7일 71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사후 제사는 신씨 집에서 모시다가 숙종의 명에 의해 142년 만인 숙종 25(1699)년 12월 27일 사당을 세우고 신주를 봉안했다. 사당의 위치는 종로구 청운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당호는 없었다. 후대에 ‘신비사(愼妃祠)’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영조 15(1739)년 3월 28일 왕후로 복위되면서 신주는 종묘로 이전, 시호는 단경(端敬), 능호(陵號)는 온릉(溫陵)으로 부여됐다.

그녀의 폐출 이후 50여 년의 삶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도 그녀의 삶의 궤적은 흐릿한 안개 속에 있다. 2021년 2월 ‘거창 신씨 대종회’에서 발간한 [신씨종보(慎氏宗報)] ‘단경왕후와 삼인대’ 제하의 기사 내용 중에 “19세인 신비는 중궁전을 나와 인왕산 밑에 있는 사가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보내어 살도록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종중 관계자에 의하면 하성위의 집이 인왕산 밑에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인왕산의 치마바위 역시 어디인지 안개 속에 흐릿하다. 다만 인왕산 근처에 살면서 사랑하는 남편 중종이 볼 수 있도록 치마를 널어놓았다는 단경왕후의 애틋한 마음만 치마바위에 전설로 담겨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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