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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6)] 인류 최고(最古)의 고전 ‘길가메시 서사시’ (上) 

인류에 도전·모험 DNA 새긴 영웅의 탄생기 

야만·동물서 문명·인간으로 진화하는 하이브리드 역사 등장
알렉산더·오디세우스·예수 파란만장 삶은 대서사시 복사판


▎호주 시드니대학에 있는 길가메시 상. 길가메시 서사시는 4000년에 걸쳐 인류에게 모험심과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해온 걸작이다.
바이러스 2.0 아니 4.0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인류의 미래를 확신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다. 해외토픽으로 전해지는 기후변화도 발등의 불이다. 당연하겠지만, 어렵고 복잡할수록 원점,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류 최초의 장편 문학이자 대서사시 길가메시는 ‘불안·불신·불만’의 시대에 대응할 삶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팬데믹은 독서의 계절을 365일로 확장해준 고마운 존재다. 2회에 걸쳐, 길가메시에 투영된 인류의 세계관과 DNA를 살펴본다. 첫 편은 하이브리드 세계관과 엔키두에 관한 얘기다.[편집자 주]

올림픽이 끝났다. 전염병과 무더위로 인해 우여곡절 파란만장 제전으로 남을 듯하다. 서방 올림픽 전문가들은 도쿄 올림픽을 기해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도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휘황찬란한 올림픽에서 ‘아담하고 섬세한’ 운동회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주최국의 국력을 총동원해 치르는 내셔널리즘 무대로서가 아닌, 선수들끼리 모여 행하는 ‘스토리텔링’으로의 올림픽이다. 올림픽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양에서 질로 진화해나갈 미래다.

올림픽의 미래와 진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귀화 혼혈’ 선수의 증가도 대세가 될 전망이다. 이른바 ‘하이브리드’ 선수들이다. 도쿄 올림픽을 통해 관심 있게 봤지만, 아시아권에서 하이브리드 현상이 돋보인다. 한국의 경우 4명이 하이브리드다. 중국, 케냐 출신으로 탁구, 마라톤, 럭비에 참가했다. 평창 올림픽 때는 한국 선수 10% 정도가 귀화 혼혈선수였다고 한다.

아시아권에서 일본은 하이브리드 대표주자로 꼽힌다. 일단 성화 봉송 최종주자인 오사카 나오미(大坂な おみ)가 떠오른다.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둔 흑인 테니스 선수다. 도쿄 올림픽의 하이라이트 중 한 명이기도 하지만, 이미 글로벌 테니스 스타로 인지도가 높은 여성이다. 개회식 당시 일본 선수단 기수를 맡은, 신장 203㎝의 하치무라 루이(八村塁)도 일본 하이브리드의 상징 중 한명이다. 미국 NBA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는 흑인이다. 일본 농구팀의 경우 12명 선수 가운데 무려 4명이 하이브리드다.

‘길가메시 대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 관련 뉴스는 올림픽 막바지인 8월 4일 자 한국 신문을 통해 알았다. ‘3500년 전 출토된 길가메시의 꿈, 30년 만에 이라크로 돌아간다’는 제목의 뉴스다. 1991년 걸프전 이후 미국에 유출된 유물로, 무려 1만 7000점에 달하는 다른 역사의 흔적들도 이라크로 반환될 예정이라고 한다. 기원전 1500년 유물로 알려진 길가메시 점토판이 이라크로 돌아갈 핵심 유물로 소개됐다. 기사의 출처는 8월 3일 자 [뉴욕타임스]다. 원문을 읽으면서 올림픽을 통한 인류의 하이브리드 역사가 떠올랐다. 길가메시 스토리에 이미 인류가 지향할 하이브리드 역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반인반수 엔키두’ 대서사시의 빛나는 조연


▎기원전 10세기 메소포티미아 아시리아 유적지에 발견한 길가메시의 흔적. 오른쪽 끝의 뿔 달린 인물이 길가메시 친구 엔키두로 추정된다. / 사진:유민호
길가메시는 고고학이나 고대사에 관심이 없는 한 평생 무관심하게 대할 얘기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산물이란 점에서 특히 동양권에서는 멀게 느껴질 법하다. 필자도 그랬다. 그러나 올 들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빠지면서 달라졌다. 두 개의 강, 유프라테스와 티크리스 사이에만 통하는 얘기가 아니다. 인류 문화와 문명 전체를 통틀어 길가메시 대서사시가 갖는 의미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했다. 좀 과장하자면, 중세 유럽인이 ‘지구가 둥글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받았을 충격이 길가메시를 통해 느껴졌다.

고대 그리스나 북유럽 신화, 기독교 성경과 이슬람 쿠란(Quran), 나아가 이집트 고고학 수준에 머물렀던 필자의 세계관이 너무도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다. 핵심을 빼고 주변만 맴돈 셈이다. 필자의 주관적 0판단이지만, 인류의 DNA에 새겨진 문화, 문명의 정신적 원형(元型)이 바로 길가메시에 있다. 신비하고도 영원한 메타포(Metaphor)와 인간에게 내려진 운명이자 숙명이 길가메시 스토리에 표류한다. 올림픽을 통해 드러난 인류의 하이브리드도 길가메시에 내재한 수많은 메타포 중 하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길가메시 스토리의 조연인 엔키두(Enkidu)가 보여준 하이브리드 역할이다. 국가, 국민을 근저로 한 21세기판 귀화 혼혈로서가 아닌, 야만과 동물에서 문명과 인간으로 진화한 하이브리드다. 숲속의 야만인이 길가메시를 통해 사랑과 우정, 고독과 죽음을 깨우치는 하이브리드 발달사가 길가메시 스토리에 투영돼 있다. 야만인 엔키두는 길가메시를 통해 인간의 품격과 가치를 알게 된다. 길가메시도 하이브리드로 급성장한 엔키두를 만나지 않았다면 수많은 고대 왕 중 한 명에 그쳤을 것이다. 엔키두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길가메시 스토리가 인류의 고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길가메시는 특별한 왕에 대한 용비어천가가 아니다. 길가메시를 비범한 왕으로 만든 인물은 엔키두다. 추정컨대 대서사시를 듣고 읽는 사람들 스스로도 왕의 친구이자 도우미인, 엔키두가 될 수 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길가메시와 함께할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자면 소통형, 참여형 스토리인 셈이다.

길가메시 스토리는 글로 존재하는 인류 최고(最古)의 대서사시다.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2000년에 나타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메르어로 기록됐다. 이후 4000년에 걸쳐 인류 최고 인기 스토리로 정착된다.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 스토리는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발견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길가메시 기록은 기원전 1800년쯤 제작된 바빌로니아 점토판이다. 원본 수메르어를 복사한 점토판이다.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 대서사시 일리아드(IIliad)보다 1000년, 최종 완성된 기독교 구약성경에 비해 1600년 앞서 등장했다. 곳곳에서 발견된 다양한 버전의 점토판들을 종합해야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4000년 전 이야기 통해 인간의 원형 이해


▎터키 유프라테스 강 주변에서 발견된 아시리아 어로 된 길가메시 점토판. 엔키두의 죽음에 관한 길가메시의 슬픈 심정이 묘사돼 있다. / 사진:유민호
수메르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다. 기원전 3200년경이니, 중국 한자의 원조인 갑골문자보다 무려 1700년 앞섰다. 인류 문자의 효시다.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 실존 인물이다. 현재의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북쪽으로 300㎞ 떨어진 고대 도시 우르크(Uruk) 왕으로, 기원전 2100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르크인들은 수메르어를 사용했다. 길가메시 통치 당시 인구는 주변을 포함해 9만 명 정도였다. 고대 도시국가치고 상당한 규모다. 길가메시 스토리가 메소포타미아 전역으로 확산하면서 기원전 1800년 바빌로니아 점토판이 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이라크에 귀환할 기원전 1500년 길가메시 점토판보다 300년 앞선 셈이다.

점토판은 날카로운 쐐기로 찍어 기록한 뒤 다시 불에 구워 보관한다. 진흙으로 된 점토판은 불에 달구면 돌이나 도자기처럼 단단해진다. 수천 년이 흘러도 명확히 남아있고 판독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파피루스, 양가죽, 종이와 달리 영구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수메르어로 된 길가메시 원본은 없다. 언젠가 수메르어 점토판이 발견된다면 세계 고고학계 나아가 인류 문화 문명사를 경천동지하게 할 빅뉴스가 될 것이다.

먼저, 길가메시 대서사시 내용부터 살펴보자. 4000년 전 스토리를 통해 인간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후 등장한 그리스 신화와 성경, 나아가 쿠란, 불경과 비교하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원형을 안다면 아류(亜流)가 어떤 것인지 가늠하고 전망할 수 있다. 아류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세상이지만, 주의해서 보면 진위를 간단히 알아낼 수 있다. 길가메시는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통하는 왕이다. 정확히 3분의 2가 신, 3분의 1이 인간이다.

이야기는 길가메시의 악행으로 시작한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길가메시의 일상이었다. 사람들이 폭정을 막아달라고 기도한다. 하늘의 신이 묘안을 하나 생각해낸다. 왕의 친구가 될 만한 인물을 창조해 길가메시에게 보내는 방안이다. 친구가 있으면 폭정도 멈춰질 것으로 봤다. 신은 점토로 반인반수(半人半獣) 야만인을 창조해낸다. 구약성경에 신이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얘기와 비슷하다.

점토로 창조된 반인반수는 엔키두다. 동물과 함께 먹고 뛰어노는 숲속의 타잔 같은 캐릭터다. 털로 뒤덮인 큰 몸에 힘도 장사다. 마을에 내려와 가축들을 죽이고 먹을 것도 약탈한다. 사람들이 왕에게 몰려가 엔키두의 행적을 알린다. 길가메시는 도시를 수호하는 창녀 샴하트(Shamhat)를 불러 엔키두를 데려오라고 명령한다. 야만인이라도 여성과의 육체적 접촉을 통해 문명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길가메시 대서사시에는 공창(公娼)이 등장한다. 4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공창은 오늘날처럼 몸을 파는 존재가 아니다. 신전을 지키고 인간에게 정신적 위안을 제공하는 성스러운 존재였다. 21세기의 도덕 윤리와 무관한, 신과 인간에 바치는 최고의 선물로서의 성(性)이다. 샴하트는 성(性)을 통해 성(聖)을 수행하는 신관(神官) 같은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흙으로 빚어진 야만인과 문명을 이어준 매개체


▎소는 신에게 바치는 상징적인 제물이다. 길가메시는 소를 죽임으로써 신의 저주를 받아 친구 엔키두 잃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는 상승세 주식(bullish market)의 상징으로 진화했다. / 사진:유민호
샴하트는 왕의 명령에 따라 엔키두를 만나러 간다. 두 사람은 2주간 하루도 빠짐없이 성관계를 가졌다. 샴하트와 만난 뒤, 동물처럼 행동하던 엔키두는 인간 문화와 문명을 이해하게 된다. 엔키두와 함께 있던 야생 동물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전부 떠난다. 반인반수에서 완전한 인간이 된 것이다. 엔키두는 샴하트와 결혼하기 위해 길가메시에게 간다. 당시 왕은 결혼 전 신부에 대한 초야권(初夜権)이 있었다. 엔키두는 분노한다. 진짜 왕이라면 자기를 이길 수 있다면서 힘겨루기를 제안한다. 고대인의 능력은 머리가 아닌, 육체적 파워에서 출발한다. 왕은 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당대의 슈퍼맨이어야 한다. 둘은 곧바로 레슬링 경기에 들어선다. 온종일 경기를 벌인 끝에 길가메시가 이긴다.

길가메시는 경기에 진 엔키두를 조롱하기보다 친구로 받아들인다. 원래 폭군이었지만, 엔키두를 만나면서 관용과 지혜가 넘치는 인물로 변한 것이다. 둘은 이후 성안에서 평화롭게 지낸다. 문화인류학자들이 말하길 꺼리지만, 둘의 관계는 친구를 넘어 동성애 관계로 발전한다. 우정과 애정이 결합된, 엔키두에게 나타난 또 하나의 하이브리드다. 공창 샴하트가 육체적인 데 비해, 길가메시는 정신적 차원의 하이브리드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신이 생각했던 대로 길가메시 폭정도 사라진다.

길가메시는 일주일에 걸친 먼 여행을 제안한다. 수년간 평화가 지속하지만, 안정된 지루함을 벗어날 변화가 필요했다. 남쪽 삼나무 대산림(Cedar Forest)을 없애고, 산을 지키는 훔바바(Humbaba)를 처형하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다. 당초 엔키두는 주저한다. 그냥 안주하자고 말하지만, 결국 왕의 생각에 따라 함께 여행에 나선다. 사막을 건너 숲으로 향하지만, 도중에 길가메시는 악몽에 사로잡힌다. 죽음에 관한 불길한 꿈이다. 엔키두는 왕의 꿈을 길몽으로 풀이하면서 목적지로 가자고 재촉한다. 길가메시에게는 전진과 내일만 존재할 뿐 후퇴와 후회는 없다.

대산림에 도착한 둘은 힘을 합쳐 훔바바를 살해한다. 나무도 전부 잘라낸다. 가장 큰 삼나무는 우르크의 대문으로 사용한다. 성으로 돌아오자 여신 이시타(Ishtar)가 나타난다.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로마의 비너스에 해당하는 사랑의 여신이 바로 이시타다. 슈퍼맨 길가메시의 매력에 반한 이시타는 결혼을 요청한다. 돈과 파워를 주겠다며 유혹하지만, 길가메시는 거부한다. 바람둥이 여신에게 갈 경우 길가메시 스스로 파멸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4000년 전의 신은 ‘공포·복수·잔인’의 화신이었다. 신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대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신의 요구를 무시한다. 거절당한 이시타는 치를 떨며 복수에 나선다. 하늘의 소를 불러들여 둘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힘을 합쳐 소를 죽인다. 이 과정에서 엔키두는 이시타에게 소 뒷다리를 던져 모욕을 준다. 이시타는 하늘의 다른 신에게 엔키두의 무례를 알린다. 신들은 엔키두를 신성모독죄로 죽음에 이르는 벌을 내린다. 신의 저주를 받은 엔키두는 시름시름 앓는다. 죽음에 이르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목숨을 잃고 만다.

친구를 잃은 길가메시는 일주일 내내 슬피 운다. 죽은 뒤 썩어가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 눈과 코 그리고 손으로 실감한다. 엔키두를 잃은 뒤 길가메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 점토판이 1954년 메소포타미아 상류에서 발견됐다. 현재의 터키 산리우르파(Sanliurfa) 아래의 술탄테페(Sultantepe)라는 고대도시다. 점토판은 산리우르파와 대영박물관에 나뉘어 전시되고 있다. 왕복 12시간에 총 1400㎞ 거리지만, 2박 3일 여정으로 달려갔다. 산리우르파 박물관에서 만난 길가메시 점토판은 가로 7㎝, 세로 9㎝에 불과했다. 평범한 암호 판이지만, 접하는 순간 큰 감동이 일었다.

성경 ‘대홍수’ 기록보다 1600년 앞서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조지 스미스는 독학으로 수메르 설형문자를 풀어 길가메시 신화를 처음으로 알렸다. / 사진:유민호
길가메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지 환경에 대한 이해와 관찰이 필요하다. 직접 가 본 술탄테페는 길이 100m 높이 50m 정도의 작은 동산이었다. 주변은 끝없는 평야가 펼쳐져 있다. 메소포타미아 도시국가의 특징이지만, 일출과 일몰이 보이는 지형에 조성돼 있다. 산꼭대기가 아니라 평야를 배경으로 한 언덕 도시다. 언덕 최정상은 보통 신전으로 활용됐다. 정복이나 전쟁이 잦지 않았다는 의미일 듯하다.

술탄테페 길가메시 점토판은 어린이 문자 학습용으로 만들어진 유물이다. 문법과 문자가 엉망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술탄테페 점토판에 감동한 것은 길가메시 대서사시의 흔적이란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대하는 길가메시의 마음이 너무도 애절하게 표현됐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어주게. 나에게 귀를 빌려주게. 나는 마치 여자처럼 울면서 자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네… 지금 자네를 여기에 (영원히) 잠자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잠자는) 자네는 검게 변하고 있고,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있네….” 오늘날 친구를 위해 길가메시처럼 슬퍼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울다 지친 길가메시 본인도 죽음의 공포에 빠져든다. 불사신(不死身)이 되는 길에 천착한다. 그는 우트나피시팀(Utnapishtim)을 찾아 떠난다. 유일하게 신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초대형 전갈, 끝없는 지하 터널, 돌로 된 두 개의 동물, 죽음의 강을 건너는 뱃사공 등이다. 길가메시 대서사시보다 대략 1000년 뒤에 탄생한 헤라클레스 12개 관문을 연상케 하는 얘기다.

난관을 전부 통과한 뒤 마침내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게 된다. 불사신이 된 비결을 묻자, 오래전에 벌어진 대홍수에 얽힌 얘기를 들려준다. 대홍수로 인간을 벌할 테니 초대형 배를 만들어 동물들과 함께 피하라는 계시를 신으로부터 미리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6박 7일에 걸친 홍수가 이어지면서 세상 전부가 물과 함께 사라진다. 불사신은 홍수가 끝난 뒤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길가메시 점토판이 세계 고고학계의 스타로 등장한 것은 정확히 1872년이다.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조지 스미스(George Smith)가 독학으로 해석한 바빌로니아 점토판을 통해서다. 기원전 10세기 메소포타미아 칼데아(Chaldea) 지역에서 발견된 점토판 파편에 새겨진 스토리다. 19세기 말 영국은 다윈의 진화주의로 들끓고 있었다. 1882년에는 독일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성주의, 과학주의, 진화론의 시대였다. 그런 상황에 32살의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길가메시 대서사시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공표했다. 기독교보다 1600년 앞서 기록된, 노아의 홍수의 원조에 해당하는 스토리다. 구약 성경의 천지창조 내용이 길가메시의 우트나피시팀 얘기와 동일하다는 점은 기독교에 큰 타격을 준다. 다윈의 진화설이 한층 더 지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시팀에게 자신도 불사신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우트나피시팀은 6박 7일 잠을 안 자고 견뎌내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충고한다. 홍수를 피해 배 안에서 보냈던 불면의 6박 7일과 같은 시간이다. 길가메시는 의기양양하게 도전한다. 그러나 하루도 안 돼 깊은 잠속으로 빠져든다. 한 번도 깨지 않은 채 거꾸로 6박 7일간 잠을 잔 뒤 일어난다. 길가메시는 자신이 오랫동안 잠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우트나피시팀은 길가메시를 위해 준비했던 빵들을 보여준다. 빵은 이미 부패해 있었다. 길가메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기회를 달라고 애원한다. 우트나피시팀은 불로초(不老草)가 바다 밑에 있다면서 그걸로 대신하라고 제안한다. 길가메시는 자기 몸에 무거운 돌을 달고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불로초를 찾아낸다. 불로초를 얻은 길가메시는 사막을 건너 우르크로 향한다. 도중에 오아시스를 만난다. 불로초를 물가에 두고 수영한 뒤 밖으로 나오자 불로초가 사라졌다. 대신 막 허물을 벗은 뱀이 눈에 들어온다. 불로초를 먹은 뱀이다. 길가메시는 낙담한 채 우르크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도착 즉시,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이 쌓은 높은 성을 찬미한다. 친구도 잃고 불사신도 못 되고 불로초도 못 얻었지만, 다시 살아 돌아온 기쁨을 높은 성과 함께 나누면서 대서사시도 종결된다.

길가메시 대서사시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양한 메타포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가 창안한 첫 번째 장편 스토리란 점에서 캐릭터만이 아닌, 문화적 특징이나 단어 하나하나가 전부 특별하게 해석될 수 있다. 앞서 엔키두를 통해 하이브리드로 진화하는 과정을 살펴봤지만, ‘7’이라는 숫자가 곳곳에 등장하는 것도 관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엔키두의 죽음을 맞아 길가메시가 7일간 울고, 7일간 홍수를 피한 뒤 살아났으며, 7일간 잠을 자지 않으면 불사신이 된다는 식의 얘기에 등장하는 숫자다. 세계 7대 불가사의, 7인의 현인(Seven Sages of Greece)에서의 7이란 숫자도 길가메시의 영향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길가메시 캐릭터 키워드는 여행과 죽음


▎구약성경과 이슬람 경전 쿠란에 등장하는 노아의 대홍수 신화는 그보다 약 1600년 앞선 길가메시의 홍수 이야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시몽 드 멜레 作 [아라랏산 위의 노아의 방주](1570)
당연하지만, 길가메시 대서사시의 중심은 우르크 왕 길가메시다. 메타포와 교훈의 중심을 길가메시라는 캐릭터에 둘 경우 두 개의 키워드가 떠오른다. 바로 여행과 죽음이다. 죽음으로서의 여행, 여행으로서의 죽음이란 측면에서 보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키워드일 수도 있다. 스토리 곳곳에 죽음에 관한 얘기가 나오고, 성에 안주하기보다 성 밖의 세상 여행에 인생을 건 인물이 길가메시다. 인류 최초의 장편 문학이자 대서사시는 성안에서 펼쳐지는 예측 가능한 삶과 무관하다. 목표를 위해 목숨을 걸고 새로운 세상으로 뛰어나가는, 도전과 모험이 주된 테마다. 여행과 죽음이란 키워드를 내세우면 10년간 바다를 떠돈 오디세우스, 20살에 왕이 된 뒤 33살에 죽을 때까지 동방 원정에 나섰던 알렉산더, 이스라엘 전역을 돌아다닌 신의 아들 예수, 전쟁이 최고의 의무이자 책임인 로마 황제들의 삶이 갖는 공통점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길가메시 삶의 복사판에 해당한다. 길가메시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다. 21세기 서양의 원대한 우주개발 프로젝트에도 길가메시의 그림자가 배어있다. 이미 4000년이 흐른 길가메시 스토리지만, 언제 접해도 흥분과 탄성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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