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성호준의 ‘골프와 인생’] 역경 딛고 재기한 골프 코스 디자이너 안문환 

“무릉도원 골프장 꿈 좌절된 것이 오히려 복” 

리먼 사태로 골프 이상향 표방 리조트 사업 무산, 우울증·공황장애 겪어
“실패 전엔 타협 없었던 독불장군, 이젠 인생 즐겨야 한다는 것 깨달아”


▎강원도 양양에 있는 설해원 리조트 레전드 코스에서 설계자 안문환 씨가 코스를 돌아보고 있다. / 사진:류석무
2018년 겨울 베트남의 골프 코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하노이 인근의 스카이 레이크 골프장도 들렀다. 한국인이 운영하며 한국인이 설계했다는 골프장이다. 로비에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을 이끄는 박항서 감독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박항서 감독은 머리를 식히러 이 골프장에 가끔 온다고 한다. 몇몇 캐디들은 박항서 감독과 찍은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하고 있었다.

코스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한국인 설계자가 적당히 예산에 맞춰, 적당히 설계한 코스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에도 이른바 명문 코스는 잭 니클라우스나 톰 독, 닉팔도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설계가를 쓴다.

스카이 코스는 예상보다 훨씬 훌륭했다. 각 홀이 나무에 둘러싸여 포근한 느낌이 나면서도 장쾌했다. 전략적으로 배치된 벙커 뒤에 숨은 깃대는 직접 공격해야 할지 돌아가야 할지 고민하게 했다. 하롱베이처럼 석회암이 용식 되어 생기는 카르스트 지형의 산들은 코스와 잘 융화됐다.

레이크 코스는 한결 더 나았다. 넓은 홀 좁은 홀, 짧은 홀긴 홀들이 리듬감 있게 나왔다. 특히 땅이 아름답다. 페어웨이가 파도치는 바다처럼 굴곡이 있다.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페어웨이는 골퍼들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설계자는 안문환(64) 씨다.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설계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안 씨는 춘천에 골프의 무릉도원을 표방한 산요수 프로젝트를 하다가 잘 안 돼 2011년 골프계에서 사라진 인물이다. 산요수는 시공사인 코오롱이 인수해 현재 라비에벨 골프장이 됐다. 라비에벨 올드 코스는 골프 애호가들이 꼽는 최고의 코스 중 하나다.

안문환 씨가 강원 양양의 설해원 리조트에 레전드 코스를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젊은이들이 쓰는 스냅백 모자를 쓴 게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재 싱가포르에 적을 둔 ABC 글로벌과 보리 DNC에서 골프 코스 디자이너를 맡고 있다.

그는 경남 함안 지리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높은 산에 가려 하늘이 손바닥만 한 깡촌이었다. 안문환은 “유년기를 농촌에서 보내면 감수성이 좋아진다”고 했다. 산으로 소를 몰고 가면서 보는 마을 풍경, 개울에서 천렵하며 보는 물가의 수초들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기억했다. 어른들이 논에서 벼 베기를 하는 모습은 마치 밀레의 그림 ‘이삭 줍는 여인들’처럼 예술적이지 않았을까.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에서 자란 사람은 볼 수 없는 자연의 풍경이다.

형편이 어려워 방송통신대 농학과를 중퇴했다. 공군 정비 부대에서 5년을 근무하고 제대했다. 안 씨는 성격이 소심했다. 그래서 성격도 고쳐볼 겸 1984년 무작정 상경해 여성용품 외판 일을 했다. 회사 동료 중 한 명이 그의 군 이력에 관심을 가졌다.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동료는 안 씨에게 “일본에 가서 사람을 만나보라”고 설득했다. 간첩이었다. 당국에 신고는 했는데, 간첩은 미리 알고 사라져 버렸다.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보복당할 수 있으니 조용히 숨어 살라”고 했다. 안 씨는 한동안 난곡 산동네에서 신문배달을 했다.

신문배달·외판일하다 그린 키퍼로 골프와 인연


▎설악산이 레전드 코스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설해원 리조트는 설악산과 동해를 끼고 있는 빼어난 입지 조건을 자랑한다. / 사진:류석무
그러다 공군 골프장에서 그린 키퍼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군무원으로 지원했다. 그는 잔디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다. 당시 한국 골프장의 잔디 기술은 일천했다. 공부하고 싶었는데 자료도 없었다. 그는 미 공군 도서관에서 제임스 비어드가 쓴 『Turf management for golf courses』(골프코스 잔디 관리)라는 책을 읽었다. 책에 나온 외국 골프장 사진은 한국 코스와 너무나 달랐다. 그는 잔디와 골프장에 대한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91년 대한조형건설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93년 경기도 용인에 있는 화산 골프장이 건설 중 폭우로 코스가 유실됐다. 안문환은 16억 원짜리 공사를 땄는데, 그의 뛰어난 감각적인 일 처리를 눈여겨본 사업주가 일을 통째로 맡겼다. 안 씨를 신뢰한 오너는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8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화산 골프장은 명문 코스로 꼽힌다. 화산 골프장은 안문환의 광고판 역할을 했다. 화산 골프장 건설 이후, 회사 수주와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짧은 기간 내에 무주 리조트, 이스트밸리, 가평 마이다스밸리 등을 건설했다.

CJ 오너는 화산 골프장에 다녀온 후 “우리가 골프장을 건설하면 안문환 대표와 함께 일해보라”고 지시했다. 세계적인 명문 제주 나인브릿지를 그가 건설했다.

외국인의 설계 및 시공 기술을 짧은 시간에 따라잡기 위해 94년부터 매년 겨울은 직원들과 세계 100대 코스를 견학했다. 그는 “좋은 것들이 너무 많아 놀랐고 그 장점을 다 머릿속에 넣으려 했다”고 기억했다. 골프도 잘 쳤다. 호주 골프스쿨에서 1년 6개월을 보내는 등 제대로 배웠다. 가끔은 언더파, 대부분 싱글을 쳤다고 한다.

안문환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그의 사업 철학은 ‘첫째, 최고로 만든다. 둘째, 사업주가 간섭하면 일 안 한다. 셋째 돈은 되는 대로 받는다’였다.

그러다 골프의 이상향 리조트를 만들고 싶었다. 산요수 프로젝트다. 컨셉이 다른 3개의 골프장에 숙박시설, 종합검진시설 등을 계획했다. 안 씨는 한국 땅에 외국인이 골프장을 짓는 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설계도 직접 했고 클럽하우스 등을 한옥으로 만들었다. 경복궁, 창덕궁, 안동 한옥 마을 등 한옥이 있는 곳엔 안 가본 곳이 없다. 국악단지와 공연장도 계획했다.

무릉도원은 한 어부가 복숭아꽃이 핀 강을 따라가다 동굴을 지나 다른 세상을 만난 것이다. 산요수도 무릉도원의 동굴 같은 터널을 뚫어 일반 세상과 골프 천국의 경계를 만들었다.

한창 공사를 하다가 사업이 무산됐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시장이 얼어붙었는데 안문환이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왔다. 그는 “기술은 자신 있다 생각했는데 54개 홀을 한꺼번에 짓는 것이 무리였다”고 회고했다. 직원들이 등을 돌리고 안문환은 회사를 떠났다.

2013년 그는 베트남으로 갔다. 하노이 인근에 골프장을 만들려던 한국인이 그에게 코스 건설을 맡겼다. 쉽지는 않았다. 골프장 건설 기술자 등의 기술숙련도가 매우 낮았다. 우기에는 매일 쏟아지는 폭우로 공사에 많은 애로가 있었지만. 그래도 1년여 만에 코스를 만들었다. 스카이 레이크는 베트남의 권력자들이 대부분 회원으로 가입한 명문 코스로 자리 잡았다.

스카이 레이크 15번 홀은 디엔비엔푸 전투를 형상화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1954년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한 전투다. 200년 이상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군을 몰아낸, 베트남의 가장 의미 있는 전투다.

안문환은 당시 전쟁의 이야기를 인근 군부대의 장군을 찾아 얘기를 들었다. 프랑스군은 복숭아꽃이 많이 핀 화산 분화구 고지에 주둔했다. 안문환은 디엔비엔푸의 분화구 지형을 코스 조형에 활용하였다. 56일간의 전투를 복숭아나무 56주를 심어 기록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6년을 보냈다. 몇 건을 더 설계했는데 인허가가 나지 않아 아직 건설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건 2018년이다. 용인을 비롯해 몇몇 신설 골프장이 그를 불렀다.

‘이 골프장의 설계자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간단치 않다. 잭 니클라우스가 설계한 코스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게 다 잭이 직접 한 게 아니다. 골프장 측에서는 잭 니클라우스 설계 회사와 계약한 것일 뿐이고, 니클라우스 회사의 직원 중 누군가가 설계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직원이 코스를 설계했다고 할 수는 없다. 설계자는 잭 니클라우스고, 그 직원은 실무 책임자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안문환이 운영하던 오렌지 엔지니어링에서는 코스 설계를 비롯해 공사, 코스 관리 용역 등 여러 일을 했다. 일을 잘했다. 오렌지에서 만든 코스들이 대부분 뛰어났기 때문에 설계자가 누구인가라는 이슈가 나온다. 안문환이 계약을 하고 회사 설계팀을 지휘했다. 그 코스의 설계자는 누구인가. 계약한 안문환인가, 직원인가.

베트남서 6년 보낸 후 귀국, 다양한 프로젝트 참여


▎레전드 코스의 1번 홀. 페어웨이는 넓지만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할 것 같은 압박감을 준다. / 사진:류석무
안문환이 직접 그린 골프장 중 하노이의 스카이 레이크는 완공됐고, 용인, 홍천 카스카디아, 설해원 레전드 코스 등은 공사 중이다. 좋은 평가를 받는다. 현재는 설해원의 다른 코스리노베이션을 비롯해 몇몇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안문환은 “예술가는 혼자 할 수 있다. 그러나 골프장은 설계자가 여러 분야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종합예술이다. 내가 프로젝트 매니저도 하고, 직접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지만, 도면이 전부도 아니다. 공사 능력이 뛰어나야 하고 불도저로 땅을 조각하는 쉐이핑도 매우 중요하다. 설계가 그리 좋지 않아도 쉐이퍼의 능력이 좋으면 그런대로 괜찮은 코스가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결국 골프 코스 설계는 종합예술”이라고 했다.

한국 골프장 중엔 외국인 설계자를 쓴 코스가 많다. 잭 니클라우스처럼 유명 설계가가 아니라 그 회사 직원들이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

국내 설계가에게는 링크스 코스 디자인이 가장 어렵다. 안문환은 “스코틀랜드에서 오래 살고 쳐보고 느껴봐야 한다. 4계절을 여러 번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김치를 안 먹어본 사람이 김치를 만드는 꼴”이라고 했다. 반대로 한국에 골프장을 설계하는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한국 골프장은 대부분 산에 있다. 과거에는 농지 보호를 위해 산이 아니면 허가를 해주지도 않았다. 주로 평지에 코스를 만드는 외국인 설계자들에겐 쉽지 않다. 골프장 건설 법규도 매우 까다로워 외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실제로는 한국인이 설계하고 외국인 이름만 빌린 경우도 없지 않다.

국내 코스는 산허리에 계단식 코스가 많다. 토목 공사가 많고, 설계가도 토목 전공자의 비중이 높다. 안문환은 “토목 전공자도 필요하지만, 미적 감각이 뛰어난 설계자가 늘어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골프장이 거의 돈벌이용으로 이용되는 게 아쉽고, 일부 역사적인 골프장은 전통을 계승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안 씨는 “안양 골프장은 이병철 회장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세심히 다루던 곳이다. 역사와 예술이 담긴 곳이다. 그 코스를 개조한 건 적절하지 않다. 현존하는 한국 최초 코스인 서울한양 골프장도 바꾸면 안 된다”고 했다.

안문환은 “골프장은 유행과 장르, 사조가 있다. 예를 들어 피트 다이는 인공미가 있다. 피카소의 그림 같다. 기찻길 침목으로 벽을 쌓고 아일랜드 그린을 둔다. 쉐이핑을 많이 해서 페어웨이의 마운드가 심하다”라고 했다. 그는 톰 파지오가 가장 뛰어난 설계자라고 여긴다.

안문환은 골프장에서 가장 빛나야 할 건 페어웨이와 그린, 티잉 그라운드라고 생각한다. 나무를 너무 많이 심어도 좋지 않다. 수천만 원짜리 나무를 수백 그루 심는 골프장이 있는데 그러려면 식물원을 하는 게 낫다. 안문환에게 중요한 건 자연과의 조화다. 딱 골프장뿐 아니라 그 주위의 산이나 강, 바다 구릉지들도 다 포함된 자연미다. 골프장으로 이용되는 땅 30만 평을, 골프장을 감싸는 주변의 광활한 자연과 어울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골프장 건설은 어차피 순간적으로 자연을 파괴하여, 인간이 이용하는 시설 중 가장 친환경적인 골프장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다, 이왕 파괴할 거면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파괴하고 가장 친환경적으로 재창조하는 게 낫겠다 싶다”며 웃었다.

골프장 주변 산·강·바다 등 자연과 조화 강조


▎레전드 코스는 자연림을 그대로 보존했다. 안문환 씨는 “골프장은 어차피 자연 파괴다. 이왕 파괴할 거면 내가 자연과 어울리게 파괴하는 게 낫겠다 싶다”고 말했다. / 사진:류석무
설해원 레전드 코스는 밴트그래스를식재했다. 안문환은 ‘한없이 아름답고, 미치도록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설계 철학이라고 한다. 지난해 400㎜ 비가 와서 코스가 유실되는 등 어려움도 많았다. 그러나 이 한 살짜리 아기는 역경과 싸워 이길 것이고 한국의 대표적인 코스 중 하나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문환은 “산요수 프로젝트가 좌절된 것은 복”이라고 했다. 그는 “나는 독불장군이었다. 타협도 없었고 의견이 안 맞으면 일을 하다가도 철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요수가 망가지고 나서 인생을 알게 됐다. 남들과 함께 사는 것도 알았고, 인생을 즐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적정한 재산보다 더 가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지금 국민연금도 받고 골프장도 지으면서 행복하게 산다”고 했다.

그는 또 “골프 때문에 30년이 즐거웠다. 이제는 받은 것을 돌려주어야 할 때다. 산요수를 내 손으로 이루지 못했지만 그런 무릉도원을 만드는 사람을 돕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다”고 했다. 지금 그는 젊은 시절 찾아 헤매던 그곳, 무릉도원에 산다.

※ 성호준 골프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사회부와 스포츠부를 거쳐 골프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중앙SUNDAY. 네이버에 ‘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골프 진품 명품’ 등의 칼럼을 연재했다. JTBC골프 채널에서 [JTBC골프 매거진] [LPGA 탐구생활] 등을 진행했다. 저서로 [타이거 우즈 시대를 사는 행복][맨발의 투혼에서 그랜드슬램까지] 등이 있다.

202109호 (2021.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