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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다시 보는 일본 | (7)마지막회] 디지털 시대에도 종이·도장 문화 여전 

‘아날로그 대국’에서 ‘비효율 재팬’으로 전락 

원칙 고수 매뉴얼 사회, 택배·철도 등 고비용 저효율 구조
날인된 문서만 신용… 현란하게 변하는 시대 적응 못해


▎아날로그 시대에 세계 최강국 중 하나로 꼽혔던 일본이 디지털 시대에 들어와서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평범한 국가로 전락한 듯하다. 일본 도쿄 시부야 스카이 전망대에서 바라본 2020 도쿄올림픽 메인 스타디움. / 사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코로나19로 세상은 뜻하지 않게 변화했다. 비대면은 일상화됐고, 도시의 밤길은 택배 차량과 음식을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장악하고 있다.

매뉴얼 사회인 일본은 택배에서도 예외가 없다. 한국처럼 문 앞에 배송하지 않는다. 반드시 고객을 만나서 직접 서명 또는 도장을 받는다. 원칙적으로 보면 상품의 분실과 책임 소재를 따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현대 사회의 특징인 신속함 측면에서 보면 비효율적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면 택배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생기고, 택배 업자 측면에서는 부재 시 배달이 안 돼 다시 방문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이러한 원칙 때문인지 어떤 택배회사는 물품 100개를 싣고 가서 단 1개만 배송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언택트(untact) 시대 택배에서도 한·일 간의 차이는 극명하다. 우선 추구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원칙론적으로 보면 일본의 매뉴얼이 옳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그 같은 원칙론 고수가 과연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두 개의 분실 위험 때문에 택배회사는 비용 상승을 피할 수 없고, 고객 입장에서는 신속한 물품 수령에 어려움을 겪는다. 고객에게 직접 배송하지 못할 경우 부재 통지서를 발행하게 되고 다시 배송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40%가량의 비용이 상승했다고 한다.

‘종래형의 산업 모델’에 매달려 개혁 외면


▎지난해 9월 일본 도쿄 지하철 등을 운영하는 JR동일본은 신주쿠(新宿)역에서 스마트폰이나 종이의 QR코드를 대면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는 새로운 자동개찰기 실증 테스트를 했다. / 사진:연합뉴스
이와 유사한 이야기는 철도 이용 시 개찰구에서도 ‘재현’된다. 한국은 개찰구를 없앰으로써 검표 비용을 절감했지만, 일본은 되레 개찰구의 검표 시스템을 고도화함으로써 비용을 증가시켰다.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양국의 대처 방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실 일본의 철도 시스템은 매우 복잡하다. 일본은 관리 기관에 따라 국철과 사철(私鐵)로 나뉘고 철로의 규격도 다르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는 IT(정보통신) 기술을 기반으로 승차권 예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업그레이드했다. 반면 일본의 철도 시스템은 여전히 출발역 개찰과 도착역 집표를 거치는 폐쇄형이다. 이로 인해 승객은 목적지 역의 개찰구를 거쳐 역을 빠져나올 때까지 승차권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비춰보면 일본은 과거의 매뉴얼이나 규범에 매우 충실하다. 물건은 고객의 손에 직접 전달해줘야 하고, 열차를 타는 승객은 반드시 검표를 받아야 한다. 기차표에 구멍을 뚫는 방식에서 최첨단 검표 시스템으로 형식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여전하다.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신용사회의 구축이 아닌 합리적 의심을 통한 효율성을 추구하지만, 되레 비효율을 낳고 있다. 한국에서는 사라져버린 영화·비디오테이프·음악 CD·만화책 등 아날로그적 감성이 넘치는 렌털 서비스가 아직 성행하는 나라가 일본이다.

버블이 붕괴된 것은 1990년대 초다. 그런데도 일본 경제는 여전히 저성장에 허덕인다. 설상가상 팬데믹으로 인한 정체까지 겹치면서 “일본은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다”는 탄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일본이란 나라가 ‘디지털 후진국’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길고 어두운 터널에 출구는 없을까.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한국이 일본을 일방적으로 따라가는 입장이었으나,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는 많은 분야에서 한국이 일본을 앞서고 있다. 비용과 효율 측면에서 디지털 마인드냐 아날로그 마인드냐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디지털 후진국 일본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일본인들에게 일본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 대국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상식이 깨지기 시작하고 있다. 왜 그렇게 됐을까? 버블 붕괴 이후, 일본 경제는 거의 ‘제로 성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사이 다른 선진국들은 국내 총생산(GDP)을 1.5~2배 확대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셈이다. 지금은 더 이상 선진국이 아니라는 탄식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 경제가 성장을 멈춘 원인 중 하나가 디지털 혁명의 시대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과하지 않을 듯하다.

1990년대 이후 PC가 보급됐다. 선진국의 기업들은 PC 보급과 함께 비즈니스의 IT화를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그런데 일본은 ‘종래형의 산업 모델’에 매달린 나머지 개혁을 게을리했다. 그 결과 업무의 효율화가 진전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제고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국제 경쟁력은 계속 저하됐다. 한동안 전자제품 등 ‘메이드 인 재팬’이 세계 시장을 석권한 적이 있었지만, 다 과거 이야기다. 전 세계 수출시장에서 일본의 시장점유율은 크게 낮아졌다. 일본은 더 이상 ‘수출 대국’이 아니다.

WSJ “가장 전통에 얽매인 하이테크 국가”


▎종이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하는 ‘도장 문화’가 일본 재택근무의 장벽이 되고 있다.
일본인은 디지털화에서도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물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강한 국가이며 기초 기술 분야에서는 여전히 톱클래스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디지털화 부문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뒤처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디지털은 데이터와 IT를 활용하는 것,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데이터를 이용해서 업무 프로세스를 변화시키는 것, 최종적으로는 비용을 줄이면서 양은 더욱 늘리는 것(scalability)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디지털화로 다양한 정보 공유와 효율화가 조성된다. 그러나 코로나19 재해 앞에서 지방자치단체와 정부 부처 간의 정보는 혼선을 빚었고, 여러 가지 급부금(給付金)의 지급은 늦어졌다. 또 기업에서 재택근무(원격근무) 등의 추진도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 노출됐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오랜 세월 일본의 낮은 생산성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디지털화의 지연이 주된 요인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고령화를 비롯한 인구구조, 산업구조, 문화구조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일본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정권 들어 디지털청(廳)의 창설, 탈(脫)도장 등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디지털 변혁에 주력하는 기업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사회 전체가 디지털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엿보이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은 유독 디지털화 부문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유는 일본 특유의 제도인 연공서열과 낮은 인력 유동화 때문이다. 연공서열 제도는 고도 성장기에는 일본 기업 성장의 원동력이 됐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오히려 방해 요인이 됐다. 새로운 것은 항상 젊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낮은 인재 유동화 또한 고도 성장기에는 일본 기업의 성장원동력이었지만, 앞으로는 디지털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인재 유동화가 활발하면 인재들이 여러 집단을 오가며 노하우의 평준화가 진행되지만, 일본의 경우 낮은 인재 유동화가 그것을 저해하고 있다. 일본 기업들은 과도한 연공서열 제도, 낮은 인재 유동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일본의 디지털 후진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도장 문화를 꼽는다. 재택근무의 경우에도 도장을 찍으려 출근을 해야 할 정도다. 신형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일본 비즈니스의 중심적 존재이기도 한 ‘인감 인증’, 이른바 종이와 도장 문화에 대해 회의가 일고 있다.

요즘은 과거와 비교하면 덜해졌을지 모르지만, 일본 비즈니스 현장에는 품의서 등 날인된 문서가 여전히 주를 이룬다. 아직도 ‘일본 스타일’이라 불리는 독특한 비즈니스 방식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품의제(稟議制) 결재 방식은 일본형 의사결정 방식이다. 도장은 리스크의 분산과 합리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안전장치다. 디지털 시대의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코로나19는 일본 특유의 상관습(商慣習)을 재검토하는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인터넷판에서 코로나19로 변하는 일본 기업들이 도장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전통에 얽매인 하이테크 국가일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WSJ는 “일본 사무실에서는 2020년 초까지는 팩스나 대면 회의, 종이로 된 계약서에 날인이 표준이었다”면서 “파나소닉은 자신들의 100년 역사 중에서 처음으로 스테이플러로 엮은 자료 배포를 중지함으로써 20세기 후반 혁명적 기술인 ‘전화 회의’를 통해 결산 설명회를 개최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막강한 ‘전일본인장업협회’, 정부 개혁정책 막아


▎올해 2월, 마스크를 쓴 일본 도쿄 시민들이 일본 도쿄 시나가와 역에서 출근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의한 원격근무의 활성화에 일본의 많은 기업도 동참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정보경제사회추진협회(JIPDEC)’ 등이 공표한 조사에 의하면 원격근무의 시스템 환경이나 사내 규정을 정비하고 있는 기업은 30%를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에 따르면 계약의 전자화를 일부라도 진행하고 있는 기업 역시 40% 남짓에 불과한 만큼, 일본 기업의 3분의 2는 여전히 디지털화와는 요원한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는 원격근무 체제가 정착되지 않는 것일까. 참의원 상임위원회 조사실 특별조사실이 마련한 ‘재택근무 확대와 과제’에 따르면 일본의 재택근무 추진이 더딘 이유를 크게 다섯 가지로 지적했다. ①노무 관리의 어려움 ②날인·서면 제출 등의 관행 ③보안대책 ④통신량 증대와 통신기반 정비 ⑤자료·데이터 접근성 및 의사소통 등이다.

코로나19 시대에 원격근무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 업종이나 직무의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장 주목받는 건 역시 ‘인감 인증’이나 ‘종이에 의한 결재’다. 내각부·법무성·경제산업성이 연명(連名)을 통해 ‘날인하지 않아도, 계약의 효력에 영향은 생기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도 조만간 날인 없는 페이퍼리스 화가 일본 전역에 확산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종이와 도장의 문화는 오래전부터 일본 특유의 문화로 뿌리내렸으며, 웬일인지 일본에는 전인협(전일본인장업협회, 全日本印章業協会)라고 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관련 업계 단체도 있다. 1997년 자민당 행정개혁추진본부가 각종 신청 신고의 페이퍼리스화를 추진하려 했을 때는 전인협 등이 중심이 돼 극렬하게 반대한 결과 이 계획을 좌절시켰다(3만 5000여 명이 서명).

요즘 같으면 몇십만 명, 몇백만 명의 서명을 모아도 행정 계획이 뒤집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전인협은 고작 3만5000명으로 정부 계획을 철회시킨 셈이다. 더구나 그 후 발족한 ‘전국인장업연락협의회’에 의해 ‘일본의 인장 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 연맹’까지 등장했다. 행정의 디지털화를 추진할 다케모토 나오이치(竹本直一) 정보통신(IT) 기술 정책 담당 장관이, 얼마 전까지 그 단체의 회장이었다고 하는 블랙코미디 같은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어쨌든 코로나19 와중에 일본 기업들의 원격근무에 가장 큰 장애가 된 것이 도장 인증, 즉 종이에 의한 결재임은 틀림없다. 원래 인감은 중국에서 온 제도다. 그런데 일본이 이를 완강히 지키려는 배경으로 수제 도장업자의 반대, 종이의 수요 감소 우려, 수입인지 사용량 저하에 따른 세수 감소 우려 등이 있다.

이미 한국은 2009년 인감 등록제를 5년 내에 폐지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며, 현재는 인감이 날인과 같은 효력을 갖게하는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도장과 사인을 병용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정부나 기업은 도장을 사용하는 습관은 남아 있다. 그러나 개인이 도장을 사용할 기회는 거의 없다. 이는 중국 디지털화의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기업들은 정부 당·압력 따라 움직이는 데 익숙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8월 15일 도쿄 지도리가후치(千鳥ケ淵)에 있는 전몰자 묘원에 헌화한 뒤 절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최근 들어 생명보험 계약 등은 전자사인 하나만으로도 거래가 성립된다. 그러나 부동산 임대계약을 체결할 때는 그보다 훨씬 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확실히 이전보다는 번잡하고 복잡한 절차가 요구되는 만큼 계약서 등에 첨부하는 서류의 수도 많다. 게다가 대부분이 전자화돼 있지 않다 보니 요즘처럼 코로나19 시대에 일부러 관공서에 가서 관련 서류를 발급받거나 우편을 통해 챙길 수밖에 없다.

구체적으로는 차용인에게는 ‘주민표’ ‘인감증명서’ ‘은행인감’ 원천징수표, 납세증명서 등의 ‘수입증명서’ ‘연대보증인의 주민표’ ‘연대보증인의 인감증명서’ ‘반사회적 세력 배제 조항’과 같은 첨부서류를 요구되고, 이후 계약 시에는 ‘중요 사항 설명서’가 제시되며, 그런 뒤 차용인의 경우 ‘중요사항 설명서’가 제시되고, 차용인은 ‘연대보증인의 인감증명서’를 받는다.

최근 일본 정부의 경제재정자문회의는 경제재정 운영의 기본방침, 이른바 핵심 방침의 원안을 마련했다. 그 핵심적인 것이 행정의 디지털화이며, 대면·종이·도장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경제재정자문회의는 개혁의 방향성을 밝혔다. 하지만 현실에는 수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일찍이 2001년에 결정한 ‘eJapan 전략’에서 2003년까지는 전자 정보를 종이 정보와 동등하게 취급하는 행정을 실현함으로써 5년 이내에 세계 최첨단의 IT 국가가 된다’는 목표를 내건 바 있다.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의 행정 IT화는 공염불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일본 기업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로 만든 제품을 계속 판매해왔다. 만일 20년 전쯤부터 구미나 아시아 국가들의 기업에도 관공서의 입찰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도록 문호를 열었다면, 일본 기업들이 디지털화 미비로 인해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보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은 2013년 행정 시스템을 통합하기 위해 내각 정보통신정책감(정부 CIO)을 설치했다. 이로 인해 아베 정부는 ‘디지털 정부’로 불리기도 했지만, 사실은 특정 기업들만을 경쟁 입찰에 참여시키는 등 정경 유착을 이어왔다. 그 배경에는 아직도 종적 관계 행정을 고집하는 ‘가스미가세키병’(霞が関, 외무성 등 관청이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서방 국가들의 정부처럼 부처를 뛰어넘어 통일된 시스템이나 구조를 만들려는 자세나 노하우가 없었다. 기업들은 정부·자민당으로부터의 압력에 따라 움직이는 데만 익숙해졌다.

아베 정부의 뒤를 이은 스가 정부가 제아무리 신속하게 디지털화를 추진한다 해도 이번에도 결과는 뻔할 것 같다. 1년 동안 디지털화에 주력할지라도 디지털 선진국들과 비교하면 한참 시대에 뒤떨어진 참담한 결과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본에서는 종이에 의한 문서 관리와 도장이라는 두 가지 ‘세트’로 사회적 신용이 성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서명, 법적으로 애매한 상태에서 보급돼 유명무실


▎한국후지필름 비즈니스이노베이션㈜이 지난 5월 12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전자서명 솔루션 ‘도큐사인’ 등 다양한 오피스 솔루션을 선보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최근 일본에서 급속히 증가한 것 가운데 하나가 전자서명이다. 전자서명법이라는 법률에 따라 탈도장을 추진하는 법률이다. 전자서명이란 클라우드 내에 미리 설정한 전자증명 기능으로, 전자서명을 압인(押印)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문제는 20년 전 제정된 전자서명법에는 전자서명 계약을 진짜 계약으로 간주하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전자서명법에서는 계약의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한 전자서명이 법적으로 유효한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 요컨대 일본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애매한 상태에서 전자서명이 보급되고 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일본 기업들은 사내 품의서 등의 서명 날인을 법률적으로 의무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기업일수록 서명 날인에 의한 문서 관리를 고집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19팬데믹에서 ‘LINE’이나 메루카리(중고거래플랫폼) 같은 IT 기업은 사내뿐만 아니라 대외 계약에서도 날인이나 문서에 의한 계약을 폐지하고, 전자서명으로 전환하고 있다. 정부나 기업의 종이와 도장을 통한 인증 탈출 시도는 민간 기업만의 노력으로는 실현이 어렵다. 정부·지자체가 동참하지 않으면 이 제도는 유명무실해진다.

물론 일본 일부에서는 전자서명 시스템이 점차 정착되고 있다. 일본 최대 기업 중 하나인 ‘변호사 닷컴’은 2015년부터 ‘클라우드 사인’이라고 하는 전자서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약 8만개 사가 서비스에 가입했다. 코로나19 사태로 원격근무가 급증한 가운데 지난 4월에는 전년 동월 대비세 배가량의 기업이 이 제대를 신규 도입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도장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 문화가 디지털 시대의 변혁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해요인은 아닐 것이다. 도장 문화를 버리고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인증 방식을 도입한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과거만 고집할 수는 없다. 현란하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을 필요가 있다. 시대가 바뀌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했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스페인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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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호 (2021.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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