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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 기시다 신임 일본 총리와 한·일 관계의 行路 

미국에 우호적인 ‘일본판 바이든’… 한·일 외교 시계(視界) 맑지만은 않을 듯 

‘밋밋하고’ 온후한 성격이 총리직 수행에 도움 될지는 미지수
“국가 간 합의 번복하면 신뢰 유지 안 돼” 文 정부 비판하기도


▎제10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전 정조회장이 9월 29일 집권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당선이 확정되자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청명한 가을날인 10월 4일 오후, 제100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64)는 연미복과 드레스 차림의 장관 20명을 총리관저 계단에 정렬시키고 기념촬영을 했다. 한국의 한 언론이 기시다 총리를 가리켜 ‘밋밋하다’는 형용사를 쓰는 것을 보고 필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64세의 새 총리를 형용하는 데 이보다 더 적확(的確)한 표현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자민당의 총재 경선이 사실상 시작된 9월 3일부터 29일 개표일까지, 기시다는 항상 ‘밋밋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는 9월 3일 오전 자민당 당직자 회의에서 스가 요시히데 당시 총리(자민당 총재)가 돌연 차기 총재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을 때다. 사실상의 퇴진 표명이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그때 기시다는 민생 탐방을 위해 도쿄 분쿄구의 한 상가를 방문하고 있었다. 기자들이 몰려들어 “방금 스가 총리가 퇴진을 표명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채근하자 그는 긴장한 듯 기자들을 둘러본 뒤 이렇게 대답했다. “저도 지금 막 소식을 들은 터라…. 일단 돌아가서 생각해본 후에 마땅한 답변을 드리는 걸로 하겠습니다.” 취재진은 김이 빠져버렸다. 스가 총리의 사퇴가 ‘일단 돌아가서 생각해본 후에’ 답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일까?

둘째는 9월 29일의 일이다. 이날 오후 1시부터 도쿄 그랜드프린스 호텔에서 자민당 총재 선거를 진행한 결과 기시다가 승리했다. 많은 일본 국민이 TV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기시다 신임 총재의 ‘제일성(第一聲)’은 다음과 같았다. “제 특기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입니다.”

이게 새 총재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인가? 취재진은 다시 한번 허탈해졌다. 기시다 총리의 이 ‘밋밋한’ 분위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필자는 기시다 총리와 30년 이상 친분을 유지해온 선배 기자인 이즈미 히로시 전 [지지통신] 정치부장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올해 74세인 이즈미 기자는 현재 기시다가 회장으로 있는 자민당의 고치카이(宏池会) 파벌 취재를 반세기 동안 담당해온 분인데, 자신을 “화석(같은) 정치부 기자”라고 부른다.

“그의 64년 인생은 매우 순탄했으며, 좌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단 두 번밖에 경험하지 못했다. 첫 번째는 도쿄대 입학에 실패한 것이고, 두 번째는 지난해 가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스가 요시히데에게 패한 것이다.”

도쿄대 3수 실패, 와세다대 졸업 후 은행원으로 출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0월 5일 총리관저에서 바이든 미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조부 기시다 마사키, 부친 기시다 후미타케가 2대 연속 히로시마의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 명문가의 3세 정치인이다. 후미타케는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관료였다.

1957년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기시다는 6세부터 9세까지는 부친이 뉴욕 JETRO(일본무역진흥기구)에서 근무해 뉴욕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동물원으로 소풍 갔을 때 교사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이웃집 아이들끼리 손을 잡으라고 지시했지만, 기시다는 백인 여학생이 자신의 손을 잡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훗날 그는 “당시 인종차별 경험이 정계 입문의 계기가 됐다”고 회상했다.

귀국 후 도쿄도(都) 치요다구의 나가타초 초등학교-코지마치 중학교를 거쳐, 일본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 사립 카이세이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카이세이 고교는 1982년 이후, 40년 동안 도쿄대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이다. 기시다는 “고교 시절 야구부에 들어가 팀플레이를 배운 경험을 정치에서도 활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기시다 가문은 히로시마의 명문가다. 부친 후미타케는 도쿄대를 졸업하고 통산성 관료가 됐고, 숙부 슌스케도 도쿄대를 나와 대장성(현 재무성)의 관료가 됐다. 고모부 히로시는 도쿄대를 졸업하고 내무성(현 총무성)의 관료가 됐다. 히로시의 형 미야자와 기이치도 도쿄대를 졸업한 뒤 대장성에 들어갔으며, 후에 정치가로 변신해 총리대신까지 올랐다.

이렇듯 기시다 가문에서는 ‘도쿄대→관료’ 코스가 당연시됐다. 기시다 후미오 역시 도쿄대생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명문 고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3년 연속 도쿄대에 도전했지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기시다에게는 큰 ‘좌절’이었던 것 같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와세다대에 입학했으며, 대학 졸업 후에는 초(超)엘리트만 입사한다는 장기신용은행에 취직했다.

기시다는 은행에서 5년간 일하다 퇴직한 뒤 비서로 정치가인 부친을 보좌했다. 1992년 부친이 65세 나이로 암으로 사망하자 이듬해인 1993년 총선에서 선친의 지역구(히로시마 1구)를 물려받았다. 그는 35세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선 동기로 아베 신조 전 총리와 이번 자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했던 노다 세이코 저출산담당장관 등이 있다.

이후 기시다는 9번 연속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는 부인 유코 여사와의 사이에 아들 셋을 뒀는데, 그중 장남은 자신의 비서를 맡고 있다. 아베 신조의 부친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과 기시다 후미오의 부친 기시다 후미타케 의원은 친구 사이였다. 1988년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 때 자민당에서 아베 신타로 간사장과 기시다 후미타케 경리국장으로 함께 일했다.

2012년 12월 2기 아베 정권이 출범했을 때, 아베 총리는 기시다 후미오를 외무상으로 발탁했다. 아베 전 총리의 한 비서관은 나중에 이런 이야기를 귀띔해줬다. “아베 총리는 외교 문제만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싶어 했기 때문에 순종적인 기시다를 외무상에 앉혔다. 아베 총리는 세이와카이(清和会=호소다파)이고 기시다는 고치카이(자유주의=기시다파)라서 파벌은 다르지만, 그의 성격을 보고 결정한 인사였다.”

예상대로 기시다 외무상은 튀지 않고 무탈하게 임무를 수행하면서 아베 총리를 만족시켰고, 전후 최장수인 4년 7개월 동안 외무상을 지냈다. “무난한 기시다 외무상이었지만, 유일하게 고집을 부린 것이 핵 군축 문제였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핵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핵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민감했다. 그런 의미에서는 2016년 5월 27일은 기시다 외무상 인생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일본 외무성 간부의 증언)

아베 내각에서 외무상으로 발탁… 4년 7개월 재임


▎ 사진:연합뉴스
2016년 5월 26~27일 아베 총리가 의장이 된 가운데 G7 이세시마 서밋이 열렸다. 그때 기시다 외무상이 강력하게 주장해 회의를 마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을 자신의 고향인 히로시마로 안내했다. 11만8661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폭의 가해자인 미군 최고 사령관(대통령)이 피폭지인 히로시마를 찾은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2009년 4월 5일 체코 프라하에서 ‘핵 폐기 스피치’를 했고, 그 덕분에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기시다 외무상은 그런 오바마를 자신의 절친인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을 통해 움직인 것이었다. 기시다는 2020년 9월에 출판한 첫 저서 [기시다 비전]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의) 평화 기념공원에 모습을 나타내자 회의장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자료관으로 향한 오바마 대통령은 직접 접은 종이학 두 마리를 아이들에게 건네줬다. (오바마 대통령은) ‘우리는 전쟁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함께 평화를 확산시키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용기를 가집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방명록에 서명한 후 종이학 두 마리를 더 얹었다. ‘편안히 주무세요, 잘못은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새겨진 위령비 앞에 멈춰 서서 흰색 화환을 바친 후, 10초 정도 묵념한 뒤 연설에 임했다. ‘71년 전, 맑은 날 아침, 하늘에서 죽음이 내려와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기시다 외무상 시절의 성과로 평가받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2015년 12월 28일의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다. 2015년이란 해는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기념할 만한 해였지만 한·일 관계는 최악이었다. 종군 위안부 문제를 놓고 박근혜 정권과 아베 정권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12월 28일, 한·일과 모두 동맹 상대인 오바마 행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두 나라는 극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이때 서울을 방문해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악수한 사람이 기시다 외무상이었다. 앞서 언급한 저서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다.

“위안부 합의가 한·일 간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확인한다’에 이르기까지 힘겨운 교섭이 계속됐다. …당시 ‘상대가 일본이라면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는 한국 여론의 압력이 있었고, 일본에서도 한국을 상대로 하는 교섭에서 저자세는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양국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 서로의 국익과 연결된다’는 생각은 공유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기시다 외무상은 2017년 8월 퇴임했다. 해임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났다. 아베 총리는 기시다 외무상의 퇴임을 만류했지만, 기시다는 고치카이의 회장으로 아베 총리가 사임했을 때 후임 총리에 오르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자면 정부의 중책을 맡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자민당 요직을 거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으로 돌아가서 역할을 하고 싶다고 아베 총리에게 말하고 물러난 것이다.

2015년 윤병세와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 이뤄내


▎2015년 윤병세 장관과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이뤄낸 기시다 후미오가 새 일본 총리로 선출됨에 따라 향후 한·일 관계 개선 가능성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10월 4일 일본 국회에서 제100대 총리로 선출된 기시다 총리가 총리관저에 들어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아베 총리의 뜻에 따라 기시다는 당 4역의 일각인 정조회장(각 부회의 수장인 정무조사회장)에 앉았다. 그는 아베 총리가 퇴진한 2020년 9월까지 이 자리를 맡았다. 기시다는 2020년 9월 14일 포스트 아베를 결정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입후보했다. 그러나 결과는 스가 관방장관에게 89표 대 377표로 완패했다. 당시 붙여진 별명은 ‘약한 남자’, 정치인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였다.

그로부터 1년간 기시다는 정부와 당의 요직을 맡지 않고, 일개 국회의원으로 지냈다. 고치카이의 모 초선의원의 증언이다.

“기시다의 스피치는 사람 좋은 면이 전면에 부각되다 보니 카리스마는 부족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우리가 스피치 연습을 시켰다. 예를 들면 ‘이 대목에서는 좀 더 무거운 표정으로’, ‘그 대목에서는 국민 분노를 대변한다는 생각으로’라고 조언한 것이다. 여러 번 반복하는 사이에 그는 꽤 ‘강한 남자’처럼 보이게 됐다. 정치인으로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우리가 기시다를 존경하는 것은 젊은 의원들의 충고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겸허한 태도 때문이다. 다른 파벌의 수장들은 젊은 의원들에게 명령만 할 뿐 그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고치카이파 48명은 일치단결해 기시다 회장을 응원했다.”

1년 전에는 그토록 인기가 없던 기시다였지만, 9월 29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당당히 승리했다. 최대 라이벌인 고노 다로(58) 백신담당상과의 대결은 1차 투표에서 256표 대 255표, 2차 결선투표에서는 257표 대 170표였다. 처음에는 고노가 유리하다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마지막에는 의외의 격차로 기시다가 승리한 것이다..

기시다가 승리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자민당 총재 선거를 30년 이상 취재해온 내 의견을 말하자면, 주된 승인은 다음의 두 가지다.

첫째, 코로나19 팬데믹 제5차 대유행의 영향이다. 스가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9월 3일 일본 전역의 신규 감염자 수는 1만6738명이나 됐다. 그러나 이후 자민당 총재 선거 당일인 9월 29일은 1986명까지 줄었다. 이틀 뒤인 10월 1일에는 장기간 이어지던 긴급사태 선언이 해제됐다. 결국 9월의 일본은 ‘유사시’에서 ‘평시’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되자 1월부터 백신담당상을 맡아 ‘행동력의 고노’로 불린 개혁파 고노보다는 ‘경청하는 기시다’, ‘안심·안전·안정의 기시다’라고 불린 기시다가 적임자라는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경청하는 기시다’, ‘안심·안전·안정의 기시다’로 불려


▎2015년 12월 28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상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기시다 외상은 회견 발표문에서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둘째, 고노와 기시다의 성격 차이다. 말하자면 고노는 ‘일본의 트럼프’로, 242만 명이나 되는 트위터 팔로어를 거느리고 있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트위터를 통해 의견을 발신한다. 전형적인 톱다운형(形) 리더이며 참신한 아이디어와 행동력으로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 때문에 자민당 정치인과 관료, 언론 등에 적이 많다.

그에 비해 기시다는 ‘일본판 바이든’이다. 팀워크를 중요시하며 정책은 부하들로부터 올라오는 보텀업 방식으로 결정한다. 작년까지의 캐치프레이즈는 ‘리더는 사람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였다.

필자는 얼마 전 미야자키 켄스케(40) 전 의원과 만났다. 그는 자민당 소장파의 기대주인데, 2015년 말 아베 총리를 주빈으로 초청해 같은 자민당 가네코 게이미 의원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때 이미 임신 중이었던 가네코 의원이 이듬해 2월 출산하자 일본 남성 국회의원으로는 처음으로 육아 휴직을 냈다. 일본 전역이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가네코 의원이 입원·출산하는 일주일 동안 미야자키 의원은 애인과 호텔에서 불륜을 일삼았다. 이 사실을 [슈칸분슌(週刊文春)]이 특종 보도하면서, 국민적 비난이 일자 그는 의원직을 사직했다. 불륜 문제로 의원직에서 물러난 사람은 일본 헌정 사상 미야자키가 유일하다. 다음은 미야자키의 말이다.

“국민적인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오래전부터 약속한 자민당 의원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 동료였던 자민당 의원들의 싸늘한 눈초리에 풀이 죽어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기시다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미야자키, 자네는 지금 구렁텅이에 있어. 그 말은 이제부터는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아직 젊으니까 힘을 내게.’ 기시다만이 진심으로 나를 격려하고 말동무가 돼줬고, 나는 평생 그를 따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의원이 아니어서 이번에는 투표권이 없었지만, 기시다가 총리가 돼서 정말 기쁘다.”

그러나 이처럼 온후한 성격이 일본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기시다에게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예컨대 기시다 총리는 평탄한 인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무엇이든 ‘성선설’의 관점에서 본다. 즉, 인간은 선행을 행하는 존재라는 전제하에 사고하고 행동한다.

기시다 총리는 10월 4일 취임 회견에서 세 가지 우선 과제로 ▷코로나 대책 ▷경제 대책 ▷안전 보장을 강조했다. 기시다는 경제 대책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일본형 자본주의를 구축하겠다’, ‘레이와(令和)판 소득 배증(倍增) 계획을 실행한다’, ‘성장과 분배의 쌍순환을 이룬다’ 등을 강조했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 의미가 모호하다 보니 일본 내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시진핑 정권이 주창하는 ‘공동부유론’이나 ‘쌍순환 성장’ 따라 하기인가?”, “한국의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다 실패한 ‘소득주도성장’을 일본에서 하겠다는 것인가?” 등등 의심의 눈초리가 적지 않다. 실제 기시다 내각 시작과 동시에 조사한 지지율은 49%([마이니치신문] 발표)였는데, 출범 당시 지지율이 50% 이하인 정권은 매우 드물다.

기시다 “반일로 활로 찾으려는 文 정권에 화가 나”

외교와 관련해서는 10월 5일 바이든 대통령과의 전화 회담부터 시작했다. 필자는 이때, 기시다 총리가 ‘일본판 바이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향후 우호적인 일·미 관계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일 관계를 비롯한 대(對)아시아 외교에서는 ‘시계(視界)가 맑다’고만은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한 [기시다 비전]은 총 251페이지에 걸쳐 기시다 총리의 비전과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기시다의 성격을 나타내듯, 거의 전편에 걸쳐 ‘온화한 필치’로 쓰여 있지만, 단 한 군데 기시다답지 않게 ‘화가 났다’는 기술이 있다. 그것은 문재인 정권에 관한 대목이다.

“문재인 정권은 지지율 유지를 위해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일(反日)을 통해서 활로를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측근인 조국씨의 자녀 부정입학 의혹, 부동산 정책 실패 등으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국민의 눈을 돌리기 위해 일본 때리기를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문 정권은 박근혜 정권 시절의 인사들에게 가혹한 대응을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정권을 지탱했던 전직 공직자 120명이 감옥에 갇혀 있다. 주일 대사였던 이병기씨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이병기씨는) 우수하고 온화한 분이었지만, 가혹한 그의 운명에 할 말을 잃었다.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보수와 진보가 서로 비난하고 있다. 문 정권은 워낙 극단적인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보수 쪽으로 정권교체가 된다면, 전 정권 인사들에게 했던 대응이 부메랑이 돼 되돌아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국내의 정치 환경이 아무리 가혹하다 해도 한·일 양국 간의 국제적 합의를 국내 사정 때문에 번복한다면 신뢰관계는 유지될 수 없다. 예로부터 한국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 있는데 국민 여론이 때로는 최상위에 있다. 그것을 ‘국민정서법’이라고 부른다. … 2015년 위안부 문제도 양국 간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로 합의한 바 있다. 이번에야말로 합의의 ‘골대’가 움직이지 않도록, 미국을 비롯해 30여 개국으로부터 ‘합의를 높게 평가한다’는 지지 표명을 받아 ‘증빙’했다. 한국은 30여 개국이 높이 평가한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라와 나라 간의 국제적 약속만큼 무거운 것은 없는데, 한국이 취하고 있는 태도에 솔직히 화가 난다.”

그렇다면 기시다 정권은 장수할 수 있을까? 사견이지만, 장수 정권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은 향후 일본이 ‘평시’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10월 7일 밤 진도 5 지진이 도쿄를 덮치는 등 ‘유사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겨울에 온다는 코로나 제6차 대유행, 중국 선박의 계속되는 센카쿠제도 침입,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19로 휘청거리는 일본 경제…. 일본 국민은 일말의 불안과 함께 기시다 정권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심판이 10월 31일 총선에서 내려진다.

- 글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특별편집위원 번역 김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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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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