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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일본 파벌정치와 금수저 정치인, 그 오랜 연원 

자민당 형성 참여 정당들 파벌로 남아… 2~3세들은 ‘3방(가방·간판·지반)’ 활용 지역구 물려받아 

영수는 세력 결집이 목적, 지지자들은 이해관계 때문에 파벌 계속 유지
많은 비판에도 불구, 안정 속 변화 추구하는 일본 문화 특성도 존속 이유


▎파벌정치와 금수저 정치인은 일본 정치의 대표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0월 4일 총리 지명 선거가 진행된 일본 중의원 본회의장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집권 자민당 총재(가운뎃줄 왼쪽 셋째)가 투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에서 일본 정치, 특히 전후(戰後) ‘일본 정치’ 하면 떠오르는 개념들로는 총재 선거 등에서 나타나는 파벌정치, 부정부패와 연결되는 정치 스캔들의 금권정치, 그리고 2~3세 의원들을 지칭하는 세습(금수저) 정치인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2~3세 의원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은 한국에서 가장 의아해하는 부분이다. 한국 정치에서도 파벌과 유사한 그룹화(계파)는 볼 수 있고, 돈과 정치의 관계라는 것도 결코 낯선 것은 아닌데 2~3세 의원이라는 호칭은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만큼 많지는 않지만 2세 의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본처럼 그 사실을 크게 내세우지 않거나, 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일본 정치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는 파벌정치와 금수저 정치인의 배경,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대부분의 주요 파벌, 리더만 바뀌면서 명맥 유지돼


일본 정치에서 나타나는 파벌적·분파적 경향은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적 현상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력한 중앙집권 세력이 있었던 에도 시대(도쿠카와 시대)에도 수많은 지방 영주가 세력을 분점하고 있었고, 전후에는 자민당과 함께 ‘55년 체제’의 한 축을 형성했던 사회당에도 파벌들이 존재했다.

즉, 오랫동안 존재했고 널리 퍼져 존재한다는 점에서 파벌적 경향이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지만, 이는 달리 말하면 다양한 성향 또는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세력들이 존재해왔음을 의미한다. 1955년 형성된 자민당에 파벌들이 존재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현재 자민당에는 7개 파벌이 있다. 호소다(細田博之–호소다 히로유키: 淸和政策硏究會[청화정책연구회]로도 불림)파, 아소(麻生太郞–아소 다로: 志公會[시코카이])파, 다케시타(竹下亘–다케시타 와타루: 經世會[게이세이카이])파, 니카이(二階俊博–니카이 도시히로: 志帥會[스아시카이])파, 기시다(岸田文雄–기시다 후미오: 宏池會[고치카이])파, 이시바(石破茂–이시바 시게루: 水月會[스이게쓰카이])파, 그리고 이시하라(石原伸晃–이시하라 노부테루: 近未來政 治硏究會[근미래정치연구회])파가 그들인데, 이들 외에도 자민당에는 이러한 파벌에 속하지 않는 무파벌 의원이 60여 명에 이른다.

파벌의 역사와 연유는 파벌 영수의 죽음으로 인한 승계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합집산으로 복잡한 양상을 보이지만, 대부분의 주요 파벌은 리더만 바뀌면서 그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먼저 96명으로 최대 인원을 자랑하는 호소다파는 전후 일본 정치에서 강력한 보수 성향을 보였던 기시 전 총리가 형성했던 기시(岸信介)파를 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아베 전 총리가 파벌 영수의 직을 맡은 적은 없지만, 호소다파 소속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당내 최대 파벌인 호소다파가 외조부인 기시 전 총리가 이끌었던 기시파에서 연유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시파는 후쿠다(福田越夫)파, 아베(安倍晉太郞)파, 미쓰즈카(三塚博)파, 모리(森喜朗)파, 그리고 마치무라(町村信孝)파를 거쳐 현재의 호소다파로 이어졌다.

10월 4일 임시국회에서 총리직에 오른 기시다는 자신의 파벌을 이끄는 인물이다. 그 규모는 46명으로 넷째 정도다. 정책 파벌로 유명했던 이케다(池田勇男) 전 총리의 ‘고치카이’(宏池會)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케다파에서 시작해 파벌 영수의 이름에 따라 마에오(前尾繁三郞)파, 오히라(太平正芳)파, 스즈키(鈴木善幸)파, 미야자와(宮澤喜一)파, 가토(加藤紘一)파, 호리우치(堀內光雄)파, 그리고 고가(古賀誠)파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지만, ‘고치카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기시다가 이끄는 ‘고치카이’는 자민당 내 넷째 규모


▎2019년 5월 자민당 호소다파의 정치자금 모금 파티에 참석한 아베 신조 총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소득배가 정책을 제시하면서 ‘요시다 정책라인’으로 통칭되는 전후 일본의 발전 방향, 즉 안보는 미·일 관계를 축으로 견지하고 경제 발전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향성을 확정한 이케다 전 총리는 요시다(吉田茂) 전 총리의 주요 참모였기에 기시다파의 뿌리는 요시다파라고 할 수 있다. 요시다파에서는 이케다파 외에도 사토(佐藤榮作)파가 갈라져 나왔는데, 현재 사토파의 인맥을 잇고 있는 것이 다케시타파다. 사토 전 총리의 뒤를 이어 파벌 영수가 된 것이 다나카(田中角榮) 전 총리였고, 다나카파를 이은 것이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 그리고 이어서 오부치(小淵恵三) 총리와 하시모토(橋本龍太郞) 전 총리가 차례로 넘겨받았다.

최근에 다케시타파로 다시 불리게 된 이유는 파벌 영수인 다케시타 와타루(竹下亘)에 의한 것으로, 다케시타 전 총리의 이복동생이다. 다케시타파로 불리기 전에는 후생대신을 지냈던 쓰시마(津島雄二)가 우선 하시모토파를 이었고, 정조(정무조사회)회장을 지낸 누카가(額賀福志郞)가 쓰시마파를 이어서 다케시타파로 넘겨졌다.

기시파와 요시다파의 차이와 요시다파의 이케다파와 사토파의 분열은 자민당 및 일본 정치에서 파벌이 어떻게 발생하고 형성되는가를 잘 보여준다. 즉, 기시파와 요시다파의 차이에서는 이념적 성향이 한 요인임을 보여준 반면, 요시다파의 이케다파와 사토파로의 양분은 파벌이 리더십의 차이 또는 리더들의 성향 차이 등에 분열되고 형성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요시다 전 총리와 기시 전 총리는 전전(戰前)에 관료로 일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외무성 관료를 지냈던 요시다는 전전의 상황에서도 외교적 접근을 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전후에도 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일본이 추구할 발전 방향의 틀을 잡았던 인물로 보수 정당인 자민당에서는 국제적 협조주의와 같은 리버럴한 입장을 대표한다.

반면에 경제 관료였던 기시는 만주국 설립에 적극적이었던, 소위 혁신 관료의 대표자였고, 이러한 이유로 전후 미군정하에서는 전범으로 수감됐다. 그러나 냉전의 진전과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풀려나 헌법 개정이나 방위력 제고와 같은 자민당의 국가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강성 노선을 대표한다.

서로 성향이 다른 기시와 요시다가 1955년에 자민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에 참여하게 된 것은 크게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당시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있던 사회당이 다시금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보수 정당들의 통합을 원하는 경제계의 요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패전 직후 일본 정치는 1955년 자민당이 형성되기 전까지는 전전의 정치가 출신인 하토야마(鳩山一郞)와 관료 출신인 요시다에 의해 설립된 일본자유당과 같은 보수계 정당들과 일본사회당을 중심으로 한 혁신계 정당들, 그리고 협동사회주의를 추구한 일본협동당과 같은 중도계 정당들에 의해 형성된 다당 체계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중에서 좌우로 갈렸던 일본사회당이 다시 하나로 합당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보수계 정당과 중도계 정당이 합쳐져 형성된 것이 자민당(자유민주당)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민당 형성에 참여했던 정당들이 파벌로 남게 됐고, 자민당의 파벌은 합당 이전의 정당이 그 뿌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민당을 정당 중의 정당이라거나 자민당의 파벌을 정당 속의 정당이라고 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파벌 이합집산은 리더들 간의 정치적 성향 차이 때문


▎2018년 9월 자민당 이시바 시게루 지방창생담당상이 파벌 결성 기자회견 도중 파벌 이름인 스이게쓰카이(水月會)가 쓰인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이념적 유사성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파벌의 이합집산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리더들 간의 성향 차이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효용성 측면에서 볼 때 영수로서는 총재 선거에 나서기 위한 세력 결집을 위해 파벌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고, 지지자들로서는 무엇보다도 다음 선거에서 필요한 것들을 확보하기 위해 파벌에 가입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파벌에 속함으로써 당내 보직이나 내각에서 자리 등을 좀 더 용이하게 얻을 수 있다. 또 선거에 필요한 자금이 파벌 영수로부터 조달될 수 있으며, 지역구에서 요구하는 청원 사항들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정보나 인맥 등을 좀 더 수월하게 얻을 수 있다.

특히 자민당이 형성된 1955년부터 자민당에 의한 일당 우위 정당 체제 또는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붕괴되는 1993년까지 유지된 중선거구제하에서는 같은 지역구에서 같은 자민당의 후보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다 보니 선거자금이 크게 필요했다. 같은 당 후보들 간의 경쟁이었기에 정책적으로 차별성을 드러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선거구비례대표병립제가 도입된 1994년 이후 선거에서도 자민당의 파벌들은 소멸되지 않았다. 파벌 영수로서는 총재 선거에 나서기 위한 세력 결집이 필요했고, 파벌에 소속된 구성원들로서는 파벌에 소속되는 것이 직책이나 정보를 확보하는 데 유리했다. 직책이나 정보는 파벌 구성원에게는 재선에 필요한 것들이었다.

앞서 언급한 호소다파와 기시다파, 그리고 다케시타파와 같은 전통의 대파벌 외에도 니카이파, 이시하라파, 아소파, 그리고 이시바파가 현재의 7대 파벌을 형성한다는 것이 이러한 측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니카이파는 요시다와 하토야마가 형성한 일본자유당 중에서도 하토야마파에서 파생된 고노(河野一郞)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토야마파에서는 우선 오노(大野)파와 이시바시(石橋湛山)파가 분리돼 나왔고, 이시바시파에서 기시파와 고노파가 분리돼 나왔다. 고노파는 나카소네(中曾根康弘)파, 와타나베(渡辺美智雄)파, 에토(江藤隆美)·가메이(龜井靜香)파, 이부키(伊吹文明)파, 그리고 현재의 니카이파로 이어진다. 자민당 내의 최소 파벌이라고 할 수 있는 이시하라(石原)파는 와타나베파가 무라카미파로 이어질 때 이에 반발해 형성된 야마자키(山崎拓)파를 이은 것이다.

현재 파벌 규모상 제2세력을 자랑하는 아소파는 중도계의 일본협동당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더해 이케다파를 이은 미야자와파가 가토파로 이어질 때 반발한 고노(河野洋平)파와의 연대로 만들어진 파벌이다. 일본협동당은 자민당이 형성될 때 시게미쓰(重光葵)파를 형성했는데, 이것이 미키(三木武夫)파, 고모토(河本敏夫)파, 고무라(高村正彦)파, 오시마(大島理森)파로 이어지다가 고노파를 이은 아소파와 합쳐진 것이다. 이시바파는 이시바의 주장에 공명(共鳴)하는 의원들이 모인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시바는 개인적으로 다나카파, 다케시타파에 소속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파벌을 이러한 파벌적 맥락에서 파악하기는 어렵다.

유능한 리더 선출하지만 당원 의사 반영 잘 안 돼


▎기시다 후미오 집권 자민당 총재가 10월 1일 도쿄도 소재 자민당 본부에서 열린 임시 총무회에서 주요 간부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엔도 도시아키(遠藤利明) 선거대책위원장, 후쿠다 다쓰오(福田達夫) 총무회장, 기시다 총재, 아마리 아키라(甘利明) 간사장,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 / 사진:연합뉴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파벌정치 또는 일본의 자민당 내에 파벌이 존재하는 이유는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자민당이 기존의 보수 정당들과 중도계 정당들의 연합으로 형성됨에 따라 이들이 파벌로 남게 됐다는 역사적 계기다. 둘째는 총재 선거에서 승리를 위한 세력 결집 차원에서 유지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당직이나 각료직과 같은 직책이 파벌에 의해 배분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넷째는 지역구의 요구사항 처리나 그와 관련된 정보가 파벌을 통할 때 좀 더 유리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이다.

파벌의 주요 순기능은 유능한 리더를 선출하는 리더십의 충원이라고 하겠지만, 최근의 총재 선거 과정은 파벌의 존재 때문에 당원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엘리트적 경향이 생겨나고 강화될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지난 9월 3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는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재 및 차기 총리로 가장 인기가 많았던 고노(河野太郞) 전 행정 규제 개혁담당 대신을 누르고 기시다 전 정조회장이 승리했다.

이번 총재 선거는 파벌의 작용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자민당의 엘리트적 측면에 눈에 띈다. 첫째는 1차 예선투표에서 고노 의원이 획득한 의원 표는 86표로, 146표을 얻은 기시다 의원과 114표를 얻은 다카이치 의원에 이어서 3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다카이치 의원이 의원 표에서 고노 의원을 앞섰다는 것은 아베 전 수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녀의 보수적 입장이 동료 의원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공히 의원과 당원 사이의 거리가 크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둘째는 1차 예선투표에서 고노 의원의 당원 표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169표에 그쳤다는 점이다. 1차 예선에서는 당원 표에 의원 표와 같은 382표가 배정됐는데, 국민적 인기를 모은 고노 의원에게 당원 표의 반 이상이 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여러 요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겠지만, 그중 하나는 당원 표가 의원 표의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는 2차 결선투표에서는 기시다 의원이 반 이상의 의원 표를 얻었다는 것이다. 고노 의원은 47표의 당원 표 중에서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39표를 얻었음에도 의원 표가 131표밖에 되지 않음으로써 이 둘을 합해도 기시다 의원이 의원 표로 얻은 249표에 미치지 못했다. 의원 표의 의향이 크게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엘리트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이번 총재 선거는 자민당의 파벌의 순기능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파벌이 이념이나 정책적으로 형성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총재 선거를 통해서 정책 대결이 진행될 수 있음을 이번 선거는 보여줬다.

정치적 무관심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저해 측면도


▎ 사진:연합뉴스
기시다 의원이 이케다 전 총리의 ‘소득배가 정책’을 낳았던 ‘고치카이’의 저력을 바탕으로 제시한 ‘레이와(令和)판 소득배가 정책’이나 고노 의원이 내놓은 최저액의 ‘보장연금 구상’은 현재 일본이 당면한 문제 중에서도 중요한 ‘격차의 해소’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당 내외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들 정책이 어떠한 성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점은 현재로서 미지수이지만, 이러한 잠재력이 있기에 일본 유권자들이 자민당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순기능적 측면은 세습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한 보고에 따르면 자민당 내에서 2~3세 의원은 4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자민당 내에 이처럼 2~3세 의원이 많은 이유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2~3세 의원들이기 때문에 누구의 아들 또는 손자라는 지명도가 있고, 세습에 따라 기존의 지역구 조직을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경쟁자보다 유리하다. 예를 들어 해당 지역구 의원이 은퇴하거나 갑작스럽게 사망할 경우, 그 지지자들은 새 후보자를 내세우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된다. 이럴 때 소위 ‘3방’(가방[자금]·간판[지명도]·지반[지역기반])을 가진 2~3세 정치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문화적인 측면이다. 한국이라고 2~3세 의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실을 크게 내세우지 않는 반면 일본에서는 내세워도 크게 문제 되지 않고 되레 용인하는 문화적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해서는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의 제3장에서 언급한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의 측면을 언급할 수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분수 지키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러한 측면이 ‘장인정신’의 숙련된 기술을 낳기도 하고, 2~3세 의원이라는 현상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파벌정치와 세습정치는 금권 정치나 정치적 무관심에 의한 엘리트 정치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작동을 저해하는 측면을 가진다. 1955년에 성립된 자민당이 38년간이나 장기집권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속성과 연관돼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자민당에 의한 장기집권 체제인 ‘55년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근본적으로는 금권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발이었지만, 직접적으로는 파벌 간의 경쟁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파벌 경쟁을 이끈 주요 인물이 선거에서 재선할 자신이 있었던 세습 의원들이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일본에서 파벌정치와 세습정치는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선호하는 일본 문화 특성상 안정을 유지하면서도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기에 아직 유지되는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 이면우 세종연구소 부소장 mwlee@sejong.org

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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