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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의 국가를 품격 있게 만든 지도자들(1)] ‘아시아의 현인’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실용주의 리더십 

“정부 체계 미비하더라도 지도자 뛰어나면 국가는 성공적으로 운영된다” 

인재 발탁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기준은 분석력·상상력·현실감각
‘정치적 측근’ 아닌 전문 인재 등용 통해 경쟁력 있는 나라 만들어


▎‘아시아의 현인’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정치적 슬로건이 아닌 정책의 실현 가능 여부를 중시했다. 2006년 씨티은행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해 특강을 하고 있는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몇 가지 있다. 국가의 방향을 선도하는 혜안, 통합적 의사결정 과정, 지지층만이 아닌 국가 전체를 바라보는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 등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내년 3월 우리는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뽑는다. 이 글의 연재를 통해 차기 대통령이 유념해야 할 점들을 담으려 한다. [편집자 주]

1995년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해 시가지로 이동하면서 느낀 감정이 지금도 되살아난다. 물 흘러가듯 기다림 없이 공항의 수속절차가 이뤄지고, 공항 문을 나서 시내 중심까지 막힘없이 숙소에 도착했다. 시내로 들어오는 도로변의 울창한 야자수는 열대의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당시 한국의 공항 수속은 너무나 복잡했고, 도로 곳곳은 개발을 이유로 파헤쳐져 있었으며, 도로에서 내뿜는 매연은 거의 통제되지 않았기에 싱가포르의 산뜻한 모습은 나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다.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전후만 하더라도 도처에 쓰레기가 난무하고 항구의 어수선함이 가득했던 허름한 도시였지만, 30년 만에 동남아시아의 정보·금융·물류의 허브가 되고 환경·교통·주택 등 국민의 복지도 일류 수준에 이르렀다.

싱가포르에 대한 깊은 인상으로 근무하는 3년여 동안, 그리고 떠난 이후에도 리콴유(1923~2015)가 어떻게 국가를 운영했는지 지속해서 살펴보게 됐다. 또 다른 나라에 근무하면서도 이러한 생각이 옮겨져 그 국가의 현상과 지도자의 통치력을 눈여겨보게 됐다. 리콴유는 인재 등용·역사인식·국가안보·실용적 접근 등 지도자의 필수적인 자질을 강조했다. 정치 시스템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도자의 역량이 부족하면 국민은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정부 체계가 일부 미비하더라도 지도자가 뛰어나면 국가가 성공적으로 운영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리콴유는 끊임없이 효율적이고 창조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인재를 찾았다. 그는 통상 정치인들이 선거 기간 도움을 준 사람들을 등용하는 잘못된 경향을 지적하면서, 인재를 등용할 때 정치적 논리를 배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투명하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국가나 중요 기관을 이끌 인재를 발탁했는데, 그 기준은 분석력·상상력·현실감각 등이었다.

그는 지도층 인사라면 국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뚜렷한 역사인식과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봤다. 역사가 매번 똑같은 식으로 반복되지는 않지만 특정한 경향과 인과를 나타내기에 역사를 모르면 단기적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역사를 알면 중장기적인 사고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역사관은 목표를 달성하는 실용적인 정책과도 연결돼 있었다.

리콴유는 일본이 군사력으로 영국을 몰아낸 후 잔혹하게 통치하는 것을 보고, 싱가포르가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됐다. 그는 국가 존위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국방에 최우선 목표를 뒀다. 평화는 공짜가 아니며, 어느 나라라도 싱가포르를 공격하면, 그 나라도 상당한 피해를 볼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정책으로 실천했다. 그는 재임 중 각료 가운데 국방부 장관을 총리 다음 서열로 뒀다. 또 젊은 남성들은 2년간 의무복무를 하게 하고, GDP(국내총생산)의 5~6%를 국방 예산으로 책정하는 한편 철저하게 예비군 훈련을 했다.

슬로건 대신 실용… 정책 전환은 유연하게


▎2015년 3월 25일(현지시간)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관을 실은 운구차(가운데)가 이스타나 대통령궁 정문에서 출발해 의사당 쪽으로 향하고 있다. 싱가포르 국민 수만 명이 국기를 흔들며 리 전 총리를 애도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싱가포르가 아무리 국방을 중요시한다고 하더라도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를 능가하지 못할 터인데 국방에 대한 과도한 조치는 되레 주변국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주변국의 군사력이 싱가포르가 대응할 수준을 훨씬 상회할 뿐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물과 간척을 위한 모래 등을 주변국에서 수입하는 상황에서 강한 군사훈련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당시 주변국과의 군사적 긴장이 없는 상황에서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싱가포르 외교관으로부터 예비군 훈련에 대한 그의 경험을 전해 듣고 북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키는 데 해이해져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됐다. 그 외교관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아세안(ASEAN)과 아세안지역포럼(ARF)을 담당하고 있었다. 아세안 회원국들은 ASEAN·ARF 회의를 돌아가면서 개최하는데, 싱가포르 순번일 때 그는 회의를 실무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위 대표단이 방문할 예정이어서 그와 수시로 업무 협의를 했는데, 회의 개최 얼마 전부터 약 일주일간 그와 연락이 되지 않아 행사를 준비하는 데 애로가 생겼다.

그가 다시 나타났을 때 부재 이유를 물었더니, 예비군 훈련을 하러 갔는데 실전같이 빡빡한 훈련을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의 경우 예비군 훈련에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려 한다. 또 설령 참석한다 해도 시간 때우기라고 할 정도로 훈련의 강도가 매우 미약했던 점에 비춰, 그의 설명을 듣고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리콴유는 스스로 실용주의자라고 했는데 그 정도로 현실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처음 제시했던 방안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대안을 찾아 유연성 있게 전환하곤 했다. 그는 국정을 운영하는 데 정치적 슬로건이나 약속이 아닌, 실현 가능 여부와 목표 성과의 달성 여부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그의 실용적인 가치관은 여러 정책으로 나타났는데 내가 실제 경험한 것은 보육정책이었다. 싱가포르의 한국 대사관은 시내 중심의 큰 빌딩에 있었다. 부임해서 처음 대사관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을 때 여성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오가고 있었다. 눈여겨보니 건물 지하 1층의 보육시설에 아이들을 맡긴 뒤 건물 내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이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자격증을 가진 보육교사가 아이들을 맡아주고 있어, 여성들이 일하는 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건물마다 이러한 보육시설을 갖추게 돼 있었던 걸로 봐서 정부가 여성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유와 창의 규제한다는 비판적 시각도


▎리콴유(왼쪽) 총리가 1978년 싱가포르를 방문한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리콴유의 또 다른 실용적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는 교통정책이다. 1990년대 중반 싱가포르에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대표단이 방문해 공항에 나가 영접하곤 했다. 그럼에도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은 교통체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나오면서부터 시내까지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차에서 25분 정도 대표단에 브리핑하고 5분 동안 질의·응답을 하면 숙소에 도착했다.

몇 년 전 다시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기회에 예전과 같은 거리의 운행시간을 재보니 거의 변함없이 30여 분 걸렸다. 이처럼 교통의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은 국민에게 가능한 한 대중교통을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한편, 교통 허용량 안에서만 자동차 등록증을 엄격히 제한해 발급하기 때문이었다.

싱가포르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많지만, 실용적 측면이나 사회질서 유지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규제한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유교적인 가치관과 질서 유지’를 강조하는 고위 인사의 설명을 듣고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싱가포르의 셀라판 라마 나단 6대 대통령이 국방전략연구소장이던 시절,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가 싱가포르에 대한 특별한 소감이 있는지 묻길래 아이가 그림 대회에 나갔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고작 대여섯 살짜리 아이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대신 컴퍼스와 자를 가져와 산을 그릴 때 자를 사용하고 해를 그릴 때 컴퍼스를 이용하는 걸 보면서 창의성보다 정교함에 집착하는데 놀랐다고 대답했다. 이에 라마 나단 소장은 어릴 때부터 질서와 규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예술에까지 정부의 방침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싱가포르에서 문화가 발전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1995년, 싱가포르를 방문한 이홍구 국무총리가 리콴유 선임장관과 면담하던 때의 분위기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리콴유는 싱가포르가 독립한 1965년부터 1990년까지 35년간 총리를 역임한 이후 고촉통 총리에게 권력을 이양한 뒤 선임장관의 직책을 신설해 자신은 싱가포르의 중장기 전략을 구상하거나 국제 흐름에 대한 식견을 세계 여러 지도자와 공유했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아시아의 현인으로 지칭되는 지도자와의 회담이어서 실무자로서 어느 때보다 많은 자료를 준비했지만, 실상 자료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두 지도자가 착석하자 리콴유가 곧바로 중국에 대한 이홍구 총리의 평가와 전망에 관해 물으면서 자료 없이 자유토론 방식으로 회담을 이끌어나갔기 때문이다. 그는 수천 년에 걸쳐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 그 가운데 국제정치 학자로 명성이 높은 이홍구 총리의 중국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두 지도자가 외교적 격식에 구애함 없이 중국의 변화에 대한 심도 있는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미국은 중국과 지배적 지위 공유해야”


▎싱가포르 독립 전인 1963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PAP)이 압승을 거두자 지지자들이 리콴유를 목말 태우며 기뻐하고 있다
리콴유는 바쁜 총리직을 수행하면서도 1980년 이래 거의 매년 중국을 방문해 지도층 인사와 의견을 교환하고, 방문 때마다 8~10일간 중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중국의 변화를 예리하게 파악했다. 그는 중국의 부상(浮上)을 예견하면서 국제사회의 대응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곤 했다. 중국 문제에 대한 그의 식견은 독보적이었고, 2015년 서거할 때까지 세계 주요 지도자들은 싱가포르를 방문할 때마다 중국에 대해 그에게 자문(諮問)했는데, 그의 의견과 평가는 늘 국제사회의 화두가 됐다.

시일이 지나면서 중국의 부상이 뚜렷해지자, 중국의 변화가 가져올 국제사회의 충격이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중국이 향후 아태지역에서 미국을 능가할 주도적인 국가가 될 것인가, 된다면 그 시점은 언제일까, 미·중 간의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할 것인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해 중국이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가 하는 등 여러 문제가 제기됐다.

리콴유는 미국이 군사적·기술적 우위로 당분간 아태지역을 주도하겠지만, 2030~2040년을 즈음해 국민총생산(GNP) 면에서는 중국이 미국과 견줄 수준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후 중국이 국내 소요사태 없이 순조롭게 발전할 경우 2060년쯤 아태지역에서 미국을 앞설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예견했다.

중국의 부상에 따라 미·중 간 충돌이 발생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리콴유는 미국과 중국이 서로 경쟁은 하지만 2030~2040년까지 서로 충돌할 가능성은 작은 것으로 봤다. 그 이유로 중국은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는 안정, 대외적으로는 평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당분간 기존 국제질서에 도전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의 부상에 따라 권력추가 움직이는 과정에서 미·중 간의 불협화음은 20세기 영국에서 미국으로 권력이 이동하던 당시보다 더 많이 표출될 것으로 내다봤다.

리콴유는 중국이 성장하면서 향후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우호 여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의 적극적인 균형자적 역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중국은 자국은 패권국이 아니라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에 리콴유는 패권국이 아니라면서 이를 자꾸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국이 거대한 시장과 구매력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을 자국의 경제체제 안에 흡수하고 있는 만큼 일본·인도 등 여러 아시아 국가가 단합하더라도 대응이 어려울 정도가 됐다고 진단했다. 나아가 중국이 평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하지만, 과거 역사를 돌이켜볼 때 주변국과의 비대칭적인 힘의 관계가 있었던 점을 상기시켰다. 중국은 미국과 달리 관대한 강국이 아니기에 아시아 지역에서 기울어진 힘의 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미국의 적극적 관여가 필요하며, 이는 동아시아 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입장이다.

중국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철하고 비판적이며 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중국의 중요성도 강조하는 등 균형감을 잃지 않았다. 그는 중국이 소련처럼 이념적인 경쟁으로 소멸할 국가가 아니며, 미국에 견줄 수 있는 최강국이 될 잠재력을 가진 나라임을 국제사회가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막으려 할 게 아니라 중국과 지배적 지위를 공유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중국을 적으로 돌리기보다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는 가운데 중국이 국제 협력의 길로 나아가도록 유인책을 제시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이다.

리콴유는 중국의 부상에 대비해 아태지역에서 미국의 균형자적 역할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중국 젊은 층 사이에서 리콴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성장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한편 국제 지도자들에게 중국의 역량이나 잠재력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함을 강조함으로써 중국 지도층으로부터 신뢰를 얻었다.

이와 함께 중국의 비효율적인 인력 운영과 관리되지 않은 행정 실태, 열악한 도로체계, 풍부한 관광자원의 미활용 등 부정적인 면을 적시하는 한편, 해결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중국 발전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덩샤오핑은 아세안 국가와의 지역적 협력을 위해 리콴유에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자문했다. 또 덩샤오핑은 중국 인사들에게 “개혁·개방의 성공을 위해 싱가포르를 배우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중국의 각계 대표단이 줄을 이어 싱가포르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뢰감이 쌓여 자오쯔양 총리는 리콴유를 중국의 오랜 동지라고 지칭했고, 시진핑 현 국가주석은 리콴유가 타계했을 때 그를 중국 인민의 오랜 친구라고 지칭하면서 조의를 표했다.

중국은 협력 끌어내야 할 상대, 특성 파악해야

리콴유는 한 세대 이전의 인물이지만 그의 국정운영 방식은 우리 지도층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도자는 엄격한 과정을 거쳐 등용된 인재의 조언을 받아 단기간의 안목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시각으로 정책을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전략적인 시각과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따뜻한 취지로 선택한 정책일지라도 기대한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대안 정책으로 선회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현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가운데 실천 가능한 정책을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해서 과거를 전부 부정하거나 타당성이 입증된 기본가치와 원칙을 바꿔서는 안 된다.

중국에 대한 리콴유의 통찰력은 중국의 변화된 과정과 현재의 발전된 모습이 증명하고 있다. 아울러 닉슨부터 오바마까지 미국 대통령들이 중국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경청한 이유는 리콴유가 중국 문화를 잘 이해하는 가운데 중국 지도층과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면서 중국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갖췄던 지도자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중국과 수천 년에 걸쳐 국경을 접하고 가장 빈번하게 교류했던 우리는 중국을 잘 알고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조선 지도층의 과도한 중화의식과 유교에 대한 맹신으로 조선 왕조 내내 중국의 압력을 받았다. 근래에도 우리 지도층이 언급했던 내용을 보면 그러한 관례가 답습되지 않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중국은 협력을 끌어내야 할 중요한 상대이기에 그들의 특성을 치밀하게 파악해서 대처해야 한다.

이런데도 우리가 중국의 입장에 맞추기만 하면 한·중 관계가 원만하게 전개된다고 믿거나, 중국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것이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극단적 시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에 반해 조그만 섬나라의 지도자인 리콴유는 중국을 직시하고 냉철하게 대응하면서 중국이 책임 있는 이웃 나라로 성장하도록 성의껏 지원했다. 중국 지도층이 싱가포르를 가볍게 보지 않고, 리콴유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보였다는 점을 우리는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리콴유는 터키의 아타튀르크, 러시아의 레닌, 중국의 덩샤오핑과 같이 국가를 개조한 지도자로 평가된다. 키신저는 이에 더해 “국제문제에 대한 분석 수준이나 깊이가 탁월했던 지성인이고 전략적 감각을 가진 사상가”로도 평가했다. 리콴유는 통찰력 있는 역사인식, 정책을 슬로건이 아닌 성과 측면에서 평가하는 실용적 관점, 그리고 정치적 측근이 아닌 전문 인재 등용을 통해 현재의 경쟁력 있는 싱가포르를 이뤘다. 바로 이 점을 차기 우리 지도자들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 조윤수 - 미국·러시아·독일·싱가포르·쿠웨이트·터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2017년 주(駐)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한국유라 시아문명연구회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로 외교 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독일 통일 30년, 독일의 과거에 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등 근무한 국가의 모습과 주요 국제 사안 을 책으로 엮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자화상] [중앙유라시아에서 본 새로운 역사흐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2111호 (202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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