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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발굴] 평양·대만에 철저 보안 유지… 노태우의 북방외교 秘史 

“여기(구소련)를 돌파해야겠어. 남북대화도 하고 통일도 앞당겨야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 盧, 올림픽 유치 활동 다닐 때 소련 상공 통과 못하는 것 보며 ‘북방외교’ 결심
■ 한·중 수교 협의 막바지 때 덩샤오핑 건강 나빠졌단 소식 들리자 가속페달 밟아
■ 北 김일성 방해 공작 뚫고 미·소, 동서 모두 참가한 역대 최대 규모 올림픽 개최
■ “깊은 사려와 판단력, 보안 유지 통해 한국 외교사상 새 지평 열었다”는 평가도


▎대한민국 역사상 첫 번째 직선제 대통령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10월 26일 별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당시 북방외교와 통일 분야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받는다. 그러나 퇴임 후 밝혀진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 부정적인 평가 또한 적지 않다. 1992년 9월 28일 중국 인민대회당 공식 환영식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 노 대통령의 왼쪽은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이다. / 사진:노태우 전 대통령
노태우(1932~2021) 전 대통령이 지난 10월 26일 8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타계로 대한민국 현대사는 또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노태우 집권기(1988~1993)는 대한민국이 산업화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노 전 대통령은 유독 공과(功過)가 대비되는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12·12 쿠데타, 5·18 유혈 진압, 수천억 원 비자금 조성 등은 노 전 대통령의 어두운 그림자다. 반면 6·29 선언, 88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 소련·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 등 이른바 북방외교는 그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북방외교는 노 전 대통령의 혜안(慧眼)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월간중앙이 노태우 시대 최대 성과였던 북방외교를 재조명해봤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인 재헌씨(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를 다시 만난 건 2019년 7월 17일 오후 6시 30분께. 장소는 그의 자택(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울 서대문역 근처의 아담한 횟집이었다. 재헌씨는 “혹시 아버지한테 가봐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녁 약속 장소는 되도록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잡는다”고 말했다.

변호사인 재헌씨는 2012년 동아시아문화센터(구 한·중 문화센터)를 열었다. 2012년은 한·중 수교 20주년이 되던 해였다. 그는 “훗날 아버지의 유업(遺業)이 될 한·중 수교의 뜻을 기리고, 민간 차원에서 양국의 문화 교류를 위해 동아시아문화센터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이날 재헌씨를 만난 것도 3년 뒤인 202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행사 계획 등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 재헌씨는 백과사전처럼 두툼한 책 한 권을 건넸다. 제목은 <노태우 대통령을 말한다>(2011년 동화출판사). 노태우 정부와 관련된 국내외 인사 175인의 기록이 담긴 950쪽 분량의 책이었다. 재헌씨는 “나중에 한번 열어보라”며 웃었다.

그로부터 2년 3개월여 뒤인 2021년 10월 26일, 재헌씨에게 받은 책을 열었다. 노태우 집권기 당시 정치·경제·사회·국제 등 거의 모든 분야와 관련해 노태우 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 또는 노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이들의 증언과 기록이 담겨 있었다. 월간중앙은 그 가운데에서 북방외교, 그리고 북방외교의 밑거름이 됐던 88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기록들에 주목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말한다]에 따르면 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가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을 만난 건 1988년 초였다. 당시 노 당선인은 김 교수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설치된 금융연수원으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노 당선인은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유럽을 다닐 때의 경험을 들려줬다. 소련 상공을 통과하지 못하다 보니 알래스카를 경유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시간이 두 배나 걸리는 걸 보고 노 당선인의 결심이 섰다는 것이었다.

“여기를 돌파해야겠어. 앞으로 북방외교가 필요할 것 같아. 남북대화도 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이룩하고 통일도 앞당겨야지. 우리가 이런 것을 위해 북한에 직접 가기보다는 우회하는 게 어떨까. 북쪽을 통해 평양으로 접근해간다는 생각 말이야. 김 교수, 거기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1988년 초가 어떤 때인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하는 등 냉전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또 소련 공군기에 의해 한국의 민간기(KAL)가 격추된 게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걱정하던 노 당선인은 임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북방정책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정한 것이었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박철언 당시 대통령 정책보좌관과 김 교수를 같은 시기에 별도의 채널을 통해 모스크바로 보내 ‘소련의 앞날’을 검토하게 한 것도 노 전 대통령이었다.

“앞으로는 북방외교가 필요할 것 같아”


그해 2월 25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임기 시작 5개월 만인 1988년 7월 7일 이른바 7·7선언을 통해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할 의사가 있음을 천명한다”는 내용의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 후 88 서울올림픽에 소련과 헝가리 등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대거 참가했다. 이어 1989년 2월 헝가리와의 외교 관계 수립을 시작으로 ▷폴란드(1989년 11월) ▷몽골(1990년 3월) ▷소련(1990년 9월) ▷중국(1992년 8월) ▷베트남(1992년 12월)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 잇달아 수교했다.

다른 나라들이야 수교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은 예외였다. 중국과의 수교는 곧 대만과의 단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수교가 발표(1992년 8월 24일) 된 지 열흘쯤 지나서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에서는 대만 정부에 우리 측 사절단을 보내 사과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김재순 전 국회의장을 필두로 한 진사(陳謝) 사절단은 9월 15일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진수지(金樹基) 전 주한대사 등 대만정부 관계자들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줬다. 그런데 공항 귀빈실에 들어가려는 찰나, 일이 벌어졌다. 공항 직원들이 갑자기 몰려들어 “중화민국 귀빈실은 배신자들에게 열리지 않는다”며 사절단을 가로막았다. 대만 기자들은 마이크를 사절단에 들이대며 인터뷰하는 시늉을 했지만, 사실상 야유나 다를 바 없었다.

베이징에서 한·중 외교부 장관이 역사적인 양국 수교 문서에 서명·발표하던 그날, 서울 한복판인 명동의 대만 대사관에서는 주한 대만인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 하강식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과의 외교를 단절하는 장례식과도 같은 의식이었다.

하강식이 끝나자 대만인들은 서로 얼싸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특히 서울 현지 대사가 한국의 전직 국회의장과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은 TV를 통해 대만 전국에 생중계됐고, 대만 일간지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국내 언론 어디에서도 그 광경을 보도하지 않았다. 진 대사는 김 전 의장을 붙잡고 하소연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통보를 받기 불과 며칠 전 청와대로 노태우 대통령을 예방했었습니다. 이때 대통령께서는 우리와의 단교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셨어요. 우리에게 이럴 수 있습니까?”

당시 노태우 정부는 중국과의 수교를 준비하면서 시종일관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다. 특히 대만에 대해서는 한·중 수교에 관한 모든 협상이 끝나고 공식 발표 며칠 전에야 비로소 운을 떼기 시작했다. 수교 발표 1주일 전인 8월 18일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진 대사를 서울 명동 롯데호텔로 불러 ‘한국과 중국과의 수교’ 그리고 ‘대만과의 단교’가 예정돼 있음을 처음으로 공식 통보했다.

“미안하고 아프지만 국가의 미래와 이익이 더 중요”


▎1992년 9월 28일 중국을 공식 방문 중인 노태우 대통령이 베이징 인민대회당 복건청에서 양상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3박 4일간의 진사 사절단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김 전 의장은 한 달쯤 뒤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에게 그간의 활동 과정을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김 전 의장은 ‘한·중 수교 공식 발표 불과 며칠 전 대만대사를 접견했을 때 왜 한국과 대만의 단교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노 대통령에게 물었다. 노 대통령은 “지금도 공개적으로 말하기에는 시기가 이르다”고 어렵게 운을 뗀 뒤 설명을 이어갔다.

“난들 대만에 대해 미안하고 아픈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국가의 미래와 국가의 이익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중 수교 협상의 막바지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로서는 실용 외교와 실용 정책을 추구해온 그분의 생존 시 수교를 성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중 수교 협상이 좌초할 수도 있을 것을 우려했습니다. 다만, 단교를 앞두고 대만대사를 만나 마음으로라도 위로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노 대통령은 당시 베이징 정부가 한·중 수교 협상 사실을 평양에 끝까지 함구하겠다며, 한국 정부도 이를 대만에 비밀로 지켜달라고 요청해왔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중국과의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화룡점정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면 중국과의 수교 2년 전인 1990년,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과의 수교가 북방외교의 분수령이 됐다.

주한미국대사를 거쳐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을 지낸 도널드 그레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치적을 평하면서 외정에서는 1980년대 북방외교를, 내정에서는 권위주의 정부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점을 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 가운데 동서 냉전시대 공산권의 종주국이던 소비에트연방(소련)을 공식 방문한 첫 번째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이다.

우리 외교에서 북방외교라는 단어가 맨 처음 공식화된 것은 1983년 6월 29일 국방대학원이 주최한 이범석 당시 외무부 장관의 ‘6·23 선언 10주년 특강’에서였다. 이 장관은 “선진조국의 창조를 위한 외교 과제’라는 주제의 특강에서 “우리 외교가 풀어야 할 과제는 소련과 중공(중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북방정책에 있다”고 강조했다. 당시 한국은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개최됐던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를 확정한 상태였고, 소련과 중공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이 참가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6·23 선언은 1973년 6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이 천명한 ‘평화 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이다. 6·23 선언 제6항에서 우리 정부는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할 것이며,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도 우리에게 문호를 개방할 것을 촉구한다’고 명시됐다.

이 정책이 외교적 현실성을 띤 것은 1989년 11월 17일 한·소 양국이 싱가포르에서 양국의 영사처 설치에 관한 합의의정서에 서명하면서부터다. 이 ‘합의의정서’에 따르면 양국의 외교 공무원에 의해 영사 업무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영사처에 국기를 게양하지 않기로 하고, 양국이 서울과 모스크바에 가진 상공회의소 사무소에 국기를 두기로 했다.

“올해 안에 모스크바로 갈 수 있도록 하라”


▎1990년 12월 14일 소련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양국의 합의의정서 서명 이후 누가 초대 영사처장으로 모스크바에 가느냐가 외무부 안팎의 큰 관심사였다. 세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결국 공노명 당시 뉴욕 총영사가 낙점됐다. 1990년 2월 19일 노 대통령은 공 영사를 불러 임명장을 수여한 뒤 다과를 나누는 자리에서 “연내에는 모스크바를 구경할 수 있도록 하라”며 소련과의 수교에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후 노 대통령은 1990년 3월 김영삼 당시 민자당 최고위원과 박철언 정무1장관 편에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 친서에는 ‘김영삼 최고위원과 박철언 장관을 통해 우리의 민주화, 남북한 관계 개선 의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노력 그리고 한·소 관계 개선을 위한 우리의 노력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던 걸로 전해진다.

우리의 강한 대소 수교 의지가 소련 측에 전달되면서 1990년 6월 5일 미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 호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노태우 대통령 내외의 소련 국빈 방문은 한·소 수교 이후인 1990년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이뤄졌다. 노 대통령은 “나의 소련 방문은 우리 두 나라가 냉전시대를 종식하고 평화와 협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음을 온 세계에 실증하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88 서울올림픽 성공 개최는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한의 동구권 국가들과의 수교로 이어졌다. 88 서울올림픽이 북방외교의 밑거름이었다. 원래 올림픽 유치는 박정희 대통령 생시에 결정돼 서울시장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유치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10·26 사태로 유치 계획이 보류됐다가 전두환 대통령 집권기인 1981년 2월 26일 IOC에 정식 신청서를 제출했다.

중국·러시아 등 공산국가들의 올림픽 참가 이끌어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제24회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노태우 대통령 내외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유치 경쟁 상대는 일본 나고야. 청와대 내부에서도 “일본을 이길 수 있겠냐”, “설혹 유치에 성공한다 해도 막대한 행사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등 비판과 반대의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 전두환 대통령은 올림픽을 반드시 유치하라며 노태우 정무장관에게 유치 활동을 지휘할 것을 지시했다. 신청서를 제출한 다음 날 노 장관은 올림픽 유치 비상대책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날을 계기로 올림픽 유치 활동이 범국민적 차원에서 활성화됐다. 그 결과 9월 30일 IOC 총회에서 서울은 52 대 27, 거의 더블 스코어 차이로 나고야를 누르고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 도시로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은 88 서울올림픽 대회조직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북방외교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게 당시 정부 주요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올림픽 경기 국제공인용품(예를 들어 하키 경기장의 스크린 보드)을 구입할 때 다소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의도적으로 동구권 국가들의 제품을 선택했다. 그렇게 공인용품을 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헝가리와의 접촉이 이뤄졌다. 헝가리는 동구권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88 서울올림픽 참가를 선언했다.

노 전 대통령은 ‘죽(竹)의 장막’ 중국에 대해서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당시 중국은 금메달 94개로 93개인 한국을 1개 차로 간신히 따돌리고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개최지 이점을 바탕으로 좀 더 노력했더라면 한국의 종합우승이 가능했겠지만, 2년 뒤 중국의 서울올림픽 참가를 염두에 두고, 그들의 우승을 축하하며 친근감을 쌓아갔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준비에 적극 협력했다.

이 같은 노 전 대통령의 전략과 정성은 명실상부한 세계인의 축제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김일성이 모스크바까지 직접 찾아가 불참과 보이콧을 간청했음에도 고르바초프는 이를 거절했고, 12년 만에 미·소, 동서양이 모두 참가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개최됐다.

88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 국력·국격 신장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됐다. 앞선 두 차례 올림픽(80년 모스크바올림픽, 84년 LA올림픽)은 동서 진영 간 냉전과 이념 대립으로 인해 ‘반쪽 올림픽’에 불과했다. 하지만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역설적으로 온전한 올림픽이 열리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올림픽 성공 개최를 계기로 당시 노 대통령이 추진하던 북방정책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그동안 접촉이 어려웠던 공산권 국가들의 주요 인사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직접 목도하고 체험했다. 그에 따른 파급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우선, 1990년 소련과의 수교에 이어 중국과의 관계 개선 움직임 중에 우리 외교의 숙원이었던 유엔 가입이 이뤄졌다. 1991년 9월 17일 제46차 유엔총회는 남북한의 유엔 가입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킴으로써 우리나라는 1949년 1월 유엔 가입을 신청한 이후 42년 만에 소원을 풀었다. 시점으로 보면 소련과의 수교, 중국과의 수교 사이에 유엔 가입이 이뤄진 것이다.

우리 외교의 숙원, 유엔 가입을 이루다


▎1989년 11월 23일 헝가리 국회의사당에서 연설하고 있는 노태우 대통령.
한국 유엔 가입의 가장 큰 걸림돌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인 소련이었다. 만일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한국의 유엔 가입은 불가능했다. 소련은 한국과 수교했음에도 유엔 가입 문제에 관해서는 ‘남북이 원만하게 합의해서 공동으로 가입하는 게 좋겠다’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

노태우 정부는 1991년 4월 제주도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을 문제 해결의 열쇠로 이용했다. 회담 직전 이상옥 당시 외무부 장관이 노 대통령에게 한국의 유엔 가입에 대한 소련의 입장을 직접 물어달라고 건의했다. 이에 노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에게 직접 이 문제를 거론했다. 이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 정부는 유엔 가입안에 한층 더 확신을 갖고 이 문제를 추진하게 됐다.

북방정책의 성공적 추진과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이후 남북관계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남북은 유엔 동시 가입 약 석 달 후인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 북방정책으로 인해 대부분의 공산국가가 한국과 수교하자 북한은 외교적 대안 마련에 골몰했다. 그때 마침 유엔 가입으로 국제무대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자 북한은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서방권 국가들과의 수교 명분을 얻으려 했다. 그리고 그 명분이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3년 전인, 그러니까 노태우 정부 출범 첫해였던 1988년 7·7 선언으로 북한을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정책 방향과 함께 우리도 공산권 국가들과 관계 개선을 추진하겠다는 북방정책을 천명했었다. 그 첫 대상국으로 지목된 헝가리와의 수교는 1989년 2월 1일 이뤄졌고, 뒤를 이어 도미노처럼 폴란드·유고·유고슬라비아·체코·불가리아·루마니아·동독과 줄줄이 외교 관계가 수립됐다. 몽골과의 수교 역시 손쉽게 이뤄졌다.

이상옥 전 외무부 장관은 [노태우 대통령을 말한다]에 기고한 글에서 “1992년 12월 24일 베트남과의 수교가 이뤄짐으로써 북방외교는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며 “북방외교의 추진과 성공은 실로 국가 원수인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노 대통령 자신이 북방외교의 원동력이 됐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일 정상회담의 새로운 모델도 제시


▎10월 30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고 노태우 전 대통령 국가장 영결식에서 부인 김옥숙 여사, 장녀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장남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 등 유족들이 헌화를 마친 뒤 좌석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1992년 8월 한·중 수교 이후 한국 내 일부 언론은 “이제부터는 중국과 손잡고 일본에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나섰다. 이 같은 내용이 일본 언론을 통해 일본 국민에 알려지면서 한국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이 조성되는 듯했다.

설상가상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북방 4개 도시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강경 입장을 고수하자 돌연 일본 방문을 취소하고 한국만 예정대로 방문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일본 언론은 러시아뿐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감정을 표하는 듯했다.

이때 노 대통령은 한반도 주변 4강 중 미국·중국·러시아 정상들과는 연쇄적으로 회담하면서 일본만 제외할 경우 한·일 관계가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크게 우려했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당시 오재희 주일대사의 ‘대통령의 방일 당위성 보고’를 받은 뒤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오 대사에게 보여줬다. “일본에 꼭 가야 한다면 주말인 11월 7일(토)과 8일(일)밖에 없다”고 당부했다.

이렇게 해서 1992년 11월 7일과 8일 노태우 대통령의 교토 방문이 확정됐다. 일정은 ▷노 대통령은 11월 7일 오후 오사카를 경유해 교토에 도착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신칸센 열차 편으로 교토에 도착 ▷미야자와 총리가 노 대통령 환영 만찬 주최 ▷11월 8일 오전에 정상회담 ▷노 대통령은 오사카 경유해 귀국이었다.

그런데 일본 측에서 갑자기 “노 대통령 교토 방문 일정을 8일 하루만으로 단축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유인즉 국회의 요청에 따라 미야자와 총리가 7일 저녁까지 국회에 묶이게 됨에 따라 그날 저녁을 노 대통령이 교토에서 혼자 지내야 하는데, 그건 외교적으로 큰 결례인 만큼 차라리 무박 일정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8일 교토에서 오찬을 겸한 양국 정상회담을 개최한 뒤 그날 노 대통령이 귀국하는 방안이었다.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단 하루 만에 외국 방문을 마친 경우는 없었고, 일본으로서도 총리가 도쿄 아닌 곳에서 정상회담을 한 적은 없었다. ‘무박 일정의 교토 정상회담’은 두 나라 모두에 파격이었다. 수일간의 검토 후 우리 정부가 일본 측의 요청을 수락하면서 역사적인 노태우-미야자와 교토 정상회담이 열렸다.

11·8 교토 정상회담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모델로 평가받았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정상 간 교류에서 중요한 선례가 됐다. 또 이를 계기로 역대 정부하에서 한·일 정상회담의 유형이 매우 다양화됐고, 회담 장소도 굳이 서울이나 도쿄에 국한하지 않고, 형편에 따라 양국의 지방 도시 또는 제3국의 도시가 선택되기도 했다.

박준규(1925~2014) 전 국회의장은 <노태우 대통령을 말한다>에 기고한 글에서 노 전 대통령의 외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말만 앞세우고 포퓰리즘적인 선전 위주의 외교를 일삼던 일부 정치 지도자와 달리 노 대통령은 그 ‘음흉’하리만큼 깊은 사려와 속을 내비치지 않는 성품으로 중국과의 수교 직전까지 보안을 유지함으로써 우리 외교사상 새 지평을 열었다. 그 당시 대만의 국민당 정부 친구들에게 결과적으로 냉수를 마시게 한 것은 국가의 이익을 앞세우는 여간 굳은 심지와 판단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박스기사] 권력 정점 올랐으나 퇴임 후 암울했던 말년 - 6·29 선언과 북방외교 등은 후한 점수, 12·12 쿠데타와 광주 유혈진압은 부정 평가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1987년 6월 29일 여의도 당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를 통해 한국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두환 정권의 2인자였던 그는 1987년 여당인 민주정의당 대표를 거쳐 제13대 대통령에 선출되며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민정당 대표 시절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고, 전두환 정권 청문회를 개최하는 등 민주화 발전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재임 당시 북방외교와 통일 분야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받는다. 그러나 퇴임 후 드러난 천문학적인 금액의 비자금,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 등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퇴임 이후 말년의 삶은 대체로 암울했다.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1995년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예치된 110억원 계좌 조회표를 제시하며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억원설’을 폭로했다. 검찰 수사 진행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5000억원을 기업으로부터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해 1심에서 비자금 수수와 뇌물 조성 혐의 등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전직 대통령 중 최초로 구속되는 불명예를 안은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비자금 사건에 대한 대법원 선고 공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다. 1997년 특별사면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지만, 심신이 많이 쇠해진 상태였다.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석에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다.

노 전 대통령은 끝내 6·29 선언의 실질적 주체, 12·12와 5·18의 진실,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과정, 불법 비자금의 용처 등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아들 재헌씨가 2019년부터 부친을 대신해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 사과하고 있다. 재헌씨는 지난해 5월에도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 헌화하고 사과했다.

재헌씨는 2020년 월간중앙 7월 호 단독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대신한 광주 방문과 사과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많은 분이 제 아버지가 5·18 특별법이 제정돼서 처벌받은 사실은 기억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 5·18에 대해 너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6·29 선언의 씨앗은 5·18이라는 확고한 소신도 가지고 계셨고요. 또 5·18 보상 관련 법률이 제정되는 데 아버지의 건의나 소신이 받아들여진 측면도 있다고 저희 가족은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이후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서 아버지가 광주에 대한 가해자로만 인식됐던 것 같습니다. 자식으로서 대신 사죄하는 것도 5·18에 대한 아버지의 일관된 생각의 연장선상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옥숙 여사가 노태우 전 대통령 취임 당일인 1988년 2월 25일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구묘역의 이한열 열사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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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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