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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기업]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탄생 100주년 맞아 재조명 

“거기 가봤나?”, ‘현장’ 강조한 대한해협의 거인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우유 배달원으로 시작해 재계 5위 대기업으로 우뚝 서
장학사업으로 5만 명 지원…“국가와 인류에 기여” 당부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하는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롯데를 유통, 석유화학, 식품, 관광, 건설, 제조 등을 아우르는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 사진:롯데그룹
롯데그룹의 창업주 고(故) 상전(象殿) 신격호 명예회장의 업적과 철학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재조명받고 있다. 신 명예회장은 1967년 롯데제과를 창립해 모국인 한국에 투자를 시작했다. 호텔과 백화점을 설립, 국내 유통과 관광 산업의 선진화를 이끌며 건설, 석유화학 등 국가 기간산업에도 진출해 사업을 다각화했다. 과감한 투자와 진취적인 도전으로 세계 시장을 개척해 롯데를 유통, 석유화학, 식품, 관광, 건설·제조 등을 아우르는 재계 5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롯데 임원들에 따르면 생전 신 명예회장의 집무실에는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그의 정신을 잘 보여주듯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도 홀로 직접 서류 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크기나 장식을 중시하지 않는 스타일은 현재 그가 묻혀 있는 소박한 묘소에서도 잘 드러난다. 2020년 1월 19일 영면한 신 명예회장의 묘지는 생전 희망대로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선영에 검소하게 조성됐다. 작은 봉분에 벌레 방지를 위한 노송나무가 전부다. 다듬지 않은 가로 1.8m 와석(臥石)만이 신 명예회장의 묘역임을 알리고 있다.

청년 시절 배움을 열망하던 신 명예회장은 1941년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오가던 부관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넘어가 학비를 스스로 벌며 1946년 마침내 일본 와세다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도쿄에서 처음 시작한 일은 우유 배달원이었다. 새벽부터 고되게 배달을 하고서도 일을 마친 후에는 묵묵히 집하장 청소까지 도맡았으며, 특유의 친화력으로 고객을 유치했고, 그 덕분에 우유 대리점 매출도 점점 늘었다.

대리점 사장은 결근이나 지각 한번 없이 최선을 다해 일하는 신 명예회장의 책임감과 성실함을 높이 사며, 두 군데 배달 구역을 독자적으로 운영해볼 것을 제안했다. 우유배달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으로 소문이 나면서 주문은 점점 늘어났다. 배달 물량이 증가해 시간을 맞추기 어렵게 되자, 신 명예회장은 자기가 직접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했다.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한 것이다. 신 명예회장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일본인이 선뜻 사업 자금을 내주었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과 일본에서 굴지의 기업이 된 롯데의 첫 자산은 바로 신 명예회장의 ‘신용’과 ‘성실함’이라고 할 수 있다.

1965년,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자 일본에서 떠오르던 젊은 사업가 신격호의 눈은 고국 대한민국을 향했다. 1인당 GDP가 약 300달러에 불과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에 눈을 돌려 고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한국 정부로부터 고국 진출 제안도 받은 터라, 신 명예회장은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부로부터 근대화의 상징이라 할 제철업 진출을 제안받고 구체적인 사업 준비에 들어갔지만, 공공성이 강한 제철업은 정부 주도로 추진하기로 계획이 변경되어 아쉽게 물러서고 말았다. 이때 거액을 들여 준비한 제철 관련 자료는 그 대신 제철업을 준비하던 고(故)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에게 조건 없이 제공했다.

이후 계획을 변경해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하며 국내에 처음 진출한 신 명예회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유서 깊은 반도호텔 자리에 새로운 호텔을 지을 것을 제안했다.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운 큰 모험이었으나, 신 명예회장은 고민 끝에 한술 더 떠 세계적 호텔 건립 이상의 목표를 세운다. 300~400실 규모면 일류 호텔 소리를 듣던 1970년대 초에 40층, 1000실 규모의 호텔에 더해 백화점과 오피스타운까지 동시에 건설하는 전무후무한 복합개발을 구상한 것이다. 그것이 을지로에 있는 지금의 롯데타운이다.

“상권은 좋은 상품과 훌륭한 서비스로 만드는 것”


▎1962년 국교 수립 전 한국에 도착한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모습. 그는 1965년 한·일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부터 한국을 방문해 고국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 사진:롯데그룹
그의 남다른 도전 정신은 롯데백화점 잠실점 부지 개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잠실점 부지는 황량한 모래벌판으로 비가 오면 한강 범람을 걱정해야 했던 유수지였다. 주변에는 참외 밭밖에 없었다. 이 지역에 백화점, 호텔, 마트, 테마파크를 아우르는 거대한 복합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뒤 신 명예회장은 임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당시 임원들은 배후 상권이 없어 장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고, 성공 가능 여부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는 “상권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상품과 훌륭한 서비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며 “잠실 일대는 곧 명동만큼 번화한 곳이 될 것”이라고 확언했고 이는 곧 현실이 됐다.

안전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도 있다. 롯데호텔이 준공되던 시기였다. 신 명예회장은 천장에 직접 랜턴을 비춰보며 복도와 객실이 완전히 분리돼 있는지 일일이 살폈다. 화재를 대비해 방화 구획이 제대로 적용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또 호텔 객실의 담요와 커튼의 불연성 테스트를 직접 하고서는 당시의 법규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가스 마스크를 비치하도록 지시했다. 롯데호텔 임직원에 따르면, 신 명예회장은 화재 및 안전사고 예방에 철두철미한 모습을 보였다. 현장을 둘러볼 때도 첫 관심사는 무조건 ‘안전 관리’였다. 백화점, 마트, 테마파크 등 롯데가 하는 사업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시설이 많으므로 유사시 큰 피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신 명예회장이 청년 시절, 처음 시도했던 회사가 두 번이나 폭격으로 인해 화재로 유실됐던 뼈아픈 경험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무차입 경영 원칙 지키며 IMF 위기 극복 업적


▎2011년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부지 방문 모습. / 사진:롯데그룹
신 명예회장은 임직원에게 눈과 발로 현장을 확인할 것을 자주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 않으면 현장의 진실한 모습과 고객의 욕구를 파악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과 일본을 한 달씩 오가며 왕성한 경영 활동을 펼쳤던 그는, 한국에 오면 롯데백화점이나 롯데마트, 혹은 롯데호텔의 현장에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매장을 둘러보며 고객에 대한 서비스는 친절한지, 매장 청결 상태가 우수한지, 안전 점검은 잘되고 있는지 등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현장 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신 명예회장의 묘역에 있는 와석에는 “여기 / 울주 청년의 꿈 / 대한해협의 거인 / 신격호 / 울림이 남아 있다”고 새겨져 있다. 또 생전 그의 철학이 담긴 한 줄 “거기 가봤나?”가 덧붙어 있다. “거기 가봤나?”는 신 명예회장이 현업에 있을 때 평소 임직원에게 많이 물었던 질문으로, 현장 경영과 부지런함을 강조한 경영 철학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특히 신 명예회장은 계열사 사장들에게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사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롯데그룹의 경영 특징을 잘 대변해준다. 제품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애정은 신 명예회장에게 ‘실패를 모르는 기업인’이라는 애칭이 붙게 할 정도였다. 잘 모르는 사업을 확장 위주로 방만하게 경영하면 결국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피해를 주게 되므로, 신규 사업은 기존 사업과 시너지를 창출할 수 있고, 핵심사업 역량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진행한다는 것이 신 명예회장의 평소 지론이었다. 또 어느 한 곳에 성공사례가 생겼을 때, 그것에만 그치지 말고 그 방식을 적극적으로 확산해야 함을 자주 강조했다.

그는 평소 기업이 나라와 국민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책임감 없는 무모한 투자는 임직원과 협력사에 피해를 줄 뿐 아니라 국가적 상처로 남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인은 경기가 어려울 때 더욱 활발히 좋은 기회를 탐색하고, 실적이 좋을 때는 어려워질 때를 대비하는 자세로 경영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신 명예회장의 무차입 경영원칙은 IMF라는 국가적 위기를 겪을 때 빛을 발했다. 대다수 한국 기업은 1990년대 후반 과다한 차입 경영의 부작용을 겪었다. 당시 무너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기업들이 존망을 위협받았다. 그러나 롯데는 신 명예회장의 무차입 경영원칙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IMF 사태를 극복할 수 있었고,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내실과 역량을 다질 수 있었다.

관광 산업 육성도 신 명예회장의 족적이다. 그는 관광 산업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에 관광보국(觀光報國)의 신념으로 투자비 회수율이 낮으며, 막대한 자본이 투입돼야 하는 관광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관광을 통해 국력을 키우고 자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국내 최초의 독자적 브랜드의 호텔을 건설하고 세계 최대의 실내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일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아울러 외국 관광객에게 언제까지나 고궁만 보여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세계 최고층 빌딩을 지어 새로운 한국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는 꿈으로 롯데월드타워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를 세계적인 관광 명물로 만드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었고, 2017년 마침내 롯데월드타워가 완공되며 꿈을 이뤘다.

신 명예회장은 나눔에도 앞장섰다. 그는 “우수한 자질이 있음에도 가난한 환경으로 어려워하는 학생들에게 사랑의 온정을 베풀어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고, 성취한 학문적 지식을 국가와 인류사회에 기여하도록 하는 장학사업을 전개하겠다”며 삼남장학회를 설립했다. 삼남장학회는 1996년 롯데장학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장학 사업을 펼쳐왔다. 롯데장학재단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기초과학 전공자를 중점적으로 지원하는 장학재단이다. 지식정보화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를 육성한다는 목표 아래 집안 형편이 어려운 우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국제경쟁력을 갖춘 과학자들에게 기초자연과학 연구를 하도록 지원하거나, 벽지의 농어촌 학교에 최신 컴퓨터와 체육 기자재 등을 보내는 일도 한다. 재단 설립 이후 2020년까지 지원된 장학금은 약 800억원, 수혜자는 5만 명을 넘었다.

관광보국 신념으로 테마파크에 대규모 투자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2021년 11월 1일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사에서 “롯데는 더 많은 고객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기업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사진:롯데그룹
롯데그룹은 신격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창업주의 도전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롯데월드타워에 흉상을 설치하고 기념관을 만들었다. 흉상 뒤에는 ‘열정은 잠들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강병인 서예가의 글씨로 담았다. ‘상전 신격호 기념관’은 롯데월드타워 5층에 약 680㎡ 규모로 마련됐다. 이곳에서는 신격호 창업주가 일궈낸 롯데의 역사를 미디어 자료와 실물 사료로 확인할 수 있다. 창업주의 일대기를 포토그래픽으로 구성했으며, 초기 집무실도 재현됐다. 집무실에는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리를 추구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인 ‘거화취실’ 액자와 한국 농촌의 풍경이 담긴 그림이 걸려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신격호 명예회장님께서는 대한민국이 부강해지고 우리 국민이 잘살아야 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사회와 이웃에 도움이 되는 기업을 만들고자 노력하셨다”며 “롯데는 더 많은 고객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기업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새로운 롯데를 만들어가는 길에, 명예회장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도전과 열정의 DNA는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며 “명예회장님의 정신을 깊이 새기면서, 모두의 의지를 모아 미래의 롯데를 함께 만들어나가자”고 말했다.

-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cho.kyuhee@joongang.co.kr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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