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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1)] 달력은 국가가 제작·판매 독점한 전매사업 

개인이 만들면 사형당할 수 있는 중죄였다 

시간 통제는 봉건시대 권력 상징, 1798년엔 38만 부까지 증가
엄금했지만 19세기엔 공급 부족해 민간 제조품이 전국적 유통


▎연말에 새해 달력을 사기 위해 시내 가판대로 몰려든 시민들, 1960년대 후반의 풍경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보급 이후 달력은 그 존재감을 크게 잃었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달력이다. 연말이 되면 새해의 달력을 구해서 벽에 걸거나 책상에 놓고 새로운 한 해를 구상하는 것은, 아마도 스마트폰 이전 시대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회사가 아닌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도 자기 가게의 상호를 넣은 달력을 만들어서 단골손님들에게 돌리곤 했다.

그러나 요즈음 세모(歲暮)가 됐다고 해서 달력을 단골손님에게 선물로 주는 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얼마 전에 은행 사람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이제는 벽에 걸어놓는 큰 달력을 가져가려는 고객은 거의 없고, 탁상에 놓는 작은 달력을 달라고 하는 손님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과거의 한옥 다락문이나 장지문에는 대개 그림을 붙였다. 네 쪽의 다락문에는 닭·개·사자·호랑이 그림 넉 장이 한 세트로 된 것을 붙였고, 장지문에는 잉어가 폭포를 오르는 그림처럼 과거시험에 합격하기를 꿈꾸는 내용의 낱장 그림을 붙여놓았다. 1960년대 이후에 이와 같은 전통적인 그림들이 사라지면서, 이 자리에 여자배우나 외국의 풍경 사진이 대신 들어섰다. 매달 바뀌는 달력의 그림은 벽에 걸어놓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장식이었고, 또 그중에 마음에 드는 그림은 오려두었다가 벽이나 벽장문에 붙여두기도 했다.

공휴일 결정 등 현재도 국가가 권력 소유


▎1950년 경북경찰국에서 발행한 호랑이 달력.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거주형태가 아파트로 바뀌고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달력의 그림을 오려서 벽에 붙이거나, 달력 자체가 장식이 되는 일은 점차 사라졌다. 시간을 알기 위해 시계를 볼 필요가 없고, 약속 날짜를 잡기 위해 달력을 보지 않아도 되며, 그날의 날씨나 새로운 뉴스를 알기 위해 신문을 찾을 필요도 없어졌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손안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 다 나온다. 달력을 보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됐다는 사람이 많고, 실제로 달력 없이 생활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이렇게 달력은 빠르게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달력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생활필수품이었다.

조선시대 달력 제작은 관상감에서 맡았는데, 관상감은 현재의 기상청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정부기관이다. 달력의 제작이 자유로운 현재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사적으로 달력을 제작하다가 발각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달력은 국가에서 엄격하게 통제하는 물품이었기 때문에, 관상감 이외에는 달력을 제작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형법에는 사적으로 달력을 제작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이 죄와 관련된 기록도 볼 수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정조 임금 시절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년(1777) 11월 24일의 기록에는 “사적으로 달력을 제작한 죄인 이동이, 살인한 죄인 이이영, 대궐 안에서 칼을 뽑은 죄인 박중근을 특별히 사형에서 한 등급 내려 귀양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사적으로 달력을 제작하는 것은 살인이나 대궐 안에서 칼을 뽑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대한 범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동이의 달력 위조 사건은, 그가 달력에 찍는 관인을 위조하고, 이 위조한 도장을 찍은 달력을 판매한 것이 드러나서 그 일에 연루된 여러 명이 체포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이동이가 지은 죄는 사형에 해당됐으므로, 신하들은 법률에 나와 있는 대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정조 임금은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자세히 파악한 뒤, 이동이를 사형시키지 않고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판결했다.

이처럼 엄한 규정을 두면서까지 달력의 제작을 정부에서 독점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달력을 제작하는 권한이 바로 권력의 상징이라는 점이다.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은 봉건시대 통치자가 갖고 있던 여러 가지 권력 중 하나였다.

이러한 힘은 현재도 여전히 정부에서 가지고 있다. 과거시험을 언제 치를 것인가를 임금이 정했던 것처럼, 수능시험 날짜를 결정하는 것은 정부의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이다. 또 관상감에서 제작한 달력으로 절기를 알려주는 것처럼, 현재도 공휴일을 정한다든가 대체공휴일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정부에서 결정한다.

우리나라에 ‘천문법’이라는 법률이 있는데, 이 법률의 제5조 3항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관공서의 공휴일을 국민이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적색으로 표기하는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월력요항을 작성하여 관보에 게재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 무슨 날을 공휴일로 정할 것인가는 물론이고, 공휴일은 빨간색으로 표시해야 한다는 것도 법률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이 조항에서 ‘월력요항’이라는 단어는 흔히 보기 어려운 말이다.

천문법에서는 월력요항이라는 단어의 뜻을 “관공서의 공휴일·기념일·24절기 등의 자료를 표기한 것으로 달력 제작의 기준이 되는 자료를 말한다”고 설명해놓았다. 이 월력요항은 매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발표하는데, 올해도 8월 12일에 2022년도 월력요항을 발표한 바 있다. 이 월력요항에 의하면, 2022년도 공휴일은 67일이고, 주5일제 근무하는 기관의 휴일은 118일이라고 한다.

봉건시대가 끝난 지 오래됐지만, 현재도 달력을 만드는 기준은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광복 후에 우리나라에서는 단군이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하는 ‘단기’를 공식적으로 썼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단기를 ‘서기’로 바꿨다. 이처럼 단기를 서기로 바꾼다든가, 표준시를 동경 127.5도에서 135도로 바꾸는 것도 정권이 바뀌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85%는 판매용, 관상감 경비 조달에 쓰여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 외국인이 보행 신호를 기다리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다.
권력과 관련된 것으로 가장 흥미 있는 달력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에 새로 제정한 ‘혁명력’일 것이다. 혁명정부는 1년의 시작을 가을의 추분으로 하고, 12개의 달 이름도 모두 새로 바꿨다. 예를 들면 기존의 9월(Septembre)은 ‘포도를 수확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방데미에르(Vendémiaire)라고 바꾸고, 이때부터 새해가 시작되는 것으로 정했다. 비록 1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통용되는 데 그쳤지만, 프랑스의 혁명력은 권력자가 달력을 제작하는 권한을 갖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현재는 ‘달력’ 또는 ‘캘린더’라는 명칭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책력·역서·월력·일과력·대통력·시헌력·내용삼서 등등의 많은 다른 이름이 있었다. 조선 후기 달력의 공식 명칭은 ‘시헌서(時憲書)’이다. 원래는 ‘시헌력(時憲曆)’이었는데, 청나라 강희제의 이름이 ‘홍력(弘曆)’이므로, 황제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력(曆)을 서(書)로 고쳐서 ‘시헌서’라고 부르게 됐다.

조선시대 달력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술한 [서운관지]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관상감의 관리인 성주덕이 1818년에 편찬한 것이다. 관상감의 전체 업무에서 달력을 제작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업무였다. 달력을 만드는 과정을 [서운관지]에 보면 다음과 같다.

달력을 제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원고를 만드는 일인데, 이 일은 12월부터 시작해서 다음 해 1월까지는 끝내야 했다. 이렇게 작성된 원고를 관상감의 여러 직원이 면밀하게 검토해서 인쇄를 위한 최종본을 만들어내면, 이 원고를 바탕으로 목판을 제작한다. 그리고 이 목판으로 인쇄하는데, 대체로 임금에게 달력을 바치기 20일 전까지는 제작을 완료했다. 관상감의 달력 제작을 담당했던 직원들은 1년 내내 달력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완성된 달력은 24절기의 하나인 동지에 임금에게 바쳤다. 동지는 양력으로는 12월 22일이나 23일로 일정하지만, 음력으로는 일정치 않은데, 대개 11월에 들어 있다. 동지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로, 한 해의 시작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날 관상감에서는 달력을 임금에게 바치고, 임금은 이를 관리들에게 나눠줬다.

관상감에서 제작하는 달력은 영조 38년(1762)에는 약 20만 부를 인쇄했는데, 이 수는 점점 늘어나서 정조 22년(1798)에는 38만 부가 됐다. 전국에 필요한 달력을 관상감에서 모두 제작하는데, 이렇게 많은 수량을 만들어서 모두 무상으로 배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박권수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약 15% 정도가 무상으로 배포하는 것이고, 나머지 85%는 판매용이었다고 한다.

책력의 판매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초기에는 간행하는 숫자가 4000~5000부 정도로 많지 않았기 때문에 책력 판매가 그렇게 커다란 이익을 내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1800년 무렵에 이르면 38만 부를 인쇄하게 되므로 그 이익이 꽤 됐을 것인데, 달력의 판매로 얻는 이익은 주로 관상감의 자체 경비를 조달하는 데 쓰였다고 한다. 달력의 제작과 판매를 정부에서 맡았으므로, 달력은 일종의 전매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조선에서 나온 책은 대부분이 관청에서 제작한 관판본이었다. 관판본이 아닌 책은, 사찰에서 제작한 불경이나, 문중에서 간행하는 족보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지봉유설]의 저자 이수광(1563~1628)은, 임진왜란 이후 나온 책에는 잘못된 글자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옛날에는 모든 서책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감독하는 관리를 바로 곤장으로 때렸으므로 잘못된 글자가 아주 없었다”고 말했다.

사소한 실수도 용납 안 돼, 오류 있으면 처벌


▎1843년 민간에서 제작된 달력. 한자와 한글이 병기돼 있다. / 사진:이윤석
이수광이 말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책을 만들어내는 기관의 기강이 해이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세기 정조 시대에 관상감은 매우 엄격하게 기율을 지켰다. 두 가지 예를 보기로 한다. 정조 14년(1790) 11월 3일 [일성록]에는 “관상감 제조 오재순과 홍양호를 파직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다. 달력은 동짓날 임금에게 바치게 돼 있으므로, 동지 20일 전까지는 완료해야 한다. 1790년에 동지는 음력 11월 16일이었으므로, 11월 3일이면 동지까지 13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달력의 제작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미 제작을 끝낸 달력에 빠진 글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관상감에서는 이 문제를 임금에게 보고하면서,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담당자를 처벌하는 데 국한되는 것만이 아니라, 빠진 글자를 다시 넣으려면 40만 부 가까운 달력을 다시 제작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정조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처리했다. 고위직 두 사람은 파면하고 실무자들은 곤장을 치는 정도로 처벌은 끝내고, 빠진 글자 하나는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대로 배포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처럼 달력의 제작에서는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대량으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만 보고하는 달력도 있는데, 이런 달력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상당히 큰 처벌을 받았다. 정조 21년(1797) 겨울에 임금에게 올리는 다음 해의 칠정력에 ‘우수(雨水)’를 빠뜨린 것이 관상감의 자체 조사에서 드러나자, 관상감의 관리들은 벌을 받겠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정조는 제작 담당자는 곤장을 쳐서 귀양을 보내고, 감독하는 관리들은 봉급을 깎거나, 벌금을 내도록 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이 금속활자 등의 인쇄 기구와 수많은 서적을 약탈해가고, 또 7년에 걸친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출판 기반이 무너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서적 보급을 위해 급히 나무로 만든 활자로 책을 인쇄하면서 출판의 질이 떨어졌었는데, 정조 시대에 와서는 다시 과거의 수준을 회복했다. 그리고 이 시대가 되면, 조선에서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출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관상감에서는 수십 명의 인원이 1년 내내 매달려서 38만 부의 달력을 제작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수량을 찍어낸다고 하지만, 당시 모든 집에 달력 한 부씩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800년 무렵 조선의 총인구가 750만 명 정도라고 나와 있는데, 역사학자들은 이보다는 훨씬 인구가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록의 기록대로 19세기 초 인구를 750만 명이라고 본다면, 38만 부의 달력은 20명에 한 부씩 보급되는 정도였다. 달력은 서울을 비롯한 큰 도시에서는 최소한도 한 집에 한 부는 있어야 했고, 지방이라 하더라도 중상류층에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므로 관상감에서 제작하는 수량은 충분치 못했다. 게다가 정부에서 제작한 것은 값이 비쌌다.

조선 초기에는 약 4000~5000부 정도 제작하던 달력이 1800년 무렵에는 38만 부까지 늘어난 것은, 달력이 있어야 하는 인구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관상감에서 제작한 달력은 순전히 한자로만 되어 있으므로, 달력을 보고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18세기 말 조선에는 적어도 38만 명 이상의 한문 해독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책력 하나를 세 사람이 본다고 하면, 한문을 읽을 수 있는 인구가 약 100만 명 정도는 됐다고 추산해도 괜찮을 것이다.

한자·한글 병기한 민간 제작 달력


▎1843년 관상감에서 제작한 달력(서울대 소장). 한자로만 표기돼 있다. / 사진:이윤석
앞에서 이동이 사건에서 본 것처럼 달력을 사적으로 제작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죄였다. 정조 23년(1799) [승정원일기]에는 관상감 제조 정민시가 “달력을 사적으로 인쇄하는 것은 법으로 매우 엄격하게 금하고 있음에도 지방 사람이 사사로이 낱장 달력을 만들어서 인쇄해 제멋대로 팔고 있으니 일이 너무도 놀랍습니다. 각 도에 단단히 일러서 각별히 엄금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기사가 있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순조 14년(1814)에도 영의정 김재찬이 “사적으로 동전을 만들거나 달력을 만드는 자들을 사형시키라”는 건의를 올렸다는 기사가 순조실록에 나온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사적으로 달력을 제작하는 것을 금지했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는 사적으로 제작한 달력이 많이 퍼져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관상감 제조 정민시의 건의를 통해, 사적으로 달력을 만들어 판매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적으로 제작한 달력의 실물이 없어서인지, 이 방면의 전문 연구자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1843년 민간에서 제작한 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843년의 관상감 달력과 민간에서 만든 달력을 보기로 한다.

관상감에서 배포하는 달력은 본문이 15장(윤달이 드는 해는 16장)으로 된 책자 형식이다. 이에 비해서 민간에서 사적으로 제작한 달력은 한장으로 된 것이다. 정부에서 제작한 달력은 그림에서 볼 수 있는 1년 열두 달의 절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이 맨 앞에 들어가고, 그 뒤로 12개월이 각 한 장씩이며, 또 몇 가지 정보가 들어 있는 것 두 장이다. 그런데 민간에서 만든 것은 한장짜리로, 여기에 1년 12개월이 큰달인가 작은달인가 하는 것, 입춘이나 우수와 같은 24절기, 그리고 매달 길(吉)한 날짜 등을 적어놓았다.

민간에서 만든 달력과 관상감에서 제작한 달력을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는 장수의 차이도 있지만, 정부에서 만든 것은 순전히 한자로만 돼 있는 데 비해 민간 달력은 한자와 한글을 함께 써놓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2월 6일에는 ‘驚蟄’이라고 쓴 한자 옆에 한글로 ‘경칩’이라고 써서, 한자와 한글을 병기했다. 이것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글로 써놓을 것을 보고 절기를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민간에서 제작한 낱장 달력은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고객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장으로 된 이 달력은 관상감에서 제작한 것에 비해 값이 훨씬 쌌다.

1894년 갑오개혁의 여파로 1896년부터 양력을 쓰게 되면서 기존의 상순·중순·하순이라는 10일 단위였던 시간 개념은 일주일은 7일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전통적인 달력은 다양한 모습의 새로운 달력이 나타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21세기에 들어와서는 기존의 모든 달력이 스마트폰에 밀려 없어지고 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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