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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12)] 서양의 발전사는 바다를 정복하는 과정 

물길·하늘길 지배한 세력이 세상을 호령했다 

해상 운송수단 진보따라 지중해·대서양·태평양 등으로 패권 이동
조선업·해운업 세계화 주도 필수 조건… 비행기는 인적 교류 넓혀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미국의 항공모함 USS America. 운하는 대양과 대양을 연결한 혁신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고대 문명은 모두 강을 끼고 발달했다. 이집트에는 나일강, 메소포타미아에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이 있고, 인더스와 황하는 강의 이름이 문명을 상징할 정도다. 커다란 강은 풍부한 물과 비옥한 토지를 공급해 농사를 수월하게 만든다. 자연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서 도시가 형성된다. 게다가 강물을 이용하다 보면 물자 운반도 용이하다.

물에 관한 생각은 문화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시내나 강을 건넌다는 표현이 보여주듯 육지를 중심으로 보면 물은 횡단의 대상이다. 도로를 만든 뒤 다리를 건설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물은 이동의 길을 제공하기도 한다. 숲을 통과하고 산을 넘으려면 인간의 노력을 동원하고 투자를 해서 도로를 만들어야 하지만, 물은 자연이 제공하는 편리한 길이다. 부력을 이용해 뗏목이나 배를 만들어 띄우면, 수면의 마찰이 상대적으로 적어 최소한의 동력만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

물을 건너거나 넘는 문화가 있다면, 물을 타는 문화도 있다. 인류 초기의 문명은 물을 타고 이동함으로써 싹틀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는 신전을 지을 돌도 나무도 없는 평야 지역이다. 따라서 문명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석재와 목재, 그리고 화폐를 만드는 은을 강의 상류 산악지역에서 가져왔다. 강이 상류의 임업과 광업, 평야의 농업, 그리고 하류의 어업이 교류하는 길을 제공했던 셈이다.

강물이 상·하류의 다른 지역을 연결하면서 문명을 낳는데 공헌했다면, 바다는 훨씬 방대한 활동 무대를 인류에 선사했다. 지중해는 이런 점에서 독보적이다. 고대 페니키아와 그리스, 로마는 모두 지중해라는 자유로운 이동의 공간을 활용해 교역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바다는 태풍이나 암초 같은 위험은 도사리고 있으나 강물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다. 강물은 높낮이가 다르고 흐르는 방향도 뚜렷한데 반해 바다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 미국까지 서구 세력의 발전은 바다를 정복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문명이 꽃핀 지리적 환경은 발칸반도 끝자락과 소아시아, 그리고 이집트를 이어주는 에게해다. 고대 로마는 제국의 무대를 지중해로 확대해 유럽과 서남아시아, 북아프리카를 하나로 묶었다. 뒤이어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 등은 대서양을 통해 세계로 뻗어 나가면서 서구의 지배력을 결정적으로 확산했다. 20세기부터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해 현재까지 지위를 유지하는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두 대양을 앞바다로 끼고 있는 해양세력이다.

유럽과 동아시아를 거시 역사적으로 비교할 때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차이 가운데 하나가 외부를 향한 확장성이다. 동아시아에서 바다가 세상의 끝을 자연스럽게 제공하는 경계로 작동했다면, 유럽에서는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인식됐다. 우리는 15세기 대서양을 가로질러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나 16세기 세계 일주에 성공한 마젤란을 상상하지만, 사실 바이킹은 11세기에 이미 대서양 북부를 건너 그린란드와 캐나다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바이킹보다 1000여 년 전에 페니키아와 그리스인들은 동쪽의 흑해나 지중해 서쪽 끝까지 진출하며 발자취를 남겼다.

‘아시아의 지중해’에 영감 준 유럽 자본주의


▎범선은 유럽이 동아시아보다 먼저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세계지도를 자세히 관찰하면 에게해나 지중해가 매우 특이한 형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땅 반, 바다 반’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들 지역은 육지와 바다가 뒤섞여 있다. 게다가 지중해 지역은 육지의 산악지역이 바로 바다와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해안에 도시가 발달하면 산으로 막힌 육지보다 바다를 통해 교류하기가 지리적으로 유리하다. 지중해처럼 육지와 바다가 어우러진 지형은 아메리카의 카리브해나 아라비아반도를 둘러싼 홍해와 걸프 지역을 들 수 있다. 태평양과 아시아가 뒤섞인 동아시아 지역도 유사한 모양이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지풀루는 [아시아의 지중해, 16~21세기]라는 저서에서 싱가포르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걸친 지역을 유럽의 지중해와 비견할만한 경제 발전의 무대로 분석한 바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시아의 지중해에 영감을 주고 개발을 이끈 것이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의 자본주의 경제였다는 점이다. 16세기에는 유럽 제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세계를 양분했고 이 두 세력이 만난 지역이 바로 동아시아였다. 스페인은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을 차지했고,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넘어 마카오에 진을 쳤다. 네덜란드도 일본까지 진출함으로써 16~17세기 동아시아 바다에서 무역의 거미줄을 치기 시작한 주역은 유럽의 범선이었다. 유럽과 동아시아는 각각의 지중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은 바다를 중심에 두고 문명이 발전했고 동아시아는 바다를 외면하는 듯 내륙 중심의 발전 양상을 드러냈다. 무엇이 유럽과 동아시아의 이런 차이를 초래한 것일까. 흔히 말하듯 서양인의 개척자 정신과 동양인의 농업을 중시하는 안정 지향적 성향 때문일까.

동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중국이 물길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 기둥으로 삼았다면 중화 문명은 황하와 양쯔강의 조합이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중국은 이미 고대 7세기 수나라 시기에 두 강을 연결하는 운하를 뚫기 시작했고 1327년에는 베이징과 항저우를 연결함으로써 이미 중세에 1800㎞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대운하를 보유하는 대륙이었다. 군사력을 자랑하는 정치 중심인 북부와 경제력이 강한 남부가 운하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셈이었다. 중국은 바다에서도 강력한 힘과 기술을 자랑했다. 유럽에서 포르투갈이 작은 범선으로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바다를 항해하는 시도를 하던 15세기에 중국 명나라는 엄청난 규모의 함대를 인도양 너머 동아프리카까지 보냈다. 영락제의 명을 받은 정화(鄭和)의 원정(1405~1433년)은 중국 문명과 항해 능력을 세계에 과시했지만 동시에 한계점을 명확하게 보여줬다. 중국은 뛰어난 기술력과 자원을 동원하는 능력이 있었으나 발전을 지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부족했다.

지구에서 육지보다 넓은 면적을 차지한 바다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게다가 15세기 항해 능력은 중국이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 하지만 16세기부터 바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이다. 하나의 제국으로 권력이 집중돼 있었던 중국은 황실의 결정이 해외 진출의 여부를 결정했다. 정화의 원정이라는 확장 전략이 갑자기 쇄국의 전략으로 180도 전환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반면 유럽은 다양한 국가가 경쟁하는 체제였다. 한 나라 왕실의 정치적 결정보다는 해외 진출의 성과가 대항해시대를 추동하는 힘이 됐다. 해외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자 유럽 국가들은 앞다퉈 대서양으로 인도양으로 뛰어들었다. 인도네시아의 후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아프리카의 노예는 유럽 세력이 자본을 키우게 추동한 무역 상품이었다. 또 아메리카의 금과 은은 세계 경제에 유동성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의 발판이 됐다.

화력과 범선의 조합, 유럽 세계 지배 비결


▎미국 자본주의의 총아였던 밴더빌트가 허드슨 강에서 운영했던 증기선의 그림. / 사진:위키피디아
유럽의 다양한 국가가 세계의 바다를 호령할 수 있었던 비결은 범선과 화력의 조합이었다. 여기에서도 다수의 국가 간 전쟁이 일상화돼 있었던 유럽의 환경이 결정적이었다. 유럽은 바람을 이용해 신속하게 이동하는 범선에 대포를 장착했고, 실전을 통해 지속적으로 기술이 발전했다. 이동성과 파괴력의 융합이 유럽의 세계 지배 요인이었다는 설명이다.

유럽은 세계 각지의 상품을 유럽으로 실어옴으로써 무역 이득을 챙기기도 했지만 다른 바다에서 지역 내부의 무역을 관리하는 방법으로도 막대한 돈을 벌었다. 앞서 언급한 ‘아시아의 지중해’를 호령하며 무역을 주도한 것은 처음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고, 이어서 네덜란드의 동인도주식회사(VOC)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중국과 일본,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연결하는 지역 내 무역조차 유럽인들이 독점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유럽은 바람의 힘을 빌려 화력을 세계 각지에 투영하고 점점 많은 분량의 화물을 운반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1492년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한 산타마리아호는 165t이었다. 백여 년 뒤 스페인 함대의 평균 중량은 515t까지 늘어났으며 1800년 인도양 영국 함대의 배는 1200t 정도까지 규모가 커졌다.

수로와 상업문화의 친화력은 유럽에서 자본의 축적을 이룬 두 도시가 모두 물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네치아는 석호 위에 건설한 도시로 대로는 물론 골목도 물길이다. 북유럽의 브뤼허 또한 바다와 강, 운하가 주변을 둘러싼 물길의 도시다. 대양을 향해 나가 세계무역을 지배한 영국의 런던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은 항구 도시로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고리였다. 이런 점에서 미국 뉴욕의 발전사는 의미심장하다. 18세기 말 미국이 독립을 선언할 당시 뉴욕은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가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앵글로 색슨계 이민의 전통이 강한 보스턴이나 독립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필라델피아에 밀리는 처지였다.

뉴욕이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증기선의 등장이다. 범선과 화력의 조합이 유럽의 세계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면 증기선의 등장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동력을 제공함으로써 거대한 대륙 국가 미국의 내륙 발전을 가능하게 해줬다. 1807년 뉴욕 맨해튼에서 출발한 증기선은 32시간 만에 150마일 상류의 올버니에 도달했고, 다시 30시간 만에 강을 타고 반대 방향으로 내려왔다. 범선으로 일주일이 걸리던 여행이 크게 단축됐고 뉴욕을 통해 내륙까지 개발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다른 하나는 올버니와 이리호(Erie 湖)를 연결하는 584㎞ 길이의 운하 개통이다. 1817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825년 열린 운하는 오대호(五大湖) 주변 지역이 전부 뉴욕을 통해 대서양으로 진입하는 계기였다. 뉴욕은 엄청난 규모의 곡창지대 산물을 수출하는 미국의 문이 된 셈이다. 남부의 뉴올리언스가 미시시피강과 카리브해를 연결하는 지점으로 면화 수출의 관문이었다면, 동부의 뉴욕이 보스턴이나 필라델피아를 제치고 미국 자본주의의 관문으로 떠올랐다.

뉴욕, 증기선과 운하 개발로 대표 도시 부상


▎항공 교통의 발전으로 대규모 선박은 크루즈 휴양 산업으로 전환했다. / 사진:위키피디아
뉴욕을 거점으로 부상한 미국의 대표적인 자본가가 코닐리어스 밴더빌트(1794~1877년)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이민 온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맨해튼과 스태튼 아일랜드를 오가는 페리 여객선을 모는 선장으로 시작해 점차 증기선을 활용한 수운(水運)으로 거대한 사업을 일으켰다. 밴더빌트는 강이나 운하를 통한 수운 노선에 진입한 뒤 살인적인 가격 인하로 경쟁업자의 시장을 차지한 뒤 사업을 되팔고 나오는 전략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수운에서 성공한 그는 철도 산업에서도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수륙을 섭렵해 교통사업 분야에서 성공함으로써 미국 자본주의 역사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미국이 주도한 현대 운하의 유행은 이제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됐다. 1869년 이집트 수에즈 운하의 개통은 지중해와 인도양을 곧바로 연결함으로써 아프리카대륙을 우회하는 노선을 크게 단축했다. 마찬가지로 1914년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이어줌으로써 미국이 두 대양의 중심국가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수에즈와 파나마는 이제 지구촌 경제의 대로를 연결하는 혁명적인 지름길로 전 세계가 애용한다.

일본, 조선·해운 성장으로 부국강병 가시화


▎초대형 여객기의 시대를 열어젖힌 에어버스 A380 발표회. / 사진:위키피디아
배를 제조하는 조선업과 이를 운영하는 해운업은 16세기 유럽의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화를 주도하는 필수 조건이었다.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근간에는 상품의 이동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다가 거대한 무법지대였다는 사실이다. 국제법이 자리 잡기 전 세계화의 초기에 국가가 운영하는 함대와 해적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공식 해군도 바다에 나가면 타국 상선을 약탈했으며 민간 함선과 해군이 벌이는 전투도 빈번했다. 이런 상황에서 해운과 해군은 하나가 됐다. 앞서 언급한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동인도주식회사는 민간의 해운과 공공영역의 해군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거대한 조직으로 인도나 인도네시아와 같이 거대한 영토를 관리하는 식민세력이었다. 실제 국가가 운영하는 해군이 본격 활동을 벌이게 되는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다.

유럽이나 미국 등 서구가 아닌 지역에서 처음 부국강병에 성공한 일본의 사례는 조선, 해운, 해군의 성장으로 가시화됐다. 1854년 미국의 함대에 굴복해 개국한 일본이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일이었다. 청일 전쟁이나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거둔 승리는 막강한 해군력에 기초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2년 체결된 워싱턴조약은 일본 해군의 부상을 정확한 수치로 드러내 주었다.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가 각각 5:5:3:1.75:1.75의 비율로 해군력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세계 바다를 지배하는 양대 세력이라면 일본은 바로 그 뒤를 쫓는 제3의 세력이었던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승리에 조선 산업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과 일본이 대립했던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은 총 90척의 항공모함을 동원했으나 일본은 7척에 불과했다.

패전 후 일본은 민간 조선업에 집중해 경제 발전의 토대로 삼았고, 1990년대 한국이 추월할 때까지 세계 1위 조선 대국의 위치를 지켰다. 일본과 한국의 조선업은 해운의 거대화라는 구조적 변화를 동반했다. 국가는 물론 대륙을 넘나드는 무역이 발달하면서 광석이나 곡식, 석유 등을 운반하는 배의 규모가 점차 커졌다. 특히 석유를 실어 나르는 유조선의 규모는 50만t을 넘어섰다. 1979년 일본에서 제작한 시와이즈 자이언트(Seawise Giant)는 56만t급으로 세계 최대 규모다.

컨테이너의 상용화도 무역 세계화의 핵심적인 주춧돌이었다. 특히 1970년대 정착한 컨테이너의 규격화는 해운과 육상에서의 운반을 연결해 복합적 상품 운송을 기계화하는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유엔의 통계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세계무역에서 해운이 차지하는 비중은 80%에 달한다. 항구도 해운의 거대화에 적응해야 했다. 내륙의 런던보다는 로테르담처럼 대규모 배를 직접 댈 수 있는 해안의 항구들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어나는 배의 규모를 제한한 요인은 운하나 해협과 같은 물길의 크기다. 해운에서는 파나맥스, 수에즈맥스 등의 표현이 있는데 각각 파나마와 수에즈 운하는 통과할 수 있는 규모를 말한다. 말라카맥스는 세계에서 가장 물량이 많다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믈라카해협을 통과할 수 있는 30만t 규모를 의미한다. 최근에는 중국의 부상을 반영하듯 차이나맥스라는 기준도 언급된다. 이는 브라질에서 중국까지 철광석을 운송하는 40만t 규모를 지칭한다.

속도 빠른 비행기, 전쟁에 적극 이용

교통의 관점에서 하늘은 매우 특수하다. 육지나 물 위에서 이동하는 데는 길과 동력이 비슷하게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육상 교통의 경우 도로가 상당 부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행군하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려면 도로의 유무가 이동하는 속도와 규모를 정했기 때문이다. 기차나 자동차도 철도와 고속도로가 있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수상 교통의 경우 육지만큼 도로를 만드는 일이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강, 호수, 바다 등 수면 자체가 도로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타고 내려오는데 비해 시간과 에너지가 훨씬 많이 들었다. 바다에서는 바람의 방향과 강도가 배의 이동 가능성을 결정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시대 이탈리아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는데 북서풍을 등에 업으면 일주일이면 됐지만, 반대로 돌아올 때는 40~70일이나 걸렸다! 풍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나 내연기관이 수상 교통을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게 된 이유다.

하늘에는 딱히 길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도 없다. 기술만 있으면 온통 길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운하와 같은 물길조차 불필요하다는 의미다. 하지만 물을 타는 것보다 공기를 타고 나는 기술은 훨씬 어려웠고 20세기가 돼서야 인류는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었다. 1904년이 되면 미국에서 라이트 형제가 비행에 성공했고, 그로부터 불과 5년 뒤 프랑스의 루이 블레리오는 도버 해협을 뛰어넘어 영국과 프랑스를 이었다.

16세기부터 유럽의 범선이 화물의 수송 능력과 전투력을 겸비하면서 제국주의 시대를 열었다면, 20세기의 비행기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비행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라는 문명사적 의미를 지녔으나 수송 능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반면 길이 없어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능력과 빠른 속력을 활용해 전투에 투입됐다. 제1차 세계대전에는 주요 참전국들이 모두 비행기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부터는 전투 및 폭격기가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수단으로 떠올랐다. 독일의 런던 폭격이나 연합군의 독일 폭격, 일본의 가미카제(神風)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등은 모두 비행기 없이 전쟁을 치르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심지어 21세기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미군의 우월성은 하늘을 장악하는 능력에 의존했다.

뉴딜 경제정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하자 일찍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미국이 항공기를 대량 생산하려면 자동차 산업을 동원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포드와 GM 등 자동차 회사들을 설득하면서 국방 예산을 증액했고 대규모 공장 건설에 나섰다. 1940년 미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400만 대에 달했으나 1942년에는 22만 대로 줄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출시된 민간 자동차는 139대로 급감했다. 반면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수백 대에 불과하던 비행기 생산량은 1년도 지나기 전에 이미 4만8000대로 폭증했고 이듬해에는 10만대까지 늘어났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산업을 1~2년 만에 최강의 항공기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산업으로서 항공 교통은 무게가 나가는 화물보다 사람을 실어 나르는 데 더 적합했다. 빠른 속도를 활용해 장거리여행에서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항공으로 운송을 시작한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19년 매일 파리와 런던을 연결하는 노선이 만들어지면서다. 1939년에는 미국의 팬암(PanAm)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6일 만에 태평양 너머 홍콩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1957년 비행기가 배 이용객수 추월

항공 산업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 대륙을 연결하면서 인적 교류가 늘어나게 된 시기는 제2차 대전 이후인 1950년대다. 예를 들어 증기선을 타고 유럽과 뉴욕을 오가는 탑승객 수는 1890년대 100만 명을 넘었고 이 규모는 1920년대까지 유지됐다. 연평균 100만 명 규모의 북대서양 횡단은 해운이 주로 담당했다. 하지만 1957년이 되면 비행기 이용객이 배를 타는 사람보다 많아진다. 그러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서양을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을 중단했다. 이후 거대한 배는 천천히 여행하면서 여유를 즐기는 크루즈라는 휴식의 공간으로 변했다.

제트기 여행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것은 다수의 인기 모델을 생산한 미국의 보잉사다. 1958년 시장에 투입된 보잉 707부터 항공기 역사상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는 소형 737을 거쳐 거대한 747까지 세계 항공기 시장의 선두를 달렸다. 미국 보잉사의 지배에 도전장을 던진 것은 1970년 프랑스와 독일이 공동으로 창설한 에어버스사다. 이후 영국과 스페인이 동참함으로써 에어버스는 유럽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21세기 현재 미국의 보잉사와 경쟁하며 세계 항공기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15년 사이 항공기 생산량은 보잉 6803대, 에어버스 6133대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에어버스는 2007년 승객을 최대 850여 명까지 태울 수 있는 A380을 개발해 시장에 투입했다. 자본주의 초기에 많은 국가의 영토가 하루 생활권이 됐듯이 21세기 지구촌은 1일 여행권 안에 들어왔다. 영국에서 호주까지, 또는 미국에서 남아공까지 20시간 이내로 도달할 수 있는 대형 제트기들이 투입되고 있다. 또 뉴욕과 시카고 사이에 매일 200편이 넘는 항공편을 운항할 정도로 미국은 비행기 여행이 일상화됐다. 항공 여행이 수월해지자 관광 산업도 덩달아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21세기가 항공 산업에 던진 거대한 충격도 만만치 않다.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 사건은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거대한 항공기가 테러의 수단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이후 세계 각지의 공항에서 검문검색이 중요한 비즈니스로 부상했을 정도다. 다른 한편 2020년 단시간에 팬데믹을 일으킨 코로나19 위기는 신속하게 진행되는 대규모 인적 교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인류의 점증하는 이동 패턴을 급격하게 중단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의 코로나 비상시국이 장기적으로 항공 산업의 쇠퇴를 초래할지, 아니면 일시적인 에피소드로 끝날지 알 수 없는 갈림길에 21세기 인류는 서 있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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