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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9)] 로마 최초 트랜스젠더 황제의 흔적 새겨진 코즈 칼레(Koz Castle) 

로마 황제들의 ‘막장史’에 담긴 미학(味學) 

단맛과 떫음 공존하는 홍시와 닮아있는 로마제국 흥망의 역사
미화하지 않은 폭군의 기록이 있기에 찬란한 역사 더 돋보여


▎시리아 국경 근처에 있는 터키의 고대 도시 코즈 칼레는 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퇴폐적인 황제 중 한 명인 에라가바루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잔해만 남은 성채는 에라가바루스가 반군에 맞서 싸웠던 곳이다. / 사진:유민호
'평화와 성숙으로서의 인(忍)’. 필자가 홍시를 보며 떠오른 이미지다. 고체에서 액체로 변해가는 과일이 홍시다. 완전한 성숙미(味)에 이르기까지 익고 또 익어가지만, 결코 터지지 않는다. 밖이 아니라 부드럽고 얇은 껍질 안에서 벌어지는 평화로운 변화다. ‘인’이라고 하면 문자 그대로 칼(刃)을 마음(心) 속에 품은, 독하고 강하고 긴장된 뭔가가 연상된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기 직전 등장하는 홍시는 다르다. 지평선에 걸린 석양의 신비로운 빛깔이 홍시 안팎을 물들인다. 성숙한 인생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여유와 풍요가 홍시의 둥근 자태 전체에 드리워진다.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밖이 아니라 내부를 향한,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시간이 홍시 하나에 담겨 있다. 계절과 함께 진화해가는 홍시의 느린 여정(旅程)이 ‘인’이란 글자 하나가 압축돼 있다.

자연 모두가 그렇겠지만, 삶의 의미와 가치를 음미하게 해주는 신의 축복 중 하나가 바로 홍시다. 필자의 눈에는 딱딱한 단감보다 연시, 연감이라고도 불리는 홍시가 우선이다. 홍시는 계절의 벽을 넘지 못하는 한철 과일의 대표 주자다. 비닐하우스 재배와 냉장 보관 기술 덕분에 21세기 인류는 수많은 과일을 사시사철, 계절과 무관하게 즐길 수 있다. 그러나 홍시는 예외다. 늦가을에 나타나 겨울에 무르익고 봄이 되면 사라지는 과일이 홍시다. 비닐하우스 재배, 보관창고로도 어림없다. 말린 감이야 언제든지 즐길 수 있지만, 독특히 탄력과 미감(味感)의 홍시는 오직 늦가을과 겨울에만 맛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홍시를 보면 ‘유치한’ 흥분과 집착에 빠지곤 한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욕(欲)’이 활활 터져 나오는 느낌이다. 사과, 배, 포도, 귤, 바나나, 오렌지, 파인애플에 이르는 수많은 과일 가운데 가장 먼저 눈이 간다. 사실 홍시는 많이 먹고 즐길만한 과일이 아니다. 높은 당도 때문에 한 개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낀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 홍시의 단맛은 중독성이 강하다. 특히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던 1970년 대 이전 흑백시대 홍시의 의미는 남달랐다. 당시 어린이들에게 홍시는 위를 채우는 ‘설탕 밥’이었다. 나무에 달린 설익은 감을 보면 모두 달려들어 경쟁하듯 배를 채웠다. 늦가을 시장에서 홍시를 볼 때 느끼는 흥분과 집착욕은 그러한 유년의 기억이 배경에 있기 때문이리라.

모두가 가난했던 시대의 달콤한 기억


▎홍시는 떫은맛이 사라진 뒤에야 단맛이 극대화해 온전한 과일의 면모를 갖춘다. 나무에 매달린 잘 익은 홍시는 새들에게 훌륭한 만찬이 된다.
2021년 한국 정치 무대는 ‘가난 자랑’이 대세로 자리 잡은 듯하다. 가난은 상대적이고 시대적이다. 고1 때 기억으로, 전자시계를 찬 학생은 전교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숫자로 표시되는 시계를 보면서 모두가 부러워했다. 한 세대를 훌쩍 뛰어넘은 2021년, 전자시계가 천원숍에서 팔리고 있다. ‘가난 스펙 경쟁시대’의 배후에는 부모가 있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모자라도 세상을 탓하고 자식에게 가난 타령을 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내가 뼈 빠지게 일하는 이유가 전부 너 때문이다”라는 식의 화풀이다. 과장과 책임 회피로 채워진 비겁한 변명에 불과하다. 가난 탓에 빠진 부모를 둔 자식은 아무리 부자가 되더라도 ‘가난 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실이 아니라 환상, 나아가 이념으로서 가난이 뇌리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미각 차원의 문제지만, 홍시의 단맛은 아주 특별하다. 그 어떤 과일보다도 달게 느껴진다. 사과나 포도, 딸기에서 느끼는 일차원적 단맛과는 차원이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완숙 미(味)가 홍시에 배어있다. 평균 당도 17도 정도지만, ‘신비’로 채워진 맛이다. 왜 홍시의 단맛은 다른 과일들과 차별화되는 걸까? 떫은맛이 주범이라고 한다. 필자가 아는 한 감에 견줄 만큼 떫은맛을 가진 과일은 없다. 한 달 전에 설익은 홍시 하나를 입에 물었다가 혼이 났다. 지금 생각해도 입안이 얼얼하다.

떫은맛이 있기에 홍시의 단맛이 한층 더 돋보인다. 최근에는 고체 알코올 가스를 통해 떫은맛을 인공적으로 없애지만, 초겨울 수확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줄곧 떫은맛을 낸다. 만약 홍시가 처음부터 농후한 단맛으로 익어간다면 어땠을까? 익기도 전에 인간은 물론 새들의 공격에서 남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홍시는 떫은맛이 남아있으면 단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고 한다. 떫은맛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홍시 특유의 신비한 단맛이 등장한다. 떫은맛이 없다면 홍시의 맛도 사과나 포도, 딸기와 같은 일차원적 단맛에 그쳤을 것이다. ‘역설의 맛, 반전(反転)의 멋’이 홍시에 새겨진 단맛의 근원이다.

고대 로마 역사는 단맛보다 떫은맛이 더 크게 느껴진다. 미각 전체를 파괴시키는 강력한 떫은맛이 로마사 곳곳에 넘쳐난다. 따지고 보면 인류사 전체가 성숙한 단맛과는 거리가 먼, 떫은맛의 연장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로마는 그러한 인류 역사 가운데 한층 더 떫은 역사로 와 닿는다. 침을 삼키면 넘어갈 정도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질 떫은 역사다. 로마사의 핵심은 황제의 역사다. 로마사가 떫은맛으로 점철된 가장 큰 이유는 70명에 이르는 황제에 있다. 피와 살이 튀는 최악의 막장 연속 드라마라고나 할까? 황제의 역사에서 폭정·살인·배신은 기본이다. 근친상간에다 부모·형제도 죽이는 금수(禽獣)의 제전, 나아가 스스로 신이라 주장하며 하늘에 오르려는 혹세와 미신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15세기 피렌체의 현실주의 정치가 마키아벨리가 찬미한 성군(聖君)의 대명사인 5현제도 내막을 살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최고의 현제로 통하는 하드리아누스(Hadrian)는 집권과 더불어 주변의 정적을 모두 제거한다. 잔인함은 글로 묘사하기 어렵다.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자신의 자식 콤모두스(Commodus)에게 자리를 물려준 ‘아빠 찬스’의 원조에 해당한다. 혈통이 아니라 능력으로 황제 자리를 이어온 로마의 전통이 아우렐리우스 때 무너진 것이다. 전통에 이어 기강이 무너지고 로마의 영광도 추락하기 시작한다. 폭정과 대학살이 상대적으로 덜했을 뿐 5현제의 역사도 다른 막장 황제들과 대동소이하다.

역설과 반전의 맛 닮은 홍시와 로마사


▎로마 동전에 새겨진 에라가바루스 황제의 모습. 그는 스스로 여장을 하고 갖은 퇴폐와 향락을 즐기다 참혹하게 살해됐다. 그의 뒤를 이은 나이 어린 세베루스 알렉산더(오른쪽) 시대부터 군인정치가 본격화했다. / 사진:유민호
홍시에서 보듯 떫은맛이 있기에 ‘신비·신기’의 단맛이 탄생할 수 있다. 로마사도 마찬가지다. 막장 역사와 막장 황제가 넘쳤기에 달고도 원숙한 로마 역사가 창조될 수 있었다. ‘역설의 맛, 반전의 멋’은 홍시만이 아닌, 인간·사회·역사 전부 적용될 수 있는 우주의 진리다. 그러나 그런 배경을 이해한다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유독’ 로마사가 인류 막장 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것일까? 인종·언어·민족·문화의 차이를 넘어 초유의 대제국을 통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피치 못 할 상황이었을지 모르겠다. 다혈질 유전자를 가진 라틴 민족 특유의 극단 정치가 배경에 있다는 말도 있다. 로마가 남긴 방대한 양의 ‘유물·유적·기록’은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 중 하나다. 로마를 막장 정치의 대명사로 만든 중요한 배경이다. 바꿔 말하자면 방대한 유물·유적·기록이 없었다면 ‘로마=막장 정치, 로마 황제=막장 드라마 주인공’이라 볼 이유도 없었을지 모른다.

유사 이래 수많은 문명과 대제국이 탄생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수많은 대제국 가운데 유물·유적·기록에 있어 2000년 전 로마의 흔적과 견줄만한 곳은 없다. 질적·양적·공간적으로 방대하다. 이탈리아를 넘어 아프리카·아나톨리아·페르시아·이집트를 비롯한 지중해 주변 전체가 로마의 범주에 들어간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집트나 중국도 유물·유적·기록이란 관점에서 보면 로마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중국은 눈이 아니라 입과 머리로 과장·왜곡하는 용비어천가 역사에 능하다. 중화사상에 입각한 과장과 왜곡, 편견이 심하다.

서방은 다르다. 눈앞의 증거가 우선이다. 로마 한복판 콜로세움이 증명하듯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증거가 존재한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눈앞의 현실’로서 유물·유적·기록이 로마 역사의 특징이자 위업이다. 유물·유적·기록이 많다는 것은 어제의 역사를 ‘정확히’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아직도 수백 군데 존재하는 메소포타미아 내 로마 유적지를 예로 들어보자. 신전 하나만 봐도 로마 당시 역사가 ‘구체적으로’ 스며들어있다. 눈앞에 서 있는 신전 그 자체가 증거지만, 건물 증·개축 기록이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의 전통이기도 하지만, 폴리스(Polis) 즉 도시국가는 각자의 역사 보존에 총력을 기울였다. 21세기로 치자면 SNS를 통해 전 세계에 자기 마을을 자랑하려는 심리라 볼 수 있다. 로마는 그런 그리스의 역사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거대한 신전은 로마의 건축 공법에 따라 세워지지만, 기록은 주로 그리스 출신자들에게 맡겨진다. 당연히 그 기록의 중심은 최고 권력자, 로마 황제로 장식됐다. 필자가 체험한 고고학 현장을 돌이켜보면 황제는 지중해 주변 로마 유물·유적·기록이 갖는 권위나 정통성의 출발점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터키 중부에 들어선, 해발 1500m의 로마 도시 사가라소스(Sagalassos)를 보자.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공인한 지역 최고의 중심지로, 4세기까지 번영과 풍요를 누린 고대 도시다. 하드리아누스 두상이 발견된 것은 물론, 지금도 로마 당시 세워진 수많은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하드리아누스만이 아니라 사가라소스를 거친 수많은 로마 황제에 관한 기록이 현지는 물론, 로마와 지중해 곳곳에 남아있다.

로마 최악의 황제가 탄생한 지중해 고도(古都)


▎코즈 칼레의 북서쪽에 있는 안티오크는 에라가바루스 황제 옹립을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안티오크 시장 한가운데 있는 우물은 만든 지 2000년이 넘는다. / 사진:유민호
학교 시험에서 자주 접했듯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国史記)다. 1145년 제작된 것으로 로마에 비하면 무려 1000년 뒤에나 등장한 기록물이다. 그나마 개인 생각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기록된 어용(御用) 역사서다. 로마는 어용만이 아닌, 개인 차원의 방대한 역사서나 회상기를 보유하고 있다. 집단이 아니라 자아에 기초한 자유로운 사고가 개인 단위 기록물에 담겨 있다. 21세기식으로 표현하자면 계몽사상가에 의한 언론 자유가 로마 당시의 상식이었다. 폭군 황제에 관련된 ‘기억 말살형(DamnatioMemoriae)’이 주기적으로 횡행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창조된 로마의 기록물이 아직 남게 된 이유다. 물론 기록의 신뢰성과 정확성은 현재 남아있는 방대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재증명될 수 있다.

‘로마=막장 정치, 로마 황제=막장 드라마 주인공’으로 된 이유는 그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수많은 기록을 통해 역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로마의 어두운 부분도 드러나게 된 것이다. 좋은 부분도 많겠지만, 잔인하고 차가운 부분이 한층 더 흥미를 끌면서 21세기까지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로마 정치와 황제가 막장 인류사의 최고봉이었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다른 대제국이 훨씬 관대하고 평화로운 공간이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반대로 법에 근거해 통치한 문명 대제국 가운데 로마 이상의 수준이 될 만한 곳이 산업혁명 이전에 존재했을지 의문이다.

로마 막장 황제의 흔적을 직접 보기 위해 코즈 칼레(Koz Castle)를 찾았다. 시리아 국경에서 8㎞ 정도 떨어진 터키 고대 산성이다. 역사에서 잊힌 공간이기에, 묻고 물어 어렵게 찾아냈다. 참수로 악명 높은 이슬람국가(IS)가 인접한 탓이겠지만, 코즈 칼레로 가는 길은 인적 하나 없는 침묵 그 자체다. 소나무로 빽빽이 채워진 좁은 산길로 새소리도 없는, 모든 것이 정지된 공간이다. 코즈 칼레에 새겨진 막장 황제는 서기 218년 로마 최고 지도자에 오른 에라가바루스(Elagabalus)다. 제정 로마 역사상 두 번째 어린 황제로, 14살부터 4년간 집권했다. 막장 황제 대부분이 그러하듯 잔인한 암살이 에라가바루스의 최후다.

코즈 칼레는 에라가바루스가 황제에 오르기 직전 자신을 지지하던 로마군과 함께 거주하던 성으로 알려져 있다.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안티오크(Antioch)에서 에라가바루스 지지를 둘러싼 로마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안티오크는 사도 바울이 활동한 기독교 대중화의 출발지이자, 당대 동부 지중해의 번성한 도시였다. 당초 안티오크에서 큰 전쟁이 예상됐지만, 반대파가 에라가바루스에게 백기투항하면서 간단히 끝났다. 이유는 돈이었다. 에라가바루스는 원래 시리아 태양신을 모시는 어린 신관이었다. 신전에 보관된 엄청난 돈을 반대 로마군에게 뿌려 승리와 맞바꿨다. 정의·질서·평화가 로마군 파워의 전부가 아니다. 전쟁에 이길 경우 얻게 될 전리품, 즉 돈·여자·귀금속이 로마군 파워의 진짜 이유 중 하나다.

현재의 코즈 칼레는 로마와 전혀 무관한, 비잔틴 대제국과 11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 흔적으로만 채워져 있다. 단단한 돌로 연결된 15m 정도 높이의 성이다. 지금은 작은 길이 옆에 들어서 있지만, 로마 당시에는 산길로 이어진 난공불락 요새였을 것이다. 숨을 죽이며 승전보를 기다렸을 14살 어린 신관의 모습이 상상된다. 만약 안티오크 전쟁에서 패했다면 본인은 물론 가족과 관계자 전원이 처형됐을 것이다. 황제와 죽음 사이를 오가는 불면의 밤이 코즈 칼레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가로 세로 200m 정도의 성 전체를 샅샅이 뒤졌다. 십자군 당시의 전형적인 둥근 망루형 성곽이 인상 깊다. 12세기에는 금은보화를 저장한 비밀 창고와 감옥이 들어섰다고 한다. 귀금속은 이후 13세기 몽골제국이 쳐들어올 때 회유용 공작금으로 변신한다. 에라가바루스로부터 시작된 돈의 힘이 로마를 거쳐 십자군 때까지 1000년 이상 이어진 셈이다.

‘레이디’라 불리길 원했던 마지막 트렌스젠더 황제


▎로마 태양신 신전을 장식했던 부조물. 콘메게네 왕이 태양신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다. 에라가바루스는 황제에 즉위하기 전 태양신의 신전을 지키는 사제였다. / 사진:유민호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함께, 음탕한 향락에 빠진 황제”. 로마 흥망사를 파헤친 철학가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의 에라가바루스에 대한 평가다. 독일의 로마사 대가인 바르톨 니불(Barthold Georg Niebuhr)은 ’차마 입으로 담을 수 없는 더러운 삶을 통해,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황제’라 평했다. 막장 황제이기는 하지만, 뭔가 색다른 캐릭터의 인물이란 느낌이 든다. 역사가들은 에라가바루스를 로마 최초·최후의 트랜스젠더 황제라 본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사회적 성(gender)과 생물학적 성별(sex)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 부른다. 진위는 아무도 모르지만, 에라가바루스가 남긴 명언 중 “나를 로드(Lord: 왕)가 아니라, 레디(Lady: 여성)라 불러라”라는 말이 있다. 밖에서 보면 남성이지만, 스스로는 여성으로 생각했다는 의미다. 로마 황제사에서 동성애는 흔하다. 그러나 아예 대놓고 동성애·양성애를 오간 인물은 에라가바루스가 유일하다. 트랜스젠더 에라가바루스는 제정 황제 70명 가운데 가장 많은 결혼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4년 재임 기간 결혼 경력이 무려 다섯 번에 달한다. 로마 명문가 딸과의 결혼도 있지만, 로마 신전 베스타(Vesta)를 지키던 여성 신관(神官), 마차를 몰던 남성도 배우자 5명에 들어간다.

로마 당시의 19금 가십이라고나 할까? 독일 역사가 니불이 말했듯이 입에 올리기 거북한 얘기들이 에라가바루스 주변에 넘친다. 항상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한 채 나체의 소년·소녀들과 목욕하길 즐겼다고 한다. 밤이 되면 여장 차림으로 시장에 나가 돈을 받고 매춘을 한 것은 물론, 남녀노소 닥치는 대로 자기 방에 데려와 온종일 관계를 가졌다는 얘기도 있다. 도덕과 윤리와 무관한 사회가 로마다. 그리스 철학의 유산인, 자기 성찰과 반성에 주목하는 스토이시즘(Stoicism)이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 상류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화두에 불과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성(性)과 욕(欲)의 발현이 보통 로마인의 상식이자 가치였다. 그러나 에라가바루스는 너무 나갔다. 베스타 여성 신관과의 결혼은 로마인을 분노케 한 ‘엽기 황제사’의 서막에 해당한다. 베스타는 기원전 8세기부터 시작된 로마의 전통 여신이다. 불과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신이다. 베스타 여성 신관은 명문의 딸로 처녀 상태에서 30년간 일해야 한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베스타의 신성한 불을 지키는 임무다. 에라가바루스는 그런 로마의 전통을 모독하고 파괴한 황제다. 처녀인 베스타 신관과 강제로 결혼했기 때문이다.

기행 일삼던 미소년 황제의 비극적 최후

에라가바루스는 원래 로마 정치와 무관한 인물이었다. 시리아 태양신의 신관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외할머니인 줄리아 마에사(Julia Maesa)가 황제로 지목하면서 로마사에 등장한다. 줄리아 마에사는 시리아 황제의 역사를 연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황제의 처제다. 3세기 로마사는 바닥을 모르는 추락의 연속이었다. 이탈리아 라틴이 아닌 시리아 출신 세베루스 황제 등장은 로마 붕괴의 서막에 해당된다. 세베루스를 이은 카라칼라(Caracalla)가 동생인 게타(Geta)를 죽인 뒤 황제에 오르지만, 카라칼라 본인도 결국 암살된다.

혼란이 계속되던 중 에라가바루스가 구원투수로 나타났다. 명분은 시리아 출신에다 세베루스의 먼 친척이라는 것이었다. 외척 정치의 결과가 14살 황제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트랜스젠더 에라가바루스의 기행이 퍼져나가면서 로마의 민심이 돌아선다. 황제의 경비원이 황제와 황제의 어머니를 참살한다. 18살 황제의 사체는 사지가 절단된 채 강에 던져졌다고 한다. 이후 로마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한 인물은 세베루스 알렉산더(Severus Alexander)다. 시리아 출신에다 에라가바루스의 사촌, 즉 줄리아 마에사의 외손자에 해당한다. 어린 황제를 통한 군인정치가 본격화된 것이다. 권력을 둘러싼 ‘피·종교·로마군·암살·돈·배신·성(性)’의 막장 정치가 일상화된다.

홍시의 단맛은 떫은맛으로부터 출발하듯이, 트랜스젠더 황제의 엽기와 기행을 통해 심오한 로마사의 영광과 교훈이 돋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라가바루스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LGBTQ의 우상이자 레이디 가가 이상의 글로벌 아이콘으로 부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티오크 뮤지엄에서 접한 에라가바루스 황제 재임 당시 동전에서 그는 매력적인 미소년으로 묘사돼 있다. ‘막장, 엽기, 기행’이란 단어보다 천진난만 틴에이저 황제로 비친다. 로마의 막장 정치가 인류의 영원한 비극이라 규정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막장 정치=선정(善政)의 반면교사’인 것만은 아니란 말이다. 단맛을 위한 쓴맛이 아니라, 쓴맛 그 자체도 가치를 갖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다양성이란 이름의 21세기 세계관, 아니 이데올로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14살 트랜스젠더 황제 스토리가 한층 더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112호 (2021.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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