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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2022 한국 대전환, 선도국가로 가는 길-외교]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글로벌 체스판 흔들리는데 감성 외교에 빠지면 국익 손해”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기술동맹 중요… 한국의 기술 우위 활용하면 미·중 경쟁 속 기회
외교가 중심에 서고 경제와 기술, 정치와 안보 역량이 같이 가줘야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대격랑 시대에 방향 감각과 좌표 의식이 없으면 표류한다”며 “외교가 중심에 서서 경제·기술·정치 역량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질서가 요동친다. 강대국 간 패권경쟁이 격화하고 있으며 국가 간 전운까지 감돈다. 의도적이든 우발적이든 작은 불씨가 전 세계를 뒤덮을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외교력이 필요한 시기다. 정확한 정세 분석과 상황 파악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대처해야 국익을 넘어 국가의 존립을 유지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 정책조정실장, 박근혜 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역임한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은 진영 논리와 그룹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정치의 부속품이 된 외교와 감성 외교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도 마주한 대격랑의 시대에서 산업화, 민주화에 이어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외교’에 있다고 강조했다. 12월 10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윤 전 장관을 만났다. 대면과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과 대만·인도 등 세계 각지에서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념과 체제에 기반한 신(新)냉전의 시작인가.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지금의 상황을 신냉전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제하고 있다. 냉전 시대와 다른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적 영토 갈등이나 미·중 전략 경쟁 등 지정학적·지경학적 이해 충돌로 최근 들어 강대국들이 관여된 군사적 대립이 심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추진, 중국의 ‘하나의 중국’ 입장과 대만의 독립 추구, 인도와 중국 간 국경 충돌 등으로 군사적 긴장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자칫 오판에 의한 군사충돌로 확산할 가능성이 상존하지만, 그 파급효과가 너무 크기 때문에 긴장 완화를 위한 외교 노력을 계속하면서 긴장을 관리해나가려고 할 것이다.”

전통적 외교에서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했지만 최근 기술 동맹을 중시하며 ‘기정학’적 외교가 중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에 대한 평가는?

“그간 ‘지정학’, ‘지경학’, ‘지전략’에 이어 ‘기정학’까지 나오는 양상이다. 기정학으로 표현하든 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트럼프 행정부 이래 바이든 행정부까지 일관되게 추진하는 것은 중국의 기술 굴기가 미국을 위협하고 있고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민관 협조하에 기술 우위에 있는 분야의 초격차를 계속 유지하고 활용하면 미·중 경쟁에서도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정학’적 외교가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마크 밀리 미국 합참 의장은 10월 27일(현지시간)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에 “지금이 ‘스푸트니크 순간’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스푸트니크 순간’은 1957년 10월 옛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리면서 미국 등 서방에 충격을 안겼던 때를 의미한다.

관련해서 미 상무부는 최근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에 글로벌 공급망 관련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 아울러 미국 무역대표부는 중국의 노동관행을 문제 삼아달라고 요청했다. 정부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글로벌 공급망 문제가 국가 안보 문제화되면서 기업의 이익과 국가 이익이 긴밀히 연계되는 냉엄한 현실이 전개되고 있다. 정부가 기업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뒤로 물러서 있다면 이는 정부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혁신 경쟁법’ 등 다수의 미 의회 입법과 미 행정부의 정책에 따라 부서별로 다양한 공조 요청을 받을 것이다. 이를 임시방편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컨트롤타워 부서에서 전체 예상 리스트를 만들어 공조 가능한 분야와 어려운 분야를 총정리해 체계적, 전략적으로 검토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면 동맹 차원에서 어느 정도 공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범위와 방안이 나올 것이다.”

미국이 최근 전통적 우방국과 안보 동맹을 강화하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오커스, 쿼드’ 등이 있는데 전 세계 외교 지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미·중 관계 차원에서는 이전 40여 년간의 대중국 전략적 관여 정책을 버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략적 경쟁국으로 전환하는 시기다. 양국의 국내 정치적으로도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의 3연임 문제를 결정지을 제20차 전국대표대회(당 대회)를 앞두고 있고 미국도 새해에 중간선거가 있어 서로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미국과 중국 간 충돌로 인해 거대한 체스판이 흔들리고 있는데 미국은 미국대로, 중국은 중국대로 편 짜기, 즉 각각 반중·반미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충돌과 경쟁 요소를 완화하기 위해 기후변화라든가 코로나 감염병 등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는 일부 제한된 분야에서의 협력과 타협은 있을 수 있다. 아울러 민감 지역에서의 갈등이 군사적 긴장으로 확산하지 않도록 예방 외교나 위기 관리 등을 통해 새로운 게임 규칙이 나오기 전까지 양국 관계를 어느 정도 관리(manage)하려 할 것으로 본다.”

보복과 겁주기로 상대 길들이려는 중국 외교


▎전차와 자주포·야포 등 러시아군 병력과 장비가 2021년 11월 1일 우크라이나에서 가까운 국경에 대규모로 집결한 모습이 인공위성에 포착됐다. 최근 우크라이나는 NATO와 EU 가입을 추진 중이며 러시아는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 사진:로이터
‘시진핑 체제’는 더욱 공고해져간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추구하는 외교 전략에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면.

“11년 전 류밍푸의 저서 [중국몽]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거대 목표가 돼 시진핑 정부와 중국 공산당의 외교, 경제, 군사, 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전략이자 정책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미국을 제치고 세계 일등 국가를 차지하겠다는 야심과 이를 실천하려는 구체적 행동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매우 공세적이고 전방위적이며 장기전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과거에는 국제 질서에 대한 현상 유지적 성향과 함께 실용주의적이었다면 현재는 현상 변경적이고 이념적인 태도를 보여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중국의 ‘전랑외교’가 도마에 오른다.

“트럼프와 바이든 미 행정부의 대중 강경 외교 이후 더욱 분명해지고 있지만, 더 길게 보면 시진핑 시대 중국 외교의 중요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덩샤오핑 시대의 ‘도광양회’, 그리고 후진타오 시대의 ‘화평굴기’ 전략하에서는 중국의 외교가 신중하고 대응적이었다면, 시진핑 시대 중국이 공세적으로 부상하면서 외교도 공격적, 주도적으로 바뀐 것을 상징한다. 특히 ‘전랑(늑대전사)외교(wolf warrior diplomacy)’라는 표현이 보여 주듯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같은 보복적 개념과 겁주기를 통해 상대를 길들이려는 중국판 강압 외교(coercive diplomacy)라고 하겠다. 시진핑 시대 초기 ‘친성혜용(親誠惠容)’의 주변국 선린우호 정책과도 구분된다. 미 의회에서 추진 중인 ‘혁신 경쟁법(전략경쟁법안 포함)’에서도 주요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과의 무역 전쟁, 홍콩 민주화 시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 인권 문제, 타이완 문제, 남중국해 문제, 호주에 대한 경제 보복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 표명 방식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에 대해서는 2016년 사드 배치 보복에 이어, 지난 7월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국내 언론 기고를 통해 ‘한국이 천하대세에 순응하라’고 촉구한 데 이어, 9월 초 방한한 왕이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문 대통령 예방시 한국 측이 중국의 ‘핵심 이익’과 ‘중대한 관심사’를 존중하라는 입장을 밝힌 것 등이 대표적이다.

한·일 관계, ‘독·프 엘리제 조약’에서 배워야


▎2021년 10월 27일 전남 여수시 오천동 여수 해양경찰교육원 정문에서 여수 시민들이 아프간 특별기여자와 가족의 입소를 환영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와 가족 391명은 여수 해경교육원에서 4개월간 생활하며 사회 적응 교육을 받게 된다. / 사진:연합뉴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인연이 있다고 들었다. 어떤 인물인가.

“장관 재임 4년여간 위안부 피해자 문제, 유네스코 산업 유산 등재 문제 등 여러 난제가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도 매년 6~7회 이상 만나면서 신뢰를 갖고 대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경화하고 있는 자민당 내에서 자신의 파벌을 이끌며 한·일 관계를 위해서 고뇌하는 정치인 중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다. 기시다파는 한국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하는 ‘고치카이(宏池会)’의 맥을 잇고 있다.”

대일 외교에 기회로 작용할까.

“한·일 양측 간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 속에서 그 원인이 된 과거사 핵심 현안에 대한 입장차를 좁히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일본의 경우 정부가 바뀌어도 외교·안보 정책은 계속성을 유지하는 경향이고 공이 우리에게 넘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차기 정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지작업 차원에서 기시다 총리의 취임을 양국 관계 회복을 위한 모멘텀으로 잘 활용했으면 한다.”

세계 외교 역사에서 한·일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만한 사건이나 결정이 있다면.

“역사 화해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가 엘리제 조약 체결의 결과로 설립된 ‘프랑스-독일 청소년사무국(OFAJ)’이다. 1963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900만 명 넘는 양국 학생이 언어·문화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지금도 매년 20만 명 이상 학생들이 서로를 배우고 있다. 독·프 양국이 2006년 여름에 공동 제작해 사용하고 있는 공동 역사 교과서도 부러운 선례다.”

프랑스와 독일은 한·일 수교 2년 전인 1963년 ‘엘리제 조약(Elysee Treaty)’ 체결을 계기로 화해했다. 그 이후 많은 분야에서 협력을 통해 신뢰를 구축한 결과 2019년 신엘리제 조약에 해당하는 ‘신우호조약’에 서명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국가가 늘어난다. 남미 일부 국가, 미얀마, 아프간 등이 대표적인데 외교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들 지역뿐 아니라 이제 전 세계 많은 지역이 정치, 경제, 치안, 보건 등을 이유로 불안한 경우가 대폭 늘고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교민의 생명과 재산, 진출 기업의 이익, 우리 외교관의 안위를 위협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동맹 및 우방국과의 긴밀한 정보 공유와 위기 시 공조체제, 교민과 체류자 국외 이송을 위한 위기관리 체제를 마련해둬야 한다. 이번 아프간과 미얀마 사태 처리 과정에서 정부가 교민 탈출과 보호 등에 기울인 노력과 대책은 시의적절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조력자들의 한국 이송도 평가받을 만 하다.”

“외교는 진영 논리나 그룹 사고에서 벗어나야“


전 세계 난민이 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우리는 6·25전쟁과 대량 실향민을 경험했고 지금도 탈북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유엔 10대 기여국이자 G-10에 근접하는 나라로서 인도주의와 인권 차원의 국제적 노력에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유럽이나 남아시아 국가들처럼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에 난민 입국을 원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사와 입국 후 처우에 있어서 보다 열린 자세로 정책적, 사회 문화적 포용성을 보여야 한다.”

올해 6월 발표된 유엔난민기구(UNHCR) ‘2020 글로벌 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2020년 말 기준 전 세계적으로 8240만 명이 강제로 집을 떠났다. 전 세계 인구의 1%가 강제 ‘실향’ 상태인 셈이다. 난민의 3분의 2는 5개 국가(시리아 670만 명, 베네수엘라 400만 명, 아프가니스탄 260만 명, 남수단 220만 명, 미얀마 110만 명)출신으로 집계됐다.

우리나라 미래를 대비해 외교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거나 관계 개선이 필요한 국가가 있다면?

“장관 재임 시 공개적으로 또 비공개적으로 많은 외교 노력을 기울인 나라가 쿠바다. 2016년 한국 외교장관으로서는 최초로 직접 쿠바를 방문해서 외상 회담도 갖고 그전에 쿠바 이외의 장소에서 비공개로도 만났었다. 쿠바와 북한과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민감한 측면이 많아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 기간에 미국과 쿠바의 관계가 다시 악화했는데 바이든 행정부가 오바마 행정부 당시 정책을 부활시킨다면 이러한 변화를 잘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차기 정부에 조언하는 바가 있다면.

“진영 논리나 그룹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외교가 국내 정치나 이념의 부속품이 돼서도 안 된다. 감성 외교에 빠지면 국익에 손상을 줄 때가 많다. 커다란 외교·안보 체스판이 흔들리는데 부분만 보고 전체를 못 보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2022년은 한국 외교의 기회가 될까.

“수십 년 만에 다시 대전환의 시대가 왔다. 격동과 격랑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방향 감각과 좌표 의식이 없으면 표류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G-10 수준에 근접한 대한민국이 한반도와 동북아를 넘어 국제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하려면 바이든 행정부의 슬로건처럼 외교가 중심에 서야 하고 경제와 기술, 정치와 안보 역량이 같이 가줘야 한다. 국민적 합의와 지혜로 받쳐주면 산업화와 민주화에 이어 다시 한번 도약할 기회가 될 것이다.”

- 글 조규희 월간중앙 기자 cho.kyuhee@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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