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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 2022 한국 대전환, 선도국가로 가는 길-사회]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념보다 실사구시하는 시민사회 성장에 기대 걸어 

민주화의 순기능 소진… 증오의 정치, 복수의 대중심리 더 악화돼
국가 중심 사조에 반대하는 ‘성찰적 시민’이 제2근대 만들어낼 것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9년 이후로 악화된 증오의 정치가 사회에 만연해 있지만 경직된 이념보다 실사구시를 선호하는 시민사회의 잠재역량이 성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경영학자는 흔히 한국의 기업은 일류인데 정부는 삼류라는 말을 한다. 기업과 정부는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효율성, 책임성을 따지면 그렇다는 뜻일 것이다. 사회학자로서 견해를 말해보자면 한국의 시민사회는 일류로 성장하는데 정부는 삼류로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한국 시민사회는 세계 일류다. 그러나 적과 동지를 이분법적으로 갈라 통치하는 문재인 정부의 사회통합 능력은 삼류 수준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부러워하는 세계시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양당체제는 서구를 닮은 면이 있다. 여야가 불꽃 튀기는 선거 경쟁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어간다. 권위주의 시대의 전임 대통령을 4명이나 감옥에 넣었다. 아시아 어디에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일본과 한국은 이 점에서 너무도 다르다.

노무현 비극적 최후로 한국 정치 파행의 길 걸어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5월 18일 오전 청와대에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의 신임 위원장에 한상진 서울대 교수를 임명, 위촉장을 수여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필자도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정치에 희망을 가졌다. 갈등이 때로는 위태롭게 보였지만, 한국 정치는 이를 통해 국민통합을 이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뜻했던 1997년 대선이 대표적 보기다. DJP 연합도 한 측면이지만, 김중권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 강인덕 초대 통일부 장관 등은 파격적인 화해와 공존의 시도였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완전히 딴판이다. 민주화의 순기능은 거의 소진됐고 역기능이 누적돼 한계 상황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걱정스럽다. 21대 대선 과정에서 감옥 얘기가 너무도 자주, 공공연하게 나온다. 양대 진영 대선후보가 그렇다. 국민의힘 대선후보 경쟁에 나섰던 홍준표는 거리낌이 없다. 대선에 패한 사람은 감옥 갈 운명이며, 어쩌면 이긴 사람도 감옥 갈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더욱이 양대 진영 배후에서 충성을 다하는 조직화된 시민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 정치는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최후로부터 파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감정의 정치, 증오의 정치, 복수의 심리가 정치의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2022년 3월 우리가 치를 21대 대선은 감정 정치의 대단원과 같은 것이다. 회고해보자. 2012년 대선을 전후한 친노의 결집은 증오와 복수의 집합 감정의 표현이다. 10년 뒤 오늘날 21대 대선에서 윤석열 야당 후보를 떠미는 집합 의식도 유사하다. 증오의 감정은 상대 진영을 긴장시킨다. 과거의 여당이 그렇듯이 오늘의 집권여당도 마찬가지다. 야당의 대선 후보는 더는 상생의 파트너가 아니다. 감옥에 넣어야 할 적이다.

사회학 이론을 하면서 근래 경험적 자료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그런데 증오의 감정을 정확히 측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을 최초로 시도한 것은 2012년의 국민의식 조사였다. 당시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관한 시민의 태도를 물었다. 원인이 “검찰의 무리한 수사 때문”이라는 주장과 함께 “책임을 회피하려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견해 등에 대한 응답을 구했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주목한 시민은 66.7%(684명)였고 책임회피에 공감한 시민은 48%였다. 그의 자살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표현에는 53%가 수긍했다. 지지정당별로 살펴보면, 당시 새누리당 지지자는 42.4%, 민주통합당 지지자는 85.4%, 통합진보당 지지자는 무려 96.4%가 검찰의 무리한 수사 때문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노무현을 정치적으로 희생시킨 사람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는 설문에 대한 반응이다. 고심 끝에 만든 설문이었다. 이에 공감하는 시민은 59.6%(611명)에 달했다. 그렇다면 그 60% 시민은 누구인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자 77.6%, 박근혜 후보 지지자 43.2%가 이런 응답을 했다. 현저한 차이다. 2040세대는 67.4%, 5060세대는 47.0%, 이념적 진보는 75.8%, 이념적 보수는 40.3%, 당시 민주통합당 지지자는 76.4%, 새누리당 지지자는 36.5%만 이에 공감했다.

온라인 정치, 증오 감정의 배설장으로 변해


이를 통해 적폐청산의 정치를 미리 보았다. 그래서 2014년 [정치는 감동이다]라는 책에 “증오는 양날의 검이다. 증오는 아군 진영의 결속을 강화하는 동시에 상대 진영의 결속 역시 강화시킨다. 언제 어떤 식으로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그 뒤 문재인 후보는 이 책에 추천서를 써주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더 아파야 합니다. 더 신랄하게 비판받고, 더 아프게 회초리를 맞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2017년 대선 승리를 위해 당의 탈바꿈이 필요하다는 대목같이 읽힌다. 책을 매개로 한 교류는 전연 없었지만, 이런 열린 인식은 환영할 일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국 정치는 오늘날 과연 어디 서 있는가? 2016~2017년 ‘촛불 혁명’의 덕으로 무난히 집권한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로 상징되는 다양한 시민집단의 변화와 열망을 국민통합으로 용해하며 야당을 동반자로 인정하고 민생문제, 남북문제, 코로나19 건강문제 등을 전례 없는 대국적 안목으로 풀어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근시안적인 헤게모니 쟁취를 위한 적폐청산에 몰입하면서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2012년 대선 당시보다 증오의 정치, 복수의 대중심리를 훨씬 더 악화시킨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2014년에 썼던 책의 추천서를 다시 읽으면서 반복되는 역사에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우리가 처한 객관적 현실을 보면, 정치가 수행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갈수록 심화하는 미증유의 위험사회를 어떻게 관리하고 개선할 것인가의 지난한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한국의 노령화 사회 질주는 전례 없이 빠르다. 노인 빈곤율, 자살률은 세계 최고다. 압축적 개인화의 급진화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 시민의 행복감, 안정감, 연대성은 최하위권에 속한다. 출산율은 세계 꼴찌다. 경제적 양극화, 정치적 양극화뿐 아니라 감정의 양극화가 사회관계를 갈기갈기 찢어 해체하고 있다. 돌진적 근대화의 부산물이 도처에 누적됐으며 크고 작은 사고의 위험이 시민 생활 위에 겹겹이 싸여 있다. 냉정히 생각하면, 정치가 홀로 다루기에는 매우 벅찬 상태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진정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시민안전사회 협치’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2009년부터 정치권이 적대적 공존 전략으로 감정 정치에 매몰되면서 정치의 사회통합 기능을 거의 완전히 잃었다는 점이다. 권위주의 체제의 부활을 알리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오판, 단견, 착오로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이에 시민·대중은 이른바 촛불 혁명으로 역사의 혼돈이 바로잡힐 것이라 예상하고 문재인 정부를 반겼다. 그러나 지배집단이 교체되고 이념 수사가 바뀌었지만, 실체적 변동은 없거나 미미했다. 승자의 잔치만 계속됐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은 더 심각해졌으며 정치의 결과에 책임지는 책임 윤리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감정 정치가 더욱 번져 온라인 정치는 온통 이런저런 증오 감정의 배설장으로 변했다.

“진영 갈등보다 공존 원하는 시민 더 많아”


▎2013년 4월 9일 한상진 민주통합당 위원장의 대선평가보고서 관련 기자간담회.
그렇다면 한국사회의 현실은 그저 절망적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비판이론의 맥을 잇는 사회학자라면 아무리 상황이 절망적인 것처럼 보인다 해도, 바로 그 사회 흐름 안에서 희망의 거점을 찾아내 인식의 표면 위로 올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먼저 약한 희망의 근거를 보겠다. 중민재단은 2020년 6월, 2020년 9월, 2021년 9월에 30개 이상의 대도시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이를 통해 각 도시 시민이 체감하는 자국의 소득 분배, 교육 기회, 젠더 관계, 소수집단에 관련된 다차원의 공정성 지수를 측정해보았다. 10점 만점 척도에서 서울시민이 본 한국의 소득 분배 공정성 지수는 4.60으로 나왔다. 그런데 세계평균도 4.60이다. 교육 기회의 공정성도 비슷하다.

그러나 젠더 공정성으로 가면 세계평균은 5.26인데 서울 시민의 평균은 4.95다. 이스탄불, 산티아고, 상파울루, 로마, 바르샤바, 멕시코시티, 도쿄, 부다페스트와 함께 낙후한 실적을 보인다. 소수집단에 대한 공정성은 더욱 그렇다. 특히 젠더 관계의 공정성에 대한 한국 여성의 감각이 매우 예민해지고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한국사회는 매우 불공정한 사회라는 자의식이 젊은 세대 사이에 퍼지고 있다.

필자는 이런 배경에서 시민사회의 공동체 회복력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치의 본질이 적과 동지의 투쟁에 있다는 것은 고전적인 명제지만, 중요한 진실은 정치의 목표는 공존에 있으며 양극대립의 배후에 있는 공통의 세계를 찾고 복원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집권이 최상의 목표인 정치인들은 의도적으로 적과 동지를 능란하게 양분한다. 양대 진영에 충성하는 조직화된 시민집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침묵하는 다수를 포함한 시민의 관점은 다를 수 있다.

정치의 기본과제에 관한 설문 결과를 보겠다. 적과 동지 사이의 투쟁이 우선인가, 진영 갈등 배후에 있는 공통의 세계를 찾는 것이 우선인가를 물었다. 이 설문으로 정치의 과제를 보는 세계시민의 관점을 양극대립, 즉 보혁(진보·보수) 투쟁 선호지수로 계산했다. 10점 만점 척도에서 서울시민의 보혁투쟁 선호지수는 4.29다. 세계평균 수준(4.23)과 거의 같다. 프라하가 5.47로 가장 높고 자카르타가 2.97로 가장 낮다. 리야드, 웰링턴, 스톡홀름, 파리, 런던, 오슬로, 시드니 등은 서울보다 높지만, 이스탄불, 리스본, 바르샤바, 마드리드, 로마, 상파울루, 산티아고, 모스크바, 하노이 등은 서울보다 낮다.

더 나아가 보혁투쟁의 반대편을 편의상 IBC 지수라고 부르겠다. IBC는 양극대립의 배후이자 사이에 있는 공통세계(In-between Common World)를 가리킨다. 10점 척도에서 IBC 지수의 세계평균은 6.77이고 서울은 6.71이다. 보혁 지수처럼 우리는 딱 중간에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세계 어디서나 IBC 선호지수가 보혁투쟁 선호지수보다 높다는 점이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경우에 잘 드러나듯이, 미국을 포함해 한국, 브라질, 터키, 폴란드, 헝가리 등 도처에서 보혁투쟁이 맹위를 떨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시민 다수는 통합과 중도의 IBC 지수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서울시민의 IBC 지수는 도쿄나 방콕, 싱가포르, 두바이, 오슬로, 런던, 파리, 아테네보다 높다. 요컨대, 한국의 정치 현실이 세계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보자면 특별히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은 세계적 양상의 일부이고, 다음으로는 시대 좌표의 관점에서 한국 21대 대선 양상을 좀 더 자세히 보겠다. 시대 좌표는 여러 노선의 경쟁을 전제한다. 진보와 보수의 생각이 다르고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의 선호가 다르다.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 시민의 자유를 옹호할 것인가에 따라 시대 좌표가 달라진다. 대선은 이런 사회의 다양성을 통합된 목표로 모으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분명한 점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시민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시민이 기대하는 한국의 미래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전자는 능력 위주의 공정한 대우보다는 약자 보호를 훨씬 더 중시한다. 강력한 정부를 선호하며 부국강병보다 민주주의 가치를 더 옹호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훨씬 더 중시하고 보편적 복지보다 맞춤형 복지를 더 선호하며 개인의 경쟁력을 옹호하는 경향이 현저하다. 차이가 분명하다.

“이번 대선서 중도의 힘으로 증오 정치 벗어날 수도”


▎‘비정규직 이제그만 1천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시민사회·노동단체 회원들이 2021년 10월 30일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정부에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LED 촛불 등을 들어보이며 상징의식을 펼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보혁투쟁 선호지수를 살펴보면, 양대 진영 대선후보를 지지하는 시민집단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정치인은 정치적 계산에 의해 시민을 분열시키지만, 그 효과가 어느 한쪽에 특별히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번 대선을 경유하면서 어떤 경로를 통하건 간에 중도정치 지형이 살아날 수 있다면 그 중도의 힘으로 증오 정치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강한 희망의 근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므로 자료를 좀 더 충실히 제시하고자 한다. 희망의 거점은 이제 더는 진보적 시민에 있지 않다. 코로나19 시대의 한 특징이지만, 세계 어디서나 스스로를 진보라고 말하는 시민은 국가권력의 입장에서 사물을 본다. 한국의 진보 시민은 더욱 그렇다. 이들은 엄격한 의미의 법치보다 긴급명령에 의존하는 예외적 통치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 정상화 정책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수한다. 환자의 프라이버시보다 방역·검역 정보의 투명한 공개를 선호한다.

정치를 적과 동지의 투쟁으로 본다. 과학과 기술에 의한 진보를 표방한다. 코로나19는 근대의 적이며 이를 물리치는 최선의 길은 백신 개발에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코로나19가 소환한 강력한 국가의 주요 지지세력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는 시민의 자유, 보다 정확히 말하면 위험사회의 불확실성에 민감한 성찰성을 지닌 새로운 시민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2020년 6월과 2021년 9월 사이에 어떤 변화가 세계시민사회에 일어났는가? 과학적 근대 전망은 26.6%에서 31.1%로 늘었다. 백신 개발과 접종이 거둔 성과가 아닌가 한다. 기술관료적 위험관리 전망은 27.9%에서 23.4%로 줄었다. 포스트 과학적 전망과 성찰적 제2근대 전망은 각각 9.5%, 36.0%로 거의 같다.

서울시민의 변화가 특히 인상적이다. 2020년 6월에는 과학적 근대 전망이 35.3%로서 성찰적 제2근대 32.2%보다 많았다. 그러나 2021년 9월에는 전자가 28.8%로 줄고 후자가 42.4%로 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세계 어디서나 위험사회에 민감한 성찰적 시민이 국가 중심 사조에 명백히 반대한다는 점이다. 코로나19는 강한 국가를 소환했다는 점에서 근대의 재생 같은 의미도 있지만,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고 위험사회의 주체로서 성찰적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제2근대의 출현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다. 한국은 이 세계적 변동 추세의 한복판에 있고 글로벌 탈바꿈을 이끄는 중심 국가의 하나다.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21대 대선 양상은 2009년 이래 악화된 감정의 정치, 증오의 정치, 복수의 대중 심리로 가득 차 있다. 양대 진영 대선후보 사이에 어떤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 누가 승리하건 미래는 불안하고 암울하게 보일 수도 있다. 대중독재의 위험성이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아울러 증오의 감정 정치가 시민사회에도 깊숙이 녹아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잠재역량 갖춘 시민사회로 ‘제2근대’ 물결 기대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의 시민사회에는 귀중한 발전의 잠재 역량이 성장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 더는 진보나 보수의 색깔, 진영 논리에 얽매여 있지 않다. 이들은 양대 진영 사이의 공통 세계를 지향하며 시민의 자유와 선택을 새롭게 옹호한다. 경직된 이념보다는 실사구시를 선호한다. 상당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이미 실효를 상실한 근대를 넘어 제2근대를 지향한다.

필자는 현재 우리 사회의 ‘중민(중산층과 민중의 복합적 개념)’을 여기에서 다시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1980년 대에 희망의 근거였던 중민 제1세대는 나름의 역사적 소명을 수행했다. 이들은 전형적인 근대의 산물이다. 그 뒤를 이어 제2근대의 물결이 오고 있다. 세계 변동의 관점에서 한국의 역동성을 잘 살펴볼 이유와 가치가 충분하다. 조직화되지 않았지만 사회 도처에 산재해 있는 새로운 중민, 성찰적 시민의 창의력을 모으는 정치적 리더십, 디지털 소통방식, 사회협치 제도가 정착된다면,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 동아시아, 특히 한국의 미래를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hansjin@snu.ac.kr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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