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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이 발굴한 ‘오랑캐의 역사’(27)] 일본 ‘대동아공영권’ 앞세워 제국 구축 정당성 포장 

만주국은 식민지 통치 이념 실험장이었다 

서양 국민국가 모방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만주서 점령 정책 등 실험
‘대동아제국’ 야욕 위해 내세운 구호들, 군국주의 전쟁범죄 도구로 전락


▎만주로 향하는 부의(溥儀, 1906~1967) 내외. 두 살에 청나라 ‘마지막 황제’로 즉위했다가 여섯 살에 퇴위한 부의는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나 천진(天津) 조계(租界)에서 지내다가 1932년 일본에 의해 만주국의 명목상 통치자로 추대되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2001년 영국 BBC방송이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선정한 여론조사에서 윈스턴 처칠에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이 이점바드 브루넬(1806~1859)이었다. 나는 그 전에 브루넬의 이름을 읽거나 들은 기억이 없다.

브루넬은 엔지니어였다. 그가 설계한 많은 교량과 터널, 기차역이 아직도 남아있고, 그중에는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을 듣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그의 면모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세 척의 기선이었다.

1838년에 대서양 횡단을 위해 건조된 그레이트웨스턴 호는 길이 71.6m에 총톤수 1350톤으로 당시 가장 큰 기선이었지만 브루넬에게는 시작품(試作品)일 뿐이었다. 목재로 만든 외륜(paddle wheel) 구동방식이었다. 5년 후의 그레이트브리튼 호가 진짜 야심작이었다.

길이 98m에 총톤수 3450톤의 그레이트브리튼 호는 덩치가 더 컸을 뿐 아니라 최신 기술을 활용한 배였다. 철제 선각(船殼)과 스크루 프로펠러는 이미 나와 있던 기술이지만 이런 규모의 배를 그 기술로 만든다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할 때였다.

19세기 ‘선박 대형화’ 로 아시아 정복 수단 갖춰져


▎그레이트웨스턴 호의 석판화. 1837년 이 배의 출현은 대서양 횡단노선에서 기선이 범선을 대치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그런데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을 시도하다 보니 건조에 6년이나 걸려서 비용이 잔뜩 쌓여 있는 상황에서 그레이트브리튼 호가 운항 1년 만에 좌초사고를 일으키자 회사가 사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헐값에 팔린 배는 수리를 거쳐 온갖 초라한 용도에 쓰이다가 1937년 포클랜드 앞바다에 수장되었는데, 1970년에 인양, 브리스톨로 옮겨져 영국 근대사의 기념물 하나가 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 호의 실패를 겪고도 브루넬의 의욕은 꺾이지 않았다. 배는 클수록 좋다는 믿음을 그는 갖고 있었다. 물의 저항은 배의 길이에 제곱으로 늘어나는데 용량은 세제곱으로 늘어나므로 배가 클수록 연료 효율이 좋아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211m 길이에 17274톤의 그레이트이스턴 호(1858년 진수)를 만들었다. 이 크기를 넘어서는 기선은 19세기가 끝날 때에야 나오기 시작했다. (1912년 침몰한 당시 최대의 기선 타이태닉 호는 269.1m 길이에 46328톤이었다.)

인도양 운항을 바라보고 ‘이스턴’이란 이름을 붙인 이 배는 그레이트브리튼 호보다도 더 암울한 운명을 겪었다. 수많은 사고의 원인이 이 배의 덩치에 있었다. 항만과 항로가 그렇게 큰 선박에 맞춰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완성 후 진수부터 힘들었다. 1857년 11월 3일 예정된 진수가 실패하는 과정에 몇 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으면서 ‘불길한 배’로 소문이 퍼졌고, 3개월 후 겨우 진수에 성공한 직후에 건조비의 절반값으로 매각되었다. 배의 새 주인은 채산성을 고려해서 인도양 운항을 포기하고 아메리카 노선에 배를 투입했으나 신통찮은 영업 실적을 보이다가 1862년 5월 큰 사고를 일으키고 더 헐값으로 팔려 나갔다. 그 후 이 배의 가장 큰 역할은 1865~1869년 기간에 대서양과 인도양의 해저케이블 설치였고, 1890년에 해체되었다. 1869년 수에즈운하 개통도 이 배에 타격을 주었다. 운하를 통과할 수 없는 크기의 유일한 배였다.


▎윌리엄 탤보트가 1844년 찍은 그레이트브리튼 호의 모습은 최초의 선박 사진으로 전해진다. / 사진:위키피디아
한 천재 엔지니어의 선박 대형화에 대한 집착을 통해 19세기 중엽 해상운송의 대형화를 돌아보게 된다. 1497년 바스코다 가마의 인도양 진입 때 기함 상가브리엘 호는 178톤 크기의 카라크선이었고 4척의 배에 170명이 타고 있었다. 18세기 말까지는 배의 크기도 항해 속도도 천천히 조금씩 발전했다. 19세기 들어 배의 크기와 속도가 갑자기 커지고 빨라진 것은 산업혁명의 성과였다. 이제 유럽인은 인도양 해역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은과 값비싼 특산물을 바꿔 가던 단계를 넘어 공산품과 원자재를 대량으로 옮길 수 있고, 필요할 때는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 정복을 위한 동기와 수단이 갖춰진 것이다.

1793년 영국 사절과 1795년 네덜란드 사절이 청나라를 방문한 기본 목적은 교역 확대였다. 두 나라는 직물공업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되어 교역 확대의 필요를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고, 각각 인도와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에 근거지를 갖추고 있어서 중국 진출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나라들이었다.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중국이 언젠가 “좌초해 산산조각이 날” 것으로 보았지만 “낡고 다루기 어려운 초대형 전함”을 당장 어쩔 길이 없었다. 그러나 40여 년 후에는 교역 확대의 의지를 무력으로 관철할 수 있게 되었다. 인도에서 양성한 병력을 동원하고 기선의 기동력으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1839~1842)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개항(開港)’의 전형이 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교역의 통제는 국가체제 유지를 위한 중요한 과제였고, 경제여건의 변화에 따라 교역의 수요가 늘어나더라도 국가의 통제 아래 서서히 늘리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1840년경에는 교역의 급격한 확대를 원하는 서양세력이 현지국가의 통제력을 격파할 군사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중국에 이어 개항의 압력을 받은 곳이 일본이었다. 일본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파고드는 사(私)무역 활동의 중요한 근거지였기 때문에 1540년대부터 유럽인의 교역망에 편입되었으나 17세기 초 도쿠가와 막부의 통제가 강해지면서 교역량이 크게 줄어든 상태에 있었다. 19세기 들어 일본의 개항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된 세력은 미국이었다. 태평양 연안까지 ‘서부개척’을 완성한 미국이 ‘세계 최대의 시장’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일본을 거점으로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1853년 페리 함대의 무력시위 앞에 막부가 무릎을 꿇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왕조의 속성을 가진 정치조직이었다. 어떤 왕조든 긴 시간이 지나면 현실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게 된다. 쇼군(將軍) 자리의 계승에서부터 이 문제가 나타난다. 12대 쇼군 이에요시(家慶, 1793~1853, 재위 1837~1853)가 덴포(天保)개혁을 추진할 때까지는 쇼군의 권위가 살아있었지만 병약한 13대 이에사다(家定, 1824~1858, 재위 1853~1858)와 너무 어렸던 14대 이에모치(家茂, 1846~1866, 재위 1858~1866)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유력한 계승자로 널리 촉망받던 요시노부(慶喜, 1837~1913, 재위 1866~1867)는 권신들의 기피 때문에 거듭거듭 배제되다가 막부의 종말이 코앞에 닥친 1866년에야 쇼군에 즉위해서 설거지만 맡았다.

막부 통치권 이전 ‘대정봉환’은 메이지유신 출발점


▎백화점 광고판으로 전락한 1880년대 그레이트이스턴 호의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설거지 역할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200여 년 유지되어 온 체제를 해소하는 데는 많은 고통과 혼란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요시노부의 지혜와 용기가 그 충격을 최소화했다. 퇴각을 잘하는 데서 장수의 진정한 능력이 드러난다고 하는 병법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가 주도한 ‘대정봉환’(大政奉還: 막부의 통치권을 천황의 조정으로 넘겨준 조치)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비교적 순탄한 진행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1842년의 강요된 개항 후에도 변화의 필요에 대한 인식이 느리게 자라났다. 1856~1860년 또 한차례 전쟁의 수모를 겪고서야 동치중흥(同治中興)의 양무(洋務)운동이 일어났으나 서양의 이기(利器)를 도입하자는 피상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1890년대 신흥 일본의 자극으로 제도 변화까지 모색하는 변법(變法)운동으로 나아갔다가,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이 좌절된 후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혁명(革命)운동이 나타났다.

1868년에 시작된 메이지유신의 기본 성격은 변법 차원이었다. 1853년의 강요된 개항이 던진 충격 속에서 불과 15년 만에 이 차원의 진로를 확정한 것은 (개항 후 50여 년이 지나 일본의 성과를 보고서야 변법운동을 일으킨) 중국에 비해 새로운 길을 찾아나가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그 결과 1894~1945년의 반세기 동안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양상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남경조약(1842) 조인 장면. / 사진:위키피디아
근대화에서 일본의 ‘성공’과 중국의 ‘실패’ 사이의 차이에 관해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논설이 펼쳐져 왔다. 시간이 지나고 연구가 쌓임에 따라 분명해지는 사실은 이 차이가 당시 현장에서 이 과제에 임한 사람들의 능력 차이보다 두 나라의 역사적-지정학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이 더 크다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근대화는 ‘국민국가’ 건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국민국가의 기본 원리는 중앙정부가 국민 개개인을 직접 지배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국가는 중간계급의 복잡한 조직으로 이뤄지는 유기론적 구조를 갖고 있었는데, 그 중간조직을 ‘봉건체제’라 부르며 파괴하고 단순한 원자론적 구조로 조직한 것이 근대 국민국가였다.

조직의 단순화는 국가 기능의 증진에 유리한 조건이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에 출현한 제민(齊民)의 이념이 이 방향을 바라본 것이었다. 이 이념은 유가 사상의 한 요소가 되어 후세의 국가 형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지만, 근대 국민국가처럼 철저하지는 않았다.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근대 유럽에서는 중국의 왕조들과 달리 국가 기능의 극대화가 지속적이고 압도적인 과제였기 때문에 ‘국민국가’의 형태가 극단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이다.

막부로부터 ‘대정봉환’을 받은 후 메이지정부가 취한 첫 조치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이었다. 200여 다이묘(大名)의 분권(分權)을 폐지하고 모든 국토와 인민을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조치였다. 국내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국가 정책을 위해 동원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산업, 경제, 군사력의 급속한 발전이 가능해졌다.

일본의 이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로 기존의 막부체제가 저항하지 못할 만큼 쇠퇴해 있었던 점이 흔히 지적된다. 그러나 서방의 충격을 받은 다른 제국들(청, 무갈, 오토만)에 비해 규모가 작고 구조가 단순했다는 조건을 또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규모가 큰 제국에서는 왕조가 쇠퇴하더라도 그 안에서 다른 대안이 나오기 쉬운데, 일본에서는 막부체제를 대신할 유력한 대안이 내부에 없었기 때문에 서양의 국민국가를 모방하는 노선이 바로 결정되었다.

200여 다이묘의 분권 폐지,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


▎노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그가 ‘대정봉환’ 후 40여 년간 다양한 취미생활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을 위해서나 일본을 위해서나 다행한 일이었다. / 사진:위키피디아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제 앞에서 일본은 유럽보다도 오히려 유리한 입장이었다. 바다에 둘러싸인 영역 안에서 혈통, 언어, 문화 등 여러 조건이 통합되어 있었고 막부체제의 정치조직을 200여년간 공유해 왔기 때문이다. 유럽의 민족주의를 반성하는 취지에서 ‘상상의 공동체’라는 말이 유행했지만, 일본과 한국의 민족은 유럽에 비해 ‘실존의 공동체’로서 성격이 훨씬 강하다. ‘국민국가’의 견고한 성격이 유신 이후 일본의 발전에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통합성도 완전무결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작은 이질성이지만, 완벽한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과정에서는 두드러진 문제가 되었다. 아이누와 유구(琉球)인이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유구인은 여러 나라로 쪼개져 명나라 초기부터 각기 조공을 바치고 있다가 1429년에 통일왕국을 이뤘다. 인근 해역의 교역활동이 늘어나는 데 따라 경제적-문화적-정치적 발전을 이룬 결과였다. 1609년 일본 사쓰마(薩摩) 번(藩)의 정벌 후 중국과 사쓰마 양쪽에 종속하는 ‘양속(兩屬)’ 상태에 있다가 1875년 일본에게 정복당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현이 설치되었다.

홋카이도와 사할린, 쿠릴열도 등에 거주하던 아이누는 14세기부터 점차 일본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도쿠가와 시대에는 마쓰마에(松前) 번의 통치 아래 있다가 1800년경부터 홋카이도 남부 지역의 막부 직접통치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동진(東進)으로 북방에 불안감이 일어난 결과였다. 유신 초기에 개척사(開拓使)가 설치되어 일본에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오키나와에서 홋카이도까지 열도를 강역으로 세워진 근대국가 일본은 1895년 타이완을 출발점으로 일련의 해외영토를 취득하여 이민족을 지배하는 ‘대동아제국’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이민족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는 이중적인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같은 ‘동아인’으로 연대감을 호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치 백인이 유색인종을 대하는 것처럼 멸시하는 것이었다.

이 이중성의 원형을 일본인이 아이누를 대한 태도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원래 마쓰마에 번은 아이누에게 농민의 통상적 복장인 도롱이와 짚신 착용을 금지했다. 양민 이하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말 러시아의 위협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허용이 아니라 강요로 뒤집었다. 상황과 목적에 따라 이웃과 다른 점을 강조하기도 하고 같은 점을 강조하기도 한 것이다. ‘국민’의 범위를 넓히려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관점과 ‘민족’의 범위를 좁히려는 ‘야마토(大和) 정신’은 일본의 국민국가 건설부터 제국 확장에 이르는 과정에 나란히 작용하며 많은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같은 ‘동아인’ 말하면서 다른 민족 멸시했던 일본인


▎19세기 초 아이누 거주 지역. / 사진:위키피디아
일본은 1895년에 타이완을, 1910년에 조선을 식민지로 탈취했다. ‘식민지’라고는 하지만 제국의 구조적 발전에 활용하는 진정한 ‘식민(colonization)’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해외영토’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도 같다. 일본에게 정말 식민지다운 식민지는 1932년에 획득한 만주국이었다. 단순한 착취 대상에 그친 타이완·조선과 달리 만주국은 ‘대일본제국’ 구축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제국 차원의 산업개발과 함께 농민의 이주도 적극 추진되었다.

루이즈 영의 [Japan’s Total Empire 총(總)제국 일본](1998)은 만주국의 역사를 살펴보되 일본이 만주국에 끼친 영향보다 만주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에 중점을 두고 들여다본 연구다. 요컨대 식민지다운 식민지로서 만주국을 확보함으로써 일본이 제국다운 제국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국(empire)’이란 다른 혈통-언어-역사-문화를 가진 여러 집단을 하나의 세력이 지배하는 현상이다. 근세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일어날 조건이 제한되어 있었다. ‘지배’가 성립될 만큼 접촉면이 큰 대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 들어 교통-통신-군사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구 반대편까지 지배의 확장이 가능하게 되면서 유럽 국가들이 각자 제국 하나씩을 꾸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근세 이전의 제국은 하나의 문명권을 하나의 세력이 석권하는 현상이었는데, 근대의 제국은 여러 세력이 문명권의 울타리를 넘어 전 지구 표면을 쪼개 가지는 현상이 되었다. ‘안과 밖이 따로 없는 천하’를 관리하던 근세 이전 제국과 달리 근대의 제국들은 내부의 ‘통합’과 외부와의 ‘대립’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과제를 함께 가지게 되었다.

메이지유신으로 ‘국민국가’를 이룬 일본에게 제국주의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과제였고, 경쟁의 압박 속에서 군국주의의 길에 빠진다. ‘유신 3대 공신’으로 꼽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메이지 정부에 반기를 든(1877) 것을 일본 군국주의의 선구로 볼 수 있다. 사쓰마 반란 평정 후 일본은 온건한 발전노선을 모색하여 ‘다이쇼(大正, 1912~1926) 데모크라시’에 이르렀으나 1929년 대공황을 뒤따른 국제정세의 긴장 속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을 신호탄으로 본격적인 군국주의가 시작된다.

러-일 전쟁(1905) 이후 요동반도 조차지를 중심으로 진행된 일본의 만주경영의 양대 기관은 만철(滿鐵, 남만주철도주식회사)과 관동군(關東軍)이었다. 만주의 광대한 영역을 활용하면서 혼란에 빠진 중국을 침략하는 제국의 구상이 두 기관을 중심으로 익어갔지만 본국정부는 1920년대 말까지 이 구상을 채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중에 중국 민족주의가 고조되며 만주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협조적이던 태도를 바꿀 기미를 보이자 관동군이 독자행동에 나섰다. 1928년 장작림을 암살하고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영은 1928년 사건과 1931년 사건이 일으킨 반향의 차이에 주목한다. 둘 다 군벌화된 관동군의 음모였다. 그런데 1928년에는 본국정부가 파장을 줄이는 데 급급했던 반면 1931년에는 관동군의 획책을 열렬히 지지하는 여론이 일어나고 그 압력으로 본국의 정당정치가 무너지기에 이른다. 이 무렵 국제정세의 변화가 일본을 군국주의의 길로 내몬 것으로 영은 해석한다.

만철(滿鐵)과 관동군(關東軍), 일본 만주경영 양대 기관


▎청나라 [직공도(職貢圖)](1751)에 그려진 유구인의 모습. / 사진:위키피디아
아이누 지역과 유구의 합병은 일본열도의 국토 정비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타이완과 조선의 탈취까지도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자위(自衛)의 성격으로 (강점당한 입장이 아니라 당시 일본 입장에서 볼 때) 인정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만주의 식민지 경영은 제국주의 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이었고, 이에 따라 일본의 국가 성격까지 크게 바뀌게 된다. 정치의 변화만이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대일본제국’의 꿈이 부풀어 올랐다.

이 꿈을 대표한 표현이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었다. 군국주의자들만의 꿈도 아니었고 일본인만의 꿈도 아니었다. 일본의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도 이 꿈에 동참했고, 서양인의 침략과 지배에 시달리던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도 큰 공명을 일으켰다. 만주국은 이 꿈을 키워내는 온상이 되었다.

영은 [총제국 일본] 제5장에서 일본 군부와 자본 세력의 이해관계가 만주경영에서 합쳐지는 상황을 그린 다음 제6장에서 온갖 종류 이상주의자들이 만주에서 꿈을 펼치는 모습을 그린다. 일본보다 더 빠른 철도와 더 깨끗한 도시를 만든 엔지니어들도 있고, 동아시아 문명의 진면목을 되살려내려는 연구자들도 있고, 사회주의 혁명의 기반을 성숙시킬 길을 찾는 좌익인사들까지 있었다. 만주의 급속한 개발 상황은 이들 모두에게 (당시 본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던) 활동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만주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세 가지 구호가 1930년대에 유행했다. ‘보경안민(保境安民)’은 약육강식의 세계정세 속에서 주민의 안전과 복리를 지켜주는 국가라는 뜻이다. ‘왕도(王道)’는 서양의 제국주의에 동양의 이상적 정치체제로 맞선다는 뜻이다. 시대적 의미가 가장 크게 드러난 구호가 ‘민족협화(民族協和)’였다. 치열한 국제환경 속에서 일본의 첫 번째 과제는 국민국가 건설이었고 다음 과제가 제국-국제체제 구축이었다. 두 과제가 충돌하는 ‘민족’ 문제 극복을 위해 제시된 것이 ‘협화’ 이념이었다. 만주국은 이 이념의 실험장이 되었다.

여러 민족이 어울려 제국 경영에 참여해서 제국이 보장하는 평화와 복리를 함께 누린다는 이념이다. 일본제국은 이 멋진 이념으로 정복 지역 민족들을 유혹하면서 실제로는 백인 식민주의자들 못지않게 탄압과 착취를 자행했기 때문에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이념을 진심으로 추구한 일본인들이 있었고, 특히 만주국에 그런 이상주의자들이 많이 모여 실제 정책 수립과 집행에도 참여한 사실을 영은 [총제국 일본]에서 밝힌다. 급속한 개발 상황 덕분에 그들이 양심을 등지지 않고도 현실에 참여할 수 있는 활동공간을 찾을 수 있었으나 전쟁 상황의 격화로 이 공간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왕도’도 마찬가지다. 당시 일본의 동양학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큰 흐름을 이루었고, 그들은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항하는 길을 찾았다. 문제는 그들이 찾은 길이 국가권력의 강화에 있었기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에게 이용당하게 된 데 있었다. 이 문제는 ‘만주국 인맥’이 부각된 1970년대의 한국에서도 되풀이된다.

일본 후원으로 인도국민군 조직한 찬드라 보스


▎1943년 11월 도쿄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각국 지도자들. (왼쪽부터) 바 모(버마), 장징후이(만주국), 왕징웨이(중국), 도조 히데키(일본), 완 와이타야콘(타이), 호세 로렐(필리핀), 슈브하스 보스(인도). / 사진:위키피디아
1930년대의 만주국은 경제적 발전과 함께 ‘제국’다운 포용력을 썩 그럴싸하게 보여주었다. 1941년 12월 진주만 습격과 함께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로 진군을 시작했을 때 각지의 민족주의 세력이 ‘대동아공영권’의 구호에 상당한 호응을 일으키는 데는 만주국의 성과가 참고가 되었다. 일본의 전황이 불리해지는데 따라 일본군의 점령정책이 악랄해지고 현지인의 배신감을 불러오게 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본다면 현지인의 정치 발전에 도움이 된 측면이 적지 않았다. 피터 처치는 [A Short History of South-East Asia 동남아시아 약사](2017, 제6판) 55쪽에서 인도네시아의 경우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일본의 점령정책은 길게 볼 때 몇 가지 혜택을 인도네시아에 가져다주었다. 첫째, 네덜란드인을 행정업무에서 제거함으로써 현지인에게 식민통치 아래서는 맡을 수 없던 중요한 역할을 맡겨주었다. (…) 둘째, 네덜란드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어 사용을 권하면서도 (…) 학교와 정부에서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게 했고, 이것이 인도네시아 독립 과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셋째, 인도네시아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여러 가지 훈련과정을 만들어 운용했다. 1946~1949년의 독립전쟁에서 이 군사훈련의 성과가 큰 가치를 발휘했다. 넷째,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수카르노 등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감옥에서 풀어주었고 그들은 일본이 제공해주는 매체와 수단을 통해 현지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각지 사정에 따라 얼마간 차이가 있지만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 일본이 두루 가져다준 선물이다. 한국과 중국처럼 오랫동안 일본의 야욕에 시달려 온 나라들과 달리 이들 지역에서는 일본의 악행도 전쟁 상황 때문에 부득이했던 것으로 이해해줄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 지도자들의 친일 경력도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일본 후원으로 인도국민군(INA)을 조직해 영국에 저항했던 슈브하스 찬드라 보스(1897~1945)는 종전 무렵 비행기사고로 죽었지만, INA장교 300명을 반역죄로 처단하려던 영국 당국은 여론에 밀려 포기해야 했다.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 산(1915~1947)도 막판에 돌아서기는 했지만, 일본의 지원으로 버마독립군(BIA)을 조직했고, 그의 암살 후 대신해서 독립 버마의 초대 수상이 된 우 누(1907~1995)는 종전 때까지 친일 정부의 장관직을 지킨 인물이다.

19세기 들어 서양세력의 물결이 들이닥칠 때 동방의 문명 수준이 높던 지역들은 대개 제국의 형태로 조직되어 있었다. 경쟁보다 조화에 중점을 두는 중층적 조직 방법이기 때문에 ‘국민국가’로 조직된 서양 열강과의 대결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일본은 예외적으로 ‘국민국가’로의 전환이 쉬운 나라였다. 그래서 서양식 근대화를 빨리 진행할 수 있었고, 20세기 초에는 영국의 현지 하위 파트너로서 유리한 발전 조건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후 파트너십의 틈새가 사라지자 독자노선을 찾아 나선 것이 ‘대동아공영권’을 내건 아시아의 맹주 자리였다.

‘대동아공영권’의 구호는 일본 군국주의에 이용당한 결과 한낱 전쟁범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많은 양심적인 학자와 사상가들의 고뇌의 산물이기도 했다. 노엘 페린의[Giving Up the Gun 총 버리기]가 다시 생각난다. 16세기 중엽 화승총이 전해진 후 얼마동안 일본인은 당시 유럽인보다 더 우수한 총기를 만들어 썼지만 다시 얼마 지난 후에는 일본인의 싸움에서 총이 사라졌다. 한 사회가 폭력의 에스컬레이션을 벗어난 특이한 사례다. 군국주의 시기 일본에도 평화를 염원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노력이 제일 많이 모인 곳이 만주국이었다. 일본제국의 역사에 희망적인 요소가 있었다면 만주국에서 제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김기협 - 서울대·경북대·연세대에서 동양사를 공부하고 한국과학사학회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에 계명대 사학과에서 강의하고, 1990년대에 중앙일보사 연구위원(객원), 전문위원(객원) 등으로 일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2년 이후 19년간 공부와 글쓰기를 계속해왔다. 저서로 [밖에서 본 한국사](2008), [뉴라이트 비판](2008),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2010), [아흔 개의 봄](2011), [해방일기](10책, 2011~2015), [냉전 이후](2016) 등이 있다.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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