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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0)] 이슬람 공격·학살 피해 퍼져나간 카파도키아 성상·성화 

우상은 사회의 불안을 먹고 자라났다 

중우정치·일신교의 탄생 배경엔 혼란과 무질서 있어
‘꿈과 환상의 거품’ 범람 시대, 실체 보는 혜안이 필요


▎터키의 옛 도시 카파도키아 남쪽에 있는 귀미스럴 수도원은 7세기경 이슬람의 핍박을 받던 기독교인들이 은신하며 신앙을 지켰던 곳이다. 가로 세로 50m에 이르는 넓은 공간을 손수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 사진:유민호
2022년은 호랑이해다. 자화자찬과 대박 만능주의로 치닫는 시대정신에 안 어울리는 생각이겠지만, 교훈으로서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봤다. 교훈이란 것이 그러하듯,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잘난 것들보다, 힘들었던 일들이 본보기로 떠오른다. 교훈의 출발점은 ‘실패하지 않으려면’이란 문제의식이다. 자랑은 하루 종일 열심히 들려줄 사람이 많다. 역설적 차원에서 본 역사라고나 할까? 흔히들 오해하면서 ‘거꾸로’ 생각하기 쉬운 큰 그림으로서 역사의 교훈, 나아가 철칙이 떠오른다. 여러 가지 있겠지만, 신년 한국에 어울리는 ‘교훈 철칙’으로서 두 가지 얘기부터 시작하자.

첫째 중우정치, 구체적으로 포퓰리즘 정치에 관해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우정치의 장본인은 포퓰리스트 정치가가 아니다. ‘통일 대박’이나 ‘G7에 준하는 선진국’을 주장하는 희망전도사가 주인공이 아니다. 발단은 포퓰리즘을 원하는 사람들 그 자체에 있다. 유권자로서의 국민이 포퓰리즘 정치의 출발점이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는 그런 공기 속에 탄생한 대중적 아바타, 즉 결과물에 불과하다.

나치와 히틀러 등장은 독일 중우정치의 핵심이 아니다. 중우정치, 선동정치를 학수고대한 독일인이 이미 1920년대부터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떠안은 엄청난 전쟁배상금 때문에 독일인 전체가 고생했다. 독일은 혁명과 무관한 이성의 나라다. 혁명은 아니더라도 근본적인 대변혁을 독일인 대부분이 열망했다. 히틀러는 화가를 지망한, 예민한 감수성과 직관력을 가진 인물이다. 게르만 전체에 흐르는 공기를 재빨리 읽고 거기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독일인이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히틀러를 만든 것은 바로 95% 이상 나치당에 표를 준 게르만이다.

‘빵과 서커스(Pains et Circenses)’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정 로마 정치를 얘기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말이다. 어원은 1세기 말 로마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is)다. 현대정치에서 중우정치를 상징하는 용어를 창조해낸 인물이다. 2000여년전 역사지만, 유베날리스는 당시 이미 ‘빵과 서커스’의 주체에 관한 부분을 명확히 했다. 황제가 먼저 나서서 음식과 검투사 쇼를 제공한 게 아니라 무지한 시민과 떼로 움직이는 노예들이 황제에게 달려가 ‘빵과 서커스’를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중우정치의 주체는 황제가 아니라 공짜를 바라는 시민이라는 말이다.

중우정치가들이 공짜와 환상에 매달리는 시민들을 선동하려 했지만, 반대로 실패한 역사적 교훈도 있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가 주인공이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쟁에서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친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비드 격이다. 그리스 시민 전체가 승리감에 도취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마라톤 전쟁 후 아테네 근교에서 은(銀)이 대량 발견된다. 정치가 대부분이 앞장서 발굴한 은을 아테네 시민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겠다고 호언한다. 전쟁 영웅에게 내린 신의 선물이 돈벼락이라 속삭인다.

그러나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인물이 있다. 바로 젊은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다. “페르시아는 육지가 아닌, 배를 이용해 그리스에 다시 올 것이다. 신이 내린 은을 활용해 배를 건조해야 한다.” 원래 그리스는 육군 중심의 군제였다. 배를 이용해 막강한 페르시아 해군과 싸우자는 얘기는 황당하게 들렸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들이 비웃으며 대박 꿈을 역설한다. 국운의 증거는 뛰어난 카리스마 지도자보다 평범한 시민의 예민한 판단력에서 찾을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 하의 열띤 토론 끝에, 그리스 시민들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생각에 동의하게 된다.

‘빵과 서커스’를 원한 건 누구일까


▎로마시대의 대표적 상징물인 콜로세움은 ‘빵과 서커스’를 원하는 대중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피 튀기는 검투사 쇼가 펼쳐졌다.
곧바로 광산의 은을 기반으로 200척의 배가 건조된다. 기원전 480년, 684척을 동원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했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가 압승했다. 세계 군사학 교제 첫 페이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살라미스 해전(Battle of Salamis)’이다. 중우정치가가 아무리 달콤한 소리를 하더라도 최종 결정은 대상이 될 시민이 내린다.

역사의 교훈 두 번째는 ‘일신교(Monotheism)’에 관한 부분이다. 단 하나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전부 이단으로 규정하는 종교관이다. 출발점은 기원전 2150년에 출생해 무려 175살까지 살았다는 아브라함이다. 일신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성인으로 추앙하는 인물이다. 전 세계 일신교가 바로 아브라함 한 사람의 신앙에서 출발한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익숙한 곳에서 일신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힌두교의 인도나 아시아의 불교국가 시각으로는 너무도 이상한 형태다. 신을 단 한 명만 모신다면, 다른 신들은 무시하고 잊는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신들을 내팽개칠 수 있는가라는 죄악감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일신교가 세계로 확장한 것은 150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4만 년 전 인류 출현 이래 대부분의 시대를 다신교(Polytheism)가 지배했다. 삼라만상에는 환경과 조건에 맞는 신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 생각이다. 서두에서 ‘거꾸로’ 생각하기 쉬운 큰 그림으로서의 역사라고 말했다. 일신교는 어떤 식의 해석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정되고 강하기 때문에 일신교가 등장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생각할 여유가 없을 때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도깨비 방망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혼란과 무질서 속의 절박함이 결국 단 한명의 신을 탄생시킨 배경이다.

불안과 공포 속에 탄생하는 ‘유일신’과 ‘독재자’


▎우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연결하는 ‘신의 아바타’로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달래주고 신에게 의지하도록 한 매개체였다. 고려인들은 높이 2.6㎝에 불과한 양류관음보살상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일신교의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 세계 역사에 본격 등장한 것은 3세기부터다. 우여곡절 끝에 기독교가 로마에서 인정된 것이 313년이다. 원래 로마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대제국이다. 로마가 자랑하는 ‘클레멘티아(Clementia)’, 즉 관용의 출발점은 종교에 있다. 민족·인종·남녀·지역보다 종교적 관용이 우선이고 필수였다. 고대 인류의 100%가 신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수많은 신들을 믿었다. 기독교가 금지된 것은 로마의 다신교 체제를 부정해서였다. 로마의 신들 중에는 황제도 포함된다.

이후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칙령을 반포하면서 기독교는 사실상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다. 역사가들은 서로마 추락의 기점을 서기 180년 사망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에 둔다. 이후 자식인 콤모두스(Commodus)가 나서지만, 3년 만에 암살되고 군인 정치가 시작된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는 칼 하나로 황제에 오르는 막장 역사에 의해 추락하기 시작한다. 물가가 오르고 변방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이름만 로마일 뿐 지역별 각자도생이 본격화한다.

기독교는 그런 불안과 공포를 잊게 해준 종교다. 기존의 로마 다신교가 해결하지 못한 것을 기독교가 풀어준다. 노예나 여자도 신에게 용서를 구하면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가 퍼져나간다. 기독교 이전까지만 해도 노예와 여자, 나아가 죄를 지은 사람은 이방인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로마를 일신교의 나라로 기울게 했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나아가 기독교 원리주의에 빠진 서방을 보자. 일신교에 대한 정열과 논리가 그 누구보다 강하다. 사회가 불안하고 내일을 두려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일신교만이 아니라 1인 독재 국가도 마찬가지다. 북한에 이어 무려 14억 인구의 중국이 단 한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베이징대학교 안에만 ‘시진핑 배우기’ 학습관이 무려 4개나 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다신교나 다원주의에 익숙한 사회와 국가는 무질서, 혼란, 공포, 불안에서 비교적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의 기반이 된 대중의 꿈과 환상은 유토피아 세계관으로 연결될 수 있다. 포퓰리스트 정치가는 밝고 희망찬 미래를 반복해서 강조한다. 현실과 동떨어진 뜬 구름 잡는 식의 얘기지만, ‘K’로 시작하는 수많은 1등 자랑거리가 복창 또 복창된다. 당연하지만, ‘포퓰리즘 정치=유토피아’다. 일신교는 어떨까? 공포, 불안을 기초로 한 디스토피아가 배경에 있다. 모든 걱정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해결사로서의 일신교지만, 기반이 되는 환경은 바로 어둡고도 척박한 디스토피아다. 유토피아라면 신을 찾을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에는 과연 어떤 존재가 있을까? 정치, 종교, 나아가 철학을 포괄하는 문제로,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개념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중 하나로 ‘우상(偶像)’에 주목한다. ‘대중의 꿈과 환상 속 유토피아’와 ‘공포와 불안속의 디스토피아’ 그 중간 어딘가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서 활약해온 것이 바로 우상이다.

우상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보인다. 우상을 통해 유토피아로 갈 수도, 반대로 디스토피아로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우상은 머릿속에 저장된 개념이 아닌, 눈앞에 나타나는 실체이자 현실이다. 시각은 오감(五感) 가운데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객관적인 감각이다. 우상은 눈이 있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이해될 존재다. 영어로는 아이돌(idol)이다. 원래 다신교에 기초한 종교적 개념으로 출발했다. 눈을 통해 확인하면서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원하는 존재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 때다.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한반도 불교 역사의 문을 연다. 이후 약 300여 년에 걸쳐 한반도 구석구석에 흡수된 뒤 일본으로 건너간다. 종이도 귀하고 글자도 못 읽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당시 어떤 식으로 포교가 이뤄졌을까? 정답은 중국에서 전해진, 손가락 크기의 금빛 불상이다. 일상에서 접하기 어려운 기묘한 모습으로 표현된, 번쩍이는 작은 불상을 접하는 순간 종교적 경이로움을 체험했을 것이다. 불상(부처)을 한 번 만지는 것만으로도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다. 불경이나 설법을 통해 100번 얘기하는 것보다, 신의 아바타 격인 불상을 보여주기만 하면 모두 순종했다. 서기 4세기는 제대로 된 조형물은 커녕 신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우상 자체가 전무했던 시대다. 그리스에서 출발해 인도와 중국을 거쳐 수입된 불상일 듯한데, 말로만 듣던 부처가 우상으로 ‘데뷔’하면서 한반도, 나아가 일본의 불교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공포와 동경이 혼재하는 ‘신의 아바타’


▎터키 카파도키아 귀미스럴 수도원에 그려져 있는 성모·성자 벽화. 일반적인 성화(聖畫)와 다르게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 사진:유민호
서방 박물관에 가면 최초의 인류 흔적으로 뾰족한 석기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아이돌, 즉 우상은 석기 도구 등장 이후 곧바로 탄생한 ‘생각하는 인류’의 발명품이다. 어떤 우상을 인류 최초 작품으로 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4세기 한반도의 불상처럼, 3차원 입체 조각을 기준으로 할 경우 1937년 독일 남부 홀렌슈타인 스타델 동굴에서 발굴된 ‘사자 인간 (Lion-human of Hohlenstein-Stadel)’이 최고(最古)의 우상으로 꼽힌다. 높이 31.1㎝, 두께 5.9㎝에 달하는, 매머드 뼈로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조각품이다. 빙하기 말기이자 구석기 시대인 기원전 3만5000년에서 4만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자 인간은 말 그대로 머리는 사자에 몸은 인간인 반인반수(半人半獸) 조형물이다. 사자 인간에 대해 처음 알았을 때 너무도 신기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인류 초기 역사에서 사자는 공포의 대상이자, 파워의 상징이다. 자칫 잡아먹힐 수도 있지만, 사자의 힘과 카리스마는 동경의 대상이다. 공포와 동경이 혼재하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복합계가 아닐까.

인류 최초의 입체 우상인 사자 인간은 꿈과 환상만이 아닌 불안과 공포도 투영된 존재였다. 이상과 현실의 중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신교 이전에 반인반수 하이브리드 세계관은 4만여 년 전 선사시대 때 이미 나타났다. 동물과 인간을 합친 세계관은 이집트 문명과 힌두교에도 남아있다. 그러나 그리스 문명에서 출발한 서방에서는 완전히 추방되고 만다. 그리스 신화 속 반인반수 캐릭터는 디스토피아로 추락하는 악의 화신에 불과하다. 그리스 당시 소의 머리를 한 크레타섬의 미노타우로스(Minotaur)만 봐도 그렇다. 인간과 동물의 교배로 탄생한, 신의 이름으로 처단될 불경스런 존재에 불과하다. 스페인은 칼로 소를 찔러 죽이는 투우의 나라다. 잔인한 쇼라고 반대하는 사람도 많지만, 성스러운 의식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투우는 악의 상징인 미노타우로스 처형을 당연시한, 지중해 문화·문명의 전통이자 흔적이라 강조한다.

21세기 서방 기독교 사회에서 통용되는 종교적 차원의 우상, 즉 성상(聖像), 성화(聖畵) 가운데 최고봉에 선 존재는 누구일까? 성모 마리아와 어린 예수에 관한 조각이나 그림이 중심에 있을 것이다. 그리스어로 ‘헤데게트리아(Hodegetria)’로 명명된, 성모와 성자의 형상이다. 유럽 박물관에 가면 너무 많아서 대충 보고 지나치기 쉽다. 성화의 경우 대부분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르다. 어린 예수를 마리아 무릎에 앉힌 모습, 마리아와 예수 모두 선채 정면을 응시하는 자세, 마리아와 예수가 서로를 쳐다보는 구도, 마리아는 예수를, 예수는 정면을 지켜보는 형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성모의 미소’ 찾아 터키의 수도원으로


▎문화·정치권력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상은‘아이돌’, ‘포퓰리스트 정치인’으로 현현(顯現)해 대중의 환상을 자극한다. 2019년 5월 영국 런던 피커딜리 서커스 전광판에 상영된 BTS의 팬 메시지 영상 앞에 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주목할 부분은 마리아의 얼굴 표정이다. 걱정과 근심이 새겨진, 슬프고도 고독한 모습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고통이 표류한다. 유럽 교회에 가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교회를 장식한 수많은 성상 가운데 헤데게트리아 앞에는 촛불이 절대적으로 많다. 카톨릭의 예법이지만, 교회에 들어가는 즉시 기도하고 싶은 성상의 제단 앞에 촛불을 놓는다. 필자는 가급적 예수 제단에 촛불을 바친다. 예수에 주목하는 프로테스탄트 영향이기도 하지만, 헤데게트리아에 비해 촛불이 너무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적게는 10대 1에서 거의 100대 1 수준으로 헤데게트리아의 촛불이 많다. 마리아와 함께 어린 예수도 묘사돼 있기는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보다 헤데게트리아에 대한 유럽인의 신앙이 절대적이란 점을 느낄 수 있다.

카파도키아(Cappadocia)는 터키를 찾는 한국 관광객이라면 거의 대부분 들르는 코스다. 보통 태양이 떠오를 때 기구를 타고 카파도키아의 절경을 구경한다. 종교적으로 카파도키아는 기독교 수난사의 상징적 장소다. 비잔틴 제국 때부터 동굴에 기독교 수도원들이 들어선다. 당초 더위와 추위를 피하기 위한 공간으로 출발했지만, 7세기 이후 이슬람 등장과 함께 미로로 연결된 요새 도시로 변한다. 이슬람 군대의 기독교도에 대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미발굴 지하 수도원이 즐비한데, 대략 지하 4층 5층까지 내려간다. 필자도 경험했지만, 잘못 들어갈 경우 출구를 못 찾고 헤매기 십상이다.

‘미소로 충만한 헤데게트리아’에 관한 얘기는 수도원과 주변을 돌아다니다 알게 된 정보다. 카파도키아 남쪽 귀뮈스럴 수도원(Gümüşler Monastery) 벽화에 웃는 모습의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웃는 성모를 본 적은 물론 들어본 적도 없다. 자식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는 어머니가 미소를 보일 수 있을까? 만약 진짜라면, 인류 최초이자 최후의 성모 마리아의 미소라 볼 수 있다. 기독교 성상, 성화 전체를 통틀어 웃음으로 표현된 유일한 벽화라 볼 수 있다.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귀뮈스럴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정복에 나설 당시 통과한 길목에 있다. 따라서 이슬람의 카파도키아 내 기독교 수도원 공격 통로이기도 하다. 16세기 유럽 주도의 대항해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대 이래 계속된 실크로드 가운데 하나로 활용됐다. 수도원 전체가 낮은 언덕 아래에 들어서 있다. 통째로 깎은 언덕 내부가 귀미스럴의 중심이다. 놀랍게도 가로 세로 높이 50m 정도로 넓은 사각형 입체 공간이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조성됐다. 허름한 연장 하나로 작은 산 하나를 깎은 셈이다. 귀뮈스럴의 역사는 대략 10세기 이후만 알려져 있을 뿐 이전 기록은 없다. 비잔틴 수도원이라고 하지만, 필자 생각으로는 알렉산더 통과 이전부터 번성한 곳으로 판단된다. 끝없는 평야가 이어져 있고, 물도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다.

‘미소로 충만한 헤데게트리아’를 찾아 수도원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 전체가 인공 동굴이다. 기독교 성인의 벽화가 동굴 안을 채우고 있다. 두 눈을 부릅뜬 예수의 얼굴 모습이 천정 한가운데 새겨져 있다. 비잔틴 시대의 예수는 공포의 신이었다. 소원을 빌고 축복을 원하기에 앞서,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신이여 우리를 용서하소서)’이라는 기도부터 시작했다. 성모 마리아는 그런 공포를 상쇄하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아이돌’이란 이름의 21세기 우상들

‘미소로 충만한 헤데게트리아’를 찾았지만, 눈에 안 들어온다. 수도원 바깥에 나서 안내원에게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다. 친절하게도 따라와 위치를 알려줬다. 큰 기둥 뒤에 숨어 있는 듯 가려진 성모와 성자의 벽화가 나타났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자 벽화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왼팔로 예수를 앉고 서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았는지 마리아의 몸이 거의 10등신에 가깝게 표현돼 있다. 성모를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지만, 길고 가는 손가락이 인상 깊다. 유럽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실크 옷이 아니라, 무명으로 장식된 소박한 성모자다.

경배를 올리고 싶었지만, 촛불 자체가 없다. 벽에 바짝 붙어 자세히 보니 미소라 볼 수도 있는 미묘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다. 성모만이 아닌 예수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배어있다. 입이나 눈으로 웃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헤데게트리아 앞에 선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사하는 느낌이다. ‘신비의 미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평할 때 언급되는 고정 메뉴다. 루브르 뮤지엄에 수차례 들른 필자의 감상이지만, 모나리자 표정에서 신비의 미소를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신교 세계관의 연장선이겠지만, 공포, 불안이 심할수록 종교적 우상도 범람한다. 수많은 성상과 성화가 귀뮈스럴은 물론 카파도키아 곳곳에 있다. 이슬람의 공격과 학살을 피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성상·성화들이 카파도키아 곳곳에 퍼져나갔다고 볼 수 있다. 평화와 안전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의 결과가 바로 카파도키아의 성상·성화들이다. 20세기 말기부터의 상황이지만, 우상은 종교적 차원을 넘어선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확산한 듯하다.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배우·가수·운동선수 같은 대중 인기인이 주인공이다. ‘스타(별)’라는 말도 있지만, 반짝하고 사라질 수 있다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아이돌이란 단어가 더 일반화하고 있다. 로마의 빵과 서커스에서 보듯, 아이돌은 개인의 탁월한 능력보다 아이돌을 원하는 환경의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2021년에 한국 아이돌은 K라는 이름으로 국가적 간판으로 세계를 향하고 있다. 서방 어디에도 없는, 개인이 아닌 국가를 배경으로 한 아이돌이다. 좋게 보고 자랑할 수도 있겠지만, 뒤집어 보면 반대 해석도 가능하다. 개인으로서가 아닌, 집단, 사회, 국가적으로 내재된 인정 욕구에서 ‘K 아이돌’이 탄생한 것이다. 우상의 배경이 그렇듯 실체로 들어가면 꿈과 환상의 거품에 불과하다. 프로테스탄트는 성모, 성자로 이뤄진 헤데게트리아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우상으로 둔갑한 사람들은 물론, 우상을 절대 숭배하는 사람들끼리의 반목과 경쟁이 극에 달할 것이다. 우상의 절대적 권위에 매달리면서 상대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마리아와 예수의 미소는 성화가 아닌, 인간 스스로의 마음속에 존재할지 모르겠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라는 세계도 인간 내면 깊숙이 새겨진 꿈과 공포의 분신이자 압축판이라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우상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처음에는 안 보이지만, 어둠 속에서 기다리는 동안 서서히 눈을 뜰 수 있게 된다. 우상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결론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 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1호 (20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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