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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수의 국가를 품격 있게 만든 지도자들(4)] ‘터키의 국부’ 아타튀르크의 100년 통찰력 

1차 대전 연합국들 분열 활용, 전쟁 피하면서 터키 공화국 건설 

시대가 낳은 인물이자 시대를 뛰어넘은 인물
국내 상황·국제 흐름 통찰해 국가 과제 해결


▎‘터키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100년 통찰력을 지닌 지도자로 평가된다. 터키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시내 중심마다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다.
터키에 대사로 부임한 이후 방문하는 곳마다 국부(國父) 아타튀르크의 자취를 보게 돼 참으로 특이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탄불 국제공항의 이름이 아타튀르크 공항이었고, 모든 화폐의 앞면에는 아타튀르크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전국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고, 시내 중심마다 아타튀르크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어느 관공서를 가더라도 그의 사진이 사무실 중앙에 걸려 있다.

외국 대사들은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한 이후 터키 정부가 주선하는 아타튀르크 영묘(靈廟) 방문을 첫 외교행사로 마친 뒤 공식 활동에 들어간다. 아타튀르크를 너무 신격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러 계층의 터키 사람들과 이야기해보면 거의 모두가 아타튀르크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그를 국부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타튀르크의 시신을 모셔놓은 앙카라의 영묘는 터키 국민이 꼭 가봐야 할 ‘버킷 리스트’ 방문지로, 사시사철 참배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영묘 건물 안은 우리의 현충원같이 옷깃을 여미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 앞 광장은 유명 관광지같이 젊은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사람들은 영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다. 서거한 지 80년이 지난 지금도 아타튀르크는 여전히 국민 삶의 한 부분이고, 그가 남긴 정책이 여전히 터키를 통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 그의 본명은 무스타파이고 중학교 시절 수학을 잘해 완벽하다는 의미의 케말이 별칭으로 붙어 무스타파 케말로 불렸다. 터키공화국 출범 이후 1934년 가족법에 따라 모든 사람이 성(性)을 갖도록 했는데, 그에게는 의회가 부여한 ‘터키인의 아버지’라는 의미인 아타튀르크가 붙었다. 그래서 1934년 이전에는 무스타파 케말로 불리다가 이후에는 아타튀르크로 불렸다.

군사적 열세를 외교적 책략으로 극복


▎터키 이스탄불 술탄 아흐메트 자미. 이스탄불에 남긴 오스만 유적인 우람한 돔 지붕 ‘블루 모스크’. 김영택 화백의 세계건축 문화재 펜화 기행.
터키인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역사적 인물로 꼽는 1위는 단연 아타튀르크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했던 메흐메트 2세 술탄이나, 중동·발칸·북아프리카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술레이만 대제보다 아타튀르크를 국민이 더 추앙하고 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을 읽어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아타튀르크의 업적은 크게 둘로 나뉜다. 그는 오스만 제국이 처절하게 와해되는 가운데 소아시아 지역에서나마 터키를 보전해 나라를 구했으며, 또한 오스만 제국과는 완전히 다른 정체성을 가진 공화국을 건국하고 광범위한 개혁을 통해 나라를 근대화시켰다.

그는 시대가 낳은 인물이었지만 시대를 뛰어넘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오스만 튀르크의 운명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15~17세기에 유럽 세력을 좌지우지했던 오스만 제국이 19세기에는 오히려 유럽 강국에 의해 그 운명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러시아의 남진, 영국·프랑스의 침탈, 제국 내각 민족의 저항으로 방향을 잃었고, 국내적으로 술탄 등 지배층 또는 젊은 장교 등 신진 세력이 시대의 흐름을 좇고자 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설상가상으로 1912~1913년 발칸전쟁에서 패배해 일부 지역이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고, 1차 세계대전에 독일·오스트리아 편이 돼 참전했지만, 패전과 함께 와해되고 있었다.

이처럼 허물어지고 있는 오스만 튀르크에서 터키인들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무스타파 케말뿐이었다. 그는 군사적 전략가일 뿐만 아니라 난세의 지도자라고 평가받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1915년 갈리폴리 전투였다. 무스타파 케말의 갈리폴리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불과 배 13척으로 133척이던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명량해전을 유추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갈리폴리는 다다넬스 해협 연해 지역으로 지중해에서 이스탄불 및 흑해로 진입하는 요충지다. 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는 독일에 의해 유럽대륙·발트해 진출이 좌절되고 오스만 튀르크로부터 지중해 진출이 저지당해 동맹국인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윈스턴 처칠 해군성 장관은 독일에 가담한 오스만 제국을 무너트리고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갈리폴리 지역에 각종 장비와 많은 병력을 투입했으며 무리 없이 장악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반해 오스만 군대는 병력 및 군수 보급에서 상당히 열악했고 영국·프랑스가 주축이 된 연합군과 전투하면서 탄약이 없어 후퇴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 최전선에서 지휘하던 무스타파 케말은 탄약이 떨어지면 총검을 써서 육탄전으로 버틸 것을 지시하는 등 배수진을 친 가운데 연합군을 물리쳤다.

당시 그가 부하들에게 내린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겠다. 다만 죽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우리가 죽을 즈음 다른 부대와 지휘관들이 우리의 임무를 대신할 것이다”라는 지시는 터키에서 회자되는 경구로,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말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게 될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와 유사하다.

1915년 3월부터 1916년 2월까지 1년 가까이 지속된 전투에서 양측 젊은이 34만여 명이 희생됐다. 연합군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처칠은 해군성 장관에서 불명예 퇴진을 해야 했고, 러시아에서는 1917년 소련 혁명의 기운이 타오르게 됐다.

갈리폴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제국은 결국 연합군에 무릎을 꿇고 해체 과정을 밟았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 지역을 차지하고 이탈리아·그리스는 소아시아 남부·서부를 장악하며 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은 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공동 관할하게 됐다. 아르메니아는 소아시아 동부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쿠르드는 독립하며, 외국인들에게는 치외법권의 특권을 주도록 하는 세브르 조약안이 제시됐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은 이 조약안을 거부하고 독립전쟁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갈리폴리 전투로 국민 신뢰를 얻었던 무스타파 케말을 중심으로 저항의 구심점은 형성됐지만,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이었기에 국민적 지원에만 의존해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전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국제 상황의 변화를 읽으면서 외교를 통해 연합세력 간의 분열을 조장했다.

그는 영국·프랑스 간 상호 이견이 심하고, 프랑스·이탈리아 등은 오랜 전쟁으로 소아시아에서 군사적 행동을 지속할 의사가 없었으며, 영국에서도 장기간 전쟁에 대한 국민의 염증 여론이 증가하고 있는 점을 파악했다. 동부전선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생겨 1917년 소련의 혁명 이후 정권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했던 영국·프랑스를 제국주의 국가로 경계하면서 오히려 터키에 대해 무기 및 자금을 지원했다.

전방위 개혁… 종교와 정치 분리


▎터키 남부 항구도시 안탈리아는 여느 휴양지와 다르다. 고대 그리스·로마부터 비잔틴,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공존하고 해변엔 근사한 리조트가 줄지어 있다. 시계탑과 이슬람 사원이 모여 있는 구도심.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를 이용해 영국을, 영국을 이용해 프랑스를, 그리고 불가리아를 이용해 그리스를 견제했다. 외교를 통해 프랑스·이탈리아에 경제 개발 특권을 부여하면서 소아시아에서 그 병력을 철수하도록 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연합국의 분열된 상황을 십분 활용해 영국·프랑스 등과 전쟁을 피하는 가운데, 터키의 전력을 그리스 및 아르메니아를 격퇴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통해 4년간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소아시아 지역을 보전한 가운데 터키공화국을 건설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새로이 건국된 터키를 어떤 방식으로 개혁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정치 체제와 관련해 오스만 제국의 술탄제와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모든 정당한 정부는 공화제’라는 장 자크 루소의 개념과 이를 모태로 한 프랑스의 공화제를 도입하고자 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의 양대 근간이었던 술탄과 칼리프를 동시에 폐지할 경우 반발이 심할 것을 예상해 공화국을 건국하기 이전인 1922년 먼저 이슬람 종교에 기반을 둔 술탄 중심 시스템을 폐지했다.

다음 단계로 광신적 믿음은 사라져야 하며, 종교를 정치와 분리하는 세속적 정치 체제를 추진했다. 그는 칼리프제도가 중세의 용종과 같다고 보면서 1924년 의회의 결정을 빌려 칼리프제를 폐지하고 모든 종교학교를 일반 학교로 전환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술탄제 및 칼리프 지위 폐지 이후에도 개혁 조치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종교적 권한이 아니라 국가 의지가 담긴 발전적인 규율로서 합법화할 수 있는 혁명적인 조처를 해야만 근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봤다.

그가 취한 대표적인 근대화 조치가 문자 개혁이었다. 당시 오스만 터키인들은 아랍어를 쓰고 있었는데 문맹률이 90%에 이를 정도로 높았다. 그는 국민의 문자해독 능력을 증진하기 위해 터키어를 새로 만드는 문자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 위원들은 문자를 새로 만들어 교육하고 활자화하는데 5년이 소요될 것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은 3개월 이내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도록 했으며, 새 문자가 제정된 후 바로 교육하고 활자화 해나갔다. 그는 아랍 문자가 이슬람과 오스만 튀르크를 연결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그 연결고리를 끊고자 했다. 새로운 터키어는 한국어와 같은 표음문자로 배우기가 쉬워 터키인의 문자 습득률이 급속히 증진됐으며, 터키어로 쓴 오르한 파묵의 소설이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을 정도로 언어가 깊이도 있다.

또 다른 개혁 조치는 여성의 해방이다. 오스만 제국의 관념적 인식은 여성이 열등하기에 남편 등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여성을 주시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스타파 케말은 남녀가 평등하며, 여성이 인간의 어머니이기에 동등한 교육, 나아가 더 나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족법을 개정해 일부다처제를 없애고, 남녀가 동등한 권리로 결혼과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새로운 선거법으로 여성에게 동등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획기적인 조치에 대해 의회 내 선거법 개정 과정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특히 이슬람 세력의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무스타파 케말은 오히려 여성의 투표를 독려해 1935년 총선에서 여성 의원 17명이 당선됐다.

일부다처제 폐지, 여성에 선거권·피선거권 부여


▎‘터키의 국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트라브존을 방문했을 때 머물렀던 별장.
무스타파 케말은 독립 전쟁 중에는 연합국 간의 갈등을 이용했지만, 독립 후에는 주변국과 분쟁을 마무리하는 데 중점을 뒀다. 그는 ‘국내의 평화, 세계의 평화(Peace at Home and Peace in the World)’에 중점을 둔 외교 정책을 채택했으며 외국의 분쟁에 가능한 한 관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외교정책에 따라 먼저 영국이 장악한 동남부 지역의 모술을 양보했다. 모술은 석유 생산지로 쿠르드 분리주의자들의 거점이 될 가능성이 우려됐다. 그렇지만 영국과 계속 전쟁한다고 해서 승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터키의 독립 후에도 그리스와의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터키의 남부인 안탈리아를 점령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스타파 케말은 그리스와는 서로의 영토에 거주하는 그리스계 110만여 명과 무슬림계 38만여 명의 강제 인구 교환을 실현해 화해했고 상호 총리 방문을 통해 전쟁으로 인한 불신을 극복했다. 또한 수백 년간 경쟁 관계였던 페르시아 그리고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과 사다바드 평화조약을 맺어 터키 동부지역의 안정도 확보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국제사회의 변화에 대해 예리한 식견을 가졌는데 히틀러의 정책이 국민을 노예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또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았지만 향후 국민의 반대로 축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는데 정확한 판단이었다. 그는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부상이 국제적인 위협으로 대두될 것으로 예상해 이에 대비하고자 발칸 국가들과 발칸 협약(Balkan Entente)을 맺는 등 국제적인 협조망을 구축했다.

소련과의 관계에서는 독립 단계에서 많은 협조를 받았고 스탈린에 대해 높이 평가하기도 했지만, 볼셰비키 정권이 유럽과 아시아의 위협 요인이 될 것으로 보아 점차 거리를 뒀다. 나아가 2차 세계대전에는 중립 입장을 견지해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국가적 비극에 직면하지 않도록 했다.

중동국가들은 이슬람이 국교로서 정치와 종교가 연계돼 있어 정치·사회 구조가 지금도 매우 경직돼 있다. 중동국가의 정치는 독재 및 왕권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여성의 인권 유린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그나마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는 이란과 터키 정도인데, 이란은 선거에서 국민의 비판적인 여론이 표출되기는 하지만 지난 40여 년간 신정체제로 종교가 사회 전체를 압도하고 있다.

터키 역시 이슬람의 세력과 함께 권위주의적 정치가 확대되고 있고 언론에 대한 통제도 심해지고 있지만, 중동의 이슬람을 믿는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공화제 국가다. 이러한 탄력적인 정치 체제가 갖춰진 것은 무려 100여 년 전인데, 아타튀르크가 개혁을 통해 종교가 정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정치 구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터키에서는 여성의 평등과 사회 참여를 제도화하여 법적으로 여성의 투표권 행사와 사회 진출에 제약이 없다. 남성 중심의 사회적 관습이 남아 있고 최근 들어 터키의 이슬람화가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다른 중동국가와는 제도적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인 사회를 터키 공화국의 세속적인 국가 구조로 완전히 개조했으며, 그가 시행한 국가 개혁은 100년이 지난 현시점에도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아타튀르크는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구상을 현실화하고, 사회의 구도 자체를 변화시킨 통찰력 있는 지도자라고 평가된다.

우리의 경우 100년은커녕 5년 임기를 의식해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고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는 개혁은 도외시한 채 실현 가능성이 미약한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 자신의 재임 중에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긴 호흡으로 보면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국가 지도자의 책무임을 인식해야 한다.

100년 관통하는 지도자의 통찰력이 주는 교훈

터키는 발칸전쟁, 1차 세계대전, 독립전쟁 등 1911~1923년 12년간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전쟁 수행능력은 그리스 등 상대국보다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이러한 열세를 상대국의 상호 갈등을 이용해 극복했다. 독립 이후에는 국내 안정을 위해 적대 관계이던 주변국과 협력 관계를 끌어내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더는 국제분쟁에 나라가 관여되지 않도록 했다.

그가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부터 시리아·리비아·불가리아 등 해외 경험으로 국가 간 경쟁 및 국제적 흐름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전쟁 시 서로 총칼을 겨눴던 적대국과도 적극 화해를 추진한 것은 터키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최근 미·중, 미·러, 중·일 간 갈등, 중국·일본 내 민족주의의 횡행 등 우리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얽매이고 북한 문제에 경도돼 국제적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일본과 협력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고 중국·북한과도 신뢰가 미약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우리 외교가 커다란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하니 과연 국제적 흐름을 읽어내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미국·일본과의 신뢰를 재점검하고, 한·중·일 3국 간 협력을 위해 교류를 확대해나가며 주요 국제문제에 대한 여러 국가와 폭넓게 협의해 우리의 대외적 영향력을 확장해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처럼 외교력을 더욱 강화해나가야 할 때 외교에 문외한인 측근 인사를 주요국의 공관장으로 보내왔다. 더구나 차기 대통령 후보들의 국제적 안목도 깊지 않은 것 같아 심히 우려된다. 우리처럼 무엇보다 외교가 중요한 나라에서 우리만큼 지도자들이 외교를 모르는 경우도 드물다. 자신이 모른다면 전문가를 활용해 보완해나가야 할 것이다.

아타튀르크는 공화제를 도입하고 개혁 정책을 통해 국가를 개조하고자 한 전략가이었다. 또한 오스만 튀르크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고 국내적 상황과 국제적 흐름을 인식하면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한 실천적 지도자였다. 중동 거의 모든 지역이 20세기 이후 지금까지도 종교적인 경직성과 사회적인 불안이 가시지 않고 있다.

터키 역시 쿠데타 등 사회불안이 있었고 권위주의적 통치 경향을 보이지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해오면서 비교적 유연하고 발전적인 면모를 보여왔다. 이는 100여 년 전, 긴 안목으로 국가를 설계한 무스타파 케말의 통찰력과 현실적인 개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우리의 차기 지도자가 유념해야 한다.

※ 조윤수 - 미국·러시아·독일·싱가포르·쿠웨이트·터키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2017년 주(駐)터키 대사를 마지막으로 37년간의 외교관 생활을 마치고, 현재는 한국유라시아문명연구회 이사장, 부산외국어대 초빙교수로 외교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독일 통일 30년, 독일의 과거에서 한국의 미래를 본다] [대사와 함께 떠나는 소아시아 역사문화산책] 등 근무한 국가의 모습과 주요 국제 사안을 책으로 엮었다. 현재 [오스만 제국의 영광과 쇠락, 터키 공화국의 자화상] [중앙유라시아에서 본 새로운 역사흐름]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202202호 (202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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