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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3)] 세종이 꽂힌 태조의 왜구 섬멸 전투 기념 비석의 기구한 운명 

광복 앞두고 일제 만행에 희생된 ‘황산대첩비’ 

조선 건국 이성계가 고려 말 세운 전공을 기리기 위해 1577년 세워져
1945년 1월 일본이 글자 모두 뭉개고 깨뜨려… 1957년 다시 건립돼


▎KBS 사극 [정도전]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뽐낸 배우 유동근. 유동근은 같은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 역을 맡아 열연했다. / 사진:KBS
지리산 둘레길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다섯 개 시·군에 걸쳐서 조성된 총연장 약 300㎞의 도보여행 길이다. 지리산을 중심에 두고 한 바퀴 도는 이 길은, 국가 숲길로도 지정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숲길이다. 전체 21개 구간 중 어떤 곳은 상당히 가파른 곳이 있어서 힘든 코스도 있고, 또 어떤 곳은 평탄해서 쉽게 걸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쉬운 구간은 운봉에서 인월까지의 제2코스라고 한다.

이번 호에서 다루는 황산대첩비는 바로 이 지리산 둘레길 제2코스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말에 수십 년 동안 고려에 침입해 말썽을 부리던 왜구의 준동(蠢動)을 꺾어버린 결정적 전투는 바로 지리산 둘레길 제2코스인 운봉에서인월 사이에 있는 황산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왜구를 완전히 섬멸했다. 이 싸움은 1380년에 벌어졌는데, 모두가 잘 아는 바와 마찬가지로, 12년 후인 1392년에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게 된다.

이성계의 무공을 빛내고 또 잊지 않기 위해 1577년에 ‘황산대첩비’를 황산 근처에 세웠다. 그런데 400년 가까이 풍우를 견디며 굳건히 서 있던 이 비석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일본인에 의해 파괴된다. 비석의 글자는 정으로 쪼아서 읽을 수 없게 뭉개놓고, 비석도 깨뜨려서 여러 조각을 내버렸다.

그러나 비석의 문장은 따로 전해지는 것이 있었으므로, 1957년에 그 자리에 다시 새 비석을 세웠다. 현재 황산대첩비가 있는 자리 전체는 사적으로 지정돼서 파손된 원래 비석과 새로 세운 비석,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가지 유적이 함께 보존되어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이 황산대첩비에 얽힌 얘기를 몇 가지 해보기로 한다.

이성계는 원래 고려의 무장으로, 고려를 침입한 외적을 물리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 무공으로 언급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중국의 홍건적 침입을 물리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왜구를 섬멸한 것이다. 이 가운데 왜구를 소탕한 전투를 ‘황산대첩’이라고 부르고,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 ‘황산대첩비’다.

황산대첩은 고려 말에 오랫동안 지속한 왜구의 침입을 물리친 전투라는 점에서 기억해둘 만하다. 수십 년 동안 한반도 남부에서 분탕질을 치던 왜구의 세력은 1380년 이성계의 황산전투 승리 이후에는 그 기세가 약화하면서더 이상 큰 문제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처럼 고려 말 한반도에서 왜구를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황산대첩의 내용은 [고려사]나 [태조실록] 같은 조선 초에 간행된 역사서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용비어천가]에 가장 먼저 실렸다.

황산대첩과 용비어천가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있는 황산대첩비. 일제는 반시국적인 고적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이 비를 깨뜨렸다. 지금 서 있는 비석은 1957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유명한 구절로 잘 알려진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이 새로 만든 문자를 처음으로 사용해서 제작한 책이다.

이 책의 중요 내용은 조선의 건국은 하늘의 뜻이라는 점과 아울러 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가 하는 점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이성계의 뛰어난 무공이 잘 드러나는 황산대첩에 관한 내용도 자세히 실어놓았다.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록한 자료로는 [용비어천가] 이 외에 [고려사]나 [태조실록] 등이 있는데, 세 자료에 실려 있는 내용은 거의 같다. 시간상으로 보면 세 가지 책은 [고려사], [태조실록], [용비어천가]의 순서지만, 실제로 책이 만들어진 시기는 이런 순서는 아니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 후 바로 만들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새로 고쳐 써서 단종 2년(1454)에 비로소 간행됐다. 그리고 [태조실록]도 이성계가 세상을 떠난 후 10년 정도 후에는 완성됐으나, 이후 여러 차례 수정해서 문종 1년(1451)에 완성됐다. 지금 우리가 보는 [고려사]와 [태조실록]은 모두 이 수정본이고, 이전에 제작한 것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성계의 손자이며 이방원의 아들인 세종은 [고려사]와 [태조실록]의 이성계 관련 기록에 대해 특히 불만을 가졌다. 임금이라 하더라도 실록은 읽을 수 없는 것인데, 세종은 기존에 편찬된 [태조실록]을 가져오라고 해서 읽어본 다음, 할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너무 간략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를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고려사]의 내용에도 문제가 있다고 해 인쇄를 마친 것을 모두 폐기하기도 했다.

세종이 할아버지의 사적에 대한 역사서의 내용에 불만을 표시한 것 중에는 황산전투도 들어 있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1380년 왜구의 침입을 물리칠 때의 정황을 현지에 가서 조사하라고 하고, 여러 고을에 흩어져 사는 노인들을 널리 찾아다니며 할아버지 이성계의 무공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수집해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명목상으로는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기 위한 자료수집이라고 했지만, [용비어천가]의 황산전투 내용은 후에 [태조실록]이나 [고려사]의 이성계 관련 기록을 수정할 때 근거자료가 됐다. [고려사], [태조실록], [용비어천가]의 황산대첩 내용이 완전히 같은 이유는 이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는 수시로 침입해서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과 곡식을 약탈해 갔다. 우왕 6년(1380) 8월에는 500척의 배를 이끌고 침입해서 금강의 하구인 진포에 정박했는데, 이때 고려는 최무선 등이 화포로 공격해 이 배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돌아갈 배를 잃은 왜구는 내륙으로 다니며 온갖 분탕질을 다 했다. 이들은 충청도·경상도·전라도 지역을 휩쓸고 다니다가, 함양을 지나 남원으로 향했다. 왜구는 장차 수도 개경으로 쳐들어간다고 떠들어댔다.

고려 조정에서 이성계를 보내 왜구를 정벌하도록 했는데, 이때 왜구는 인월(현재 남원시 인월면)에 주둔하고 있었다. 왜구의 기세가 매우 강하고 또 고려군이 계속 패했으므로, 장병들이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소극적이었다. 이성계는 앞장서서 나아가 싸우면서 왜구 50명을 활로 쏘아 죽였고, 무릎에 화살을 맞으면서도 여덟 명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대장이 앞장서서 왜구를 물리치자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가게 되면서, 왜구들이 오히려 진을 치고 지키는 상황이 됐다. 황산전투의 결정적인 대목은 이성계가 적장을 죽이는 대목인데, [용비어천가]에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놓았다.

“적장 가운데 나이가 15~16세 되는 자가 있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데다가 사납고 날쌔기가 비할 데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돌진하면, 향하는 곳은 모두 쓰러져 감히 당해낼 자가 없었다. 아군에서는 ‘아기바톨’이라고 부르며 다퉈 피했다. 이성계가 그 용기와 날카로움을 아껴 이두란에게 사로잡으라고 명하자, 그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으려면 다른 사람이 다칠 것이라고 이두란이 말했다. 아기바톨은 갑옷을 입고, 투구는 얼굴과 목을 감싸고 있어서 활을 쏠 틈이 없었다. 이성계가 이두란에게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쏘아 벗길 테니 너는 바로 쏴라’고 하고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꼭지를 정통으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 투구가 비스듬히 벗겨졌다. 아기바톨은 급히 투구를 바로 했다. 이성계가 다시 쏘니 또 꼭지에 맞아 드디어 투구가 떨어지자, 이두란이 쏘아 죽였다. 이에 적의 기세가 꺾였다.”

활로 적장 투구 꼭지 정통으로 맞힌 신궁


▎황산대첩비 탁본(장서각 소장본). / 사진:이윤석
적장 아기바톨을 죽인 후 이성계는 병사들보다 앞에 나가 적을 무찔러, 황산 앞을 흐르는 시냇물이 적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모두 물리쳐서, 적군은 겨우 70여 명이 살아서 달아났다고 한다.

[용비어천가]에는 적장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놓았다. 그의 이름을 한자로 아기발도(阿其拔都)라고 써놓고, ‘아기(阿其)’는 우리말로 어린아이를 부르는 말이고, ‘발도(拔都)’는 혹 발돌(拔突)이라고도 쓰는데, 몽골어로 용감해 대적할 자가 없는 것을 말한다는 주석을 붙였다. 그리고 한자 ‘阿其拔都’의 우리말 음은 ‘아기바톨’이라고 적어놓았다. [고려사]나 [태조실록]에는 ‘아지발도(阿只拔都)’라고 돼 있어서 후대의 기록에는 모두 ‘아지발도’라고 했으나, 당시 고려 군사들이 적장에게 붙여준 이름의 정확한 표기는 ‘아기바톨’이다.

황산전투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개성에 돌아오자, 최영은 이성계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치하했고, 여러 사람이 시를 지어 축하했다. 권근은 특히 두 편의 시를 지어 축하했는데, 한 편은 이성계를 위한 것이고, 또 한 편은 아들 이방원을 위한 것이었다. 이 시에 의하면 14세의 이방원은 아버지를 따라 황산전투에 참전해 아버지를 도왔다고 한다.

이성계는 홍건적을 물리치면서 북방의 방어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는데, 황산전투에서 남쪽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하면서 그의 명망은 더욱 높아졌다. 이와 같은 그의 뛰어난 무공은 그가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원동력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성계의 황산전투 이후 약 200년이 지난 선조 10년(1577)에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황산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하자, 조정에서 운봉현감 박광옥에게 황산의 서쪽에 비석을 세우도록 한다. 황산대첩비의 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김귀영이 썼는데, 이 비문의 내용은 [용비어천가]에 들어 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황산대첩비는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황산대첩을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해줬고, 또 이 비석이 있는 마을도 함께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어우야담]의 작자로 잘 알려진 유몽인은 1611년 2월 남원의 수령으로 부임해 3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열흘 정도 지리산을 유람했다. 그는 운봉을 지나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까지 올라갔다가 화개마을 쪽으로 내려왔고, 이 여행의 기록을 남겨놓았다. 유몽인은 남원을 떠나 점심때 황산대첩비가 있는 마을에 도착해서 쉬면서 이 비석을 봤는데, 그는 황산대첩비라는 제목의 시를 짓기도 했다.

박세당·장유·채제공 등 당대 저명인사들이 지은 시도 전해져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유아인. / 사진:SBS
유몽인이 남원에 부임한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임진왜란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써두었다. 그는 태조 이성계가 황산의 싸움에서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태조가 전술을 잘 구사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적은 군사로 많은 적을 대적하려면, 이태조처럼 황산과 같은 요충지에서 적을 맞아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남원성에서 일본군에 패한 것은 유리한 곳을 차지하고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도 아울러 말했다.

많은 사람이 황산대첩비를 보고 글을 남겼는데, 박세당·장유·채제공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지은 시도 전해진다. 다산 정약용도 황산을 지나다가 비석의 글을 읽고 간단한 감상을 쓴 것이 있고, 또 시도 지은 것이 남아 있다. 정약용도 유몽인과 마찬가지로 황산은 천연의 요새이므로, 이곳을 잘 지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황산대첩비를 세우고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전각을 지었으므로, 이 비석이 있는 동네는 ‘비전(碑殿)’이라는 이름으로 얻게 된다. 이곳을 지나다가 글을 남긴 사람들이 ‘비전’이라는 마을 이름을 언급했고, [대동여지도]에도 ‘비전’이라는 마을의 이름이 나온다. 이름 없던 작은 마을이 황산대첩비 덕분에 크게 알려진 셈이다. 그리고 혈암도 비석과 함께 조명을 받게 된다.

혈암(血巖)은 우리말로 ‘피바위’라고 하는데, 비전마을 앞을 흐르는 람천에 있는 너럭바위다. 이 바위에는 황산전투에서 죽은 왜구의 피가 흘러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황산대첩비를 주제로 한 시에는 이 혈암도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비석만큼이나 깊은 인상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약을 마시고 자결한 송병선도 지리산 여행을 하면서 비석과 바위에 대한 인상을 글로 남긴 것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여 년 후인 1611년에 이 비석을 본 유몽인은 황산대첩비가 아무 탈이 없다고 했다. 또 강항의 시 ‘황산대첩비’에는 10년 동안의 전쟁에도 이 비석은 없어지지 않았다는 대목이 있고, 일본군 1000명이 이 비석을 끌어당겼으나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도 들어 있다. 강항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와 [간양록]을 쓴 인물로, 그는 의병장으로도 활약했다.

그런데 영조 8년(1732) 전라도 어사 정형복은 운봉의 황산에 있는 태조의 승전 비각이 낡고 헐어서 수리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를 올린다. 이 보고를 받은 영조는 바로 수리하도록 했다. 그 후 정조 13년(1789)에 다시 크게 수리하면서, 이곳을 지키는 장교를 병조에서 임명하도록 했다. 처음에 비석을 세울 때 별장을 뒀는데, 이후에 승려들이 지키게 됐고, 이때 다시 별장을 뒀다. 고종 37년(1900)에도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도재가 황산대첩비를 살펴봤다는 내용의 얘기를 고종에게 전한 바가 있다.

황산대첩비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5년 전에 세운 비석이므로, 임진왜란 때 이곳을 지나가던 일본군도 이 비석을 봤다. 1840년에 일본인 반 노부토모(伴信友)가 쓴 글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참전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도 황산대첩비를 봤는데, 그는 이 비석을 없애버리지는 않고 탁본 하나를 구해갔다고 한다. 반 노부토모는 이가토 기요마사가 가지고 간 황산대첩비의 비문을 옮겨놓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글을 남겼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황산대첩비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보호를 받는 중요한 기념물이었지만,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의 왜구를 물리친 기념물이므로, 일제로서는 이 비석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1922년 7월에 이재극·이지용·이재각 등 전주 이씨 37명이 연명(連名)해 이 부지의 비석과 건물 등을 매각해줄 것을 청원하는 문서를 조선 총독에게 제출한다. 이제 황산대첩비는 국가 기념물이 아니라 전주 이씨 집안의 기념물이 된 것이다.

지금은 판소리 유명한 ‘국악의 성지’로 변모

전주 이씨 문중에서는 선조의 업적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 황산대첩비와 그 부지를 불하(拂下)받겠다고 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제출한 청원서의 회신을 보면, 황산대첩비에는 일본인을 ‘섬 오랑캐(島夷)’라고 욕하는 문구 같은 것이 있으므로, 이 비문의 탁본이나 등사본을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의사항을 붙여놓았다.

비석을 영구히 보존하겠다던 전주 이씨 문중의 꿈은 20여년이 지나면서 완전히 깨어진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면서, 반시국적인 고적을 철거하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방침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일찍이 해인사의 사명대사비를 파괴한 일이 있었고, 1943년 여름부터는 명량대첩비나 좌수영대첩비 같은 비석을 땅에 파묻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비석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의 침입을 막아낸 내용이 들어있는데, 일제는 이런 내용이 들어있는 고적을 반시국적 고적이라고 지칭하면서 무언가 조처를 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런 판단에 따라, 조선인의 민족적 자부심을 공고히 하는 고적은 철저히 없애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만들기도 했다.

광복을 불과 얼마 남기지 않은 1945년 1월에 일제는 황산대첩비의 글자는 모두 지우고, 비석은 몇 조각으로 깨뜨려버렸다. 광복된 지 10여 년이 지난 1957년에 성적봉찬회(聖蹟奉贊會)라는 명의의 조직에서 비석을 다시 세우는데, 아마도 이 모임은 전주 이씨 문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비석은 깨어져서 원형이 손상됐으므로 문화재로 지정될 수 없다고 해 현재는 “황산대첩비가 있던 자리”라는 의미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가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깨어진 비석 그 자체가 역사성을 지닌 것이므로 깨어진 비석을 잘 맞춰서 다시 세우고, 이를 문화재로 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산대첩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문화재로서의 진정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재 황산대첩비가 있는 남원시 운봉읍의 비전마을은 판소리로 유명한 곳이다. 비전마을은 동편제의 창시자인 송흥록이 태어난 곳이고, 여류 명창 박초월도 여기서 태어났다. 이곳에는 2만 평이 넘는 대지에 여러 개의 건물이 들어선 ‘국악의 성지’라는 큰 시설도 있다. 이제 비전마을은 황산대첩비보다는 판소리가 훨씬 더 중요한 곳이 됐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30여 종의 [홍길동전] 이본(異本)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30여 권의 저서와 80여 편의 논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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