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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27)최종회] 조선왕조 500년 종친부의 흥망성쇠 서린 터 

근·현대 공존 지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종친 예우 차원에서 설립된 기관, 흥선대원군 때 전성기 구가
문화계·학계 절충 통해 건물 제자리 찾아, 일제 치하 아픔 극복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뒤쪽에는 조선 시대 역대 임금들의 어진과 의복을 관리하던 관청인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사진:이성우
2020년 10월 25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사망했다.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6년 5개월이라는 긴 투병의 시간을 보낸 후였다. 대한민국 재계 1위의 기업 총수가 사망한 만큼 상속에 관한 부분도 세인들에겐 초미의 관심사였다. 2021년 4월 28일, 삼성은 상속세 납부 계획을 밝히며 이 회장의 유지였던 미술품 기증 및 어린이 의료 지원 등도 함께 발표했다. 이후 몇만 점에 달하는 이 회장의 미술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기증됐다. 그리고 약 3개월 후인 2021년 7월 28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회장의 기증 작품 가운데 근·현대 미술작품들만 선별해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장소는 분관인 서울관이다.

서울관의 위치는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문인 건춘문과 동북쪽 국립민속박물관 정문까지의 도로 건너편쯤에 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165번지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주소다. 소격동(昭格洞)은 ‘소격서(昭格署)’라는 관청 이름에서 유래했다. 소격서란 조선 시대 도교의 제사인 초제를 주관하던 관청인데 그 자리는 지금의 소격동 25번지 일대다. 소격동 면적의 약 절반가량은 국군서울지구병원이 쓰고 있다가 2010년 병원이 이전하면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쓰고 있다. 지금의 소격동은 조선 초부터 한성부 북부 관광방과 진장방에 속했으며 1914년 소격동에서 1936년 소격정, 1946년 다시 소격동이 돼 오늘에 이른다. 법정동인 소격동은 행정동인 삼청동 관할하에 있다.

흥선대원군, 종친부 위상 회복에 힘써


▎경근당 건물의 편액 우측 상단에는 고종 임금이 직접 썼다는 ‘어필’이라는 글자가 작게 새겨져 있다. / 사진:이성우
소격동에 있었던 종친부는 조선 시대 역대 임금들의 어진(御眞)과 의복을 관리하고 종실제군에 관한 각종 사무, 즉 봉작(封爵), 승습(承襲), 관혼상제 등의 업무를 의논해 처리하던 관청이다. 고려 시대부터 내려오던 제군부에서 규찰을 담당하던 종부시가 별도의 관청으로 독립하자 나머지 기능을 담당할 수 있도록 세종 12(1430)년 11월 29일 직제를 개편하고 명칭도 종친부로 개칭했다.

종친이란 가까운 친족을 일컫는 말로 대개 왕실의 친족 가운데 임금의 4대손까지를 칭한다. 이들에게는 작위와 녹봉만 줄 뿐 관직을 맡기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종친부는 종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설립된 기관이다. 종친부와 관계한 모든 사실을 기록한 ‘종친부등록’이란 책이 있다. 종친부에 내린 국왕의 명령을 비롯해 종친부가 주고받은 공문 등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종친부등록은 영조 32(1756)년 이후 기록만 남아 있다. 그것도 영조 시대에는 영조 35(1759)년까지, 그리고는 정조 9(1785)년부터 정조 20(1796)년까지 연평균 10여 건씩 드문드문 남아 있다. 또 순조 10(1819)년부터 자료가 보이지만 이 역시 충실하지 못하다. 이는 종친부의 위상이 점점 추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영조 대를 지나면서 봉군되는 종친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순조 대를 지나 19세기 중·후반부로 들어서면서 종친의 반열에 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종친부의 규모와 위상은 하락했다.

하지만 종친부는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흥선군이었던 헌종 13(1847)년 2월 11일, 종친부의 유사당상을 맡으면서 그동안 위축됐던 종친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종친은 4대가 지나면 잡역의 대상이 되거나 과거시험을 치러야 하는 등 일반 사대부 가문과 차이가 없어진다. 이는 흥선군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였다. 흥선군의 형제까지는 봉군의 대상이지만, 흥선군 아들은 봉군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헌종에 이어 철종조차도 아들이 없어 종친부는 존폐의 갈림길에 서게 될 상황이었다. 이에 흥선군은 종부시(宗簿寺) 담당이었던 선파인(璿派人), 즉 전주 이씨 중 왕실에서 갈려 나온 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각종 군역 및 잡역 면제에 관여하는 일을 종친부로 가져왔다.

종부시는 종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또 다른 기관이다. 종부시의 업무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통칭 ‘선원록’이라고 불리는 왕실의 보첩(譜牒)을 편찬하는 기능과 종친의 비위를 규찰하는 것이었다. 종부시의 최고책임자인 도제조는 왕실의 종친인 대군이나 군만 맡을 수 있었기에 비위 조사기관인 사헌부가 있음에도 종친들의 일반적인 비위에 대한 조사만큼은 종부시에서 담당했다. 이는 종친에 대한 예우와 견제라는 두 가지 차원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이 당시 종친의 수가 너무 적어 ‘도제조’는커녕 일반 종친이 할 수 있는 ‘제조’조차도 종친이 아닌 일반 문신이 담당했다. 기능이 약화한 종부시는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이재황이 이으면서 결국 종친부에 통합됐다. 아들이 임금이 되자 흥선군도 하루 뒤인 12월 9일 흥선대원군으로 봉작됐다. 흥선대원군이 야심대로 선원제파의 사람들이 정치의 무대로 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듬해인 고종 1(1864)년 4월 11일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이 종부시를 종친부와 통합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당일 종친부와 종부시의 통합을 윤허했다. 이에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전락한 종친부의 규모와 권한은 단숨에 커졌다. 종친부 건물의 중수 및 확장도 이뤄졌는데, 대원군이 수리를 주도했다. 공사를 마치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노고를 치하하며 ‘어필 편액’을 내렸다. ‘종친부 등록’ 고종 2(1865)년 2월 24일 자에는 고종이 ‘돈종목친백세일실(敦宗睦親百世一室)’이라는 글을 써서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종친 간에 친목을 돈독히 하고 백대를 내려가도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종친부가 어떤 곳인지를 알려준다.

“전교하기를, ‘내가 잠저(濳邸)에 있을 때 이미 종친부가 황폐하고 무너졌다는 것을 듣고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국조에 융성했던 시절에야 어찌 이러하였겠는가? (중략) 내가 즉위한 후로 중건을 하려고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는데, 우리 대원군께서 빨리 수리하여 모두 옛 모습을 회복하였으니 웅장하고 미려한 아름다움이 옛날에 비해 낫다. (중략) 종친부의 편액은 친히 써서 내리겠다’ 하였다.”([고종실록] 2(1865)년 2월 20일)

‘숙천제아도’는 1차 중수 이후의 종친부를 그린 듯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이 헌종 13(1847)년 2월 11일, 종친부의 유사당상을 맡으면서 그동안 위축됐던 종친부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숙천제아도’라는 그림첩이 있다. 조선 순조 7년부터 고종 15년까지 살았던 문신 하석 한필교가 자신이 처음 벼슬하던 때부터 근무했던 관청들의 모습과 그 주변 풍경 등을 그린 것이다. 이 화첩은 표지 포함 총 18쪽으로 구성돼 있는데, 11번째 그림이 한필교의 종친부 근무 당시를 그린 ‘종친부도’다. 그림에 따르면 그는 고종 2(1865)년 8월 초7일 종친부 정5품인 ‘전부’로 제수된 후 고종 3(1866)년 11월 24일 종친부 정4품인 ‘전첨’으로 승진했다. 주요 건물 구성은 정면 5칸의 관대청, 별도의 담장으로 구획된 정면 3칸의 선원보각과 신당, 정면 3칸의 규장각과 서리청, 사령방, 군사방, 헛간, 창고 등이다.

한필교는 자신이 근무하던 시기에 이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지만, 시기상 다소 차이 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필 편액을 보면 한필교가 근무할 당시 그림에 ‘경근당’이라는 건물 명칭이 나와야 함에도 그러지 않아 ‘종친부도’가 그의 재직 당시 그려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종친부등록’을 보면 고종 이전의 종친부에 대해 “담장이 모두 무너지는 바람에 사방으로 길이 만들어져 무뢰배가 무상으로 출입하는 지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한필교의 그림은 대원군의 주도하에 1차 중수가 끝난 후 종친부 배치를 그린 그림임에 무게가 실린다. 이 화첩은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옌칭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뒤쪽에는 한옥 두 채가 연이어 있다. 그중 정면 7칸의 건물 명칭은 종친부 ‘경근당’이고, 그 왼쪽에 복도각으로 연결된 정면 5칸의 건물 명칭은 ‘옥첩당’이다. 경근당은 왕과 가까운 종친을 공경한다는 뜻이며, 대군과 왕자군이 사용한 30칸짜리 건물이다. 옥첩당은 15칸짜리 건물로 종정경(종2품 이상의 종친부 관직)의 집무실이었다.

종친부의 건물들은 ‘종친부조례’의 시작부인 ‘건치’ 부분에 기록돼 있다. ‘종친부조례’는 고종 재임 초기 종친부를 재정비한 이후 연혁·직제·임무·규정 등 종친부와 관련한 제반 사항을 정리해 만든 책이다.

종친부는 고종 2(1865)년 2월 이전 대원군에 의해 1차 수리됐으나, 고종 1(1864)년 4월 종부시를 통합한 이후 직제 개편과 함께 급속히 늘어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중수 이듬해인 고종 3(1866)년부터 고종 4(1867)년까지 종친부 옛터에 302칸 규모로 다시 중수했다. 그러면서 당시 건치 기간을 ‘당저병인시역정묘성’이라고 기록했다. ‘당저’는 고종을 의미하며, 병인(1866년)에 공사를 시작해 정묘(1867년)에 완공했다는 의미다. 경근당 건물의 편액인 ‘경근당’의 우측 상단에는 ‘어필’이라고 새겨져 있다. 임금의 글씨라는 뜻이다. 편액의 좌측 상단에는 ‘상지이년을축오월’이라는 작은 글씨가 보인다. ‘고종 재위 2년째인 을축(1865)년 5월’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써서 경근당이라는 편액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종친부조례’의 전체 건치 기간보다 경근당의 건축 시기가 더 앞선다는 의미다.

경근당 편액은 고종의 친필


▎조선 순조 7년부터 고종 15년까지 살았던 문신 하석 한필교가 그린 ‘숙천제아도’ 가운데 ‘종친부도’. / 사진: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도서관 홈페이지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경근당에 대한 기록은 고종 5(1868)년 3월 20일 ‘천한전에 나아가 전알(참배)하고 경근당에 거둥하여 종과 정시를 설행하였다’는 것이 처음이다. ‘종친부조례’에는 천한전을 비롯해 아재당, 규장각, 장판각, 경근당, 옥첩당, 이승당 등의 건물들이 위의 순서대로 기록돼 있다. 즉, 이 건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물은 56칸 규모의 천한전이라는 의미다. 천한전은 창덕궁 규장각에 있던 철종 임금의 어진 4점을 모시기 위해 종친부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창덕궁 규장각은 재임 당시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던 곳인데 임금이 승하하고 삼년상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 봉안한다. 계해(1863)년 12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한 철종의 어진도 삼년상이 끝나자 규장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종친부가 이봉 장소로 결정됐다. 이는 고종 2(1865)년 11월 4일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 조씨(효명세자 빈)가 의견을 내고 고종이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 결정한 것이다. 같은 날 철종의 어진을 봉안할 종친부의 새로운 전각 명칭은 ‘천한전’, 현판 글씨는 좌의정 김병학이 쓰는 것으로 결정됐다.

철종의 어진은 고종 3(1866)년 2월 4일 창덕궁 주합루에서 종친부 천한전으로 이봉됐다. 그런데 이 당시 천한전이 완공은커녕 신축 공사를 시작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다만 약 5개월 후인 고종 3년 병인(1866) 7월 2일 실록에는 ‘천한전을 건축하는 곳의 공장들에게 건호궤를 후하게 지급하라’는 고종의 전교가 있었다고 하고, 같은 날 승정원일기에는 ‘공장과 인부 등 859명에게 58냥 6전 5푼을 나누어 주었다’고 나와 있어 당시 공사 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철종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천한전으로 부르고 있을 뿐 ‘종친부조례’에 기록돼 있는 천한전은 아닌 셈이다. 고종 4(1867)년 1월 12일 ‘승정원일기’는 천한전의 공사가 이미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어 고종 3(1866)년 2월 4일 철종의 어진을 봉안한 천한전은 신축 공사 전의 다른 건물임을 뒷받침한다. ‘종친부조례’에는 이 건물을 옥첩당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규장각의 철종 어진은 천한전이 완공되기 전까지 임시로 옥첩당에 봉안하면서 그 명칭을 천한전으로 호칭한 것이며, 옥첩당은 고종 3(1866)년 이전 이미 존재하고 있던 건물이다. 철종의 어진은 고종 4(1867)년 1월 25일 천한전 신축건물에 정식으로 봉안됐다.

과거의 지도를 살펴보면 지금은 복개돼 확인 불가능한 중학천이 삼청동에서 동십자각 방향으로 흐르고, 경복궁 건춘문의 중학천 건너편에 장생전, 장생전의 남쪽으로 사간원, 장생전의 동쪽으로 종부시, 종부시의 남쪽으로 종친부가 있는 형태였다. 그런데 고종 1(1864)년 종부시가 종친부에 통합됐기에 대원군의 1차 중수 당시에는 기존의 종친부에 종부시 영역을 합친 공간이 종친부 권역이었을 것이다. 그 후 장생전이 옮겨가고 그 자리까지 종친부의 권역으로 포함됐으며, 넓어진 공간을 활용해 천한전을 신축했다. ‘종친부조례’에 나타나는 30칸 규모의 아재당도 이때 같이 신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술국치 이후 종친부 역시 수모 겪어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에서 거행된 만송 이기붕 일가의 장례 사진을 통해 당시까지 종친부 정문인 외삼문이 남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사진:국가기록원
이후 몇 년 동안의 전성기를 누리던 종친부는 고종의 친정체제로 접어들고 대원군의 위상이 약해지면서 쇠퇴기를 걷는다. 고종 31(1894)년 종정부, 고종 42(1905)년 종부사 등으로 명칭이 바뀐 종친부는 순종 즉위년인 1907년 11월 결국 폐지되고, 업무는 규장각으로 옮겨졌다.

경복궁 건춘문의 동쪽에 자리하던 종친부에는 8300평 가까운 대지에 경근당을 비롯한 10여 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왕실 종친의 권위를 상징하던 이곳은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불행을 겪는다. 우리는 이날을 경술국치(庚戌國恥)라 부른다. 이듬해인 1911년 2월 20일 대한제국의 상징인 원구단과 사직서의 건물 및 부지 전체가 총독부로 인계됐다. 5월 17일에는 19만 8600여 평의 경복궁 전체가, 6월 26일에는 경희궁 전체가 총독부로 넘어갔다. 종친부 터의 토지와 건물은 11월 29일 총독부에 인계됐다. 1911년 제작된 ‘경성부시가도’에는 종친부 터에 ‘도서과’라고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도서과는 이왕직의 도서과를 의미한다. 이왕직 도서과는 1910년 12월 30일 공포된 황실령 제34호에 의거, 황실의 사무를 관장하는 이왕직 관제가 새로이 제정되면서 규장각 및 적상산 등 4곳의 사고에 보관했던 서적을 옮겨와 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서적들도 조선 총독의 명령에 따라 1911년 6월 19일 총독부 취조국에 인계됐다. 도서와 기록 등 조선 왕조 500년의 귀중한 보물들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긴 이상 이왕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1928년 11월 29일 소격동 종친부 터에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 부속병원이 건립됐다. 경의전은 191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전문학교 관제와 경의전 규정이 공포되면서 문을 열었다. 원래 경의전 교사는 당시 서울 이화동 사거리에 있었다. 건물이 매우 좁고 시설도 초라했지만, 해마다 증축공사를 꾸준히 한 결과 1922년에는 의학교육을 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을 갖췄다. 다만 아쉽게도 임상 실습을 하거나 임상강의를 들을 수 있는 부속병원이 없다 보니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경의전의 부속병원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1924년 5월 2일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 관제가 공포됐다. 예과가 먼저 개설되고 이어서 의학부도 신설되면서 1927년에는 의학부 교사도 준공됐다. 1928년 조선총독부 의원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지원할 수 있도록 경성제대의 부속병원으로 변경됐다. 이에 임상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걱정하던 경의전 학생들은 당시 사이토 병원장의 노력으로 총독인 야마나시로부터 소격동에 있던 학무과 분실 건물의 일부를 양여 받아 병실로 운영한다. 이것이 종친부 터에 병원이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 이와 관련해 1928년 12월 2일 자 [동아일보]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관립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인 총독부의원은 대학부속병원으로 되어 버리고, 의전부속병원은 소격동 165번지 종친부 터의 일부에 10만 원의 건축비와 10만 원의 설비비를 들여 우선 일반치료에 응하도록 모든 준비를 하고….”([동아일보] 12월 2일)

1929년 12월 10일 병실 건물, 1932년 5월 10일 외래진료소의 일부가 준공됐다. 1933년 12월 15일 외래진료소가 증축되면서 이때 내삼문인 사성문 행랑과 남서쪽 일대에 변화가 생겼지만,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종친부의 행랑이 유지됐다. 그러나 1936년 내과·외과 등의 시설이 증축되면서 기존의 종친부 건물은 변형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 종친부에서 사용하던 경근당과 좌우 익사였던 옥첩당, 이승당은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1960년까지 종친부 정문인 외삼문과 좌우로 연결된 행각들도 일부 남아 있었다. 이는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에서 거행된 만송 이기붕 일가의 장례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도육군병원은 6·25전쟁 중이던 1951년 11월부터 부상자 치료를 위해 서울의대 제2 부속병원을 육군통합병원으로 사용하다가 1963년 4월 1일 국방부 소속 병원이 됐다. 서울의대 제2 부속병원의 전신은 종친부 터에 설립된 경의전 부속병원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경성제대 의학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하 서울의대), 경의전 부속병원은 1946년 8월 22일 서울의대 제2 부속병원으로 바뀌었다.

경근당과 옥첩당은 소격동을 떠나서 한동안 종로구 화동 옛 경기고등학교 터를 사용하고 있는 정독도서관에 있었다. 보안사령부에서 1981년 체육시설로 테니스장을 조성하며 정독도서관으로 옮긴 것이다. 보안사령부는 1971년부터 소격동에 주둔했었다. 1971년 9월 20일 국군수도병원이 강서구 등촌동으로 이동했지만, 북쪽에 남아 있던 병원 시설은 수도통합병원 분원(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존속했다. 그리고 빈 곳에 육군보안사령부가 들어왔다. 육군보안사령부는 해군과 공군의 방첩부대를 통합하면서 1977년 9월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 개편됐으며, 10월 7일 창설식을 거행했다. 국군보안사령부는 1991년 1월 1일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된 후 2008년 11월, 37년간 주둔했던 소격동을 떠나 경기도 과천시로 이전했다.

1960년대까지 종친부 흔적 남아 있었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옛 종친부 터에 있다. /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08년 8월 청와대는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이전하는 국군기무사령부와 국군서울지구병원 부지를 국민에게 돌려주고 이곳을 경복궁 주차장과 복합문화관광시설로 활용하겠다는 기본 구상(안)을 내놓았다. 정부의 구상에 문화계와 학계는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문화계는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접근성이 좋지 않으니 여기에 분관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 반해, 학계에서는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건물이 근대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니 유지할 뿐만 아니라 종친부 건물 역시 이 기회에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발굴 작업을 통해 종친부 정당 건물들의 유구가 확인됨에 따라 종친부 건물도 제자리를 찾고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건물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 주변을 미술관으로 활용하게 된 것은 양측 주장의 절충안인 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역은 조선 왕조 500년의 토대 위에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비록 일제 통치 36년이라는 아픔의 기간도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발전해왔을 뿐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는 건물과 수목들도 건재하다. 문화계와 학계가 절충한 것처럼 상대를 배려하는 공존의 정신이 지금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역을 만든 게 아닐까.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03호 (2022.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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