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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K컬처 톺아보기(1)] '스물다섯 스물하나', 새로운 청춘들의 목소리 

IMF 사태가 남긴 청춘들의 상처, 그리고 초상 

[미생], [쌈마이웨이] 등 냉혹한 현실 보여주는 청춘 멜로 주목받아
‘흙수저’면 어떠냐, ‘쌈마이’라도 당당히 ‘마이웨이’ 가겠다는 의지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로 하루아침에 냉혹한 현실 앞에 내몰린 당시 청춘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 사진:tvN
청춘 멜로라는 장르가 풋풋한 청춘들의 사랑으로 물들던 시절은 훌쩍 지나갔다. 이제 청춘 멜로에는 당장 살아내야 하는 ‘현실의 무게’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이러한 변화의 기점이 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는 지금까지 청춘들의 삶에 어떤 변화의 분기점이 됐던 걸까.

아버지의 부도로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된 백이진(남주혁)의 나이는 이제 겨우 스물둘. 부도 이전까지만 해도 잘나가는 기업 대표의 아들이었던 그는 금수저였다. 하지만 그는 하루아침에 생활 전선에 내몰렸다. 대학생이지만, 휴학계를 내고 신문 배달·만화대여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번 돈으로 이모 집에 잠시 얹혀사는 동생을 챙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사는 자취방에 아버지를 찾는 빚쟁이들이 몰려와 자신들의 가족이 아버지의 부도로 얼마나 힘겨운 상황에 부닥쳐 있는가를 토로한다. 고3 아이가 대학을 가도 내줄 등록금이 없는 처지를 토로하며 애먼 스물두 살 백이진에게 “두 발 뻗고 잠이 오냐”고 몰아세운다. 그게 너무나 미안한 백이진은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한다.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게요. 아저씨들 고통들 생각하면서 살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떤 순간에도 정말, 어떤 순간에도 정말 행복하지 않을게요.”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을 담은 이 드라마에 드리워진 만만찮은 현실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 현실의 그림자는 다름 아닌 IMF 사태다. 이 갑작스러운 국가부도 사태는 펜싱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나희도(김태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어려워진 학교가 예산을 줄이기 위해 펜싱부를 폐지한 것이다. 이렇게 펜싱부를 일방적으로 없애 꿈을 뺏는 게 어딨냐는 나희도의 토로에 코치는 시대 탓을 한다. “네 꿈을 뺏은 건 내가 아냐. 시대지.”

199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가져온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달달하고 풋풋한 청춘 멜로지만, ‘시대’와의 대결의식 또한 세워놓은 드라마다. 이러한 대결 구도가 의미 있는 건, 당대만 해도 IMF의 여파라고 하면 주로 조기 퇴직하게 된 중년의 가장들만을 떠올렸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 되돌아보면 지금껏 그 여파가 청춘들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IMF 시대를 기점으로 청춘들에게 치열해진 현실은 많은 것을 잃게 만들었다. 취업 전쟁 앞에서 청춘의 낭만은 사라졌고, 성장의 사다리가 끊김으로써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는 ‘수저 계급’이 형성됐다.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는 ‘3포 세대’에서 이제는 집·인간관계까지 포기하는 ‘5포 세대’라는 말이 나오게 됐다.

그러니 당대에 청춘을 보낸 지금의 중년들이나, 아니면 당대를 직접 겪지는 않았어도 그 여파를 현재 마주하게 된 청춘들에게 이 드라마는 전할 말이 있다. 그건 백이진 같은 청춘이, 기성세대들 간의 문제가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 듯 “어떤 순간에도 행복하지 않을게요”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막연하게 네 꿈을 뺏은 건 ‘시대’라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 치부하며 그저 수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나희도가 백이진에게 하는 말처럼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라고 되물으며 기성세대가 뭐라 말해도 “행복해지자”고 해도 된다는 것이다.

시대와 맞서는 청춘들의 이야기


▎KBS 드라마 [쌈마이웨이(2017)]는 가진 것이 몸뚱어리 하나라 격투기장에 서게 되는 고동만(박서준)을 통해 흙수저 청춘의 초상을 그려냈다. / 사진:일간스포츠
그렇다면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소환해온 IMF 시절을 변곡점으로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기에 그 여파가 현재의 우리 사회의 현실까지 이어지게 된 걸까. 70년대 개발시대를 지나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을 거쳐 90년대 세계화까지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한국사회의 성장 서사에 대한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던 사건이 바로 IMF 사태다. 그때 ‘치이익’ 소리를 내며 피어난 수증기 같은 여파들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국내총생산(GDP) 같은 과거 기준의 국가 발전지표는 지속해서 성장 그래프를 그려왔지만, 부유한 이들은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이들은 더 가난해진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그래서 서민들이 느끼는 경제 심리는 국가가 내세우는 GDP의 성장곡선과는 정반대로 나아지기보다는 나빠졌다.

또 90년대는 PC 통신부터 시작해 인터넷으로 접어드는 디지털화가 시작되던 시기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한 방향으로 흐르던 정보들이 쌍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고, 인터넷에서 모바일로까지 진화한 개인 미디어들은 가족주의가 있던 자리에 개인주의를 보다 우선적 가치로 세워놓았다. ‘디지털 민주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중의 목소리는 그저 사라지지 않고 여론이 돼 실제 현실을 바꾸는 힘을 만들었다. 디지털 사회는 이른바 대중의 시대를 촉발시켰다.

이처럼 IMF가 한국사회의 현재를 만든 중요한 기점이었다는 걸 염두에 두고 보면 신원호 감독의 드라마 데뷔작이었던 [응답하라 1997(2012)]이 왜 하필이면 ‘1997년’을 복고의 지점으로 가져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지점은 IMF 이후 급격히 개인화되고 양극화된 삶이 밀어낸 사회의 온기나, 아찔한 디지털 시대의 속도가 밀어낸 아날로그적 삶의 방식들 같은 게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시기다.

복고가 현재의 결핍을 찾아 그걸 채워줄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응답하라 1997]에 이어 [스물다섯 스물하나] 역시 IMF 직후의 시기를 소환해왔다는 건 남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그건 IMF라는 시대적 사건이 현재의 한국사회에 그만큼 중요한 변곡점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이 방영됐던 2012년으로부터 10년이 지난 2022년 현재 우리의 삶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극화, 경쟁사회, 무너진 성장의 사다리, 수저 계급론 등등 10년 전의 문제들은 지금도 그대로가 아닌가.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현재의 청춘들은 특히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하지만 2010년에 이르기까지 청춘들이 현실에서 마주하는 치열한 고통들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스스로 감내하고 이겨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하고 스펙을 쌓는 일이 당연시됐고, 기성세대들은 청춘들의 아픔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사회 시스템 때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했다. 2010년에 출간돼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됐던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짐짓 청춘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편지 42편을 담았지만, 만만찮은 비판에 직면하게 된 건 그래서였다. 이 자기계발서는 당대에 청춘들이 겪는 아픔들이 사실상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잘못된 사회 시스템 때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이러한 아픔을 청춘들이면 누구나 느끼는 고통과 성장의 과정으로 수용했다. 그래서 이러한 자기계발의 관점을 비판하는 청춘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왜 청춘은 아파야 하는가” 하고 되물었고, 그 기성세대가 야기한 시대적 아픔을 왜 청춘들이 수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졌다.

대중문화에서도 이즈음 새로운 청춘들의 자화상과 목소리들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홍대 앞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장기하와 얼굴들은 ‘싸구려커피(2008)’에 잉여적 청춘의 삶을 녹여냈다. 점점 청춘들에게 좁아지는 취업 현실 속에서 이른바 ‘잉여론’이 피어났다. 스펙이 없어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청춘들은 그렇게 일종의 체념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들을 토로했다. 하지만 청춘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부정적 의미로서의 잉여, 즉 생산성의 관점으로 볼 때 별 쓸모없는 인간의 의미를 오히려 생산성 바깥으로 탈주해 삶을 누리는 긍정적 의미의 ‘잉여로움’으로 재해석했다. 그래서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2009)’ 같은 노래는 특별한 일이 없어 오히려 ‘별다른 걱정’도 ‘고민’도 없는 청춘의 새로운 얼굴들을 당당하게 꺼내 놨다. 기가 막힌 중의적 의미를 가진 제목의 이 노래는 ‘일 없이 사는 자’가 그로 인해 ‘별 고민 없이 산다’고 말한다. 일 없는 자가 일을 좇지 않고 일 없음을 즐기는 태도는 실로 (아마도 일이 있는 자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면서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로 전복된다. 장기하는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가 바로 ‘일 없는 상태’가 ‘즐겁고 신나고 재밌다’고 말함으로써, 먼저 상황을 뒤집고 그런 상황을 만든 그 누군가의 의도가 실패했음을 통쾌하게 역설한다.

IMF라는 변곡점과 청춘의 각성


▎tvN 드라마 [미생(2014)]은 청춘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사진:tvN
더는 달달한 멜로일 수만은 없는 현실은 한동안 드라마에 있어서 청춘 멜로라는 장르 자체를 주춤하게 만든다. 하지만 [미생(2014)] 같은 작품이 드라마화하면서 멜로가 아닌 청춘 앞에 놓인 냉혹한 현실을 담아내기 시작하더니, 사회 현실의 무게가 드리워진 청춘 멜로가 등장한다. 임상춘 작가의 [쌈마이웨이(2017)]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드라마는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 이른바 수저 계급론이 회자되던 당대에 청춘들의 새로운 선언을 담았다. 가진 것이 몸뚱어리 하나라 격투기장에 서게 되는 고동만(박서준)은 마치 흙수저 청춘의 초상처럼 그려진다. 안타까운 건 그 아들을 바라보는 흙수저 아버지의 시선이다. 그는 아들이 흙수저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며 “나처럼 살지 마라”고 아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그 아버지 앞에서 이 청춘은 마치 ‘흙수저’면 어떠냐며 ‘쌈마이’라도 당당히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의지를 내보인다.

이 새로운 청춘들은 세상이 내민 성공의 잣대나 기준을 무화시키고, 대신 그들 스스로 내세운 진짜 행복의 길을 제시한다. 명문대·대기업, 그리고 성공한 집안과의 결혼으로 이어지는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성공의 시스템 안에서 정해진 대로의 미래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시스템 바깥으로 나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겠다는 선언. 2020년 방영된 [청춘기록]과 [스타트업]은 이렇게 달라진 청춘들의 새로운 성장 서사를 보여준다. 흙수저지만 부모의 도움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이 있어 오히려 그것이 진정한 성공으로 이어지는 청춘과, 아예 창업이라는 도전으로 성공을 이루는 청춘의 판타지가 이들 청춘 멜로 속에는 들어 있다. 이런 흐름은 작년에 방영돼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인기를 끈 [갯마을 차차차]와 [그 해 우리는]에도 계속 이어진다. 도시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작은 어촌마을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갯마을 차차차]의 홍두식(김선호)이나, 학교에서는 꼴찌였지만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으로 성공해 유명한 작가가 된 최웅(최우식)은 모두 기성 시스템 바깥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낸 인물들이다.

안 아파해도 돼, 청춘이니까

IMF 사태는 압축성장의 신화로 달려나가던 한국사회에 제동을 건 중대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모든 세대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웠던 세대는 청춘들이었다.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무한경쟁하고 각자도생하게 된 청춘들이 더는 ‘노오력’해도 수저의 색깔을 바꿀 수 없다는 현실을 인식한 후 이들은 가치관을 바꾸었다. 기성 시스템 바깥으로 탈주해 저마다 각자가 세워놓은 행복의 기준 위에서 마이웨이를 가겠다는 새로운 청춘의 목소리들이 대중문화 안팎에서 들려왔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바로 이렇게 달라진 청춘 서사를 잇는 작품이다. 20여 년 세월을 지나오며 달라진 가치관을 가진 현재의 우리들은 이 드라마를 통해 1998년 암울한 시대를 마주했던 청춘들에게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개발시대의 폭주가 만들어낸 후폭풍으로 IMF를 맞게 된 것이었지만 마치 청춘이라면 그 시기에 응당 감내해야 하는 고통으로 생각하며 받아들이기도 했던 당대의 나에게, 이제 그 시대를 지나온 현재의 내가 보내는 응원. 또한 이 과정을 거쳐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현실 앞에서 똑같은 어려움을 맞닥뜨리고 있는 청춘들에게도 보내는 지지가 바로 [스물다섯 스물하나]다.

드라마 속에서 스물둘의 백이진은 열여덟의 나희도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아무 걱정 없이 살았던 열여덟 시절의 자신을 나희도를 통해 떠올리면서, 그때의 ‘사소했던 걱정들’조차 그립다고 말한다. IMF 이후 한참을 지나왔지만, 또다시 코로나19로 인해 막막한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는 IMF 당시 청춘이었던 지금의 중년들은 아마도 백이진의 시선으로 나희도를 보듯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의 청춘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을까. 현재의 청춘들의 어깨에 드리워진 시대의 무게는 기성세대들의 몫이니 청춘은 잠시 비켜 있어도 된다고. 세상이 그대들을 속이고 이용하려 한다 해도 그대들은 스스로 정한 그 길을 가라고. 그렇게 좌절하지 말고 행복하게 청춘을 지나다 보면 또 시대가 밀어주는 어떤 날들이 올 거라고. 그러니 안 아파해도 된다고. 마음껏 도전하고 꿈꿔도 되는 청춘이니까.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MBC 시청자 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SBS‘열린TV 시청자 세상’,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 등이 있다.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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