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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 ‘민족 자결주의’ 물결 속 창당된 신한청년당·한인사회당 

자유주의 vs 공산주의 대결, 독립운동 과정서도 본격화 

독립운동 벌이던 민족 지도자들 윌슨·레닌 노선으로 갈려
1918년에 자유공화국·공산혁명 내건 두 한인 단체 등장


▎블라디미르 레닌은 1917년 10월 정권을 장악했을 때,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을 발표하며 민족 자결권을 천명했다. 이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1917년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한 해였다. 우선 1914년 7월 유럽에서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1917년 4월부터 참전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참전은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913~1921 재임)에 의해 결정됐다. 윌슨의 참전 결정은 미국의 역사는 물론 세계 패권의 판도마저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orge Washington. 1789~1797 재임)은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외교방침을 남겼다. 이에 따라 미국은 건국 이후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의 외교방침은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1817~1825 재임)에 의해서도 재확인됐다. 이 같은 상호불간섭주의 또는 고립주의라 할 수 있는 외교방침에 따라 미국은 건국 이후 140여 년 동안 유럽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다. 1914년 7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미국은 고립주의에 따라 참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4월, 윌슨 대통령이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을 계기로 미국은 기왕의 고립주의에서 벗어나 유럽 문제는 물론 세계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참전은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영국을 대신해 세계 패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 못지않게 중요한 세계사적 사건이 러시아에서도 발생했다. 이른바 1917년 2월 혁명과 1917년 10월 혁명이 그것이었다. 2월 혁명은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이 차르 체제를 전복시키고 자유 공화국을 수립한 사건이고, 10월 혁명은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자유 공화국 체제를 전복하고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Soviet) 공화국 체제, 즉 공산 체제를 수립한 사건이다.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카를 마르크스 이론에 따라 공산 혁명을 추진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자가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으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기에 노동자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공산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자본가의 재산, 즉 사유 재산을 국유화하고 동시에 노동자 중심의 권력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카를 마르크스 생각이었다.

레닌, 소수민족 ‘민족 자결권’ 천명


▎김알렉산드라(왼쪽), 오와실리 등은 당시 연해주 동포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동휘(오른쪽)를 설득해 ‘한인사회당’을 창설했다. / 사진:중앙포토, 독립기념관
이 같은 카를 마르크스 생각에 따라, 레닌은 10월 혁명 이후 토지 국유화, 사기업 국유화 등을 단행하고 부분별로 노동자 소비에트, 농민 소비에트, 병사 소비에트를 조직했다. 소비에트(Soviet)는 ‘위원회’, ‘평의회’ 등으로 번역되는 러시아 말이다. 도시의 산업 부분은 노동자 위원회가 장악함으로써 노동자 중심의 권력 구조가 가능하고, 농촌의 농업 부분은 농민 위원회가 장악함으로써 농민 중심의 권력 구조가 가능하며, 국방의 무력 부분은 병사 위원회가 장악함으로써 병사 중심의 권력 구조가 가능하다. 이 같은 소비에트 조직을 통해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국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불렸는데, 이는 ‘위원회 공화국’ 또는 ‘인민 공화국’ 또는 ‘노농(勞農) 정부’ 등으로 번역될 수 있었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가 이념은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 이념, 즉 노동자, 농민, 병사를 자본가의 수탈과 억압에서 해방하기 위해 공산 체제를 실현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레닌이 1917년 10월 정권을 장악했을 때, 러시아에는 200여 종류의 소수민족이 있었다. 레닌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 농민, 병사를 해방한다는 사명감에서 10월 혁명을 일으켰는데, 러시아의 노동자, 농민, 병사 중에서도 진짜 약자는 소수민족 출신의 노동자, 농민, 병사였다. 따라서 레닌에게 러시아 내부의 소수민족은 중요한 문제였다. 레닌은 10월 혁명이 성공한 다음 달에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이 권리 선언에서 레닌은 러시아 소수민족은 각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즉 ‘민족자결권’을 갖는다고 천명했다.

그 권리 선언대로 해석하면, 러시아 내부의 200여 소수민족은 각각 분리, 독립될 수 있는 권리도 있고, 아니면 러시아 내부에서 자치정부를 구성할 권리도 있었다. 만약 러시아 소수민족이 모두 분리, 독립을 원한다면 러시아는 200여 독립국가로 해체될 수도 있었다. 이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왜 민족자결권을 주장했을까? 레닌은 소수민족이 분리, 독립을 원한다면 정말 분리, 독립시킬 마음이었을까?

소비에트화·공산화 위한 자결권의 의미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영국(왼쪽부터),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 정상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배상과 영토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이 회의에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설명하고 국제연맹 창설을 제안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산 혁명에서 국제 공산당의 역할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국제 공산당 역시 카를 마르크스가 시작했다. 카를 마르크스는 1848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저술한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을 통해 공산당의 이념, 공산 혁명의 방법론 등을 천명하고 혁명 활동에 뛰어들었다. 뒤이어 1862년 [자본론(資本論)]을 저술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산 혁명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당시 공산 혁명은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영국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864년이 되도록 영국에서 공산 혁명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카를 마르크스는 지난 16년 동안의 혁명 활동을 되돌아보고, 그동안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국제 연대가 결여됐기 때문이라 생각해 1864년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the international workingman’s association)’를 조직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첫 번째 국제 공산당이라는 의미에서 ‘제1 인터내셔널(the first international)’이라고도 불린다. 제1 인터내셔널 발기문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과 국제 연대를 이렇게 강조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잠정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계급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에 의해 성취되어야 한다.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계급 특권이나 계급 독점을 위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권리와 의무 및 모든 계급 지배의 폐지를 의미한다.

-노동자가 생명의 원천인 노동 수단을 독점한 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당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노예 상태는 물론 모든 사회적 비극, 정신적 비하 및 정치적 의존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 노동 계급의 경제적 해방은 모든 정치 운동이 수단으로 종속되어야만 하는 최종 목표이다.

- 최종 목표를 향한 모든 노력들은 지금까지 각국의 다양한 노동 분파들 사이에 연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고, 또한 서로 다른 국가들의 노동 계급 사이에 노조(勞組)의 형제애적 유대가 결여되었기에 실패했다. (중략)” (John Lewis Evans, “Statute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Adopted at the Second Comintern Congress” [The Communist International, 1919-1943] 1, 1973)

위에서 나타나듯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의 성패는 각국 공산당의 단독 활동이 아니라 각국 공산당 사이의 형제애적 유대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각국 공산당은 국적과 민족을 떠나 국제 공산당을 중심으로 단결, 투쟁해야만 했다. 요컨대 공산당은 계급 문제를 핵심에 두고 가정 문제, 민족 문제, 국가 문제는 부차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계급 문제를 핵심에 두는 각국 공산당 중 어느 하나가 국제 공산당의 지도하에 혁명에 성공해 권력을 장악하면 그 나라는 소비에트 공화국이 된다. 그 소비에트 공화국은 국제 공산당의 지도에 따라 다른 나라 공산당을 도와 혁명에 성공하도록 하는데, 만약 성공하면 소비에트 연방 체제를 구성한다. 이렇게 구성된 소비에트 연방은 전 세계가 소비에트화할 때까지 확장되고, 마침내 전 세계가 소비에트화되면 그때 세계에는 민족도 없고, 국가도 없고, 계급도 없는 지상낙원이 되리라는 것이 카를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즉 그에게 민족이나 국가는 부차적인 문제였고, 궁극적으로 소멸돼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런 생각은 레닌도 계승했다.

레닌은 러시아 내부의 소수민족이 설사 각각 분리, 독립된다고 해도 이미 러시아가 소비에트 공화국이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국제 공산당을 만들고 소수민족 내부에도 소수민족 공산당을 만들어, 국제 공산당 지도로 소수민족을 소비에트화해 연방으로 포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에도 같은 논리로 공산당을 만들어 소비에트화한다면 세계 공산화도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이런 면에서 레닌의 민족 자결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결권이 아니라 공산화를 위한 자결권이라 할 수 있다.

이동휘, 블라디보스토크서 첫 한인 공산당 창설


▎김규식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 출신으로 언더우드의 양자로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유학까지 한 기독교 지식인이었다. 그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노선에 따라 자유 공화제를 지향하는 신한청년당 창당에 기여했다.
이 같은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에 따라 1917년 11월 이후 러시아 각지의 소수민족은 분리, 독립할 수도 있고 또는 자치정부를 수립할 수도 있게 됐다. 따라서 연해주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우리 동포들도 분리, 독립 또는 자치정부 수립이 가능했다. 다만 그러려면 레닌의 공산 혁명에 동참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동포들 스스로 공산당을 창설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1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사 최초의 공산당 조직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이 창당됐다.

한인사회당은 레닌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한인 2~3세들이 주동해 조직됐다. 연해주에는 1860년대부터 우리 동포들이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로부터 50여년 후인 1910년대에는 한인 2~3세들이 등장했고, 그들 중에는 명실상부 러시아인이 돼 공산 혁명에 투신한 사람들도 있었다. 김알렉산드라, 오와실리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 한인 2~3세는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에 따라 연해주에 한인자치정부를 수립하고, 나아가 동북아 여러 나라들도 공산화하고자 했다. 그것을 위해 김알렉산드라, 오와실리 등은 당시 연해주 동포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동휘를 설득해 ‘한인사회당’을 창설했던 것이다.

이동휘는 안창호와 함께 1907년 신민회를 창립한 핵심인사였으며,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에 동감한 이동휘는 강화도는 물론 고향 함경도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학교도 많이 세웠다. 1911년 105인 사건 때 신민회 핵심요인으로 체포된 이동휘는 2년 동안 옥고를 치른 후, 1913년 만주를 거쳐 연해주로 망명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도 이동휘는 교회를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등, 실력양성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점차 실력양성론에 회의를 느끼게 된 이동휘는 무력투쟁론을 주장하게 됐다. 그런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창당이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우선 한인사회당을 창당해 연해주에 한인자치정부를 수립한다면 그 자체로 한인사회의 권익 신장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연해주의 한인자치정부를 근거로 무력 투쟁을 벌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이동휘는 기독교를 버리고 공산주의로 전향해 1918년 5월 한인사회당을 창당해 당수가 됐다. 한인사회당의 강령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강령을 거의 그대로 베꼈다. 예컨대 1918년 5월에 확정된 한인사회당 약법(約法)에 의하면, 한인사회당 사업은 ‘사회주의적 국가를 조직’ 하고, ‘일체의 계급을 타파’ 하며, ‘토지 및 일체의 생산업을 공유(公有)’ 하는 것으로 명시했다. 이 같은 사업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사업이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공산 혁명이기도 했다.

한인사회당 창당은 한국의 공산주의 역사는 물론 동북아 공산주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었다. 우선 한국 역사에서 사회주의 국가, 즉 공산 혁명을 목표로 조직된 최초의 공산당 조직이라는 사실에서 역사적이었다. 나아가 한인사회당은 동북아에서도 최초로 조직된 공산당 조직이라는 사실에서 의미가 있었다.

한인사회당 창설은 동북아에서 한국 민족이라는 피압박 식민지를 매개로 공산 혁명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한인사회당에 뒤이어 몽골, 중국, 일본, 동남아 등에도 공산당 조직이 창설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은 동북아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피압박 식민지가 많은 지역에도 유사했다. 이는 다시 말해 당시 세계의 피압박 식민지에서 마르크스 공산주의 사상과 더불어 레닌의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이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음을 뜻했다. 이 같은 상황을 그대로 둔다면 전 세계가 공산주의화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여러 민족의 권리 선언‘에 대항할만한 선언이 필요했다.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추종하는 ‘신한청년당’ 창설


▎신한청년당의 한 축인 대종교는 단군을 숭상하기에 처음에는 당연히 군주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가 붕괴하자, 군주제는 더 이상 대세가 아니라고 판단한 조소앙이 1917년 7월 ‘대동단결선언 (大同團結宣言)’ 이라는 글을 발표해 주권재민에 입각한 자유 공화제를 선언했다.
이런 배경에서 1918년 1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와 국제 연맹을 선언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는 레닌의 자결주의와 몇 가지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우선 레닌은 궁극적으로 공산화를 위한 민족 자결주의였음에 비해 윌슨의 자결주의는 자유화를 위한 민족 자결주의였다. 구체적으로 레닌은 국제 공산당을 통해 소수민족, 약소민족, 식민지 등을 비롯한 전 세계를 소비에트화하려고 했음에 비해, 윌슨은 국제 연맹을 통해 소수민족, 약소민족, 식민지 등 전 세계를 자유화하려고 했다. 이런 면에서 레닌의 민족 자결주의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본격화했음을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국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독립운동을 벌이던 민족 지도자들도 레닌 노선과 윌슨 노선으로 갈리게 됐기 때문이다. 191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립된 한인사회당이 바로 레닌 노선을 추종하는 선구적 조직이었다.

반면 윌슨 노선을 추종하는 선구적 조직은 1918년 11월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었다. 신한청년당은 크게 볼 때 상해의 한인 기독교 세력과 한인 대종교(大倧敎) 세력이 결합해 창설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을 전후로 수많은 한국인이 상해로 망명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신규식과 김규식, 여운형 등이었다. 신규식은 1911년 상해로 망명했는데, 그는 나철이 1909년 창설한 대종교(大倧敎) 간부였다. 신규식은 대종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상해 교민사회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상하는 민족종교였다. 나라가 망한 이유는 민족정신이 약화됐기 때문이란 문제의식에서 나철은 독립의 전제는 민족정신 고취이고 그것은 곧 단군 사상 고취라는 생각에서 단군교를 창설했다. 대종교의 ‘대종(大倧)’은 바로 국조 단군을 지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대종교는 곧 단군교이고, 단군교는 곧 대종교이다. 이 대종교에는 저명한 유교 지식인들이 많이 참여했다. 예컨대 신규식을 위시해 이상설, 신채호, 박은식, 조소앙, 주시경, 이광수 등이 그들이었다.

원래 대종교는 국조 단군을 숭상하기에 처음에는 당연히 군주제를 지지했다. 하지만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차르 체제가 붕괴하자, 군주제는 더 이상 대세가 아니라고 판단한 조소앙이 1917년 7월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이라는 글을 발표해 주권재민에 입각한 자유 공화제를 선언했다. 대종교인이던 조소앙은 ‘경술년 융희황제의 주권 포기는 즉 우리 한국인 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禪位)’라고 함으로써, 경술년 한일합방은 합방이 아니라 융희 황제의 주권이 한국 동포에게 선위된 사건이고, 그렇기에 주권을 갖게 된 우리 동포가 국가체제를 결정한다는 논리였다. 이 같은 논리는 수천 년간 지속한 군주제를 서양 이론이 아니라 대종교 스스로의 논리로 대종교인이 창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라 할 수 있다.

“인류 문화 증진하고 평등·자유·박애 실현”

한편 김규식은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경신학교 출신이었고, 여운형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 출신이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의 양자로 미국 프린스턴대학에 유학까지 한 기독교 지식인이었다. 김규식은 1913년 상해로 망명해 신규식과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 반면 여운형은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이후 승동교회에서 몇 년 동안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1914년 남경의 금릉대학에 유학했다. 원래는 이곳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로 가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려 했었다. 하지만 학비 등 상황이 여의치 않자 여운형은 1917년 봄 상해로 와서 전도 활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런데 1918년 7월에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재차 천명했다. 이때쯤 제1차 세계대전은 연합국 승리로 급격히 기울었다. 조만간 연합국의 승리가 예견되는 상황에서 여운형은 금릉대학의 후배들 그리고 기독교인 김규식, 대종교인 신규식 등과 민족 독립과 자유 공화국을 위한 신당 창당 문제를 논의했다. 여운형이나 김규식은 기독교인으로서 자유 공화국이 당연했고, 신규식은 비록 대종교인이지만 그들도 자유 공화국을 지지했기에 함께할 수 있었다.

민족 독립과 자유 공화국을 위한 신당 창당이 논의되던 중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승전국의 전후 협상회의에 참여하기 위한 조직으로 여운형, 김규식, 신규식 등을 중심으로 신한청년당이 급조됐다. 신한청년당은 당헌에서 “본당은 인류의 문화를 증진하여 평등, 자유, 순결 급 박애의 진체(眞體)를 대지에 실현하여 써 인생의 천직(天職)을 수완(遂完)함으로써 종지(宗旨를 삼음”이라 명시했는데, 이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와 자유 공화국을 기본 노선으로 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레닌 노선을 추종하는 한인사회당과 윌슨 노선을 추종하는 신한청년당이 등장함으로써 한국사에서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대결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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