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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 백성의 응어리 풀어준 ‘신녀의 신명’ 

수로부인은 기우제 인기 스타였다 

‘해가(海歌)’ 속 신라 귀족의 아내는 신녀, 곳곳의 제의·주술에 초빙돼 권력 다툼에 휘말려 역사서 사라졌지만 ‘주술의 노래’와 함께 부활

▎헌화가에 등장하는 수로부인은 신녀로 명성이 높았다. [삼국유사] 에는 수로의 미색이 세상에서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 붙들려갔다고 적혀 있다. 지난해 3월 평창군 미탄면 동강 변 바위에서 카메라에 포착된 동강할미꽃. / 사진:연합뉴스
아득히 먼 옛날부터 한국인은 노래를 즐겨 불렀다. 민족의 흥과 한이, 역사의 심장박동이 옛 시가에 담겨 있다. ‘공무도하가’에서 ‘아리랑’까지, 노래를 흥얼거리면 겨레의 짙은 감성이 되살아난다. 유리왕에서 황진이까지, 가인(歌人)들을 만나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편집자 주]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 남의 아내 훔쳐간 죄 얼마나 큰가? / 네 만약 거역하고 내어놓지 않으면, /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 ([삼국유사] 기이 ‘수로부인’)

바닷가 백성은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서 입을 모아 노래를 불렀다. 순정공(純貞公)은 초조하게 지켜보며 아내의 무사 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바다의 용은 과연 뭇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의 주술에 걸려 납치해간 수로부인을 내놓을까?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2~737) 때의 일이다. 진골 귀족 김순정이 하서주(河西州, 강릉) 도독에 임명돼 길을 떠났다. 가족과 하인들을 거느리고 동해안을 따라가는 부임 길이었다. 이르는 곳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신임 도독의 화려한 행차도 볼만했지만, 세간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절세 미녀로 소문난 수로부인에게 시선이 쏠렸다. 구경꾼들은 그 아리따운 자색을 멀리서나마 일별하기를 소원했다.

수로부인의 소문이 용왕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일까? 행차가 임해정(臨海亭)에 이르렀을 때 믿기지 않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다에 면한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홀연 뇌성벽력과 함께 집채만 한 파도가 일더니 용이 나타났다. 바다의 용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로부인을 낚아채서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순정공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아내를 구할 방도가 없겠느냐고 소리쳤다. 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인다고 했습니다.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바닷가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십시오.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면서 불러야 합니다. 그리하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삼국유사] 기이 ‘수로부인’)

아내를 도둑맞은 남편으로선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김순정은 즉각 노인의 말대로 시행했다. 신임 도독의 명에 진풍경이 연출됐다. ‘여러 사람의 입’은 힘이 셌다. 용이 슬그머니 바닷속에서 나오더니 납치해간 수로부인을 바쳤다. 뭇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주술의 노래에 신수(神獸)도 꼼짝 못 한 것일까?

[삼국유사] ‘수로부인’ 조에 나오는 이 노래를 ‘해가(海歌)’라고 부른다. 널리 알려진 또 다른 고대가요와 무척 닮았다. “거북아, 거북아. / 머리를 내어라. / 내어놓지 않으면, / 구워서 먹으리.” 그렇다. 같은 책 ‘가락국기’에 실린 ‘구지가(龜旨歌)’다.

아홉 추장이 다스리는 고장에 어느 날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북쪽 구지봉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난 것이다. 주민들이 몰려갔더니 형체는 보이지 않고 신령한 소리만 들렸다. “산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 하늘에서 임금이 내려와 새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계시였다. 주민들이 따르자 과연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내려왔다. 황금알은 아이로 변하고 금세 자라 수로왕 등 6가야의 임금이 됐다. 노래 ‘구지가’에서 내놓으라는 ‘머리’는 으뜸을 가리키므로 임금을 맞이하는 ‘가락국기’ 이야기와 서로 통한다.

고대인들은 신령하고 초월적인 힘이 우주 삼라만상을 지배한다고 믿었다. 인간 세상의 문제도 그 힘에 기대거나 호소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이른바 ‘주술(呪術)’이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여러 사람의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게 잘 먹힌다고 여겼다. 주문을 대대로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였다. 아득히 먼 옛날에는 글이 널리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뭇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주술의 노래가 나타난 이유다.

그것은 상고시대 제천의식과도 닿아 있다. 3세기에 편찬된 중국 정사 [삼국지]에 삼한의 제천의식을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 “5월에 씨 뿌리기를 마치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떼로 모여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노래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의 일환이었다. 주술의 노래였다. 뭇사람들이 신이 들린 채로 함께 노래하며 모듬살이 애환을 토로하고 간절히 빌었다.

‘구지가’로 주민들이 빈 것은 새 나라를 세울 임금이다. 신령하고 초월적인 힘에 그런 임금을 달라고 청했다. 거기서 거북이가 왜 나올까? 거북은 바다와 육지를 넘나드는 동물이다. 그 특성을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쓴 것이다. 다시 말해 신령하고 초월적인 힘과 인간 세상 사이에서 쌍방의 의사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거북이다. [별주부전]에서 용왕이 토끼 간을 구해오라고 괜히 거북을 내보낸 게 아니다.

거북아 거북아, 주술의 노래 ‘해가’와 ‘구지가’


▎입춘을 하루 앞둔 2월 3일 부산 남구 동명대 본관 앞 정원에 매화꽃이 만개해 있다. / 사진:송봉근 기자
거북에 주술을 거는 데는 공식이 있다. ‘구지가’를 보자. 먼저 거북아, 거북아, 부른다. 이어서 머리를 내어라, 명한다. 다음은 내어놓지 않으면, 하고 가정한다. 마무리는 구워서 먹으리, 협박하는 것이다. 부름·명령·가정·협박! 거북을 요리하는 법이다. ‘해가’ 역시 이 요리법을 쓴다. 다만 더 구체적이다. 남의 아내 훔쳐간 죄를 따져 책망한다. 그물로 잡겠다며 제압 수단까지 밝힌다. ‘구지가’의 배경 연도(서기 42)에서 700여 년 흘러 인간 세상이 꽤 발전했다. 이제 법률과 도구를 이용해 정교하게 거북을 협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가’에서 거북을 협박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용에게 납치당한 아내를 구출하려 했다는 ‘수로부인’ 조의 이야기는 황당무계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삼국유사] 특유의 은유로 봐야 한다. 그들은 뭔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을 모아 주술의 노래를 불렀다. 역사의 진실은 은유의 베일에 감춰져 있다.

정사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수로부인’ 조의 무대인 성덕왕 연간에 자연재해가 자주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위 36년 동안 가뭄·지진·전염병·우박 등 크고 작은 재해 40여 회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0여 차례의 가뭄과 그에 따른 기근이었다. 비가 안 내리니 곡식이 여물지 않고 흉년으로 백성이 몹시 굶주렸다.

특히 705년부터 707년까지 2년간 이어진 역대급 가뭄과 기근은 성덕왕 대의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동쪽 지방이 심각했는데 굶주려 떠도는 백성들이 하도 많아 왕이 사자를 보내 구휼에 나섰다. 급기야 굶어 죽는 사람들이 쏟아져나오자 성덕왕은 나라 곡간을 열고 식량 배급에 들어갔다. 707년 1월부터 7월까지 한 사람당 하루 석 되씩 벼를 나눠줬다. 모두 합계를 내보니 30만500석이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인다”


▎인도는 기우제의 일환으로 개구리 한 쌍을 결혼시키는 풍습이 있다. / 사진:트위터 캡처
하지만 구휼과 배급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듭된 흉년에 나라 곡간 사정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신령하고 초월적인 힘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715년 6월에 크게 가물자 왕은 하서주용명악의 거사 이효를 불러 임천사못가에서 비를 빌게 했다. 국가적으로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영험이 있었을까? 곧 비가 내려 열흘이나 퍼부었다. 거사 이효는 이듬해 가뭄에도 기도를 올렸다. 비를 부르는 주술은 계속됐다.

[삼국유사] ‘수로부인’ 조에서 순정공이하서주도독으로 부임한 것도 가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목차상 바로 앞에 있는 ‘성덕왕’ 조가 흉년이 들어 백성들에게 식량을 배급했다는 이야기다. 다음 조에 성덕왕 때 부른 주술의 노래 ‘해가’가 나온다면 기우제에 관한 것이어야 앞뒤가 맞다. 게다가 하서주에는 비를 부르는 영험한 거사 이효가 있지 않은가. 성공적인 기우제로 가뭄과 기근에 지친 주민들을 달래는 게 신임 도독의 첫 임무였을 것이다.

수로부인을 납치한 바다의 용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대상이다. 신라 사람들은 용을 용왕의 분신이라고 여기며 물을 다스리는 수신(水神)으로 받들었다. 진평왕 50년(628)에는 여름에 크게 가물자용을 그려서 비를 빌었다고 한다. 바다나 강 부근에 용왕당(용신당)이 자리한 것도 그래서다. 가뭄이 닥치면 수신에 기우제를 올리고 주술의 노래를 불렀다.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는 임해정(臨海亭)은 바다에 면한 정자이므로 용왕에게 기도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것은 음식을 장만해 제사상을 차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순정공에게 조언한 노인은 기우제를 주관한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하서주용명악의 거사 이효였을 수도 있다. 여러 번 비를 빌고 영험을 입증한 장본인이다. 신임 도독이 부임 길에 기우제를 지내고자 했다면 그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제사장은 능수능란했다. “여러 사람의 입은 무쇠도 녹인다”라며 경내의 백성들을 모았다. 주술의 노래 ‘해가’를 뭇사람들이 함께 부르게 했다. ‘구지가’를 닮은 이 노래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기우제의 집단 주문이었다.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는 것도 수신에 비를 호소하는 주술이었다. 여럿이 언덕을 두드리면 후드득후드득, 빗소리를 연상케 하는 소리가 났다. 기우제에 걸맞은 음향효과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수로부인의 역할이다. ‘수로(水路)’는 곧 물길이다. 용왕과 접신(接神)해물을 끌어오는 게 부인의 임무였다. 바다의 용에게 붙잡혀간 것은 수로부인이 접신할 때 일종의 환각상태에 빠졌음을 암시한다. 이른바, ‘신명(神明)’이다. 신비체험을 통해 수신과 합일한 것이다.

접신이라니, 수로부인은 무당이었단 말인가? 오늘날 무당은 대개 내림굿을 해 신령을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한다. 하지만 수로부인은 일시적으로 신이 들려 영매 노릇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상류층 여성이 국가적인 제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진골 귀족의 아내 수로부인은 기우제의 신녀를 맡았다.

그럼 접신은 어떻게 했을까? 과거 시베리아에서는 샤먼들이 특수한 버섯을 먹고 황홀경 상태에 들어가 조상신에 빙의됐다. 고대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들은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를 쐬고 무아지경인 채로 신탁을 받았다. 버섯과 연기는 환각제였다. 수로부인도 비슷한 방법을 썼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환각제를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수로부인이 용에 잡혀갔다가 돌아오자 순정공이 바닷속 일을 궁금해했다. 부인은 “용궁 음식이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고 묘사했다. 시베리아 샤먼의 버섯이 떠오른다. 또 부인의 옷에서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폴론 신전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수로부인의 말과 옷에 접신하는 데 쓰인 환각제가 묻어나온 것이다.

단, 환각제는 신을 지필 때 도움을 줄지언정 접신의 전 과정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신녀가 신명에 푹 빠져서 수신과 합일하도록 이끄는 것은 기우제에 나온 백성들이다. 뭇사람들이 함께 주술의 노래 ‘해가’를 부르고 막대기로 언덕을 두드리는 광경을 그려보라. 거북아, 거북아, 노래가 반복될수록 홍조 띤 얼굴은 달아오른다. 후드득후드득, 막대기 두드리는 소리에 심장박동도 빨라진다. 환영의 용이 덮치며 신명은 정점을 찍는다.

신녀의 신명은 다시 백성들에게 파급된다. 수로부인이 신이 들려 경련을 일으키면 군중의 피가 거꾸로 솟는다. 현장의 열기가 고조되고 흥분은 극에 달한다. 노래하고 두드리고 시끌벅적 난장이다. 울다가 웃다가 미치는 주술의 광란이다. 가뭄과 기근에 맺힌 응어리들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다. 고해의 바다를 떠도는 울분들이 소용돌이치며 가라앉는다.

기우제는 반목 해소한 정치 행위


▎용 그림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기우제에 자주 사용됐다.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 제작된 민화 ‘운룡도(雲龍圖)’로 상하좌우 네 귀퉁이에 ‘수탁용도 (水濯龍圖)’라고 적혀 있다. / 사진:갤러리조선민화
기우제는 사실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진골 귀부인을 신녀로 삼아 비를 염원하는 주술을 걸고 집단적인 신명을 불러일으켰다. 비는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민심을 다스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제의와 주술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국가적으로 장려된 이유다. 신과 인간의 합일이라는 멍석을 깔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반목을 해소한 것이다. 주술의 노래를 다 함께 부르며 너와 내가 우리로 거듭난 것이다.

수로부인은 신녀로서 명성이 높았다. [삼국유사]에는 수로의 미색이 세상에서 뛰어나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 붙들려갔다고 적혀 있다. 바다의 용뿐 아니라 산에 군림하는 신령한 호랑이, 못에 똬리를 튼 오래 묵은 구렁이와도 접신했으리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의와 주술에 신녀로 초빙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행사 많이 뛰는 인기스타였다. 그녀에게는 ‘해가’ 말고도 대표곡이 또 있었다. 바로 ‘헌화가’다.

이 노래의 뒷이야기도 ‘수로부인’ 조에 실려있다. 순정공의 부임 행차가 임해정에 이르기 전의 일이었다. 어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주위 경관이 기가 막혔다. 천길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를 둘렀고, 그 위에 철쭉꽃 한 무리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풍경에 반해 산책하다가 꽃 무리를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저 꽃을 꺾어 나에게 주겠소?”

하인들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바위 봉우리 위에 위태롭게 핀 꽃이다. 수로부인에게 바치고 싶지만, 목숨까지 걸 수는 없다. 가족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곳이니 단념하라고 했다. 수로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탄식했다. 봄날의 물오른 철쭉을 절세 미녀는 갖고 싶었다.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 ‘헌화가’도 대표곡


▎통일신라 시대 (7~10세기) 표준 한국인의 얼굴. / 사진:한국얼굴연구소
한 촌로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았다. 수로부인의 탄식에 노인은 안타까웠다. 아름다운 부인을 위해 마땅히 꽃을 꺾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수로부인은 노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고귀한 진골의 아내다. 촌에 사는 늙은이가 주책이라고 언짢아할지도 모른다. 노인은 조심스레 노래를 지어 마음을 전했다.

“붉은 바위 가에 /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 /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삼국유사] 기이 ‘수로부인’)

‘헌화가(獻花歌)’였다. 수로부인이 허락하자 촌로는 천길 바위 봉우리를 타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 쇠약해졌지만 어릴 때부터 오르내린 바위다. 그는 가파른 봉우리를 능숙하게 올라가서 높은 곳에 핀 철쭉을 꺾어 내려왔다. 꽃을 바치자 부인은 고운 미소로 화답했다. 노인은 어디 사는 누군지도 밝히지 않은 채 그 길로 암소를 끌고 사라졌다. 그래도 ‘헌화가’는 선물로 남았다. 사람들은 순박한 촌로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런데 이 노래와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천길 바위 봉우리 위의 철쭉꽃을 노인이 꺾어서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분위기가 꿈처럼 몽환적이다. 그것도 아이 밸 것을 암시하는 태몽 같다. 이 대목은 수로부인의 태몽을 은유한 게 아닐까? 태몽 설화는 대개 귀인의 출생을 알리는 것이다. 바위 봉우리 위의 꽃으로 보아 그 귀인은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부인의 자식은 누구일까? 이제 수로 일가의 역사적 실체를 밝혀보자.

수로부인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의 장모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경덕왕은 742년에 즉위하는데 왕비가 이찬 순정(順貞)의 딸이었다. [삼국유사]의 순정(純貞)공과 한자만 한 글자 다르다. 그 시대 기록은 같은 인물이라도 한자 이름을 혼용하곤 했다. 이찬 순정과 순정공은 동일 인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찬은 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 이므로 신분은 진골이고 성은 김씨다. 김순정과 수로부인 소생의 왕비가 앞에서 언급한 귀인이었던 셈이다. 수로 일가는 잘나가는 귀족이었다.

문제는 즉위 이듬해 왕비 교체가 단행됐다는 것이다. 경덕왕은 이찬 김순정의 딸 삼모부인을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궁궐에서 내보내고, 서불한 김의충의 여식 만월부인(경수왕후)을 새 왕비로 삼았다. 즉위 직후임을 고려하면 자식이 없다는 건 핑계에 불과했다. 삼모부인을 내친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선왕 때부터 누적된 지배층의 갈등이 원인이었다.

수로부인 딸인 왕비가 궁에서 쫓겨난 이유

경덕왕은 33대 성덕왕의 아들이며 34대 효성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효성왕(재위 737~742) 연간에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왕은 739년 이찬 순원(順元)의 딸 혜명을 왕비로 삼았다. 참고로 왕의 어머니 소덕왕후도 순원의 여식이었다. 효성왕이 이모와 혼인한 것이다. 2대에 걸쳐 딸을 왕비에 앉힐 만큼 김순원의 권력이 막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효성왕에게는 원래 박씨 왕비가 있었지만, 김순원에게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740년 7월에 “붉은 옷 입은 여인이 예교 아래에서 나와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고, 효신공의 집을 지나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어쩐지 폐비의 한과 분노가 연상되는 장면이다.

8월에는 파진찬 영종이 반역을 꾀하다가 처형당했다. 영종의 딸은 효성왕의 후궁이었는데 임금의 사랑과 은총이 날로 더했다. 질투가 난 혜명왕후가 친족들과 모의해 후궁을 죽이려고 했다. 여식의 목숨이 위태로운데 가만있을 아비가 어디 있나. 영종은 왕비의 족당(族黨)을 치려다가 역모로 몰려 제거된 것이다.

임금으로서는 원통하고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외조부로 인해 본부인과 애첩을 잃었다. 권신이 왕권을 억누른 것이다. 효성왕은 기를 못 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뒤이어 즉위한 경덕왕도 소덕왕후 소생이고 김순원의 외손자였다. 하지만 그는 형의 전철을 밟지 않았다. 743년 왕비를 교체한 건 왕권 회복을 위한 새 임금의 결단이었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보면 경덕왕의 장인 김순정과 권신 김순원은 친족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順貞)과 순원(順元)이라는 이름은 형제였으리라는 추정도 가능케 한다. 김순원은 조카딸(삼모부인)을 외손자(경덕왕)의 짝으로 삼아 3대째 왕비 배출을 도모하다가 임금과 조정의 반발을 초래해 숙청당한 것으로 보인다. 김순정도 조정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수로부인의 딸이 궁에서 쫓겨난 진짜 이유다.

권력 다툼에 휘말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수로 일가는 그러나 주술의 노래와 함께 은유적으로 부활했다. 먹고살기 고단한 백성들은 지배층의 갈등에 관심 없다. 차라리 가뭄과 기근에 맺힌 응어리를 신명으로 풀어준 아름다운 신녀가 그립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비를 부르는 노래는 계속된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생활역사연구소 소장.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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