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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73)] 금산서 ‘칠백의사’와 함께 순국한 의병장 중봉(重峯) 조헌 

“왜란 대비해야” 도끼 들고 상소하다 

‘소(疏) 안 받으려면 내 머리 쳐 달라’ 목숨 걸고 직언
왜군 침략하자 창의, ‘행동하는 선비’의 삶 본보기


▎김포 우저서원 조언환 사무국장이 서원 사우(祠宇)인 문열사 앞에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여식(汝式)이 비록 경세제민의 큰 뜻은 있으나 재능은 미치지 못한다. 또 고집이 너무 강해 세상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하·은·주 3대의 훌륭한 치적만을 임금에게 기대한다. 그러면서 자기 뜻과 맞지 않으면 강경한 언사로 임금에게 간할 우려가 있으니, 교분 있는 자네가 그를 발탁하는 데만 급급해선 안 될 것이다.” 율곡 이이는 집권 세력 이발이 한 제자를 발탁하려 하자 인정에 얽매임 없이 평소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 여식은 당시 율곡을 존경하며 따르던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의 자(字)다. 율곡은 조헌의 강직하지만 성급한 기질을 지적하면서 학문적으로 더 무르익기를 기다린 것이다.

24세에 급제한 조헌은 1571년(선조 4) 28세에 홍주목 교수에 임명된 뒤 토정 이지함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한다. 토정은 한 번 보고 학문에 놀라 “그대는 내가 가르칠 사람이 아니다”며 대신 율곡 등을 소개했다. 그해 가을 조헌은 파주로 율곡을 찾아가 첫 만남이 이뤄졌다. 9년이 지나 1580년 가을 조헌은 황해도 해주 석담에 근거지를 마련한 율곡을 다시 만나 여러 달 학문을 닦았다. 1584년(선조 17) 율곡은 세상을 떠났다. 조헌의 나이 41세 때다.

당시는 당파 중 동인(東人)이 득세하고 있었다. 사간원 등 삼사의 동인 세력은 율곡과 가까웠던 인물을 제거했다. 조헌은 대간(臺諫)의 모함을 받아 파직됐다. 그는 고향 김포와 서울을 피해 현감을 지낸 보은 인근 옥천 안읍 밤티(栗峙)로 내려가 산속에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은둔했다. 이듬해인 1585년 조헌은 오랜 친구 이발과 절교한다. 당론이 격심해져 정여립이 이이·성혼을 모함하고 이발이 여기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조헌은 이발 등 동인이 계속 율곡 등의 죄를 물으려 하자 만언소를 올리고 율곡을 배반한 정여립을 따져 물리치는 등, 서인(西人)의 ‘돌격대장’으로 나섰다. 그는 율곡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분란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조헌은 ‘율곡을 계승하겠다’며 자신의 호를 ‘후율(後栗)’이라 지었다.

2월 19일 중봉 조헌이 태어나고 자란 김포를 찾았다. 도심 사우동에 우저서원(牛渚書院)을 관리하는 사무국이 있었다. 조언환 사무국장을 만났다. 서쪽으로 3㎞쯤 떨어진 곳에 우저서원이 자리했다. 나지막한 속칭 중구봉산(重九峯山) 자락에 앉은 건물이다. 중봉(重峯)이란 호는 중구봉산에서 나왔다고 전해진다. 태극 문양 외삼문 가운데 처마에 ‘우저서원’ 편액이 걸려 있다. 서원은 중봉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터에 들어섰다. 서원 이름은 물가에 소가 드러누운 지형을 본떠 우저란 이름이 붙여졌고 영조 시기사액됐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마주 보는 동·서재를 앞에 두고 강당이 서 있다. 강당 편액은 서까래 아래 가파르게 걸려 보기가 쉽지 않다. “麗澤堂(여택당)이라 쓰고, ‘이택당’이라 읽습니다.” 조 사무국장이 설명했다. 이택위태(麗澤爲兌). 맞닿은 두 연못이 서로 물을 대주니 마르지도 넘치지도 않고 윤택하다. [주역(周易)] 64괘 중 58번째 태(兌) 괘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강당에는 향사 등에 필요한 예복과 김포문화원이 주관하는 각종 프로그램 자료 등이 보였다. 코로나19로 운영은 멈춰있다.

물가에 소가 누운 지형 본떠 이름 지은 ‘우저서원’


강당 뒤는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시호 문열(文烈)을 따 문열사(文烈祠)란 편액이 임진왜란 7주갑(420주년)에 맞춰 2012년 내걸렸다. 참배를 위해 사당 문을 열었다. 도포를 입은 선생의 대형 초상화가 시선을 압도했다. 사당 가운데 ‘文烈公趙重峰先生神位(문열공조중봉선생신위)’라 쓴 위패가 보였다. 우저서원은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중 한 곳이다.

조헌은 서원이 들어선 김포시 서쪽 감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다. 1548년(명종 3) 김포 서감정리 정자에서 마을 아이들이 모여 [천자문]을 읽었다. 그때 고관의 행차가 지나갔다. 아이들은 모두 구경하려고 달려나갔지만 다섯 살 아이는 글을 읽으면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관이 이를 보고 정자에 올라 “모두 행차를 구경하는데 너는 왜 그냥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는 또렷이 대답했다. “오로지 글 읽기에만 마음 쓰라는 아버지 말씀을 따랐을 뿐입니다.”

그는 열두 살 때 김황에게서 글을 배운다. 조헌은 가난해 스스로 밭 갈고 소를 먹이면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날마다 땔나무를 해다가 어두워지면 어버이 방에 따뜻하게 불을 지피고 그 불빛으로 책을 읽었다. 조헌은 스무 살 때 서울을 다녀오던 길에 양천강을 건너다가 심한 풍랑을 만난다. 배를 탄 사람들이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조헌은 태연히 앉아 있었다. 배가 겨우 강을 건너자 그가 말했다. “죽고 사는 일은 모두 명에 달려 있는데 날뛰고 울부짖는다고 죽음을 면할 수 있겠소?”

1565년(명종 20) 조헌은 성균관에 입학한다. 그는 유생들과 함께 당시 잡음을 일으키던 봉은사 승려 보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 엎드려 비답을 기다렸다. 동료들은 임금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하나둘 물러났지만 조헌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오랜 기간 중봉을 연구한 이하준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중봉의 의지와 용기를 만나면 만날수록 스스로 초라해진다”고 말했다. 성균관에서 학업에 전념한 조헌은 1567년(명종 22)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 부정자가 된다. 그는 1570년(선조 3) 파주목 교수로 옮겨가 파주의 대학자 우계 성혼을 찾아 문인이 된다. 이듬해 율곡을 스승으로 모신다. 조헌은 당대의 대학자 우계와 율곡을 차례로 만나면서 학문과 세계관이 훌쩍 커진다.

박제가 “중봉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고 싶다”


▎우저서원 편액은 외삼문 가운데 걸려 있다. / 사진:송의호
1572년(선조 5) 조헌은 지방을 떠나 내직인 교서관으로 입성한다. 교서관은 임금이 사찰에 향을 하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중봉은 유학을 숭상하는 나라의 임금이 사찰을 챙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입으로는 성현의 글을 외우면서 손으로는 불전(佛前)에 바치는 향을 받을 수는 없다”는 직언 상소로 파직된다. 조헌은 이듬해 교서관 저작으로 돌아오지만 다시 봉향(奉香)을 맡자 반대 상소를 또 올린다.

이때부터 중봉의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이 널리 알려졌다. 1574년(선조 7) 5월 조헌은 질정관으로 성절사(聖節使, 황제의 생일 축하 사절) 박희립을 따라 4개월간 명나라를 다녀온다. 국제정세를 살필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견문은 [조천일기(朝天日記)]로 남아 있다. 그해 11월 중봉은 조정에 돌아와 “관리들이 먼저 검소한 식생활을 지켜야 한다”는 등 적폐를 지적하고 중국을 따라 개혁하자는 팔조소(八條疏)를 올린다. 조헌의 이런 개혁 사상은 후일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박제가는 [북학의(北學議)]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고운 최치원과 중봉 조헌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비록 후대에 살고 있지만 그분들의 말을 끄는 마부가 되어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졌다 (…) 중봉은 질정관 신분으로 연경에 들어갔다. 조선에 돌아와서는 임금에게 [동환봉사(東還封事)]를 올려 중국 문물을 보고 조선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남의 훌륭한 점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고자 노력하는 간절한 정성을 담았다.”

조헌은 명나라를 다녀온 뒤 교서관 박사, 호조 좌랑, 예조 좌랑,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통진현감이 돼 다시 외직으로 나간다. 중봉은 수령을 맡아 지방 관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애쓰던 중 방자한 관노 한 사람을 장살(杖殺, 매를 맞고 죽음)한다. 그는 이 일로 탄핵당해 부평으로 유배된다. 1578년 조헌은 유배지에서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마치고 귀양살이가 끝이 났다. 해주 석담에 머무른 율곡을 찾아간 것은 그때였다. 1582년 중봉은 보은현감으로 다시 발탁된다. 2년 뒤 중봉은 모함을 받아 파직되고, 스승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옥천으로 들어간다.

우저서원 사당 문열사 앞뜰 한쪽에는 ‘조헌 선생 유허 추모비’가 서 있었다. 서원보다 35년 앞서 건립된 비석이다. 비각 안 2m 높이 대리석에 선생의 충절이 새겨져 있다. 추모비 뒤엔 수령 320년 느티나무가 세월을 지키고 있다. 비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비석을 살폈다. 1617년(광해군 9) 세워진 추모비는 400년이 지나 글자는 마모가 심했다. 비문은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인 이정구가 지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임진년 8월 금산 싸움에서 중봉 조공(趙公) 부자(父子)와 칠백의사가 같은 날 함께 전사하였다.”

중봉 조헌은 관료나 학자보다 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마지막 6년은 오롯이 행동하는 선비의 삶이었다. 중봉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6년 전인 1587년(선조 20) 벌써 일본의 음모를 내다보고 있었다. 추모비에 내력이 새겨져 있다. 그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는 사신을 보내 조선의 국력을 염탐했다. 중봉은 일본 사신을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그러나 관찰사는 이를 조정에 올리지 않았다. 12월 그는 다시 소를 지어 궐문 앞에 나아가 “도요토미는 제 임금을 시역(弑逆)한 놈이니 마땅히 그가 보낸 사신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의(和議)를 좇은 선조는 크게 노하며 소를 불태우게 해 중봉은 옥천으로 돌아왔다.

1589년 중봉은 이번엔 도끼를 들고 상경해 대궐 문밖에 엎드려 정여립 역모 등 대신들이 나랏일을 그르친다고 상소했다.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다. 소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는 목숨을 건 직언이다. 조언환 사무국장이 덧붙였다. “역사상 지부상소는 역동 우탁과 중봉, 한말 면암 최익현 등 세 사람뿐이었다.” 지부상소로 중봉에게 돌아온 답은 길주 유배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 정여립 역모가 사실로 드러나 중봉은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며 유배에서 풀려난다.

당쟁 휘말려 파직, 스승 율곡 세상 떠나자 옥천 은둔


▎조헌 의병장과 승장 영규, 칠백의사가 순절하기까지 행적을 기록한 충남 금산 순의비각. / 사진:문열공종회
1591년 일본은 조선에 사신 겐소(玄蘇) 등을 보내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를 쳐들어갈 길을 빌려 달라)를 강요했다. 중봉은 옥천에서 다시 상경해 “겐소의 목을 베 명나라에 알리고 군대를 정비해 왜란에 대비하라”며 지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사흘을 기다려도 비답은 없었다. 중봉은 주춧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낭자한 채 “명년에 산골로 피난하여 숨어다닐 때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며 도성문을 나섰다.

이후 중봉은 곧바로 명나라 조정과 대마도, 일본 유민에게 도요토미를 타도하는 내용의 글과 겐소를 목 벨 죄목, 영남과 호서 지방 방어책 등을 지어 올렸다. 그러나 이 소 역시 승정원으로부터 회답이 없었다. 중봉은 나랏일을 더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비통해하며 옥천에 칩거한다. 외로움은 시조로 남았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楊柳)에 내 끼인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무심한 갈매기만 오락가락 하노매”

1592년 4월 20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중봉은 비보를 듣고 탄식한다. “이제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내 일찍이 여러 차례 상소로 대비책과 방어책을 구했건만 그 누가 귀를 기울였단 말인가. 이젠 의로운 마음으로 임금과 백성을 구하는데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만이 남았도다.”

중봉은 제자들과 임금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으나 길이 막혔다. 대신 격문을 써서 팔도에 알렸다. 내용이 격렬해 의사(義士) 16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중봉은 바로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더불어 청주로 달려가 혈전 끝에 성을 탈환한다. 왜적은 어둠을 틈타 달아났으며 호서 좌도에 주둔하던 적들도 소문을 듣고 도주했다. 중봉은 다시 격문을 띄워 군사를 정비하고 의주로 북행하다 온양에 이른다. 순찰사가 급박한 사태를 알린다. 인근 금산 주둔 왜적이 호남 침공을 노린다는 것이다. 휘하 막료들도 왜적이 유린하지 않은 곳은 호서남뿐이라며 이곳을 빼앗기면 나라가 없어진다고 걱정했다. 근왕(勤王)보다 금산의 왜적 격퇴가 급선무였다. 그는 공주로 돌아왔으나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휘하 군사는 흩어져 700여 명만이 따랐다. 왜적의 세가 날카롭고 숫자도 1만5000명이니 먼저 적의 동태를 살피라는 말이 들렸지만, 왜군에 함락당한 금산을 공격하기로 결단한다.

중봉 시신 가운데 두고 장수·병사 빙 둘러 죽어


▎공산을 지나며 덕(德) 있는 사람을 노래한 조헌의 친필 시판. / 사진:문열공종회
왜적은 중봉의 후속 부대가 없음을 탐지했다. 그들은 세 갈래로 진을 나눠 공격해왔다. 중과부적(衆寡不敵)에 날은 저물었다. 중봉은 위급했지만 북을 울리며 진격을 명령했고 의병은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병은 모두 장렬히 순국했다. 왜적도 타격을 입고 퇴각한다. 호남 방어선 금산은 회복됐고 곡창 호남은 지켜졌다. 다음날 아우가 중봉의 시신을 찾았다. 중봉은 ‘의(義)’ 깃발 아래 숨져 있었고 휘하 장수와 병사들은 의병장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죽어 있었다.

송강 정철은 슬퍼했다. “나의 친구 여식이여 (…) 원래부터 곧게 죽고자 하더니 필경 절의에 죽었도다.” 조헌 의병장은 스승 율곡에 이어 양병(養兵) 등 경세제민을 추구했으나 49세에 둘 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난세에 직언과 절의를 실천한 중봉은 훗날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박스기사] 실천 중시한 유학자… 개혁 사상 방향은 ‘위민’ 명나라 다녀온 뒤 임금에게 백성 위하는 길 제시

중봉 조헌은 실천을 중시한 유학자였다. 그러한 자세는 피폐한 사회현실을 극복하려는 개혁 사상으로 발전한다. 방향은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안민(安民)’이나 백성을 위하는 ‘위민(爲民)’이다.

중봉의 개혁 사상은 [동환봉사(東還封事)]에 잘 나타나 있다. ‘동환봉사’는 조선에 들어와 밀봉한 뒤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이다. [동환봉사]는 중봉이 1574년 11월 질정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임금에게 올린 ‘팔조소(八條疏)’와 ‘십육조소(十六條疏)’로 이뤄져 있다. 중봉은 생전 저술에 집착하지 않아 [동환봉사]는 후일 은봉 안방준에 의해 편찬된다.

‘팔조소’는 조선의 적폐를 중국을 따라 고치자는 제안이다. 1조는 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황 등을 중국처럼 국가 문묘에 배향하자는 글이다. 2조는 관리 임용제도 개선, 3조는 의관제도, 4조는 관리의 물자 절약에 관한 글이다. 또 5조는 사대부가 서로 접대하는 예, 6조는 스승과 제자가 접대하는 예, 7조는 향촌의 풍속 순화, 마지막 8조는 문무를 겸비한 장수 배출 등이다.

또 ‘십육조소’는 사회가 바르게 나아가는 데 필요한 군주의 마음가짐 등을 다루었다. 1조는 임금이 스스로 수양과 반성을 다하라, 2조는 임금이 자신의 선조에 추모를 다하라, 3조는 왕릉은 간소하게 할 것을 주장했다. 또 4조는 제사를 간략히 할 것, 5조는 경연을 독실하게 수강할 것, 6조는 조정을 성실하게 돌볼 것, 7조는 귀에 거슬리는 바른말을 받아들일 것, 8조는 인재는 문벌을 논하지 말 것 등 임금의 자세에 관한 것이다. 이와 함께 11조는 재혼 허가, 12조는 노비를 병사로 선발해 20년 안에 100만 정병 육성, 13조는 군대 훈련 강화, 14조는 성곽의 견고화, 15조는 공정한 인사행정, 마지막 16조는 명령을 엄하게 하기 등 서얼 차별 폐지와 군제(軍制) 개혁 등을 담고 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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