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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3)] 설탕 가져온 십자군 원정은 유럽 르네상스 출발점 

일본 홀린 포르투갈 ‘별사탕’은 이슬람 흔적 

16세기 일본 최고 권력자에 선물, 통상에 사용한 ‘스위트 파워’ 기원
서방 대학도 ‘마드라사’ 모방해 탄생… 8세기 이후 문명 핵심 키워드


▎이슬람의 성지로 여겨지는 이란 수도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모스크.
별사탕, 듣는 순간 행복 지수가 급상승할 흑백시대 유산이다. 대략 50대 이상 장년에 해당될 듯하지만 별사탕을 둘러싼 추억이 머릿속 깊은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구입할 수 있지만 ‘추억의 건빵’ 영역의 상품 중 하나로 처리되고 있다. 별사탕은 1970년대까지 인기를 끌다가 1980년대 들어서부터 가게에서 사라진다.

뜬구름 잡는 식의 얘기로 들리겠지만, 별사탕은 식민지의 유산이다. 일제 강점기 때 유입된 환상의 세계가 별사탕이다. 설탕의 재료인 사탕수수는 아열대 지역의 산물이다.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가 설탕의 원산지다. 조선 시대 때는 왕이나 특권층이나 중국을 통해 설탕 맛을 봤을 것이다. 일반인에게는 소문으로만 듣던 귀한 약재로 통했다. 백설탕은 특수한 증류 기술을 필요로 한다. 21세기 들어서기까지 흑색·황색 설탕이 싸구려로 취급된 이유다. 새하얀 별사탕은 20세기 초 신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별사탕은 16세기 포르투갈을 통해 일본에 처음 등장한다. 일본과의 통상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전국시대 통일을 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바치는 선물로 선보인다. 초콜릿과 껌은 한국전쟁 당시 보여준 미군의 이미지 중 하나다. 초콜릿이나 껌 하나 얻으려 미군 뒤를 따라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에 처음 등장했지만 미군이 가는 곳에 반드시 뿌려진 선물이 초콜릿과 껌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달콤한 스위트를 이용한 ‘소프트 파워’로 풀이될 수 있다. 코카콜라도 포함되겠지만 미국의 안정과 평화가 달콤한 초콜릿과 껌을 통해 전 세계에 어필됐다.

포르투갈은 미국보다 약 400여 년 앞서 그 같은 스위트 파워, 즉 소프트 파워를 일본에 선보였다. 일본에서 별사탕은 ‘콘페이도(金平糖)’라 불린다. 사탕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 ‘confeito’를 풀어쓴 단어다. 15세기 당시 포르투갈인 상인은 ‘난반진(南蛮人)’으로 불렸다. 중국이 나눈 세계관에 따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찾아온 야만인이란 의미다. 그러나 무지몽매하다는 ‘난반진’이 들고 온 별사탕은 일본 최고 권력자의 입맛을 돋운 최첨단 문명의 상징으로 숭상됐다. 당시의 기억 때문인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별사탕이 일본 황실의 선물로 활용되고 있다.

별사탕에 대한 관심은 이슬람권 재래식 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떠오른 것이다. 이슬람권 어디에 가도 볼 수 있지만, 설탕을 입힌 견과류 기호품이 상당히 많다. 견과류 그 자체도 팔지만, 설탕을 표면에 발라 50% 정도 비싸게 판다. 땅콩·호두·아몬드·피스타치오·은행·콩과 같은 견과류 모두에 입혀 판매한다. 대략 1㎏에 5000원 미만에 구입할 수 있다. 소금을 입히기도 하지만 현지인의 인기 상품은 얇은 설탕을 입힌 견과류다. 이슬람권 설탕 견과류는 1941년 미국에서 탄생한 M&M 캔디의 원조에 해당된다. 대략 1000년 앞서 이슬람권에서 즐겨먹던 기호품이 20세기 중반 미국에 건너가 M&M 캔디로 변신한 것이다. 설탕 대신 초컬릿이나 다른 향료를 입힌 기호품이 M&M 캔디다.

놀랍게도 유럽에 설탕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1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다. 유럽 초유의 기독교 연합군이 이슬람권을 공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설탕의 맛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그쳤다. 단맛이라고 하면 꿀이 전부였다. 사탕수수도 기후에 안 맞고 암흑의 중세란 말이 있듯이 원거리 무역 자체가 드문 곳이 유럽이었다. 설탕은 최고급 회색 향신료이자 만병통치 약재로 통하던 동방의 신비 그 자체였다.

이슬람은 ‘종교=무역’으로 본다. 종교 포교를 위해 무역에 나서고 무역 확산을 통해 이슬람 땅을 넓혀간다. 설탕은 그 같은 과정을 통해 이슬람권 전역에 골고루 퍼진다. 이념은 짧고 맛은 영원하다. 예루살렘 성지 회복에 나선 십자군이지만 결과는 대실패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의외의 성과도 있다. 바로 설탕이다. 설탕은 중독을 동반한다. 한번 맛본 이상 잊을 수 없다. 견과류에 설탕을 입힌 기호품은 십자군 원정 당시 이슬람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아몬드 표면에 설탕을 입히는 기술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설탕을 얇고도 골고루 견과류 표면에 입히는 기술은 유럽 왕실 내 특별 장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이슬람 견과류, 미국 M&M 캔디와 프랑스 ‘드라제’ 원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죽은 사람의 모습이나 신체 장기 등을 그림으로 설명한 자연 과학형 화가로도 유명하다. 당시 유행한 이슬람 의학이 배경에 있다. 인간 해부도의 원조가 바로 이슬람 의학이다.
프랑스인 친구가 있다면 ‘드라제(dragée)’라는 선물이 귀에 익을 것이다. 출산 생일 세례에 맞춰 안기는 작은 선물이다. 설탕과 견과류를 재료로 한 제품으로, 보통 신선한 아몬드에 꿀을 발라 건조시킨 뒤 먹는다. 아몬드 사탕인 셈이다. 당사자와 손님과 모두가 즐기는 기호품으로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볼 수 있다. 맛도 있지만 성스러운 의식의 일환으로서의 드라제다. 아몬드의 쓴맛과 설탕의 단맛을 통해 인생의 빛과 어둠을 이해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보통 7개가 한 세트지만 참가자나 구체적 축하 내용에 따라 드라제 숫자도 달라진다. 드라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13세기 프랑스에서다. 십자군 전쟁 당시 맛본 신비의 향신료가 신성한 음식으로 둔갑한 것이다. 15세기 포르투갈이 일본에 선보인 별사탕은 그 같은 역사의 연장선에서 나타난 이슬람의 흔적에 해당된다.

이슬람권 역사에 주목하면 할수록 세계 전체가 서방 중심 역사에 세뇌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시아가 중국 중심 세계관에 빠져있듯이 전 세계가 기독교 유럽을 중심으로 한 구대륙 세계관에 물들어 있다고 봐도 된다. 서방에서 유럽사는 크게 다섯 범주로 나눠진다. 고대·중세·근세·근대 그리고 현대다. 대략 근세는 15세기 르네상스, 근대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부터 시작된다. 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다. 신을 중심으로 한 중세의 어둠을 깨고 인간 중심 역사로 나아간 것이 르네상스, 즉 근세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출발점이자 서방 인본주의 역사의 중심 무대다. 메디치 가문의 문화 예술 진흥 정책은 르네상스 태동기 역사에 따라붙는 근세 문명 문화사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다. 곧바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둘러싼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스토리가 이어진다. 이슬람권은 어떤 식으로 풀이할까.

이슬람, 철학·윤리·의학·신학·천문학 분야서 유럽 압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인체 해부도 중 갈비뼈와 다리뼈 부분.
피렌체발 서방 역사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별사탕 역사라고나 할까. 이슬람권 내의 설탕을 바른 견과류나 11세기 십자군 행적도 모른다면 프랑스의 드라제가 별사탕의 선조로 여겨질 것이다. 아시아주의에 빠진다면 일본을 출발점으로 둘 수도 있다. 이슬람권에서의 아몬드 사탕이 없었다면 과연 13세기 드라제가 세상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유럽이 자랑하는 르네상스도 마찬가지다. 십자군 전쟁을 통한 이슬람 문명 문화와의 접촉이 없었다면 근세 르네상스도 없었다고 확신한다. 1100년 암흑의 중세가 그 이후에도 수백년간 더 지속됐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문명 문화적 차원에서 볼 때 15세기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은 이슬람권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슬람은 철학·윤리·과학·의학·신학·천문학 모든 분야에서 기독교 유럽을 압도했다. 가령 의학 하나만 봐도 당시 유럽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11세기 십자군 원정 당시 상황이지만 병에 걸리면 신의 뜻이라 보고 기도에 매달렸다. 수술이라고 하면 악령을 몰아낸다면서 상처 부위를 통째로 절단하는 것이 전부였다. 질병 회복 여부도 전적으로 신의 뜻이라 보면서 기도에 매달렸다. 21세기 유럽을 보면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르네상스 이전의 서방은 신과 종교를 앞세운 반문명 미신 사회 그 자체였다. 지배층의 수탈 방법으로도 활용됐지만 무조건적 맹신과 황당한 주문(呪文)이 사회와 국가의 신념 체계로 작용했다. 11세기 당시 이슬람권은 어떨까. 질병을 신이나 종교가 아니라 자연 현상의 일부로 해석했다. 질병의 원인을 찾아 물리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발달된 제련술을 기반으로 한 작고도 세심한 장비들이 개발된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 질병 대응의 주체로 나선 셈이다. 근대 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 자라위(Al Zahrawi)’는 이슬람 의학의 수준을 알려주는 증거다. 11세기 스페인 내 남부 아랍권에서 활동한 인물로 생전에 200회의 수술을 집도했다. 뇌 장기 신경 분야 수술도 행했다고 한다. 무려 400종류에 달하는 각종 수술 도구와 함께 자신이 만든 특수 액체로 상처 부위를 씻은 뒤 집도를 했다. 균이나 바이러스에 관한 개념이 인류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말부터다. 알 자라위를 보면 11세기부터 멸균 습관을 일상화했다고 볼 수 있다. 알 자라위가 행한 수술 경험과 수술 도구에 관한 책은 이후 13세기 유럽으로 넘어간다. 서방 의학의 기본 교제로, 19세기까지 무려 600여 년간 최고의 의학서로 활용된다.

15세기 피렌체의 다빈치는 죽은 사람들의 모습이나 신체 장기 골격 근육 신경을 그림으로 설명한 자연 과학형 화가로도 유명하다. 당시 유행한 이슬람 의학이 배경에 있다. 인간 해부도의 원조가 바로 이슬람 의학이다. 인간의 몸을 해부한 뒤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사고 자체가 서방이나 아시아에는 없었다. 이슬람이 처음 선보인 뒤 이후 수백 년 뒤 서방과 아시아로 확산된다. 무식과 무지는 이데올로기 만능주의에 빠지는 첩경이다. 한국 정치에서도 볼 수 있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멀리하고 외국의 변화에 무시할 경우 수십 년이나 지난 이데올로기 하나에 올인한다. 해부학이 이단의 학문으로 탄압받은 것은 좋은 본보기다. 다빈치 생존 당시 분위기지만 ‘해부학=이교도의 괴변’ 정도로 풀이됐다. 신이 만든 몸을 해부한다는 것 자체도 불경스럽지만, 해부도를 이용한 수술 그 자체를 무시했다. 신의 뜻으로 죽고 살 뿐 인간의 지식이 아예 필요 없다는 생각이다. 해부학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 질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한다. 다빈치가 무신론자였을 것이란 얘기가 있지만 적어도 맹신과 주문에 의존한 중세형 인간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할 듯 하다.

이슬람 황금기(Islamic Golden Age)는 르네상스의 유럽, 8세기 이후 인류 역사를 설명해 줄 핵심 키워드에 해당된다. 르네상스로 접어든 서방 근세 역사의 출발점이 바로 이슬람 황금기에 직결돼 있다. 8세기부터 14세기까지 무려 600여 년간 지속된 이슬람 문명 문화의 최전성기가 이슬람 황금기의 내역이다. 이슬람 정통 후계자 아바스(Abbasid Caliphate) 제국이 통치하던 시대로 이라크 바그다드가 수도다. 7세기 불어닥친 이슬람 포교 열풍 덕분이지만 아프가니스탄·페르시아·메소포타미아·이집트·아라비아반도·북아프리카를 포괄하는 광대한 땅이 아바스 지배하에 들어간다. 아바스 제국 당시 이슬람은 ‘포교의 포교를 위한 포교에 의한’ 영토 확장에 나섰다. 상식이지만 이슬람이 정복한 땅은 알라를 대신한 이슬람 최고 지도자가 들어서 통치에 들어간다.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 국가가 이교도를 정복한다 해도 가톨릭 최고 지도자가 통치의 수반이 되지는 않는다. 가톨릭은 통치의 보조 장치나 정통성의 근거로 활용될 뿐 정치의 얼굴로 나서지 않는다. 처음부터 제정일치(祭政一致), 즉 신을 대변한 인물이 정치도 총괄하는 체제가 이슬람의 특징이다.

아바스 제국은 알라의 이름을 빌려 역내 문명 문화 발전에 주력한다. 수도 바그다드가 600년에 이르는 이슬람 황금기를 주도한 지성의 핵(核)으로 떠오른다. 핵의 핵이라고나 할까.

600여 년간 지속된 이슬람 문명 황금기


▎18세기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도레가 십자군 전쟁을 소재로 그린 그림.
‘지혜의 하우스(House of Wisdom)’는 아바스 제국, 아니 당대 전 세계 최고 두뇌들로 채워진 지구 문명·문화의 터전이다. 원래 아바스 최고 통치자들의 개인 도서관으로 출발한 곳이 지혜의 하우스다. 이후 확장되면서 이슬람 최고 지성과 지식인이 모이는 ‘지(智)의 광장’으로 발전된다.

지혜의 하우스가 보여준 최대의 활약상은 번역·출판 사업에 있다. 아바스는 전 세계 역사상 극히 드문 수평적 차원의 제국이다. 제국 내에 산다면 종교 출신 인종 언어에 관계없이 동등한 세금을 냈다. 종교가 다르거나 출신지가 다르다고 해 세금을 차별화하는 제국이 아니다. 세금을 제대로 낼 경우 자유롭게 일하고 공직 생활로의 평등한 진출도 보장됐다. 번역·출판 사업은 아바스 제국을 수평으로 연결할 ‘두뇌의 네트워크’라 볼 수 있다. 언어 인종 민족 지역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과정에서 아랍어로 된 번역·출판이 국가 프로젝트로 책정된다. 제국 내 흩어진 다양한 언어의 책과 자료가 바그다드에 밀려들었다. 당시 이슬람과 적대 관계에 있던 비잔틴 제국의 책과 자료들도 지혜의 하우스에 도착한다. 번역·출판에 나선 지식인은 시리아·이집트·페르시아·이스라엘·아르메니아·이탈리아에 걸쳐 다양했다. 상호 비교하면서 출판하는 과정에서 페르시아·라틴·시리아·유대 언어로도 번역·출판된다.

아나톨리아(소아시아) 한복판에 들어선 도시 카이세리(Kayseri)는 이슬람 황금기가 어떤 것인지, 바그다드에 들어선 지혜의 하우스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실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도시명 카이세리는 고대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종신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에서 따온 것이다. 로마 당시 크게 융성한 곳으로 현재 140만 인구를 가진 이슬람권 유수의 공업 도시 중 하나다. 카이세리에 들린 이유는 도시 곳곳에 들어선 ‘마드라사(Madrasa)’라는 이슬람 흔적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슬람 어디에 가도 쉽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서방의 종합 대학에 해당되는 곳이 마드라사다. 세계사 시간에 다룰 문제일 듯 하지만 세계 최초의 대학은 어디일까. 보통 이탈리아 볼로냐대학을 떠올릴 듯 하다. 필자도 몇 번이나 들렀지만 1088년 이래 지금까지 지속된 유사 깊은 학문의 전당이다. 그러나 이슬람권의 시각으로 보면 다른 답이 나온다. 895년 모로코 페즈(Fez)에 들어선 ‘알 카라윈(Al Qarawiynn)’이 세계 대학의 효시다. 필자 역시 페즈 대학이 최초라 본다. 이유는 두 가지다.

895년 모로코 페즈에 설립된 ‘알 카라윈’ 세계 대학 효시

첫째, 유럽의 대학 자체가 이슬람 황금기에 설립된 대학들을 모방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해부학조차 이단시하는 곳이 유럽이다. 자유로운 학문이 나올 환경이 못 된다.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에 모든 것을 거는 종교다. 모스크에 가면 우상이나 그 흔한 그림 하나도 없다. 그러나 이슬람은 신을 믿기에 자연과학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은 다르다. 신을 믿을 경우 자연 과학을 부정해야만 한다. 지구가 둥글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신성 모독이다. 알라도 믿고 지구도 둥글다고 말할 수 있는 종교가 이슬람이다. 둘째 이유는 지혜의 하우스에서 출판된 책들에 있다. 8세기 아랍어로 번역된 수많은 책들이 9세기 페즈에 나타나면서 대학도 탄생한 것이다. 중세의 유럽은 말 그대로 암흑의 시대다. 신 이외를 표현할 책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터키 카이세리에는 현재 10여 개의 크고 작은 마드라사가 있다. 현재 대학으로 사용하는 곳은 없고 전부 유적지로 관리되고 있다. 원래 이슬람 마드라사는 기부 문화의 결과물이다. 8세기부터지만 지역 내 부자나 권력자가 기부한 돈으로 건물을 짓고 지식인을 초청했다. 일단 가동되면 지역 내 상인들이 돈을 모아 유지해나갔다. 학비는 거의 무료다. 원래 알라를 모시는 종교적 모임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다양한 학문을 연구하는 종합 대학과 같은 곳으로 승격된다. 카이세리 마드라사의 대부분은 12세기에 설립된다. 당대의 정복자인 셀주크(Seljuk) 제국이 카이세리를 활동 거점으로 하면서 마드라사도 설립된다. 셀주크는 몽골의 사촌격인 유목 민족이다. 몽골 대제국이 그러했듯이 지식인의 대부분은 페르시아 출신이다. 셀주크 당시 마드라사 설립에 관여한 인물은 페르시아인 ‘니잠 알 물크(Nizam al-Mulk)’다. 셀주크 통치자의 최고 고문으로 일하면서 아랍권에 수십여 마드라사를 설립한 인물이다. 몽골은 이른바 색목인(色目人)을 통치 브레인으로 활용했다. 아프가니스탄 서쪽의 이슬람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 색목인이지만 페르시아 즉, 현재의 이란이 특히 두뇌의 원천으로 통했다.

카이세리 내 마드라사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도심 한복판에 들어선 아브군루(Avgunlu)다. 튼튼한 성곽을 연상시키는 건물로 재료 전부가 석회석이다. 1998년 이후 찻집과 서점 어린이 놀이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안에 들어가 살펴봤지만, 사람들이 거의 없고 전시된 책도 대부분 이슬람에 관한 것들이다. 21세기 세상 변화를 알도록 도와줄 책이 거의 없는, 무성영화 시대의 정지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12세기 당시의 아브군루는 21세기 하버드대학에 버금가는 학문의 보금자리로 활용됐을 것이다. 아브군루는 가로 40m 세로 30m 정도의 단층 건물이다. 원래 규모는 부속 건물을 포함해 지금보다 10배 이상 컸다고 한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왜소하지만 900년 전 세워진 공적 건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준이다. 유럽 초기 대학이 그러하듯 12세기 당시 마드라사 재학생 규모는 백여 명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학생과 선생과의 비율도 1대1 정도라고 보면 된다. 한 분야 학문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신학을 기초로 하면서 자연·과학·사회·과학을 하나로 연결하는 식의 공부다. 한때 한국에서 유행했지만, 스티브 잡스풍(風) 리버럴 아츠(Liberal Arts)보다 한층 더 깊고 넓은 세계였을 듯하다.

14세기 이후 700년간 방황하는 이슬람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 학문과 사상은 마드라사 교육의 핵심 내용 중 하나였다. 8세기 이슬람 황금기 당시 번역된 출판물 중 상당수가 그리스에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철학·윤리·도덕·정치·과학·의학·천문학에 관한 기록물은 당대 이슬람 황금기를 빛낸 영역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철학·예술 그리고 관심사 전부를 양가죽에 기록해 남겼다. 바그다드 지혜의 하우스는 기원 전 5세기에 꽃을 피운 그리스의 학문 사상을 아랍어를 비롯한 수많은 언어로 번역했다. 11세기 등장한 근대 수술의 아버지 알 자라위의 책들도 그리스 의학서를 기초로 한 것이다. 지혜의 하우스가 없었다면 알 자라위라는 존재도 없었고 다빈치의 해부도도 없었을 것이다.

이슬람이 왜 다신교의 그리스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였는지 궁금할 듯하다. 일신교에 기초한 알라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앞서 자연 과학에 대한 개방적 자세에서 보듯 이슬람은 다신교와 이교도에 관한 연구도 포용했다. 현재 서방 윤리 철학 정치의 기준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키케로·세네카에 이르는 그리스 로마 사상가의 흔적은 이슬람 황금기에 번역된 책들을 통해 발전된 것들이다. 만약 지혜의 하우스가 없었다면 그리스 철학 사상은 물론 그리스 비극이나 문학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별사탕이 포르투갈 무역에 등장했는지, 왜 14세기 십자군 전쟁이 끝나는 즉시 유럽 전체의 문명 문화가 역동적으로 변해가는지, 왜 15세기 갑자기 르네상스가 서방 정신사를 움직이게 됐는지. 이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8세기부터 600여 년간 지속된 이슬람 황금기에서 찾을 수 있다. 흥망성쇠는 인간 역사 모두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이슬람이 저물면서 유럽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16세기 대항해 시대 때부터다. 18세기 민족주의, 19세기 제국주의를 거쳐 오늘날 서방 중심 세계관이 지구 전체로 확산된다. 가톨릭 종교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은 서로마 멸망 후 르네상스까지 약 1100년간 지속된다. 이슬람은 14세기 황금기가 끝나고 내부 분열로 들어간다. 21세기까지 700여 년간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돌고 도는 인류 역사를 보면 이슬람권도 언젠가 문명 문화의 재도약 무대로 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 분열 혼란이 표류하는 땅이지만 지혜의 하우스가 창조했던 숭고한 역사가 다시 한번 찾아오리라 확신한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4호 (20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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