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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14)] 환관의 상징인 ‘아티스’와 사대주의 유전자 

환관은 중국이 원조처럼 둔갑된 또 하나의 허상 

그리스 신화 속 대지의 여신 키벨레, 아티스를 신관(神官)으로 임명
중국이 기원전 2000년에 발명했다는 면(麺)도 메소포타미아가 원조


▎아티스의 어머니이자 대지의 신 키빌레. / 사진:유민호
'만절필동(萬折必東)’. 주중 한국대사가 2017년 12월 5일 남긴 명구(名句)다. 대사 신임장 제정식 때 중국 측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그 어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강물은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것이 원론적 의미다. 은유적으로 보면 달라진다. ‘작은 나라는 대국 중국의 뜻에 맞춰 결국 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중국의 생각에 맞춰 마지막까지 함께 하겠다는 ‘충성 맹세’가 만절필동에 배인 진짜 의미다. ‘뼛속까지 친미 친일’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절필동을 ‘뼛속까지 친중’이라고 비난할 듯하다. 낯 뜨거운 용비어천가는 10일 뒤인 12월 14일 당시 중국을 국빈 방문 중이던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한층 더 심화된다. “중국은 높은 산맥의 나라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몽에 동참하겠다”. 베이징(北京) 대학에서 연설한 문 대통령의 발언이다. 덕담으로 좋게 볼 수도 있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미국 워싱턴에 가서 “미국은 높은 산맥의 나라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미국의 안보구도에 동참하겠다”고 말할 경우 어떤 반응이 나올까.

새삼스럽게 5년 전 사안을 꺼내면서 황혼 정권을 욕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중국 사대주의가 대통령과 대사만이 아닌 대한민국 전체를 지배하는 유전자로 정착돼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한국인의 중국 사대주의 유전자는 깊고도 넓게 새겨져 있다. 사대주의의 결과지만 높은 산맥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높은 산 어디쯤 서 있다고 오판하기 쉽다. 문 정권 관료들에게 많이 봤지만 동맹국인 미국까지 가서 일당독재국 중국을 대변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에서 관찰한 한국인은 심리와 행동 유형이 중국식 세계관의 판박이로 느껴진다. 사대주의 유전자에 빠져들면서 ‘한국인 사고=중국식 세계관’으로 진화된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인 대부분은 그 같은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거나 부정할 것이다. 이성이 아니라 거의 본능에 가까운 무의식이 유전자의 정체다. 각론은 아예 없이 뜻도 모를 한자 고사성어와 함께 펼쳐지는 고상한 거대담론, ‘최고 최장 최대 최초’라는 부분에 집착하는 풍조, 중화사상에서 보듯 한국이야말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 한반도 신앙, 내면이 아닌 세속적 외면 경쟁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트랜드 공화국, 자신의 언행은 부드럽게 남에게는 잔인한 잣대를 들이대는 허위의식과 내로남불, 근본을 추구하는 철학이나 원칙도 없이 눈앞의 위기만 넘기려는 단기적 세계관까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끝도 없지만 당장 떠오르는 한국인의 중국 판박이 유전자에 관한 본보기들이다.

한반도에도 존재했던 기묘한 직업 환관


▎유일하게 남은 아티스 청동상. / 사진:유민호
환관(宦官)은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존재했던 기묘한 직업이다. 21세기 한국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잊었을 것 같지만 중국에서 전해진 ‘첨단’ 문명 문화가 바로 환관이다. 뜬금없이 환관 얘기를 꺼낸 이유는 한국인에 내재된 중국 사대주의 유전자를 설명할 최적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무려 1000년 이상 한반도 최고 권력 주변을 지켰던 중국의 유산이 바로 환관이다. 이웃 나라 청년들이 사무라이(侍)를 흠모하는 동안 조선의 청년들은 과거 출세나 환관을 꿈꾸며 살았다. 과거와 환관은 의식주 해결이 가능한, 흙수저 청년들에게 열린 유일한 출구였다. 과거 시험에도 엄청 몰렸지만 스스로 거세를 한 뒤 환관을 자청한 청년들도 넘쳤다. 슬픈 어제의 초상화지만 조선과 고려 심지어 현존하는 최고(最古) 역사서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것이 환관이다.

일본 역사가들이 자주 하는 얘기지만 일본이야말로 환관이 없는 아시아 내 유일한 나라라고 자랑한다. 과거 제도를 도입한 베트남도 환관이 존재했다. 조선은 고려에 이어 중국발 환관제도를 계승 확대한다. 이어 조선발 환관을 ‘아버지 나라’ 중국에 주기적으로 헌상하기까지 한다. 흔히들 환관이라고 하면 왕 주변을 맴도는 집단으로 이해할 듯 하다. 그러나 실제로 왕 근처에 갈 수 있는 환관은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은 잡일을 도우는 노예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음지에서 살아갔다. 하녀를 대신해 힘이 필요한 일을 도와주는, 권력자 주변 여자들을 위한 남성 노예라고 보면 된다. 거세된 상태이기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환관은 국가 간 최고급 선물 리스트에 오른 ‘상품’이기도 했다. 의료 수준이 낮았던 당시 거세(去勢) 과정에서 절반 정도의 환관 후보생들이 저세상으로 갔다. 출혈과 세균 감염,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인해 ‘잘 다듬어진’ 환관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다. 10대 처녀보다도 더 귀한 최고급 선물이 환관이었다. 조선은 1403년 명(明)의 영락제(永樂帝)에게 35명의 환관을 헌상했다. 조선 개국이 이뤄진 1392년 이후 불과 11년 만에 이뤄진 조공이다. 초기 조선 집권자들의 중국에 대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본보기 중 하나다.

한족(漢族)이 세운 명은 인류 최다 환관을 가진 나라였다. 황실과 주변에 대략 10만 명이 존재했다고 한다. 당시 수도 남경(南京)의 인구가 50만 정도였다. 거주민 5명 중 1명이 환관이었던 셈이다. 당시 환관은 인기 직종이었다. 환관이 되는 순간 의식주가 해결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모자가 항상 넘쳤다. 명 황실이 1612년 환관 3000명을 모집하자 무려 2만 명의 응모자가 모였다.

‘독립 조선’은 19세기 말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 당시 내세웠던 최고의 명분이다. 현실적·제도적으로 중국 사대주의와 끊으라는 의미다. 환관제도는 당시 제국주의 일본이 내세웠던 중국 단절론의 대표적 사례다. 환관이 한반도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은 1894년 일본 주도하의 갑오경장(甲午更張)을 통해서다. 노비제 폐지, 조혼 금지, 과부 재혼, 고문과 연좌제 2 폐지가 당시 일본이 무력으로 단행한 갑오경장의 내역이다. 왕궁 내시부(內侍府)가 폐지되면서 환관도 과거 유물로 전락한다. ‘뼛속까지 친일’이라고 비난할 듯 하지만 일반 백성 입장에서 볼 때 갑오경장은 1789년 프랑스 혁명에 버금가는 한반도 초유의 역사다. 갑오경장 내용 하나 하나가 당시 백성들의 운명을 통째로 바꾼 혁명 그 자체다. 일본이 강제한 법이기에 정통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중국 등소평(鄧小平)이 말했다는 흑묘·백묘론 얘기를 전해주고 싶다. 인간 개개인의 인권은 민족 국가 이전에 보호해야할 하늘이 내린 법이다. 일본이 식민지 준비 단계로 내세운 정책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을 듯 하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남을 탓하기 전에 조선인 스스로 그 같은 변혁을 주도하지 못했다는 반성부터 해야 할 것이다. 작은 일상사에서부터 국가적 차원의 거창한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원인은 결국 스스로에 있다.

환관은 아시아적 전근대성을 상징하는 증거


▎키벨레 여신을 모신 초대형 암벽. / 사진:유민호
19세기 서방 기준으로 볼 때 환관은 중국 주도 하의 아시아적 전근대성을 상징하는 증거다. 남성 성기를 없애는 환관 제도야말로 반문명·야만·미개의 상징으로 풀이됐다. 근대화에 뛰어든 일본이 정신적 차원에서 중국을 압도한 근거 중 하나도 바로 환관 제도다.

‘미(美)의 원점, 예(藝)의 기원, 술(術)의 원조를 찾아서’는 필자가 2년째 연재하고 있는 이글의 전체 타이틀이다. 인류 역사의 출발점을 통해 오늘을 짚어보고 내일을 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인류 역사의 출발점으로 가면 모든 것이 신(神)으로 연결될 수 있다. 미·예·술 어디 하나 예외가 없다. 물론 본능에 기초한 인간의 욕(欲)과 속(俗)도 존재했다. 그러나 출발점은 신에 따르는 성(聖)과 영(霊)이다. 인간에게 떨어지는 현세적 이익은 신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얻는 축복이자 부산물 정도로 해석됐다. 기독교 바이블에도 자주 나오지만 수시로 동물이나 농산물을 신에게 바친다. 일단 신에게 수확의 기쁨과 영광을 돌린 뒤 의식용 음식을 인간에게 재활용하는 식이다. 유교는 한국인 내면에 스며든 중국발 유전자의 핵심이다. 유교 예법에 따르면 조상과 사자(死者)를 추모하는 제사를 주기적으로 지내야만 한다. 일단 음식을 바친 뒤 나중에 제사용 음식을 가족 전부가 나눠먹는다. 유교권에서 보면 당연하게 보이겠지만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희한한 의식이다. 신이 아닌 같은 인간인 조상에게 음식을 바치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 문화사 차원에서 볼 때 신이 아닌 인간을 우선시하는 의식은 극히 드물다. 조상에게 음식을 바치더라도 일단은 신에게 감사와 축복을 전한 뒤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조상을 앞세운 유교 의식을 가족 화목이나 인간 해방이란 긍정적 시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과 하늘을 무시하고 망각하는 행위다.

중국은 신을 앞세운 종교가 드물거나 아예 없는 나라다. 산발적으로 외부 종교가 들어가기는 하지만 신과 무관한 피(血)와 인간 자체에 주목하는 종교관이 전부다. 당연하지만 사회체계와 인간 관계에 집중하는 유학은 종교가 아니다. 굳이 중국에서 통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피에 기초한 가족’이 전부다. 가족이 신은 물론 그 어떤 가치보다도 우위에 서있다. 돈은 그 같은 ‘피와 가족 종교’를 받쳐주는 기본 요소다. 중국인이 돈을 통한 현세적 욕(欲)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아름다운 전통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원이 돈을 기초로 한 피의 종교에 매달린다.

‘최초·최고(最古)’는 중국발 유전자, 나아가 한국인이 믿는 중국 사대주의의 허상 중 하나다. ‘최초 최고’라는 수식어와 함께 중국 문명 문화야말로 전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기 쉽다. 지난 28년간 125개국을 여행하며 얻게 된 결론이지만 중국 중심 세계관의 대부분은 ‘뻥’이다. 세계가 중국과 그 주변에 그친다고 믿었던 19세기 말까지의 우물 안 세계관에 불과하다. 중국 밖으로 눈을 돌려 비교하면 최초 최고에 대한 중국식 뻥의 한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지만 잊을만하면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면(麺)’에 관한 뉴스를 살펴보자. 간단히 말해 중국이 기원전 2000년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진위 여부가 의심되는 그릇 밑에 붙은 면을 비롯해 다양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면 발명국이라고 주장한다. 마르코 폴로도 국수와 아이스크림이 중국에서 왔다고 말할 정도니 대부분은 쉽게 수긍할 것 같다. 그러나 면의 개념을 어떻게 할지에 따라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보면 이미 기원전 5000년부터 가늘게 이어진 국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대략 20㎝ 이상의 길이가 아닌 5㎝ 이하의 짧은 면이다.

밀은 기원전 1만 년 전 메소포타미아 농업 혁명 당시 탄생된 인류 최초의 인공 농산물이다. 인류의 정주는 밀 재배의 결과물이다. 메소포타미아 면은 밀을 손이나 도구를 이용해 비교적 길게 만들면서 등장했다. 보존용 음식으로, 물에 넣는 즉시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짧은 파스타라고 보면 된다. 메소포타미아의 짧은 면은 지금도 이슬람권 전역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탈리아 파스타도 십자군 전쟁을 통해 본격 유입된 메소포타미아 유산에 해당된다. 기존의 짧은 면을 굵고 길게 다양화한 것이 이탈리아 파스타다. 중국이 자랑하는 인류 최초의 면도 그 같은 역사적 과정 속의 결과물이라고 보면 된다. 짧은 메소포타미아 면을 길게 늘린 것이 전부다. 핵심은 발상 그 자체다. 메소포타미아가 원조다. 추정컨대 짧은 면이 동쪽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 길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개량 개선 정도라면 이해가 가지만 아예 제로 상태에서 면 자체를 중국이 발명했다는 것은 억지에 불과하다.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인 종이·활자·화약·나침반에 대한 얘기도 내막으로 들어가면 ‘중국식 뻥’에 불과하다. 이미 메소포타미아에서 개발해 사용되던 것을 조금 개량시킨 것이 중국발 4대 발명품의 실체다. 왜 고고학계에서 중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달 듯 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즉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가장 큰 배경에 있다.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과 이슬람 문명·문화를 배제하는 과정에서 거꾸로 중국이 최고이자 원조로 둔갑하게 된다.

“종이·활자·화약·나침반도 메소포타미아 유산”


▎잘려진 키빌레 여신의 목. / 사진:유민호
환관은 중국이 최초 발명국이자 원조처럼 느껴지는 또 하나의 허상 중 하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중국이 아니다. 외부에서 수입된 뒤 중국에서 개량된 것이 환관이다. 농업 혁명과 가축 사육, 문자와 바퀴를 발명한 인류 문명의 출발점 메소포타미아가 환관의 출발지다. 대략 기원전 2000년에 메소포타미아로,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방에서 출토된 점토판에 환관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앞서 강조했지만 인류의 초기 문명 문화의 99.9%는 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환관 역시 마찬가지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신을 모시는 신성한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가 환관 탄생의 기원이다. 왕과 권력에 기생하는 중국식 세계관과 전혀 무관한, 신을 염두에 둔 인간의 창조물이 바로 환관이다. 신과 환관의 관계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고대 그리스에 전해지는 신화는 환관의 출발점을 이해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다. 대지의 여신인 키벨레(Cybele)가 주인공이다. 현재의 터키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등장했던 모신(母神)으로, 대략 기원전 6세기부터 대지의 신·출산의 신·부활의 신·창조의 신·곡물의 신으로 숭배됐다. 여성을 앞세운 모신사상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문화의 특징 중 하나다. 이미 기원전 6000년부터 풍만한 가슴과 몸매를 가진 모신 사상이 아나톨리아에 등장했다. 키벨레는 양쪽에 사자를 거느린 채 앉아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신이다. 모신으로 숭배되지만 여성만이 아닌 남성도 내재한 양성 신으로도 통한다.

키벨레와 관련된 환관은 아티스(Attis)로 불리는 10대 초반의 미소년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티스는 여신 키벨레의 손자에 해당된다. 키벨레는 그러나 미소년 아티스를 사랑하게 된다. 아티스는 키벨레의 내심도 모른 채 다른 여성과 결혼 준비에 나선다. 키벨레는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아티스에 분노한다. 결혼식 당일 신부를 죽이고 아티스를 미치게 만든다. 키벨레의 저주로 인해 아티스는 스스로 거세한 뒤 죽게 된다. 아티스가 키벨레의 분노로 거세당했다는 것을 알자 결혼식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거세에 동참한다. 키벨레는 이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다. 아티스를 부활시킨 뒤 영원히 늙지 않도록 도와주면서 자신의 전용 신관(神官)으로 임명한다.

고대 그리스에 전해지는 신화가 환관의 출발점


▎키빌레의 영향으로 탄생된 기독교 마리아 모습과 예수. / 사진:유민호
21세기 기준으로 볼 때 아티스 신화는 ‘막장 패륜 엽기’가 교차하는 기묘한 스토리다. 손자와의 근친상간에 집착하는 여신의 욕망이 소름을 돋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아티스 신화가 시작됐던 기원전 6세기, 나아가 수메르 점토판에 환관 얘기가 등장했던 4000년 전으로 돌아가면 달라진다. 당시 후손 번식은 노동력 제공과 생존 보장이란 차원에서 인간 모두가 갈망하던 일생일대 이벤트였다. 도덕 윤리도 없던 시대다. 누가 아버지인지 누가 어머니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생명이 태어나면 소속된 집단과 더불어 공동 생활에 들어갔다. 출산 과정에서 생명은 물론 산모도 죽음을 감수해야만 했다. 무사히 태어난다 해도 유년기에 병으로 죽거나 수명도 서른 살을 넘기지 못했다. 근친상간도 일상적이었다. 아니 근친상간이 더욱 신뢰감을 주는 집단 보존의 안전 방패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키벨레가 관여해 부활시킨 뒤 영원히 늙지 않도록 도와준다. 인간 모두 적극 환영할 환희의 스토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키벨레만이 아닌 신의 창조물인 아티스에 대한 숭배도 당연히 나타났다.

중국 역사에서의 환관은 밥과 잠자리를 보장하는 황실 내 직업이란 개념으로 출발한다. 메소포타미아 환관의 출발은 중국과 같은 세속적 목적과 무관하다. 신의 사랑을 받는, 신을 모시는 대변인으로서의 환관이다. 신관으로 일하면서 의식주 관련 생존도 보장된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중국 환관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신관으로 일한 결과로서의 의식주 보장과 아예 처음부터 생존 목적 하에 시작된 환관이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신이 아닌 인간에게 제사를 지내는 유교가 그러하듯 신과 무관한 세속적 목적이 중국 환관 탄생의 배경에 있다.

중국의 환관은 음모와 속세적 욕망의 상징

우상 파괴에 나섰던 기독교도 탓이겠지만 환관의 상징인 아티스를 묘사한 조형물은 극히 드물다. 예수처럼 부활한 인간이란 점에서 한층 더 탄압을 받았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다. 아주 희귀한 아티스 청동 조형물이 터키의 항구 도시 안탈랴(Antalya) 뮤지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려 500㎞를 달려 현지에 들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협상이 안탈랴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회의장뿐만 아니라 도시 내 중심 도로 전체가 차단된 상태다. 약 30분간 걸어 뮤지엄에 도착한 뒤 곧바로 아티스 청동상으로 달려갔다. 높이 약 150㎝ 정도의 고깔모자를 쓴 미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을 띤 얼굴로 세월을 뜻하는 로젯타(Rosetta) 문양이 다리에 새겨져 있다. 보통 아티스의 성기는 옷으로 살짝 가리는 식으로 표현된다. 1971년 발견됐다는 안탈랴 청동상은 어린이에 어울릴 듯한 작은 성기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스·로마 조각상을 보면 남성의 성기를 작게 묘사한다. 왜 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티스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욕(欲)이 아닌 키벨레를 위한 성(聖)으로서의 순결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아티스 성기를 작게 묘사했다. 그리스 로마는 순결한 신관 아티스를 보면서 다른 조각들의 성기도 미소년처럼 표현한다. 상식이지만 그리스 조각상의 출발점도 신에게서 찾을 수 있다. 즐기거나 자랑하기 위한 조각이나 예술과 무관하다. 신에게 바치는 공물로, 신이 기뻐할 모습과 표정을 조각과 예술에 담았다.

이미 26년 전 얘기지만 중국 베이징에서 2년 이상 머문 적이 있다. 당시 전 세계가 주목했던 뉴스가 중국 개혁 지도자 등소평에 관한 정보였다. 등소평이 언제 세상을 뜰 것인가가 당시 외신 기자들의 주된 업무였다. 중국 마지막 왕조 청(清)의 환관인 순야오팅(孙耀庭)에 관한 뉴스는 등소평 소식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중 접했다. 1996년 12월 17일 중국 최후, 아니 인류 마지막 환관이 세상을 떴다. 94세다. 거세된 신체로 인해 평소 목욕을 피한 것은 물론 죽은 뒤에도 몸을 씻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주변 중국인에게 최후의 환관에 대한 소회를 물어봤다. 놀랍게도 대부분 차갑게 반응했다. 역사로서가 아닌 청산 대상이자 인민을 착취한 악의 화신이란 식으로 풀이했다. 독재국가의 교육 탓이겠지만 중국공산당은 자신 외의 모든 중국 역사를 불온시한다는 것도 알았다.

안탈랴의 아티스 청동상을 보면서 웃는 미소년 환관의 모습이 중국인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궁금했다. 중국의 환관은 늙은 모습에다가 웃음과는 거리가 먼 어두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음모와 속세적 욕망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중국 사대주의 유전자는 중국만 쳐다본 우물 안 세계관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사대주의 박멸의 특효약은 넓은 세계를 무대로 한 객관적 눈과 머리, 가슴에 있다. 중국발 1000년 유산인 환관에 관심이 있다면 안탈랴의 아티스 청동상부터 찾아보길 권한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2205호 (2022.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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