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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인터뷰] ‘일본의 실패’ 연구하는 김현철 서울대 일본연구소장 

“일본의 현재는 한국의 미래… ICT 혁신하고 이민자 거부감 줄여야”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아베노믹스 부작용 덮쳐… 낮은 혁신·낮은 기술·낮은 임금의 ‘싸구려 자본주의’로 전락
‘나쁜 엔저’ 탓에 항로 잃은 기시다 총리의 경제 정책, 기축통화 지위까지 흔들릴 지경


▎김현철 서울대 일본연구소장은 ‘어떻게 하면 한국이 일본의 실패 경로를 피해 갈 수 있을지’를 학문적 소명으로 삼고 있다. 그 실마리가 ‘혁신’에 있다고 그는 믿는다.
'싸구려 일본(安いニッポン).’ 닛케이 금융 전문기자 나카후지 레이가 쓴 도발적 책 제목이다. 2021년 3월 출간 이래 지금까지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다. 김현철(60)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이 책을 책상 위에 놓고 인터뷰에 임했다. 김 교수는 “일본의 실패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스스로를 규정했다. 그는 2015년 책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통해 저성장 시대에 처한 일본의 한계와 활로를 모색했다. 2022년 5월 10일 서울대 일본연구소에서 만난 김 교수는 “7년 넘게 흘렀지만, 책에 썼던 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경제보좌관을 역임한 후 학교로 돌아온 그는 2019년 3월부터 일본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등장 이래 일본은 거대한 ‘경제 실험장’이 됐다. 돈을 무한대로 찍어내 경제를 띄우려는 MMT(현대화폐이론)가 ‘아베노믹스’의 이름으로 펼쳐졌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언뜻 성공하는 듯했지만, 2022년 미국이 긴축 모드로 급전환하자 부작용이 터져 나오고 있다. 수출에 도움은 별로 안되면서 물가만 밀어 올리는 ‘나쁜 엔저’ 현상이 발생했다. 기축통화로서 엔화의 입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2022년 1월 일본 경제지 [주간 다이아몬드]는 표지에 ‘일본 침몰’이라는 헤드 카피를 달았다. ‘부자들이 일본을 떠나고 있다’는 부제가 달렸다. 실제 일본이 기침만 해도 한국은 몸살을 앓던 공식은 유통기한이 끝났다. 오히려 경쟁자 일본이 침체할수록 반사이익을 노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이 이웃의 불행을 마냥 즐길 수는 없다. 자칫하면 ‘일본의 현재가 한국의 미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붕괴하는 일본의 경제 신화


▎2021년 10월 총리가 된 기시다 후미오가 일본 경제를 재건할지는 회의적이다. / 사진:교도통신
일본 경제 위기론은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심각하다는 시선이 강하다.

“아베노믹스는 엔저를 유도해서 기업 실적 개선→주가 상승→투자 활성화→임금 인상→내수 소비 진작을 이끌어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겠다는 프레임이었다. 주가 상승 단계까지는 갔었지만, 그 이후가 미진한 상황에서 지금의 글로벌 인플레이션 쇼크가 왔다. 원재료를 해외에서 조달하는 내수 기업과 임금은 안 올랐는데 물가가 올라서 가처분 소득이 줄어든 가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일본을 구원해주리라 생각했던 엔저가 이제 충격을 주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구상은 뭘까?

“엔화가 안전자산인 이유는 경상수지의 지속적 흑자와 세계 1위인 대외 순자산 덕분이었다. 과거 글로벌위기 때마다 엔화는 강세였다. 그러나 대외 순자산은 2019년부터 하락을 시작했고, 경상수지는 42년 만에 적자로 돌아서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인상 기조로 돌아선) 미국과 금리 차까지 발생하니 엔화 약세가 지속되고 있다. 기시다 총리는 ‘일본형 자본주의’를 내세웠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처럼 임금을 올리고, 의료·주거·교육 등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글로벌 쇼크가 와버렸다. ‘나쁜 엔저’를 막아야 하지만, 통화조절까지는 못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긴급재정 지원으로 7월 참의원 선거를 넘기려 하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왜 금리 인상 등 통화정책 전환을 하지 않나?

“‘기시다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일본은 아직도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국내총생산(GDP) 수준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코로나 때 한국에 비해 마이너스 성장은 더 심했고, 회복기 때 덜 올랐다. (미국이나 한국에 비해 경제 체력이 안 되니까) 지금 금리를 올릴 상황이 아니다. 일본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256%에 달한다. 금리를 1% 올리면 이자 부담만 37조원이다. 일본은행이 완화적 통화정책으로 엔저를 용인하자 엔·달러 환율이 오버슈팅한 것이다. 그렇다고 금리를 안 올리면 빅스텝(0.5% 금리 인상)을 밟는 미국과 금리 격차가 벌어져 자본의 해외 유출이 가속화한다. 아베노믹스의 청구서 때문에 기시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덫에 갇혀 있다.”

그토록 많은 돈을 풀었는데도 왜 일본은 디플레에서 빨리 못 빠져나왔을까?

“저성장은 수요 부족 때문이다. 내가 돈이 없고, 늙어서 사고 싶은 것이 없으면 공급이 넘쳐도 안 산다. 이러면 기업은 가격을 낮추고, 임금은 안 오르는 악순환에 진입한다. 기시다 총리는 수요부족을 임금주도성장으로 메우려 했지만 엔저가 심화되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일본은행이 상장지수펀드(ETF)를 사줘서 닛케이지수를 받치는 현 상황을 정상적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은행이 리스크 자산을 직접 구입해서 시장에 개입하는 전대미문의 일을 지금 일본이 하고 있다. 구로다 총재는 아베가 아베노믹스 추진을 위해 앉힌 인물이다. 상상도 못할 이런 통화정책을 사명이라고 생각하니까 수정을 못한다. 구로다 총재 임기가 내년 4월까지다. 교체하지 않는 한 정책 수정의 타이밍을 못 잡을 것 같다.”

바이든이 일본보다 한국 먼저 찾는 이유


▎일본의 중심지 도쿄 긴자에서 다이소 매장이 성업 중이다. 엔저 여파로 100엔 숍은 300엔 숍이 됐다.
정책 리스크를 제외하고, 산업적 측면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경쟁력도 예전만 못한가?

“아니다. 소니, 도요타, 닌텐도 등은 엔고 시절 해외로 나가서 글로벌 밸류 체인을 깔아 다국적 기업이 됐다. 일본이 세계 3위 경제 대국에서 4~5등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다. 게다가 일본은 전통적으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산업이 강하다. 일본을 버티게 해주는 경쟁력이다. 문제는 엔저가 이들 기업의 수출 증대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좀비 기업의 연명만 늘리고 있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학교 명예교수의 한탄처럼 강한 통화, 강한 혁신, 강한 임금의 ‘고차원 자본주의’가 아니라 낮은 혁신, 낮은 기술, 낮은 임금의 ‘싸구려 자본주의’가 돼버렸다.”

세계 각국이 스태그플레이션을 두려워하고 있다. 일본의 지금 방식은 물가를 더 자극할 수 있다.

“공급망 문제로 생긴 인플레이션은 단기적일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일시적 쇼크가 왔는데도 일본의 물가 상승률이 1.3%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사태 같은 외부 충격이 없었다면 아직도 일본은 디플레이션 상태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리플레이션이라는 표현을 쓴다. 2% 정도의 물가상승을 경제 목표로 할 정도로 수요가 부족한 것이다.”

2019년 여름 한국에서 ‘노 재팬(일본 상품 불매운동)’ 현상이 있었다. 그 여파로 일본산 소·부·장 공급이 끊긴 한국 반도체 산업이 타격을 받았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의 수출 보복에 맞서 우리 국민이 ‘노 재팬’을 했다. 일본의 급소를 때리는 응징 효과도 있었다. 왜냐하면 엔저와 원화 강세로 일본 관광업이 받아야 했던 수혜가 사라졌다. 한국 관광객이 오지 않으면서 일본 지방정부의 타격이 컸다. 한국도 반도체 파운드리 수율 문제가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는 신산업의 성장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산 소·부·장 조달에서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산업은 대만 TSMC를 추격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에서 (육성에 힘쓴) 수혜 업종이었다.”

TSMC를 축으로 미국·일본·대만이 반도체 동맹을 맺었지만, 중국 시장을 버릴 수 없는 삼성전자는 소외됐다는 시각에는 동의하나?

“그렇지 않다. TSMC가 일본에 투자하는 발표를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최첨단 기술이 아니다. 일본은 그 기술마저도 너무 필요하기 때문에 엄청난 보조금을 주고 TSMC를 유치한 것이다. 그렇더라도 일본은 반도체 부문에서 왕성한 혁신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과 대만을 따라올 수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월 20일 방한한다. 일본보다 먼저 한국을 찾는 일정이 꽤 무게감 있게 다가온다.

“미국은 중국과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서 한국의 반도체나 배터리는 굉장히 중요한 글로벌 전략자산이다. 하지만 일본은 TSMC를 유치해 보완해야 할 정도로 반도체 산업 경쟁력이 약화돼 있다. 전략자산을 보유한 국가가 국제 관계에서 힘의 우위에 서는 건 당연하다.”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기 위한 조건

언젠가부터 ‘국뽕’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한국은 물가를 반영한 PPP(구매력지수) 기준 1인당 GDP에서 이미 일본을 넘어섰다. 2027년에는 1인당 GDP도 일본을 추월할 것이란 일본 싱크탱크 일본경제연구센터의 보고서도 나왔다.

“큰 의미를 갖는다. 2018년 한국의 PPP가 일본을 추월했다. 굳이 ‘국뽕’을 강요하지 않아도 일본 여행을 가보면 ‘일본이 싸졌네’라고 느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걸 추월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부만 넘어섰고 소·부·장 같은 분야에서는 더 노력해야 하지만 한국과 일본이 드디어 대등한 관계가 됐다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세대와 달리 국민 다수는 더는 일본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너희 아버님 세대는 ‘소니(Sony) 세대’, 너희 세대는 ‘김연아 세대’라고 칭한다. 소니 세대에게 일본은 항상 모든 면에서 앞서가고 우월했다. 그러나 김연아 세대는 김연아가 아사다 마오를 봤듯이 일본을 바라본다. 주눅 들지 않고 쿨하게 대응한다. 일본이 수출 보복을 가하면 한국 산업이 망할 것처럼 소니 세대는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잘못된 감각이 한·일 관계를 망쳐놓은 씨앗이 되기도 했다. 김연아 세대의 쿨함이 오히려 한·일 관계를 더 건전하게 이끌 수 있다.”

정도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한·일 양국은 인구 감소라는 공통 문제에 직면해 있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트위터에 “출생률이 사망률을 웃도는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어차피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며 일본 소멸론을 꺼냈다.

“한국의 출산율은 0.8명이다. 1.1명인 일본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다(현재 인구를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2.1명은 나와야 한다). 저출산 문제에 있어서 한국은 지금이라도 일본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일본의 첫 번째 실수는 ICT 후진국이라 할 정도로 아날로그 사회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인구 감소를 보완해줄 수 있는 첨단 기술에서 한국은 일본보다 강하다. 두 번째 실수는 이민을 배척하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국수주의를 막지 못한 점이다. 여기에다 엔저까지 겹치니 ‘싸구려 국가’가 된 일본에 인도 등 외국의 ICT 인재가 오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부 인재가 유출된다. 실제 일본의 애니메이션 장인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다. 한·일 경제 경쟁에서 우리가 앞서기 위해 윤 대통령이 탑재해야 할 마인드는 무엇일까?

“우리는 일본의 실패를 통해서 경로를 잘 잡아야 한다. 소비를 촉진하는 성장, 혁신 기술이라는 두 축과 강한 통화를 바탕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새 정부도 혁신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글로벌 전략자산을 육성하고, 벤처 기업의 혁신성을 북돋워준다면 한국은 일본과 다른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다.”

-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 녹취 정리 이민준 월간중앙 인턴기자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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