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3)] 임시정부 수립 공식화한 민족지도자들 

3·1운동 한 달여 만에 상해임시정부 출범 위한 ‘임시의정원’ 결정 

감리교 지도자 현순, 한국의 독립 의지 널리 알리기 위해 상해로
도쿄 2·8독립선언 알린 이광수와 ‘기미독립선언서’ 번역해 전파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민족대표들은 1919년 3월 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갖고 세계 만방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이로써 거족적 3·1운동이 점화됐다. / 사진:연합뉴스
현순(玄楯) 목사는 1910년대 한국 감리교의 유력한 지도자이자 민족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그는 조선시대 명문 역관(譯官) 가문 중 하나인 천녕(川寧) 현씨 출신으로 1878년 한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유교경전을 공부하던 그는 10대 후반 세계정세에 눈을 뜨면서 외국유학을 꿈꿨다.

그는 20세 되던 1897년 육영공원에 입학해 영어를 공부하고 다음 해 도쿄의 순천(順天)중학에 입학해 1902년까지 4년 동안 일본에서 유학했다. 뒤 이어 26세 되던 1903년 하와이로 가 이민자들의 통역으로 1907년까지 4년을 지냈다. 하와이에서 통역으로 지내는 동안 감리교 목회자로 활동하며 수많은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인 이민자들을 조직했다. 당시 미국 본토 캘리포니아에서는 도산 안창호가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인 이민자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초기 미주의 한국인 이민사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는 하와이의 현순 목사와 미국 본토의 도산 안창호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순 목사는 31세 되던 1907년 고국으로 귀국했다. 당시 그는 일본과 미국 생활을 모두 다년간 경험한 보기 드문 인재였다. 이에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던 정동제일교회는 그를 부목사로 청빙했다. 현순 부목사는 뛰어난 목회 실력으로 정동제일교회를 부흥시켰다. 그 결과 현순 부목사는 1913년 정동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승진해 1915년까지 2년 동안 사역했다. 정동제일교회 사역을 그만둔 현순 목사는 감리교 주일학교 활동에 주력했고 손정도 목사가 후임목사로 청빙됐다.

정동제일교회 사역을 그만둘 당시 현순 목사는 한국 감리교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유력한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다. 그동안 한국 감리교와 민족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1914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즉 현순 목사는 1914년부터 전덕기 목사의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이런 배경에서 현순 목사는 1919년 3·1운동에서 감리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해 현순 목사는 자서전 [현순 자사(自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전략) 나는 종로 청년회관과 기독신보사(基督申報社)를 방문하고 주필 김필수 목사와 함께 남대문 밖 제중원 약방주임 이갑성의 집에 갔다. 그곳에 자연스레 모인 사람들이 김필수,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이었다.

그때는 1919년 2월 19일(고종이 승하한 1월 21일로부터 약 한 달 후) 오후 2시쯤이었다. 토론의 대 주제는 독립운동이었다. 해외로부터 도착한 소식들을 종합하면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이광수, 최팔용 등이 유학생을 규합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고 하여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파리에 파송하여 평화회의에서 조선독립을 요구하였다 하고,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하였다고 했다.

3·1독립선언서 막전막후


▎1919년 2·8독립선언은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발표한 것으로, 국내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사진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2·8독립선언서. / 사진:연합뉴스
이처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먼저 거행하였으니 국내에서는 거국적 독립운동을 반드시 거행해야만 된다 하고 밤새도록 토의하였다. 김필수는 토의 도중에 귀가하였고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 7명이 기독교를 대표하여 간부를 조직하고 천도교와 합동운동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날, 즉 2월 20일 밤에 이승훈, 현순 두 사람이 정탐의 주목을 피하며 재동(齋洞)에 사는 최린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최린이 말하기를, “우리 손병희 선생님은 결심이 이미 굳건하니 우리는 결단코 실행할 뿐이라”고 하였다. 이승훈, 현순 두 사람이 돌아와 간부들에게 보고하고 곧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황제(大皇帝-고종황제) 국장일(國葬日)을 임박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간부 인원 몇 명을 각처에 파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얻기로 하며 서무, 외교통신, 회계의 3부를 나누어 업무를 분담하였다.

서무에는 이승훈, 함태영, 이기선 그리고 외교통신에는 현순, 안세환, 이갑성 그리고 회계에는 박희도였다. 국내의 독립운동을 국외에 선전하여 해외동포들에게 알리며 열강에 선전하여 세계여론을 일으킬 필요성을 절감한 간부들은 외교통신원 한 명을 상해로 파견하여 파리 평화회의와 미주, 하와이 동포들에게 통고하여 세계형세를 때때로 살피어 국내로 통신케 할 사명을 주자고 의결하고 사명자로 현순이 임명되었다.

2월 22일 밤에 이승훈, 현순 두 사람이 최린 집에 다시 가서 위의 사항을 상의하니 최씨가 극히 찬성하고 천도교 측으로부터 경비 2000원을 지급키로 하였다.(하략)”

“독립국임과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대량으로 찍어 내기 위해 만든 번각판.
위에 의하면 현순, 이승훈, 함태영 등 8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고종황제 승하 약 한 달 후인 2월 19일 남대문 밖 이갑성 집에 모여 거족적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그들은 도쿄의 2·8독립선언은 물론 상해 신한청년당 활동, 미주 대한인국민회 활동 등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상해의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국내밀사들의 보고 때문이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한청년당의 활동에 호응하기 위해 거족적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천도교 측과 협력하기로 했다. 이 같은 결의에 따라 현순과 이승훈이 천도교의 최린과 접촉했고, 최린은 “우리 손병희 선생님은 결심이 이미 굳건하니 우리는 결단코 실행할 뿐이라”고 대답함으로써 기독교와 천도교의 협력이 성사되었다. 한편 최린의 대답으로 미뤄볼 때, 당시 천도교 측에서도 내부적으로 거족적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린은 거족적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서 초안을 최남선에게 위촉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은 2월 23일 완성됐다. 이 초안과 여비 1000원을 이승훈이 천도교 본부에서 받아와 현순에게 건네줬다.

당시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는 아직 민족대표 33인의 서명이 없었고, 거사일자는 고종황제 국장일인 3월 3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후에 천도교 측에서 국장 당일 거사하는 것은 불경한 일이라는 반론이 제기돼 결국 3월 2일로 변경됐다. 3월 3일의 전날인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 측에서 난색을 표명해 하루 더 당겨 3월 1일로 결정됐다.

현순은 이 같은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휴대하고 24일 밤 한양을 출발해 상해로 향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잘게 찢어서 끈처럼 꼬아 휴대했다. 현순은 외교통신원으로서, 3월 3일 예정된 국내의 거족적 독립운동을 해외에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현순은 신의주, 펑톈, 톈진을 거쳐 3월 1일 상해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3월 2일 밤 현순은 신규식, 이광수, 선우혁, 김철 등 신한청년당 당원들을 만나 자신이 상해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그때 현순은 자신이 국내 독립운동본부의 대표임을 증명하기 위해 휴대하고 온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는 “현순 목사와 최창식이 상해에 와서 나를 찾았다. 그들은 독립선언서 한 장을 가지고 왔고, 삼월 삼일 광무 황제의 인산일(因山日-국장일)을 기회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예정이란 것과, 자기들은 독립운동본부의 명령으로 대표로 온 것이란 말을 하였다. 그러나 선언서에 서명할 인물에 대해서는 손병희, 박영효, 이상재, 윤치호 등이 머리에 쓰일 것이란 것밖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현순이 한양에서 상해로 온 목적은 이광수가 도쿄에서 상해로 온 목적과 같았다. 이광수는 도쿄의 2·8독립선언을 해외에 널리 선전하기 위해 왔고 현순은 국내의 거족적 독립운동을 해외에 선전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광수와 현순은 자신들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협력할 필요가 있었다.

이광수는 신한청년당 당원들과 의논하고 상해 프랑스 조계에 현순과 함께 일할 임시사무소를 마련했다. 총무에는 현순, 통신서기에는 이광수와 여운홍, 서무에는 신규식과 신헌민, 재무에는 김철과 선우혁이 임명됐다. 임시사무소에는 타이프라이터 하나와 등사판도 들여놓았다. 임시사무소의 이광수와 현순은 국내의 거족적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리면서 우선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국내의 거족적 독립운동 소식이 오는 대로, 독립운동 소식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서를 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영자 신문 '대륙보' 통해 3·1운동 알려


▎1919년 3·1운동 직후 한 재판정의 모습.
드디어 3월 4일 아침 상해의 [The China Press(대륙보)]라고 하는 영자 신문에 3·1운동 소식이 실렸다. 임시사무소의 이광수와 현순 등은 밤을 새워가며 3·1운동 소식과 기미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선전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광수와 현순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을 알지 못했기에, 현순이 상해로 오기 전 들은 대로 손병희, 박영효, 이상재, 윤치호 등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해외에 선전했다. 이 같은 선전활동에 힘입어 수많은 민족지도자들이 상해에 모이게 됐다.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신채호, 신익희, 조소앙, 조완구, 조성환, 손정도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3월 중순경부터는 국내에서 다양한 임시정부가 공개되고 있었다. 예컨대 한성정부를 위시해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등이 공개됐다. 이에 따라 상해에 집결한 민족지도자들도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 주장은 기호 출신의 신익희, 조소앙, 신석우 등이 주도했다. 하지만 이광수와 현순은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이광수나 현순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온 것이 아니라 도쿄의 2·8독립선언과 국내의 3·1운동을 해외에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현순은 3·1운동의 최고지도부가 33인임을 확인한 후, 그 지도부가 상해임시정부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만에 하나 33인이 상해가 아닌 국내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생각이라면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면 절대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해에 집결한 민족지도자들은 속히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한양에서 다양한 임시정부가 공개되는 상황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상해의 민족지도자들은 즉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측과 국내 33인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측으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즉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익희, 조소앙, 신석우 등이 주도했고, 국내 33인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은 이광수, 현순 등이 주도했다.

미국식 자유공화제 추구


▎일제 강점기 대전지역 최초의 독립운동인 ‘3·16 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 재연행사에 참가한 시민들이 당시 만세운동을 재현한 공연을 바라보고 있다. / 사진:김성태 객원기자
이와 관련해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는 “(4월 9일 저녁에) 아니나 다를까. 임시정부 설립이 시급한 것을 주장하는 의논이 나왔다. 나는 처음에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으나 일이 급전직하할 형세인 것을 보고 일어났다. 나는 이러한 뜻으로 말하였다. ‘독립 선언을 하였으니 정부를 조직하자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의사를 듣지 아니하고 우리가 여기서 정부를 조직한다면 미국 동포들도, 하와이 동포들도, 아령(俄領, 연해주 지역)에서도, 서간도와 북간도에서도 저마다 정부를 조직하게 될지도 모르니, 이리 되면 우리 독립운동이 분열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에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습니다.’(하략)”는 기록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미뤄 본다면 당시 상해의 주류 여론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당시 국내 33인으로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지시를 기다리던 이광수와 현순은 오래도록 소식이 없자 3월 말 이봉수를 서울로 보내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윤대원 교수의 ‘현순에게 비전(秘傳)된 임시정부의 실체와 대한공화국임시정부(한국독립운동사연구 33호, 2009)’에 의하면, 이봉수는 함경도 홍원 출신으로 3·1운동 당시 메이지대학 상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천도교도였다. 그 이봉수는 3·1운동 소식을 듣자 국내로 들어왔다가 3월 말경 상해로 왔다. 아마도 천도교 측에서 상해에 파견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봉수는 천도교 측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듯하다. 이런 이봉수를 통해 이광수와 현순은 천도교 측에서 ‘조선민국임시정부’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3·1운동 직후 손병희를 비롯한 33인 대부분이 체포됐기에 임시정부에 대한 33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의 [나의 고백]에는 “만일의 준비로 새 나라 이름과 내각의 직제와 사안인 각원 명부 하나를 만들어 가지고 가게 하였으니, 이것은 국내에서 정부 조직에 대한 준비가 없는 경우에는 이 안을 참고로 하거나 또는 그대로 승인하여 달라기 위함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이광수와 현순은 상해임시정부가 가능할 경우에 대비해 상해임시정부의 국가이름, 국가체제로서 내각제, 내각 명단 등을 미리 작성해 이봉수로 하여금 국내 지도자들에게 전달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상해임시정부의 국가이름, 내각제, 내각 명단 등은 이광수와 현순이 독단적으로 작성했다기보다는 임시사무소의 신한청년당 당원들과 논의한 결과로 이해된다. 기독교 신자들 중심으로 조직된 신한청년당 당원들이 구상하는 상해임시정부의 국가체제는 당연히 미국식 자유공화제였고, 내각 각료들 역시 기독교인 중심이었다.

상해임시정부 수립 공식화


▎전남 함평군 해보면 문장장터에서 주민들이 1919년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4·8만세운동을 재연하고 있다. / 사진:양광삼 기자
그런데 상해의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사무소의 이광수와 현순을 제외하고 4월 9일 저녁 별도의 회합을 가졌다. 임시사무소의 이광수와 현순이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임시정부 수립을 반대한다고 생각해 자신들끼리 임시정부를 수립하려고 모인 것이었다. 바로 그 회합에 이광수가 참여해 “서울에 보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조금 더 기다릴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민족지도자들은 상해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 소식을 이광수는 4월 10일 아침이 돼서야 들었다. 크게 놀란 이광수 등은 각 여관으로 찾아다니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모이길 요청했다. 장소는 임시정부 수립을 대비해 마련한 임시정부 청사였다.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이광수는 이동녕과 신채호가 머무는 여관으로 찾아가 참여할 것을 허락받았다. 이동녕이 가장 대선배요,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이동녕, 신채호, 조소앙, 신석우, 손정도 등 30명 정도의 민족지도자들이 임시정부 청사 2층에 모이게 됐다. 이광수는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했고, 민족지도자들은 점심때까지 임시정부 문제를 토론했다.

마침 서울에 갔던 이봉수가 점심 식사 후 돌아왔다. 그는 33인 대표는 정부 조직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남기지 않았으며, 상해에 모인 여러분이 좋도록 하라고 했다고 보고했다. 이로써 임시정부 수립의 걸림돌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광수 등 신한청년당당원들은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며 고깃국을 끓이고 저녁을 대접했다.

30명 정도의 민족지도자들은 저녁 식사 후, 식당에 앉은 채로 임시정부 수립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먼저 조소앙이 본회의 명칭을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으로 하자고 제청했고, 이 제청에 신석우가 찬성함으로써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임시의정원이 결정됐다. 회의에 참여한 민족지도자들은 자연스럽게 임시의정원 의원 자격을 획득했고, 상해임시정부 수립도 공식화됐다. 이제 상해임시정부의 국가이름, 국가체제, 각료 등을 결정하는 절차만 남았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206호 (2022.05.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