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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6)] 조선의 3대 도적-홍길동·임꺽정·장길산 

유명한 도둑 있었다는 건 당시 나라가 편치 않았다는 증거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거론… 후대에 소설 주인공으로 나오면서 주목 받아
[홍길동전], [임꺽정전], [장길산] 소설 속에 창조된 인물로 대중의 꿈 투영


▎SBS 드라마 [장길산]에서 장길산 역을 맡은 배우 유오성.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자신의 저서 [성호사설]에서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을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말했다.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는 물건을 청전(靑氈)이라고 하는데, 전(氈)은 짐승의 털로 짠 담요나 방석 같은 것을 일컫는 말이다. 푸른색 담요라는 의미의 청전은 청전구물(靑氈舊物)의 준말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명필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글씨를 잘 쓴 인물이다. 어느 날 밤 왕헌지가 서재에 누워 있을 때, 도둑이 들어 그 방의 물건을 모두 훔쳐가려고 했다. 이를 보고 있던 왕헌지가 도둑에게, “여보게 도둑, 청전은 우리 집에 대대로 전해온 물건이니 놔두고 갈 수 없을까?”라고 천천히 말하니, 도둑이 놀라서 훔친 물건을 놓고 도망갔다고 한다.

청전구물의 고사에 등장하는 도둑은 아마도 좀도둑이었던 것 같다. 이런 좀도둑은 어지러운 시절이나 먹고살기 어려울 때 극성을 부린다. 1950년 대 서울에서는 댓돌에 놓아둔 신발이나 벽에 걸어놓은 옷가지를 훔쳐가는 좀도둑이 많았는데, 조선 말기에도 서울에는 그릇이나 신발 등을 훔쳐가는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좀도둑도 여럿이 모여 조직을 이루면,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기도 한다. 임진왜란이나 조선 말기처럼 국가가 위기에 빠진 시기에도 이런 도둑 떼가 횡행했는데, 밖으로 외적의 침입에 시달리고 안으로는 도둑 떼가 창궐하니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도둑이 반드시 어지러운 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도둑이 많다는 것은 나라가 어지럽다는 증거일 것이다. 연산군 때의 홍길동, 명종 때의 임꺽정, 숙종 때의 장길산 등은 조선시대의 유명한 도둑인데, 이렇게 이름난 도둑이 있었다는 것은 이 시기에 나라가 편안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세 명의 도둑은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언급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들 세 명의 도둑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조선시대 도둑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임꺽정이다. 성호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임꺽정에 관한 항목이 있어서, 일찍부터 임꺽정은 조선시대 도둑의 대표적인 이름이었다. 이익은 자신의 책 [성호사설]에서 임꺽정뿐만 아니라 홍길동과 장길산도 함께 거론해 요즈음은 이들 세 명을 조선의 3대 도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성호사설]에서 주로 다룬 도둑은 임꺽정이고, 여기에 장길산에 관한 내용을 덧붙였다. 홍길동에 대해서는 거의언급하지 않았다.

'성호사설'에서 거론한 세 명의 도둑


▎이익의 저서 〈성호사설〉. 정치·경제·사회·문화· 지리·풍속·역사 등에 관해 쓴 책이다.
이익이 조선의 도둑 이야기를 쓴 것은 도둑을 막지 못한 조정의 무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지, 도둑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익은 임꺽정을 잡기 위해 “3년 동안에 몇 도(道)의 군사를 동원해 겨우 도둑 하나를 잡았고, 양민으로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했고, 또 장길산을 잡지 못한 데 대해서는 “온 나라가 힘을 다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꾀가 없음이 예로부터 이러하니, 하물며 외적의 침략을 막고 이웃 나라에 권위를 세우는 것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고 탄식했다.

근래에 [성호사설]의 임꺽정 항목을 얘기하면서 이들 도둑을 ‘의적’이라고 소개하는 일이 있어서, 마치 이익이 이들을 의적이라고 말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호 이익은 그런 의미로 글을 쓰지 않았고, 홍길동·임꺽정·장길산 등을 도둑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들을 의적이라거나, 영웅시하는 말은 후세 소설가들의 붓끝에서 나온 것이다. 이익이 홍길동·임꺽정·장길산 등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보고, 또 이들에 대한 조선시대의 다른 기록을 참고해서 세 명의 도둑에 대한 사실이 무엇인지 보기로 한다.

이익은 홍길동에 대해서 “옛날부터 황해도와 평안도에는 큰 도둑이 많았다. 그중에 홍길동이란 자가 있었는데, 오래전이라서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장사꾼들이 맹세하는 말에 들어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홍길동에 대해 언급한 내용 전부이다. 18세기 중반쯤 되면, 이익처럼 박학다식한 사람도 홍길동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정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밖에는 기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홍길동에 관한 과거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들어 있는 몇 가지가 전부이고, 다른 데에서는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홍길동에 관한 정보는 현재 우리가 성호 이익보다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익은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없었지만, 우리는 실록을 자유롭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이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누구나 [조선왕조실록]의 원문과 현대어 번역 전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이라 할지라도 실록을 볼 수 없었으므로, 이익도 실록에 들어 있는 홍길동 관련 기록은 알 수가 없었다.

실록에 나오는 홍길동 관련 기록은 서너 개에 불과한데, 이를 종합해보면, 홍길동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홍길동은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도적으로, 1500년에 체포돼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홍길동은 높은 벼슬아치 행세를 하면서 돌아다녔다. 충청도는 홍길동의 도둑질로 큰 피해를 봐 10여 년이 지난 뒤에도 그 후유증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런 정도가 홍길동에 관한 정보 전부다.

이익은 임꺽정이 관군에게 붙잡혀 죽은 후 약 120년 정도 지난 다음에 태어났으므로, 그가 임꺽정에 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대체로 이전의 기록에서 얻은 것이다. [성호사설]에 실려 있는 임꺽정에 관한 내용은 간단한데, 이는 이익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한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도적 홍길동


▎2002 서울만화모형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임종열씨가 만든 이두호 원작 임꺽정 모형.
임꺽정에 관해서는 [조선왕조실록]에 상당히 자세한 기록이 들어 있어서, 실록만으로도 임꺽정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또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에 들어 있는 내용도 임꺽정과 가까운 시기의 인물이 쓴 기록이므로 믿을 만하다. 실록과 그 밖의 자료를 바탕으로 임꺽정의 활동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임꺽정의 고향은 경기도 양주인데, 언제 어떤 과정으로 도둑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교활한 면이 있는 인물인데, 그와 함께 도둑질한 무리도 모두 민첩하고, 또 잔인했다고 한다. 임꺽정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559년 3월이다. 이 얼마 전에 개성의 포도군관 이억근이 임꺽정을 추적해 체포하려다가 도적들에게 오히려 해를 당해 죽은 일이 있었으므로, 무신 중에서 용맹한 자를 뽑아 도적을 잡도록 하자는 논의가 조정에서 있었다. 이런 것을 보면, 임꺽정은 1559년 3월 이전에는 그리 크게 알려진 도둑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 임꺽정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다가, 1560년 11월에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을 서울에서 잡고, 서림에게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임꺽정의 근거지로 관군 500명을 보낸다. 그러나 관군은 도적을 잡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장 연천령이 도적에게 잡혀 죽는 일까지 발생한다. 그러다가 12월에 황해도에서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리는데, 사실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 가도치였다. 게다가 이 일은 가도치에게 허위 진술을 하게 한 것이어서 관련된 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다음 해 9월에 평안도 의주에서 임꺽정을 붙잡았다고 보고하자, 임금이 대궐에서 심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 임꺽정은 가짜였다. 의주 목사 이수철이 공을 세우려고 임꺽정이 아닌 자를 고문해서 임꺽정으로 만들어 서울로 압송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10월 6일 황해도에서 임꺽정 일당이 대낮에 민가 30여 곳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임금은 벼슬이 높은 장수와 군대를 보내기로 하고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남치근을 뽑아서 보냈다.

임꺽정은 변장하고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임꺽정을 지목해 화살을 맞고 사로잡힌다. 1562년 1월 3일 임꺽정을 사로잡았다는 보고를 임금에게 올리니, 조정에서는 금부도사와 무관을 파견해 서울로 압송해 목을 베었다. 그런데 1월 9일 사간원에서 남치근을 파직시킬 것을 청했는데, 임꺽정을 잡는 과정에서 황해도 백성들이 너무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간원에서는 임금에게, “비록 도적의 우두머리는 죽었으나, 백성과 군사의 사상자가 너무나 많습니다. 황해도 백성들의 원망과 고통은 이미 극에 달해, 이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그 참혹함을 이기지 못할 정도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교활한 임꺽정


▎임꺽정의 전설이 전해오는 강원도 철원군의 고석정(孤石亭). 대중에게 임꺽정은 의적으로 기억돼 있다.
임꺽정이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날뛴 도둑인 것은 분명하지만, 임꺽정 같은 무리가 나오게 된 것은 정치가 잘못됐기 때문이라는 평가는 이미 명종실록을 편찬하던 때도 있었다. 명종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임꺽정의 무리를 “비록 방자하다고 하지만 그들의 무리는 8~9명에 지나지 않으며, 모이면 도적이고 흩어지면 백성”이라고 하면서, 임꺽정 잡는 것을 핑계로 백성을 너무 많이 괴롭혔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숙종 때 장길산이라는 영리한 도둑이 황해도에서 출몰했다. 장길산은 원래 광대로 곤두박질을 잘하는 자였는데, 용맹과 빠르기가 남보다 뛰어났으므로 드디어 도둑의 우두머리가 됐다”고 했다. 곤두박질은 광대가 몸을 뒤집는 재주인데, 이것으로 장길산이 매우 몸이 가벼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이익이 장길산에 관해서 말한 것은, 조정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다는 것이 전부다.

장길산은 [조선왕조실록]에 두 차례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숙종 18년(1692년) 12월 13일의 기록이다. “이때 도둑의 우두머리 장길산이 평안도 양덕현에 숨어 있었는데, 포도청에서 장교를 보내서 잡으려고 했으나 관군이 놓쳤다. 대신들이 양덕현감을 처벌하여 다른 고을의 수령을 경계하는 것이 좋겠다고 청하자,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라는 내용인데, 숙종이 비변사의 높은 벼슬아치들을 불러 만난 자리에서 나온 내용이다. 비변사의 2품 이상 관리들을 만나서 논의했다는 것은, 장길산이 좀도둑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1697년 1월 10일의 기록이다. 장길산과 결탁해서 반역을 꾀하려는 무리가 있다는 보고를 받은 임금이 이들을 문초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숙종은 장길산에 대해서 “큰 도둑인 장길산은 비할 데 없이 날래고 사납다. 여러 곳으로 다니면서 그 무리가 실로 번성했는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현에서 군사를 풀어 포위해서 잡으려 했으나 끝내 잡지 못했으니, 또한 그 흉악함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신하들에게 별도로 군사를 내어 체포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신하들이 장길산을 잡는 자에게 높은 벼슬과 후한 상을 준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왕에게 요청하니, 임금은 이를 허락했다.

끝내 잡히지 않았던 큰 도둑 장길산


▎동양방송(TBC) 어린이 프로 [소년 홍길동]의 한 장면. 홍길동은 조선 후기 한글소설이 나타나면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이처럼 장길산을 잡는 자에게는 높은 벼슬과 상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후에 장길산을 잡았다는 보고는 없고, 더는 장길산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몇 가지 기록에 장길산이 등장하기는 하나, 그가 큰 도적이라는 내용일 뿐이다.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은 것이다.

흔히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을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말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이익의 [성호사설]이다. 그런데 [성호사설]에 들어 있는 이들에 관한 내용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들이 현재와 같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홍길동·임꺽정·장길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나오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1800년 무렵에 나온 고소설 [홍길동전], 1928년부터 10여 년 동안 홍명희가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임꺽정전], 그리고 1974년부터 10년 동안 황석영이 일간신문에 연재한 [장길산] 등이 바로 그것이다. [홍길동전]은 오랫동안 허균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근래에 그가 작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창작시기도 1800년을 전후한 시기라는 점도 새롭게 알려졌다.

이처럼 홍길동은 조선 후기 한글 소설이 나타나면서 소설의 주인공으로 거듭났고, 임꺽정은 오랫동안 대중의 기억에서 멀어진 인물을 홍명희가 다시 창조해냈으며, 장길산은 황석영이라는 걸출한 소설가의 손에서 20세기 후반에 다시 살아났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소설가의 손에서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지, 역사적 사실 속의 인물은 아니다. 그렇지만 세 편의 소설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면에서 본다면, 이 소설들에는 대중의 꿈이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06호 (202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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