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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석] 이정동 교수가 말하는 기술패권 전쟁 승자의 조건 

“미·중 누구 편에 설지 고민하기보다 최초의 질문으로 고유한 분야 개척이 우선”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축적의 길' 이어 '최초의 질문' 출간해 기술 선진국 도약의 필요조건 제시
“경제성만 내세우기보다 고유한 기술로 인류에게 혜택 줄 수 있어야 선진국”


▎6월 2일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가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기술주권은 여러 국가와의 협력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다. 2021년 7월 2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제68차 무역개발이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지위를 그룹 A(아시아·아프리카)에서 그룹 B(선진국)로 변경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당시 외교부는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증명해온 무역과 투자를 통한 성장의 모범적인 사례임을 확인하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기술 선진국일까? 다소 도발적 질문에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로 우리 산업계에 반향을 일으킨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가 입을 열었다. 그가 최근 저술한 [최초의 질문]의 부제는 ‘기술 선진국의 조건’이다. 그는 기술 선진국은 단순히 국제시장에서 잘 팔리는 제품을 생산하는 국가가 아닌 그 이상의 뭔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6월 2일 서울대 공대 건물에서 그를 만났다.

한국은 충실한 실행자, 이제는 게임 체인저 돼야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는 [최초의 질문]을 통해 우리나라가 기술 선진국이 되려면 각 분야 리더가 고유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밝혔다. / 사진:민음사
기술주권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진단한다면?

“비유하자면 컵에 물을 반 잔 정도 채웠다고 할 수 있다. 채워진 물 반 잔은 선진국 입장에서 협력할 가치가 있는 분야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국내 기업들의 생산 현장을 둘러보며 협력을 약속한 일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이처럼 서로 협력하자고 제안하는 국가가 세계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이러한 위상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게 아니다. 지난 70년 동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수많은 기술자, 정책수립자의 피와 땀으로 개척한 길이다.”

그렇다면 아직 채워지지 않은 물 반 잔은 어떤 것인가?

“우리나라는 정해진 게임의 룰에서 충실한 실행자로서는 그 누구보다 탁월하지만,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탁월한 실행자로서 세계적 역량을 펼친 우리나라는 이제 다음 단계인 ‘게임 체인저(상황 전개를 완전히 바꿔놓는 사람이나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5월 20일 방한한 바이든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신흥 기술 파트너십을 증진하고 글로벌 공급망 협력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방한 마지막 날에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면담하고, 현대차의 미국 투자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기술주권의 관점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방한은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기술주권은 여러 국가와의 협력 관계를 통해 비로소 성립될 수 있다. 우리가 미국에 제시할 수 있는 고유한 기술을 갖고 있으면 우리의 기술주권은 지켜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지켜내기 어렵다. 우리 기업들이 미국 투자를 약속했는데, 이러한 투자를 통해 미국과의 협력 관계가 돈독해지고 그 와중에 두 국가 사이에 기술 지식도 오간다. 그런 관계가 있어야만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될 때 우리가 그 질서 속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런 면에서 우리 기업들의 미국 투자 약속을 긍정적으로 본다.”

미·중 기술패권 전쟁이 심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미·중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이냐는 상대적 관점에서 고심할 것이 아니라, 절대적 관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고유한 분야·기술을 개척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반도국이라는 지정학적 한계를 말해왔지만, 사실 고유한 분야·기술을 개척한다면 세계 열강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게 우리나라 앞에 놓인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하려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선행돼야 하는 건 아닌지?

“중요한 지적이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좋은 예시다. 인구가 적고 국토가 좁은 네덜란드가 세계에서 기술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ASML 같은 업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ASML은 엄밀히 말해 삼성에 납품하는 하청 업체지만, ASML이 가진 독점 기술 덕분에 누구도 ASML을 무시하지 못한다. 국가의 외교적 역량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고 그 기술을 실현할 수 있는 제조 역량을 갖추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가 갖는 지정학적 한계를 논의하기에 앞서 우리나라가 고유한 기술을 가졌는가를 먼저 질문해야 한다고 거듭 말하고 싶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은 초미세 반도체 회로 공정에 필수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업체다. 1대당 2000억원에 달하는 고가 장비인 데다 생산 가능 수량이 1년에 약 40대뿐이라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 다수의 글로벌 기업이 ASML에서 이 장비를 확보하려고 경쟁하고 있다.

[최초의 질문]에서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우리가 누구도 하지 못한 최초의 질문을 통해 의미 있는 시행착오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전에 썼던 [축적의 시간], [축적의 길]에서 끊임없이 시행착오를 축적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며 그 과정을 ‘스케일업(Scale-up)’이라고 요약했다. 그런데 여러 기술자, 정책수립자와 대화하면서 시행착오 가운데 의미 있는 시행착오와 의미 없는 시행착오가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초의 질문을 자주 던지는 의미 있는 시행착오 필요해


▎6월 2일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가 월간중앙 인터뷰에서 “고유한 기술로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국가가 진정한 기술 선진국”이라고 말했다.
의미 있는 시행착오란?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로드맵(청사진)’과 다른 것을 시도하고자 할 때 생기는 시행착오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분야에서 단순히 30년을 근무했다고 해서 과연 그 사람이 ‘고수(高手)’냐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해답은 그 사람이 어떤 노력과 시도를 했느냐에 따라서 ‘퇴적(단순한 시행착오의 반복)’ 또는 ‘축적(의미 있는 시행착오의 반복)’의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나는 의미 있는 시행착오를 하려면 질문을 새롭게 하는 것부터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질문]은 [축적의 시간]과 [축적의 길]의 ‘프리퀄(어떤 작품의 전편)’에 해당한다.”

기술 선진국이 되기 위한 조건은?

“각 분야 리더가 최초의 질문을 조직 구성원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가 기술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젊은 세대들은 외국어, 컴퓨터 활용 능력이 뛰어나 이전 시대보다 훨씬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그러니 리더는 그들에게 도전적 질문을 던져 각성하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최초의 질문]의 주된 독자가 그런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기업 환경을 고려했을 때 도전적 질문을 던지기가 쉽지 않다.

“미국의 거대 글로벌 기업 ‘애플’은 잘나갈 때나 그렇지 못할 때 구분 없이 도전적 질문을 해왔기 때문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잘나갈 때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그렇지 못할 때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언제 어느 때든 도전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떤 리더들은 ‘도전적 질문을 던질 권한이 없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건 면피성 발언이라고 본다. 모든 조직 구성원은 질문할 권리를 갖고 있고, 그 권리는 행사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다. 이 점을 각 분야 리더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최초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아지려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리더가 자기 아래 리더에게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유로운 조직 문화를 만들어줘야 한다. 영구 동력기와 같이 물리 법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모든 질문은 최초의 질문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최초의 질문을 실행하는 데 있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최초의 질문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스몰 베팅’을 해 아이디어를 빨리, 그리고 자주 테스트해봐야 한다. 스몰 베팅을 해야 자본 낭비도 적고, 회사가 휘청거리는 일도 줄일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오픈 네트워크 활용이다. 내가 시도해보려는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이 이미 시도했을 수 있다. 그런 사람과 교류해 혹시 모를 낭비를 줄여야 한다. 열린 자세로 다른 사람과 자주 만나 논의하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테스트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유로운 조직문화 속 ‘스몰 베팅’으로 리스크 최소화


▎이정동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는 [중앙일보]와 JTBC가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 과정인 J포럼 강연에서 “오픈 네트워킹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은 혁신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은 질문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입시 위주인 교육 제도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나는 대학 입시 제도를 바꾼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 졸업 후 경제 활동에서 은퇴할 때까지의 수십 년을 어떤 학습으로 채울 것인가에 달린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 그 해답은 평생학습에 있다. 이를테면 은행 마케팅 부서 근무자가 평생학습을 통해 인공지능 기법을 배워 이를 어떻게 마케팅 시스템에 접목할까를 고민하는 식이다. 평생학습은 근로자가 자신의 업무와 연관된 기술을 배울 기회를 넓혀 더 많은 최초의 질문이 나올 수 있도록 할 것이다.”

2011년 한국생산성협회 회장, 2017년 한국기업경영학회 회장, 2018년 아시아태평양생산성콘퍼런스(APPC) 서울대회 조직위원장, 대통령 비서실 경제과학특별보좌관(2019~2021년)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해온 이 교수는 이러한 경험과 이론적 연구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 기술주권과 최초의 질문에 대한 통찰을 전하고 있다. [중앙일보]와 JTBC가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 과정인 ‘J포럼’에 여러 차례 강연자로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기술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J포럼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우리나라 오픈 네트워킹의 한 축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J포럼을 계기로 만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는 과정은 혁신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사립 소프트웨어 교육기관인 ‘에콜 42’는 교수 없이 학생들이 실제 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기술과제를 팀을 구성해 서로 협력해서 해결하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학생들이 영감을 주고받으며 교류한다. 이는 ‘P2P 학습(동료 간 상호학습)’으로 평생학습의 기본이다. 이 P2P 학습은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모였을 때 가장 효과가 크다. 구성이 다양한 J포럼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있고, 실제 현장에서 토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인상적이었다.”

10년 후 대한민국이 어떤 국가로 불렸으면 하는지?

“우리나라가 고유한 기술로 인류 발전에 기여하는 국가로 불렸으면 한다. 일각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우리의 지상과제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경제성장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지 우리의 비전이 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진 고유한 기술이 인류에게 혜택을 줄 수 있다면 우리나라는 전 세계가 존경하는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고유한 기술은 차원이 다른 질문, 최초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기술 선진국이다.”

- 글 최현목 월간중앙 기자 choi.hyunmok@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eon.minkyu@joongang.co.kr

202207호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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