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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7)] 조선시대 수도를 지탱한 한강의 뗏목 

뗏목에 한강 상류의 취사·난방용 땔나무 실어 오기도 

강원 산지에서 벌채한 나무를 떼꾼이 뗏목으로 운송
경복궁과 창덕궁 등 조선시대 궁궐 건설의 숨은 공신


▎강원 영월군의 동강 변은 과거 인근 지역 목재상들이 서울까지 뗏목으로 목재를 실어 나를 때 쉬어 가던 쉼터였다. 2007년 열린 ‘동강뗏목축제’에서 주민들이 뗏목을 시연하고 있다. / 사진:영월군
현재는 꽤 알려진 여름철 레저 스포츠의 하나인 래프팅은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이전까지는 소수의 개인이 즐기다가 1990년대 들어와서 전문 클럽이나 레저 전문 업체가 생겨나면서 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래프팅은 영어 ‘rafting’을 그대로 쓰는 것인데, 영어의 ‘raft’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나무나 통으로 만든 평평한 구조물로, 물 위에 띄워 사람이나 물건을 운반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람을 넣어서 물 위에 띄우는 작은 배를 뜻한다. 우리말로 한다면 하나는 뗏목이고 또 하나는 고무보트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raft가 뗏목이라는 의미이니 rafting을 우리말로 한다면 ‘뗏목타기’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뗏목타기라고 하면 수상 스포츠인 래프팅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으므로 영어를 그대로 쓰게 됐다. 그런데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스포츠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 뗏목을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벌채한 목재를 강 상류 지역에서 하류 지역으로 운송하기 위해 뗏목을 만들어 이 위에 타고 하류로 내려가는 떼꾼(떼몰이꾼)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떼꾼이 몰고 오는 뗏목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집 짓는데 필요한 재목이나 취사를 위한 땔나무를 충분히 공급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뗏목은 배와 달리 물의 흐름을 따라 하류로 내려올 수 있을 뿐이지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만큼 강의 하류 지역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수단이다. 조선시대 뗏목을 이용한 물자 운반은 큰 강에서는 모두 이뤄졌다. 현재 남한의 한강, 낙동강, 금강 등에서는 뗏목을 이용한 물자 운반이 활발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강은 조선의 수도인 서울을 지나가는 한강이다. 한강의 큰 줄기인 북한강과 남한강을 통해 내려온 뗏목은 양수리를 거쳐 뚝섬이나 용산 또는 마포까지 이르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래프팅 장소는 북한강에서는 인제의 내린천이고 남한강에서는 영월의 동강이다. 두 곳 모두 조선시대에 뗏목을 내려보내던 곳이다.

이제는 민속으로 남은 뗏목 이야기


▎뗏목으로 나무를 실어 나르는 북·중 국경의 북한 주민.
오랜 기간 서울에 목재를 공급하던 한강의 뗏목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그 역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뗏목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보면 북한강의 뗏목은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사라지고 남한강의 뗏목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초까지도 신문에서 뗏목 관련 기사와 사진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경향신문](1960. 5. 28.)에서는 ‘추억을 두고 오는 뗏목’이라는 제목 아래 “마포 앞강의 뗏목”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함부로 벌채하는 것을 보도한 [동아일보](1960. 9. 24.)의 기사에서도 뗏목을 볼 수 있는데, 북한강 유역에서 목재를 그대로 뗏목으로 엮어 하류로 내려보내는 사진과 함께 문제점을 보도한 사례가 있다.

1960년대 초까지 등장하던 뗏목 관련 기사가 그 이후에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면 이 시기에 경제적 가치가 없어지면서 뗏목이 사라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산림 자원이 황폐화되어 벨 만한 나무가 없었을 수 있고 콘크리트와 벽돌이 중요한 건축 자재가 되면서 나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 않게 됐을 수도 있다. 이렇게 현실적인 수요가 없어지면서 뗏목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전통 문화의 하나가 된다.

[중앙일보](1997. 8. 1.)는 ‘뗏목축제와 함께 영월의 시원한 계곡에서 무더위를 식히세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한여름 영월 동강 뗏목축제가 1일부터 3일까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동강 변에서 열린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는 “영월의 동강 변은 과거 인근 정선과 영월 지역 목재상들이 남한강을 따라 서울 마포나루와 광나루까지 뗏목으로 목재를 실어 나를 때 쉬어 가던 쉼터. 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하던 뗏목은 교통 수단이 발달하자 70년대 들어 자취를 감췄다. 이번 축제에는 뗏목을 만들었던 경험이 있는 이 지역 60~70대 노인들이 참여해 1일 오전 10시 길이 15m 폭 3m의 뗏목 5개를 엮는 뗏목 만들기를 재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뗏목을 민속놀이로 재현하거나 ‘뗏목’이라는 명칭을 붙인 축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함경도 개마고원에서 베어낸 나무를 뗏목으로 만들어 두만강에 띄워 운반할 때 떼꾼들이 부르던 노래가 ‘두만강뗏목놀이소리’라는 이름으로 2007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리고 남한강과 북한강에서 뗏목을 만들어 서울로 내려보내던 인제, 정선, 영월 등지에서는 영월 동강의 ‘뗏목축제’, 정선의 ‘아우라지 뗏목축제’ 그리고 인제의 ‘인제뗏목놀이’ 등을 만들어 지역 홍보 자료로 쓰고 있다.

이제는 역사의 한 장으로만 남아 잊혀가고 있는 뗏목이지만 조선시대 뗏목에 부과하는 세금은 상당히 중요한 국가의 수입원이었다. 그리고 뗏목과 관련된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나무를 베는 벌목꾼, 벌채한 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이를 타고 서울까지 운반하는 떼꾼, 그리고 뚝섬이나 마포 등지의 강변에서 서울의 사대문 안까지 마차로 다시 재목을 옮기는 차부(車夫), 이 재목으로 집을 짓는 목수, 그 밖에 강변에서 떼꾼들에게 갖가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관이나 술집에서 일하는 사람 등이 모두 뗏목과 관련된 일로 돈을 벌었다.

근래 한강의 뗏목에 관한 학술논문이 몇 편 나온 것이 있다. 이들 논문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사이 뗏목을 탔던 떼꾼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들이 남긴 기록은 오래전부터 이어진 뗏목 역사의 마지막 부분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귀중한 자료지만 조선시대의 뗏목과 완전히 같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벌채한 나무는 뚝섬이나 마포로 운반


▎숭례문 (남대문)은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보물 1호’로 지정한 이래 문화재 지정 번호를 없애도록 개정한 문화재보호법이 지난해 11월 19일 시행됨에 따라 ‘국보 서울 숭례문’으로 표기하고 있다. 2008년 2월 10일 방화로 불에 탄 숭례문의 복원에 사용한 나무가 금강송이다. 사진은 1904년 숭례문과 숭례문 성곽. / 사진:문화재청
조선시대 뗏목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있는 자료의 하나로 ‘황제풀이’라는 서울의 무당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성주풀이’라고도 하는데, ‘성주’는 집을 지켜주는 신령을 뜻한다. 새로 집을 짓거나 이사한 뒤 새로 성주를 받아들이는 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가 황제풀이인데, 이 노래에는 깊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 뗏목으로 운반해 집을 짓는 과정이 들어 있다. 황제풀이에 나오는 순서대로 나무를 베어 운반하는 과정을 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관청에 가 나무를 베겠다는 허가를 받고 이 벌목 허가장을 나무를 벨 지방 관아에 제출하는 것이다. 나무를 베는 일꾼들은 이어 목욕재계하고 고사를 지낸 다음 나무를 베어 산 아래로 내려보내 강변에서 뗏목을 만든다. 뗏목에는 깃발을 꽂았는데, 사방에 각기 그 방향에 맞는 색깔의 깃발을 꽂고 한가운데에는 성주신을 상징하는 황색 깃발을 위치시켰다.

떼꾼은 낮에 뗏목을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오다가 밤이 되면 뗏목을 육지에 대고 잠을 자면서 여러 날 걸려 서울에 도착한다. 뗏목이 서울의 관문인 뚝섬에 도착하면 뗏목 가격의 10%를 세금으로 냈다. 그리고 용산이나 마포에 도착해 뗏목을 푼 다음 마차로 서울 시내까지 운반했다. 황제풀이는 매우 긴 노래로, 재목을 운반해 새로 지을 집에 도착한 이후에는 집을 짓는 과정과 집의 여러 장소에 대한 축원이 자세하게 나온다.

뗏목 연구자들이 논문에서 기술한 내용과 황제풀이의 내용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면 조선 후기와 1940년대의 뗏목 운행 방식은 대체로 비슷했던 것 같다. 다만 20세기의 뗏목이 주로 재목을 운반했다면 조선시대에는 재목뿐만 아니라 땔나무와 숯을 굽기 위한 나무도 있었다는 점이 다르다.

나무의 용도는 여러 가지인데, 조선시대 나무의 용도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목재를 그대로 쓰는 것이다. 건물이나 선박 그리고 가구나 관(棺) 같은 것을 만드는 데 필요한 나무를 가리킨다. 둘째는 시탄(柴炭)이다. 난방이나 취사를 위해 불을 때는 데 필요한 나무와 숯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서의 나무다. 셋째는 종이를 만드는 데 쓰는 나무다.

종이는 각 지방에서 만들어 서울로 가져오는 것이므로 뗏목과 관련이 없지만 목재와 땔나무는 서울까지 뗏목으로 운반해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숯은 주로 서울 근교에서 생산해 서울로 들여왔는데, 숯을 굽는 곳까지 뗏목으로 나무를 운반하기도 했다.

뗏목으로 운반하는 나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재고 그다음이 땔나무였다. 조선 후기 서울에는 여러 곳에 집 짓는 재목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재목을 장목(長木)이라고 했는데, 이 장목을 파는 점포가 성 안에 있으면 내장목전(內長木廛)으로 불렀다. 성 밖에 있는 것은 외장목전(外長木廛)으로 칭했다. 그리고 땔나무를 파는 점포는 시목전(柴木廛)으로 불렀는데, 용산과 두모포에 있었다. 용산은 현재도 이 이름을 그대로 쓴다. 현재 쓰지 않는 두모포는 성동구 옥수동 지역이다. 두 군데 모두 한강 변에 위치한 만큼 뗏목으로 운반해 온 땔나무를 파는 곳으로 적격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집을 짓는 데 쓴 나무로는 소나무가 많았다. 소나무는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성질을 지녔다. 조선 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쓴 나무가 대부분 소나무인 것을 보면 당시 궁궐 건축에는 반드시 소나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한강의 상류에서 뗏목으로 운반해 온 목재는 대부분 소나무였다.

생계 수단이자 국가의 수입원이기도


▎황장목은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던 질 좋은 소나무를 뜻한다. 조선시대 정부에서 황장목을 베지 못하게 지정한 산의 나무를 베다가 적발되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사진은 강원 원주 치악산의 황장목. / 사진:손민호 기자
소나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황장목(黃腸木)’은 귀에 익지 않은 단어다. 반면 ‘금강송(金剛松)’은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황장목과 금강송은 좋은 소나무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현재는 황장목보다 금강송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숭례문(남대문)이 방화로 불에 탄 이후 복원에 사용한 나무가 금강송이라고 해 화제가 된 일이 있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황장목을 찾아보면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던 질이 좋은 소나무’라고 돼 있다. 그런데 금강송은 표제어로 올라오지 않았다. 황장목은 목재의 중심부가 누런색인 단단한 소나무를 가리키는 말로 조선시대에 쓰던 단어인 반면, 금강송은 일본의 식물학자가 강원도 지역의 소나무에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근래 이 소나무라는 이름을 두고 두 지역에서 각기 자신들의 주장을 펴고 있다. 경북 울진군 서면은 2015년 면의 명칭을 ‘금강송면’으로 바꾸면서 울진과 금강송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시의 치악산에는 ‘황장목 숲길’을 조성하면서 금강송이라는 말보다는 황장목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황장목이나 금강송으로 불리는 소나무의 산지가 강원도 산간지역만은 아니었다. 충남의 안면도, 전북 부안군의 변산, 전남 완도군 등도 모두 황장목의 산지라는 조선시대의 기록이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난 소나무 가운데 그 나이가 150년이 넘는 나무는 모두 황장목이나 금강송으로 불러도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허가 없이 ‘황장목’ 벴다간 사형까지


▎조선 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쓴 나무가 대부분 소나무인 것을 보면 당시 궁궐의 건축에는 반드시 소나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5월 15일 오후 서울 청와대 상공에서 바라본 경복궁. / 사진:연합뉴스
황장목은 대궐의 건물을 짓거나 선박을 건조할 때 쓰는 목재일 뿐 아니라 왕이나 왕비를 비롯한 왕실사람들의 관(棺)을 만들 때 쓰는 목재였으므로 국가에서 필요한 물량을 충분히 확보해두지 않으면 안 됐다. 소나무가 150년 이상은 자라야 황장목이 되므로 필요할 때 곧바로 쓰기 위해서는 국가가 계획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특히 조선시대 황장목은 엄격하게 나라의 보호를 받았다. 정부에서 황장목을 베지 못하게 지정한 산을 황장산 또는 황장봉산(黃腸封山)으로 불렀는데, 이런 산의 나무를 베다가 적발되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좋은 재목은 민간에서도 수요가 많았던 만큼 불법적으로 황장목을 베는 일이 많았다. 국가가 엄격히 관리했다고 하지만 감독하는 관리가 목재상과 짜고 부정을 저지르면 현실적으로 이를 막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뗏목은 이제 민속놀이에서 과거를 재현하는 행사에서나 볼 수 있다. 다만 지난날 뗏목을 엮어 하류로 내려보내던 곳이 현재는 래프팅 명소가 됐다. 뗏목이 지나가던 한강에는 여러 군데 거대한 댐이 건설돼 물길이 이어지지 못하지만 고속도로와 국도 그리고 지방도가 함께 어우러진 찻길만큼은 이어지고 있다. 강원도의 국도를 지나다 보면 소나무를 싣고 달리는 트럭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방향은 예외 없이 서울을 향한다. 소나무를 단순 목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정원의 조경을 위해 반출하는 것이다. 강원도의 소나무는 과거처럼 강물을 따라 뗏목으로 엮여 흘러가는 대신 아스팔트 국도를 따라 트럭에 실려 가고 있지만 그 방향은 여전히 서울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07호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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