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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4)] 대인배 기질의 조선시대 톱스타, 황진이 

상여 나갈 때 곡하지 말고 풍악 울리라는 유언 남겨 

연정은 한바탕 소낙비… 남자에 연연 않고 세속에 초연했던 기생
산천 유람하다 고을 잔치에 끼어 이 잡으며 노래 불렀던 자유인


▎조선 중종 무렵의 송도 기생 황진이는 매력적인 노래와 호방한 성품으로 지배층 남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설적인 가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영화 [황진이] (2007)의 한 장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여, /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일이다. 송도 기생 황진이의 노래가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동짓달 긴 밤의 한 자락을 베어 봄바람 이불 아래 넣어뒀다가 사랑하는 임이 오면 이부자리처럼 펴겠다니, 장안의 한량들이 후끈 달아올랐다. ‘서리서리’ 넣었다가 ‘구뷔구뷔’ 펴겠다는 황진이의 밤은 상상만으로도 두근거리는 판타지였다. 소문난 기생을 한 번이라도 보고자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앞다퉈 만남의 자리를 청했다.

조선시대 기생의 시조는 음률이 따라붙는 노래였다. 황진이는 직접 노래를 지어 거문고를 타며 부르는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녀의 시조 6수와 한시 여러 수가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 등에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16세기 기생의 노래가 18~19세기 가집(歌集, 노래책)에 적지 않게 실렸다. 지금도 가사를 읊어보면 천부적인 기지와 매력이 물씬 풍긴다. 불멸의 가인(歌人)이자 명곡들이다

“뜻이 크고 높으며 호협한 기개”


▎조선 후기 도화서 화원 신윤복의 [미인도]. 옷고름을 푸는 기생의 모습이 에로틱하다. 옆에 “여인의 봄볕 같은 정을 붓끝으로 옮겼다”라는 글을 달았다. / 사진:간송미술관
황진이는 비록 천대받는 기생 신분이었지만 조선의 지배층 남성들에게 ‘레전드’ 대우를 받았다. 양반들은 신분을 뛰어넘는 재능과 함께 그녀의 성품을 높이 평가했다. 선조 시기부터 광해군 때까지의 문신 유몽인은 [어우야담]에 황진이의 일화들을 수록했는데 “뜻이 크고 높았으며 호협(豪俠)한 기개(氣槪)가 있었다”라고 추켜세웠다.

흔히 기생하면 미모와 교태를 연상하기 쉽지만 송도(松都, 개성) 출신의 이 전설적인 명기(名妓)는 달랐다. 뜻이 크고 높다는 것은 차라리 이상적인 선비상에 가깝다.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으며 기상과 절개를 지녔다니 요샛말로 ‘대인배’라 칭할 만하다. 기생의 이미지를 전복시키는 파격적인 인간미다. 시대의 이단아로서 평단을 주름잡았던 허균도 자기 못지않은 그 파격에 자연스럽게 끌렸으리라.

“진랑(眞娘, 황진이)은 개성 장님의 딸이다. 성품이 얽매이지 않아서 사내 같았다. 거문고를 잘 탔으며 노래를 잘했다. 일찍이 산천을 유람하며 금강산에서 태백산과 지리산을 지나 금성(錦城, 나주)에 이른 적이 있었다. 때마침 고을 수령이 절도사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 기생이 가득하고 풍악이 넘쳐흘렀다. 진랑은 해진 옷에다 때 묻은 얼굴로 그 좌석에 끼어 앉았다. 이를 잡으면서 태연히 노래하고 거문고를 타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기색이 없으니 좌중의 기생들이 기가 죽었다.” (허균,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

스스럼없다. 금수강산을 유람하다가 거지 같은 몰골로 지방 수령들의 잔치에 끼어든다. 아랑곳없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를 잡으면서 노래와 거문고 솜씨를 뽐낸다. 잔치에 모인 기생들을 기죽이는 톱스타의 카리스마다. 천생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기생으로서 그녀의 삶과 노래를 지탱해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 기생은 행사나 연회에서 노래·춤·연주로 흥을 돋우고 지배층 남성들에게 풍류(風流)를 제공했다. 팔천(八賤)의 하나로 노비·백정·광대·무당 등과 함께 최하층 천민이었다. 기생은 그만둘 수도 있었다. 재물을 내놓고 대신할 수양딸을 바치면 기적(妓籍, 기생 명부)에서 이름을 빼줬다. 그래서 ‘기생딸’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서 팔려 온 여자아이들이었다. 황진이도 먹고 살기 힘든 소경의 딸이었으니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은 유교 국가답게 기생을 엄격히 통제하고 관리했다. 도성에서는 장악원이, 지방에선 교방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장악원은 궁중에서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었고, 교방 또한 지방 관아에서 같은 업무를 맡아본 곳이었다. 여기서 기생은 어려서부터 예인(藝人)의 재주와 소양을 갈고닦았다.

수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노래·춤·연주였다. 행사나 연회의 흥을 돋우는 데 필수적인 재주였다. 기방에서 즐겨 부르는 ‘춘면곡’과 ‘선유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배따라기 북춤과 홍문연 검무, 가야금이나 거문고로 연주하는 ‘영산회상’ 등을 배우고 익혔다. 황진이처럼 재능이 있다면 시조를 지어보거나 한시의 운도 맞췄다. 양반님네와 교류하는 데 시담(詩談)만큼 좋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몸단장 또한 중요했다. 기생은 직업 특성상 사대부가 규수들처럼 비단옷을 입고 노리개를 찰 수 있었다. 대신 ‘분대화장(粉黛化粧)’이라고 해서 볼에 분을 잔뜩 바르고 눈썹은 청흑색 먹으로 진하게 그렸다. 웃지 않아도 웃는 것처럼 보이는 화장법이었다. 기생의 얼굴은 언제나 화사한 봄날이어야 하니까.

‘분대화장’에 감춘 기생의 속마음


▎신윤복의 [쌍검대무]에는 기생들의 검무 공연이 담겨 있다. 조선 기생은 양반에게 여흥과 풍류를 제공했다. 그들은 춤과 노래, 연주에 능한 예인이었다. / 사진:간송미술관
기생의 기생다움은 무엇보다 속마음을 감추는 데 있었다. 점잖은 선비도 술 먹으면 개가 되기 일쑤였다. 술에 취해서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무뢰배도 있었다. 그래도 참는 게 철칙이었다. 선조 때의 부안 명기 이매창은 오언절구 한시를 지어 기생의 고충을 토로했다. 제목이 ‘증취객(贈醉客)’, 취한 손님에게 주는 시였다.

“취한 손님 비단 적삼 붙잡으니(醉客執羅衫) / 비단 적삼 손길 따라 찢어지네(羅衫隨手裂). / 그까짓 비단 적삼 아까울 것도 없지만(不惜一羅衫) / 은정마저 끊어질까 그것이 두렵다네(但恐恩情絶).”

취객이 옷을 찢으며 행패를 부려도 은정을 내세워 속내를 감추는 게 기생의 숙명이었다. 손님이 집적거린다고 눈이라도 치켜뜨면 본분을 망각한 것으로 간주됐다. 어린 기생들은 회초리를 맞아가며 눈을 다소곳이 내리까는 법을 습득했다. 분대화장 거짓 웃음 속에 슬픔과 고통, 분노와 설움을 모두 묻도록 한 것이다.

수업을 다 받은 기생은 15살에 성인식 치르고 정식으로 데뷔했다. 18살 전후에는 기생으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꽃 같은 시간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20살이 되면 끝물이었고, 20대 중반이면 은퇴했다. 퇴기(退妓)는 유력자의 첩이 되어 팔자 고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배층 남성들은 정만 통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다냐. /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의 이 노래는 ‘임’에 대한 조선 기생의 고민을 섬세하고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시대 양반과 기생은 풍류를 즐기다가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들의 만남은 대개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 호감을 느끼고 열망에 사로잡힌다 해도 그저 한여름 소낙비 같은 연정일 뿐이었다. 사랑도 한바탕 퍼붓고 지나가곤 했다. 기생의 연정이 덧없음을 황진이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써 이별을 고한다고 끝이 아니다. 노래가 한숨처럼 새어 나온다. 아, 이렇게 그리워할 줄 몰랐단 말인가? 붙잡았다면 임이 ‘구태여’ 떠나지 않았겠지만, 자기가 ‘구태여’ 보내놓고는 밀려오는 회한에 잠긴다.

오묘한 심리적 갈등을 겪으며 황진이는 가인의 감수성을 길러나갔다. 그녀의 노래에는 매력적인 이별의 정서가 흐른다. “인걸은 물과 같아 흘러가면 아니 온다”라고 담담하게 노래한다. 쓸쓸하면서도 도도한 감정선이다. 잘나가는 양반과 한량들이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난다긴다하는 명사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기생으로서 전성기가 열린 것이다.

황진이 노래에 흐르는 이별의 정서


▎1920년대 평양 기생학교 수업 사진. 전통 가무와 서화 등을 전문적으로 엄격하게 교육했다. 일제 강점기 기생은 전통문화를 짊어지고 계승한 존재였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문신 임방의 [수촌만록]에는 황진이와 소세양의 이별 이야기가 나온다. 소세양은 중종 때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한 명신이다. 명나라 사신을 맞아 시문으로 응답해 중국에까지 문명을 떨쳤다. [수촌만록]에서 소세양은 송도 명기와 한 달만 동거하고 미련 없이 떠나려고 했다. 황진이는 기꺼이 이별을 받아들이며 한시를 한 수 지어줬다.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이다.

“달빛 아래 오동잎 모두 지고(月下梧桐盡) /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네(霜中野菊黃). / 누각은 높아 하늘 한 켠에 닿고(樓高天一尺) / 사람은 취해 천 잔 술을 마시네(人醉酒千觴). / ‘유수곡’ 거문고 연주는 쓸쓸한데(流水和琴冷) / ‘매화곡’ 피리 연주는 향기롭다네(梅花入笛香). / 내일 아침 서로 이별한 뒤에도(明朝相別後) /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이 흐르리(情與碧波長).”

소세양은 탄복했다. 시 한 수로 쓸쓸하면서도 향기로운 송별연을 연출했다. 마치 두 사람이 높은 누각에 앉아 이별주를 주고받으며 거문고와 피리를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석별은 슬프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웠다. 소세양은 내일 떠나겠다는 뜻을 접고 며칠 더 머무르기로 했다.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시에 대한 경배였다.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황진이의 시재(詩才)를 예우하고 존중한 것이다.

명창 이사종과의 일화는 [어우야담]에 실려 있다. 그는 왕명을 전하러 다니는 선전관이었는데 가곡을 잘 불러 인기를 얻었다. 어느 날 이사종은 임무 수행차 송도에 들렀다가 천수원 시냇가에 안장을 풀고 쉬었다. 관모를 배 위에 얹고 벌렁 드러누우니 문득 목청을 뽑고 싶어졌다. 굵고 시원한 노랫소리가 산천에 울려 퍼졌다. 때마침 길을 지나던 기생이 절창에 반해 ‘앵콜’을 청했다. 황진이였다.

송도 명기는 이 노래 잘하는 남자에게 끌렸다. 이사종을 집으로 데려와 며칠 묵게 하고 정성껏 대접했다. 시심과 음률이 어우러져 사랑이 무르익었다. 황진이는 이사종의 첩이 되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기생을 은퇴할 나이였으리라. 고백도 호방하고 거침없었다. “그대와 함께 6년을 살아야겠습니다.” 6년 기한을 정해 계약동거를 하자는 것이었다. 톱스타의 파격적인 제안을 이사종은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 계약 조건은 두 사람이 대등한 관계를 맺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이었다. 처음 3년은 황진이가 재물을 갖고 이사종의 집으로 들어갔다. 부모와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첩으로서 집안일을 도맡았다. 다음 3년은 이사종이 황진이 일가를 먹여 살리며 지난 노고를 갚았다. 이윽고 6년 기한이 다 되자 황진이는 깔끔하게 작별을 고했다. 남자에게 매달리지 않은 것이다. 인생이 결국 홀로서기임을 퇴기는 잘 알고 있었다.

나이 든 황진이는 자연 속을 노닐면서 유유자적했다. 둥근 풀모자에 칡베 적삼과 무명 치마를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으며 금강산, 태백산, 지리산 등지를 유람했다. 도중에 잔치가 열리는 곳이 있으면 해진 옷과 때 묻은 얼굴로 끼어 태연히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불렀다. 방외지유(方外之遊), 세속의 규범과 관습을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구도(求道)의 길이기도 했다.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스승을 열망했다.

“지족선사가 30년이나 면벽 수양을 했으나 내가 그의 지조를 꺾었다. 반면 화담 선생은 여러 해를 가깝게 지냈지만 끝내 관계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허균, [성소부부고] ‘성옹지소록’)

참된 스승 찾아 ‘도장 깨기’ 나서


▎늙은 기생의 무료한 일상이 잘 표현된 신윤복의 [연당의 여인]. 곰방대를 피워 물다가 생황도 불어보다가 여인의 쓸쓸한 눈에 연꽃이 가득 차오른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황진이는 참된 스승을 찾아 ‘도장 깨기’에 나섰다. 스승의 자격이 있는지 여색으로 시험한 것이다. 승려인 지족선사는 30년 면벽 수양의 공력에도 불구하고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이름난 기생이 다가와 주위를 맴돌자 그만 색계(色戒)를 범했다. 그럼 화담 서경덕은 어떨까? 그는 송악산 자락의 화담 못가에 초당을 짓고 독자적으로 성리학의 도를 탐구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이 도학자도 유혹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송도 명기가 가르침을 청하자 화담은 선선히 받아줬다. 서경덕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산중처사였지만 학문과 도력이 출중해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다. 허균의 아버지인 동인의 영수 허엽, 후일 [토정비결]로 유명세를 탄 이지함,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 남언경 등이 모두 화담의 문하였다. 그는 제자를 받을 때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다. 천한 기생과 사제의 연을 맺더라도 그이라면 이상할 게 없다.

황진이는 밤마다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서 서경덕의 초당에 나타났다. 지족선사에게 그랬듯이 유혹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작정하면 무너뜨리지 못할 남자가 없지 않았는가. 하지만 화담 선생은 여색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 함께 거문고와 술을 즐기고 시담을 나눌지언정 남녀의 선은 일절 넘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이 지내면서 그녀가 스승의 진면목에 빠져들었다. 서경덕은 우주만물의 이치를 헤아리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즐거움에 취해 살았다. 양식이 떨어져 솥에 이끼가 끼어도 얼굴에 굶주린 빛이 나타나지 않았다. 빼어난 산수를 만나면 눈을 샛별처럼 반짝이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자연 속에서 만족하고 기뻐하니 세속의 정욕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황진이는 화담 선생을 진정한 스승으로 받들고 추앙했다. 서경덕도 여성을 얽매는 조선에서 꿋꿋하게 홀로 서려는 여제자를 어여삐 여겼다. 하루는 황진이가 화담에게 말했다. “송도에 삼절(三絶)이 있습니다.” 화담이 궁금해서 물었다. “무엇이 삼절인고?” 이에 황진이가 답했다. “박연폭포와 선생과 저입니다.” 서경덕은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 녹수도 청산을 못 니져 우러 예어 가는고.”

이 노래에는 만년의 황진이가 갈고닦은 내공이 담겨 있다. 청산은 변함없이 뜻을 지키는 자신이요, 녹수는 감정이 변해 떠난 임이다. 성리학에서 뜻은 내면의 본성인 절의이고, 감정은 세상에 휩쓸린 정욕이다. 그녀는 정욕을 경계하고 절의를 추구하는 성리학 이념을 노래의 바탕에 깔았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서 “뜻이 높고 크다”라고 황진이를 추켜세운 까닭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감정이 변해 떠난 임, 녹수를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녹수가 청산을 못 잊어 울면서 흘러간다는 것이다. 정욕에 흔들리는 인간군상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고 따뜻하게 연민하는 뉘앙스다. 그것을 엄숙하게 배척하는 유생들과 온도가 다르다. 방외지유에 나선 황진이의 도량이 엿보인다. 자연의 너른 품으로 울어예는 인간을 다독인다. 그렇게 자연과 인간은 하나가 돼간다.

황진이는 나이 삼사십 줄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죽기 전에 출상(出喪)할 때 곡하지 말고 풍악으로 인도하라는 당부를 남겼다고 한다.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는 인생을 살았으니 세상을 떠나는 길 또한 가인답기를 바란 것일까? 중국 고대 사상가 장자(莊子)의 일화를 살펴보면 그녀의 최후를 다르게 읽을 수도 있겠다.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님의 정이”

장자의 아내가 죽자 친구 혜시가 조문을 갔다. 장자는 주저앉아서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생뚱맞은 광경에 혜시가 의아해 물었다. “아내가 죽었는데 슬프지 않은가?” 장자는 태연히 대답했다. “죽음은 사계절의 변화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네. 만약 슬퍼한다면 하늘의 명을 어기는 것일세.”

구도자에게 죽음은 슬퍼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연의 이치에 따르면 죽음은 방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오히려 노래를 불러 축하할 일이다. 풍악을 울리며 떠난 뒤에도 가인 황진이는 오래도록 사랑받았다.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던 허허로운 삶은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도 깊은 감흥을 줬다. 선조 때의 문장가 임제는 황해도사 부임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이렇게 노래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 홍안은 어듸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07호 (2022.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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