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13)] 조나단 라슨의 유작, '렌트'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여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오페라 [라보엠]에서 모티브, 12년간 5000여회 공연 기록
고된 삶 속에서 현실을 극복하려는 소수자들의 유쾌함 그려


▎1996년 1월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른 조나단 라슨의 뮤지컬 [렌트]는 사회적·성적 소수자들의 삶을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소화했다. / 사진:서울예술대학교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살아생전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죽은 뒤였다. 살아 있는 동안 팔린 작품은 단 한 점에 불과했다. 평생을 고통 속에 살며 예술혼을 불태운 그는 그래서 불운하지만 위대한 예술가의 대명사로 자주 인용된다. 뮤지컬 [렌트(RENT)]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을 보면 언뜻 반 고흐가 연상된다.

1996년 1월 24일, 라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론과, 그것도 뉴욕타임스와 인터뷰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모티브로 한 록 뮤지컬 [렌트]의 오프 브로드웨이 프리뷰 전날이었다. 1994년 뉴욕씨어터에서 워크숍 형식으로 첫선을 보인 [렌트]는 투자자를 찾지 못해 표류하다 천신만고 끝에 오프 브로드웨이 데뷔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아마도 이날은 라슨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지 모른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내고 결과를 지켜보는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하게 라슨은 [렌트]의 개막을 보지 못하고 다음 날 아침 차가운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인(死因)은 대동맥 질환이었다. 그의 나이 불과 서른여섯이었다.

한 젊은 예술가의 안타까운 죽음은 그가 남긴 유작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불러일으켰다. [렌트]를 향한 뜨거운 찬사와 호평이 잇달았고, 팬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며 작품에 빠져들었다. 150석 규모의 소극장은 날마다 관객으로 미어터졌고, 밀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엔 너무 작았다. 결국 석 달 후인 4월 29일 브로드웨이의 네덜란더씨어터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렌트]는 이곳에서 2008년까지 12년간, 무려 5123회나 공연되며 브로드웨이에서 9번째로 장기 공연한 작품으로 기록됐다.

“세상의 모든 경계가 다 찢겨 나가고 있는 이 위험천만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죽음의 얼굴을 직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20세기 말 삶의 공포에 질린 우린 이렇게 숨어 있지 말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며,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라슨이 죽기 전 컴퓨터에 메모한 내용이다. 감정의 과잉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힘들고 치열했던 그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울러 그가 원했던 예술의 지향점이 잘 드러나 있다. 사랑과 우정으로 고난의 시대를 헤쳐 나가자는 그의 철학은 그의 유작인 [렌트]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조나단 라슨, 가난과 열정의 삶


▎뮤지컬 [렌트]를 작곡한 조나단 라슨은 천신만고 끝에 작품이 첫 무대에 오르는 날 숨을 거뒀다. 라슨의 비운의 스토리가 더해져 흥행에 성공한 [렌트]는 브로드웨이에서 9번째 장기 공연한 작품으로 기록됐다. / 사진:미국의회도서관
어려서부터 음악과 연기에 관심이 많았던 라슨은 대학 입학 후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졸업 후 뮤지컬 창작에 전념하기로 결심한 그는 뉴욕으로 건너가 난방도 안 되는 허름한 건물의 5층 꼭대기 방을 구했다. 젊은 창작자의 의욕은 하늘을 찔렀으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녔고, 돈이 없어 끼니를 거를때도 많았다. 거리에서 주워 온 물건을 쓰는 건 예사였다. 주말에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기를 무려 10년이었다. 또 달랑 하나 있는 욕조가 부엌에 있어 룸메이트가 샤워하면 음식에 물이 튀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비롯해 라슨의 수많은 실제 경험들이 [렌트]에 생생하게 삽입되었다.

생활고 속에서도 뮤지컬에 대한 라슨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집으로 배우들을 불러 오디션을 했고, 친구들을 초대해 노래를 들려주며 의견을 묻기도 했다. 아울러 자신의 작품을 들고 수많은 제작자와 컴퍼니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끊임없는 문전박대였다. 세상은 아직 젊은 예술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실의에 빠질 법도 했지만, 라슨은 달랐다. 주위 사람들에게 “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미래”라고 떠벌리고 다녔고, 이 말은 나중에 현실이 되었다. 그의 유작 [렌트]는 미국 뮤지컬의 미래를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브로드웨이의 거장 작곡가 스티븐 손드하임을 존경해 그가 만든 뮤지컬의 모든 노래를 외우고 다녔다고 한다. 대형화, 산업화하는 뮤지컬 추세에 반발해 콘셉트 뮤지컬을 통해 뮤지컬의 예술화를 고집한 손드하임을 인생의 멘토로 삼았다는 사실은 그의 고독한 예술적 투쟁과 일맥상통한다.

라슨은 1983년부터 1990년까지 7년에 걸쳐 영국작가 조지 오웰의 고전 [1984]를 각색한 [수퍼비아]라는 작품을 썼다. 하지만 오웰의 유족으로부터 저작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방향을 틀어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한 변형된 버전으로 바꿔 완성했다. 작은 상도 받고, 워크숍까지 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국내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되고 2021년 미국에서 영화로도 제작된 [틱 틱 붐(Tick Tick Boom)!]은 서른 살이 된 자신의 불안하고 막막한 생활을 담은 작품이다. 오프오프브로드웨이(off-off-broad way)에서 자신이 직접 출연해 짧게 선보였지만, 정식 공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틱 틱 붐!]은 그가 세상을 뜨고 난 후인 2001년 그의 동료였던 데이비드 어번이 1인 극 구성을 3인 극으로 바꿔 무대에 올렸다. 비록 살아서 개막을 보지 못했지만, [틱 틱 붐!]은 록뮤지컬이란 형식,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렌트]의 예고편으로 평가받는다.

록에 담은 젊은이들의 아픔과 사랑


▎조나단 라슨은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에서 영감을 얻어 뮤지컬 [렌트]를 통해 보헤미안의 삶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라슨의 필생의 역작 [렌트]는 원래 1988년 극작가 빌리 애런슨의 구상에서 시작됐다. 애런슨은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을 뉴욕의 빈민가로 옮겨 새롭게 뮤지컬로 만들려고 했다. 1989년, 당시 29세이던 라슨은 주위의 추천으로 애런슨을 소개받아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산타페’, ‘스플래터’(나중에 타이틀곡 ‘렌트’로 제목이 바뀐다), ‘네게 말해야 했어(I should tell you)’ 등 몇 곡을 만들었고 [렌트]라는 작품 타이틀까지 생각해냈다. 그러나 무대화에 큰 진전이 없자 조금씩 의견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급기야 라슨은 애런슨에게 자신이 대본을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애런슨은 나중에 수입이 발생하면 나누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드디어 [렌트]가 온전히 라슨의 것이 되었다.

[렌트]의 인기는 라슨의 비극적인 죽음과 맞물려 증폭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전 세계에서 롱런할 수는 없다. 작품 자체가 가진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것은 바로 강렬한 록에 담은 동시대 젊은이들의 생생한 이야기였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도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한 뮤지컬 빅4와 대다수 뮤지컬은 판타지를 지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디즈니는 가족뮤지컬이란 새로운 장르를 통해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이런 호화 블록버스터들에 비하면 오프브로드웨이에서 탄생한 [렌트]는 초라할 정도의 규모다. 무대 전환도 없는 단순한 세트에 특수효과는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음악도 1970년대를 끝으로 뮤지컬계에서 사라진 록을 선택했다. “MTV 세대에게 록 오페라를 보여주는 것이 목표”라는 라슨의 고집 덕분이었다. 그러나 [렌트]에는 블록버스터에서는 볼 수 없는 참신한 무기가 있었다. 젊은 관객들이 공감할 만한 현실적인 인물들, 바로 동성애자와 마약중독자, 홈리스들이 등장했고, 이들의 아픔과 열정, 사랑을 뜨거운 가슴에 담아 펼쳐 보였다.

1990년 크리스마스 무렵, 뉴욕 빈민가 이스트 빌리지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난방도 안 되는 방에서 기타 줄을 튕기며 곡을 쓰고 있는 로저는 가난한 작곡가이고, 그의 룸메이트 마크는 독립영화 감독이다. 마크는 최근 여자친구인 행위예술가 모린에게 차였다. 레즈비언의 정체성을 깨달은 모린에게 ‘여자친구’ 조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래층에 사는 미미는 관능적인 스트립 댄서로 약물 중독에 에이즈 환자다. 오페라 [라보엠]에서 로저는 시인 로돌포, 미미(이름은 같다)는 결핵을 앓는 재봉사였고, 마크는 화가 마르첼로였지만 현실에 맞춰 이름과 직업이 조정됐다.

로저와 마크의 친구인 엔젤은 트랜스젠더 퍼커셔니스트이고, 그의 남자 ‘연인’인 흑인 톰 콜린스는 철학 강사다. 엔젤과 콜린스 모두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다. 이렇게 [렌트]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예사롭지 않다.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회적, 성적 소수자들이다. 아울러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처절하게 펼치는 20세기의 보헤미안들이다.

부잣집 딸과 결혼한 옛 친구 베니는 이들을 괴롭힌다. 그는 로저와 마크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헐고 멋진 새 빌딩을 지으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밀린 집세를 내놓으라고 독촉한다. 하지만 로저와 마크에게는 돈이 없다. 강렬한 비트의 타이틀곡 ‘렌트’를 통해 그들은 외친다. “갚지 않을 거야, 작년 것 올해 것 내년 것 모두, 세상 모든 것은 다 빌려 쓰는 거야!” 언뜻 한국영화 [베테랑]의 대사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가 연상된다.

사연 많은 소수자들과 ‘튀는’ 캐릭터들


▎뮤지컬 [렌트]의 등장인물 중 스트립댄서 미미는 관능적인 춤과 노래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2020년 6월 9년 만에 국내 무대에 오른 작품에서 미미 역할을 맡은 아이비가 열연하고 있다. / 사진:신시컴퍼니
[렌트]가 국내 초연됐던 2000년만 해도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약물중독 등의 소재는 국내 관객들에게 낯설고 파격적이었다.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해 생소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렌트]의 주제는 이렇게 진지하다. 뮤지컬에서 이런 무거움은 자칫 단점이 될 수 있다. 관객이 어려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슨은 여러 인물의 각기 다른 사연을 록을 비롯해 발라드, 탱고, 재즈 등으로 편성해 아기자기한 재미를 주었다. 여기에 다양한 퍼포먼스를 집어넣어 무대에 활력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저는 기타를 치며 록을 열창하고, 영화감독 마크는 항상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친구들의 삶을 다큐멘터리에 담는다. 스트립 댄서인 미미는 관능적인 춤으로 로저를 유혹한다. 그녀가 부르는 ‘불 좀 빌려줘요(Light my candle)’와 ‘아웃 투나잇(Out tonight)’은 굉장히 에로틱하다. 소화하기가 절대 쉽지 않은, 연기와 노래, 춤의 결합이 바로 미미 역이다. 산타복을 입은 엔젤이 코믹하고 역동적인 댄스를 추며 부르는 ‘투데이 포 유(Today 4 U)’에서는 웃음이 절로 나오고, 행위예술가 모린의 퍼포먼스 ‘오버 더 문(Over the moon)’은 혼자서 약 5분간 무대를 책임져야 하는 고난도의 쇼다.

[렌트]는 전반적으로 드라마가 다소 산만하다. 인물들 각각의 사연은 흥미롭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사건이 약하다. 베니의 음모에 맞서 모린과 친구들이 준비하는 홈리스들을 위한 자선공연, 로저와 미미의 위태로운 사랑 등이 뼈대를 이루고 있지만, 워낙 ‘튀는’ 캐릭터들이 많아 한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 의욕이 넘쳤던 라슨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이야기를 줄이고 줄이고, 수백 곡 가운데 40여 곡을 추려냈지만 그래도 조금 넘쳐 보이는 느낌이다.

‘오직 오늘뿐! (No day but today!)’

이런 약점에도 많은 사람이 [렌트]에 감동하는 이유는 복잡다단한 이야기 줄기들을 하나의 간결한 캐치프레이즈로 집약한 덕분이다. 바로 ‘오직 오늘뿐!(No day but today!)’이다. ‘다른 날이 아닌 바로 오늘’이라는 메시지는 이 작품에서 가장 히트한 두 곡 ‘사랑의 시간들(Seasons of love)’과 ‘또 다른 날(Another day)’을 통해 반복된다. 이 가운데 출연 배우들이 한 줄로 서서 부르는 ‘사랑의 시간들’은 아름다운 멜로디는 물론 1년을 분 단위로 계산한 재치 있는 노랫말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우리들 눈앞에 놓인 수많은 날/오십이만 오천육백 분의 귀한 시간들/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긍정적인 의미의 노랫말을 담고 있는 ‘사랑의 시간들’은 여러 명이 함께 부르는 곡이다. 그래서 한동안 각종 행사의 오프닝 또는 마무리를 숱하게 장식했다. 후렴부에서 관객과 함께 손뼉 치며 부르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 이 ‘오직 오늘뿐’이란 슬로건을 통해 로저와 마크, 미미, 엔젤과 콜린스 등 여러 인물의 사연은 비로소 일관성을 갖춘다. [렌트]의 인기를 바탕으로 이 ‘오직 오늘뿐’이란 표현은 세계적인 유행어가 되었다.

[렌트]는 현대 뮤지컬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리얼리티의 감동을 되살려 주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열혈 분투에 젊은 관객들은 환호했다. ‘렌트 헤드(Rent Heads)’라는 마니아층이 생겨날 만큼 열기가 뜨거웠다. 가족 단위, 중년층 이상을 겨냥한 뮤지컬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미국에서 [렌트]는 이렇게 사회적 신드롬을 일으키며 1990년대를 대표하는 뮤지컬로 자리매김했다. 대형 블록버스터들 틈바구니에서 일군 성과라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라슨은 평생 마음 편히 투자를 받아 여유롭게 작품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이 무대화되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만큼 불우했다. 하지만 ‘오늘’에 충실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렌트]와 같은 땀 냄새, 사람 냄새가 풍기는 뮤지컬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의 유작 [렌트]와 함께 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207호 (2022.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