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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 '킹덤: 아신전', 소빙기가 부른 나비효과 

17세기 한파로 모피 품귀(品貴)… 조선과 여진족 사이 비극의 시발점 

여진족에 과도한 초피(담비 가죽) 조공 요구하며 불만 커져
조선에 사치 풍조 확산, 여진족은 모피 통해 패권 거머쥐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아신전]은 좀비 사극 [킹덤]의 첫 스핀오프 작품으로 조선과 여진족의 복잡한 관계를 담고 있다. / 사진:넷플릭스
아신: “그냥 강 건너 우리 핏줄(여진족)에게 돌아가요. 힘들게 잡은 모피도 다 뺏기고, 위험한 밀정 노릇까지 해주면서 언제까지 무시당하고 살 건데요.”

타합: “폐사군 저 땅은 우리 조상들이 살던 땅이었다. 조선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어. 우리는 그 은혜를 배신할 수 없다.”

아신: “우리의 조상에겐 그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모든 걸 다시 다 빼앗아갔어요.”

간절하게 애원하는 딸 아신을 바라보던 타합은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아신전]의 한 장면이다. 조선과 여진족의 복잡한 관계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 지날수록 조선-여진족 관계 악화일로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아신전]에서 어린 아신(왼쪽)은 아버지 타합(오른쪽)에게 “힘들게 잡은 모피도 다 뺏기고, 위험한 밀정 노릇까지 해주면서 언제까지 무시당하고 살 건데요”라며 조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 사진:넷플릭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조선의 국방 위협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이었다. 이순신·김시민·신립 등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던 장수들이 전쟁 이전엔 북쪽 변경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명성을 날리던 장수였다는 점은 조선이 북방에 얼마나 국방력을 집중했는지 보여준다. 건국 이래 조선은 앞선 국력과 무기 등을 바탕으로 여진족을 줄곧 압도했지만, 여진족도 게릴라 작전으로 변경을 약탈하며 조선 정부의 골칫거리가 됐다.

조선 초만 해도 양측의 관계는 원만했다. 함경도 영흥의 군벌 출신인 이성계는 여진족과 관계가 각별했고,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데 여진족 군사력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의 의형제이자 건국 공신인 퉁두란(이지란)도 여진족 추장 출신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양측의 관계는 경색됐다. 태종 이후 조선이 줄기차게 압록강·두만강 일대로 국경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마찰이었다. 그 결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살아오던 여진족은 양자택일의 처지가 됐다.

① 조선과 갈등을 감수하며 독립적 세력으로 남는다.

② 조선에 복종해 일정 규모의 땅과 자치권을 얻는다.

①을 선택한 여진족은 변경을 약탈하며 조선에 맞섰다. 지친 세조는 세종 때 개척한 여연(閭延)·우예(虞芮)·무창(茂昌)·자성(慈城) 등 사군(四郡)을 모두 없앴고, 이곳은 폐사군이라 불리게 됐다.

반면 ②를 선택한 여진족은 성저야인(城底野人)이라 불렸다. 조선 정부는 이들에게 땅과 관직을 주고 회유하면서 여진족들의 주요 동향을 주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니 성저야인이 다른 여진족들에게 좋게 보였을 리가 없다. [킹덤: 아신전]에서 성저야인의 지도자 타합이 ‘동족의 배신자’라며 다른 여진 부락에 의해 감금돼 고초를 겪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성저야인들도 조선에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조선 내에서 ‘2등 민족’이라 멸시받는 것이나 동족인 여진족으로부터 위협받는 이유도 있었지만, 조선이 요구하는 모피에 대한 부담이 가장 컸다.

모피, 그중에서도 초피(貂皮)라 불린 담비 가죽은 조선과 중국에서 매우 고급 상품에 속했다. 태종은 하륜·성석린·조영무 등 가장 아끼던 신하들에게 초피를 선물하기도 했고, 중종반정 때는 초피를 뇌물로 주고 공신에 임명된 사람이 있었을 정도였다. 명나라 사신들도 초피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 태종 때 사신으로 온 환관 황엄은 푸른색 비단옷을 내놓으면서 그 안을 초피로 채워달라고 요구했을 정도였다.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은 무엇보다 초피를 원했고, 이에 조선 조정은 평안도와 함경도에 2000장씩 할당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좋은 초피가 나는 지역은 인적이 드문 폐사군 지역이고, 이곳은 여진족들의 사냥터가 돼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함경도에 초피 180장, 서피(다람쥐 가죽) 280장 등을 매년 세금 명목으로 부과하면서, 특별히 이곳에서 활동하는 성저야인들에게는 일정량의 초피를 바치게 했다. 대신 여진족에게 부족한 쌀이나 콩 등 식량을 대가로 주면서 불만을 최소화했다.

사회가 안정되면 사치가 고개를 드는 법이다. 조선도 건국 이후 100년간 외침이 없자 성종 때부터는 사치 풍조가 확산했다.

초피는 정3품 당상의 부제학(副提學) 이상만 착용할 수 있을 정도로 고가의 상품이었지만 이 시기가 되자 일반인들도 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부녀자들이 초피로 만든 옷이 없으면 그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당시 기록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그러자 성종 3년엔 사치를 금하는 조목을 만들면서 ‘일반인은 초피로 만든 옷이나 방한 도구를 착용할 수 없다’고 명시했지만, 초피에 대한 수요가 치솟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초피가 큰돈이 되자 북방의 지방 수령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부 가구를 아예 ‘산장한(山場漢)’으로 지정해 세금 명목으로 담비 가죽을 구하도록 전담시켰다. 담비의 털이 좋지 못하면 다시 추가로 세금을 거두고, 그 돈으로 한양의 시장에 가서 초피를 사들였다. 그 결과 함경도의 많은 지역에서 백성들이 도망쳐 일부는 만주로 넘어가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조선 정부는 당초 여진족에게 모피를 구하면서도 농사에 필요한 소나 농기구가 넘어가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다. 전근대 사회에서 소와 농기구는 중요한 전략물자이기도 했다. 특히 철을 생산할 능력이 없는 여진족에게 농기구의 중요성은 매우 컸다.

하지만 초피 열풍은 변화를 가져왔다. 초피를 중앙에 뇌물로 바치곤 하던 지방 수령들은 중앙에 올릴 진상품이라면서 백성들을 쥐어짰고, 백성들은 초피를 구하기 위해 야인들과 비밀리에 교역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막아왔던 조선의 농기구나 소가 여진족 세력에 넘어갔다. 이런 상황은 조선의 안보에 큰 위협을 가져왔다. 초피의 가치를 깨닫게 된 야인들은 점점 초피의 가격을 올리며 협상에서 우세를 점하기 시작했고, 원래 짐승의 뿔로 무기를 만들던 여진족들은 조선인들로부터 받은 철제 농기구를 무기로 바꿨다. 이는 여진족들의 무장력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선의 북방 수령도 초피 확보에 혈안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아신전]의 한 장면. 조선은 여진족 가운데 복종하던 성저야인에게 일정량의 모피를 조공으로 바치게 했다. / 사진:넷플릭스
그런데도 초피 확보에 혈안이 된 지방 수령들은 이를 방치했고, 오히려 무리한 방법을 동원하면서 성저야인들의 반발을 샀다. 1594년 6진 중 한 곳인 온성(穩城)에서 일어난 성저야인들의 반란은 바로 이런 문제가 누적되며 폭발한 사건이었다. 온성부사 전봉은 오래된 보리를 성저야인들에게 억지로 나누어주고 1두(斗)마다 초피 1장을 징수해 가는가 하면, 성저야인 부락에서 제때 초피를 바치지 않으면 이들을 잡아 가두고 처벌하곤 했다. 결국 조선과 여진족 사이에서 조선의 편에 섰던 성저야인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까지 오게끔 자초한 셈이다. 몇십 년 후 벌어지는 호란에서 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 비교적 근래까지 모피는 추위를 막는 우수한 방한 제품으로 애용됐다. 호랑이·표범·담비·족제비·곰·여우 등에서 얻는 모피가 교역상품이 된 것도 오래전부터다. 고조선·고구려·발해 등 만주 지역에서 흥성했던 국가들은 일찍부터 모피를 중국이나 일본에 팔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가장 짭짤하게 이득을 본 것은 17세기의 여진족이었다. 17세기에 접어들면서 지구 북반구에서 소빙기(小氷期)가 극성을 부렸다. 런던에서는 템스강이 얼어붙었고, 알프스 산맥의 빙하가 마을까지 내려왔다. 동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 동해가 얼어붙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질 정도였다. 날씨가 추워지자 한반도 북부에서 발달했던 온돌이 전역으로 퍼졌고, 땔감 수요가 급증하면서 전국의 산들이 헐벗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전 세계에서 모피에 대한 수요와 가치가 상승했다. 일찌감치 모피 확보에 눈떴던 여진족에게는 다시없을 기회였다. 백두산 일대와 만주 남부에서 활동하던 건주 여진의 지도자 누르하치는 모피로 큰돈을 벌어들였고, 이를 통해 군사력을 신장시켰다. 이후 역사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청나라를 건국해 조선과 명나라를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중원의 지배자가 됐다. 한때 힘센 이웃(조선·명)에게 모피를 수탈당했던 이들이 이제는 모피를 통해 패권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모피 구하려 동진(東進)한 러시아, 청나라와 충돌


▎백두산 일대와 만주 남부에서 활동하던 건주 여진의 지도자 누르하치는 모피로 큰돈을 벌어 군사력을 신장시켰다. 이후 청나라를 세워 조선과 명나라를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중원의 지배자가 됐다.
하지만 전 세계를 강타한 소빙기와 모피 열풍이 여진족에게 미소만 지은 것은 아니다. 당시 유럽에서 모피의 주요 판매자는 러시아였다. 그러나 유럽 대륙의 수요를 감당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모피를 더 구하기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동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시베리아 진출이다. 이 지역에는 당시까지 별다른 세력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거침없이 전진할 수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의 광대한 동쪽 영토는 이런 과정에서 확보됐다.

계속 동쪽으로 전진하던 러시아는 어느덧 청나라의 국경까지 진출했다. 건국 이래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 청나라가 마주하게 된 첫 위협이었다. 양측은 몇 차례 군사적으로 충돌했고, 위기를 느낀 청나라는 조선에도 조총 부대 파견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우리 역사에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고 기록된 사건이다. 조선 효종은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했고 이들은 헤이룽강(黑龍江) 인근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결국 이 충돌을 통해 서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확인한 러시아와 청나라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년)을 맺으며 마무리 지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수도 모스크바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에서 거대한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는 게 득보다는 실이 많을 뿐이었다. 대신 러시아는 이를 통해 아무르강 이북과 외몽골 지역 일부를 영토에 넣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국의 전통 왕조가 처음으로 외부 세력을 대등한 상대로 인정하며 맺은 조약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중국 왕조에는 조공 관계만 인정될 뿐이었지만, 처음 조우한 유럽의 강국을 상대로는 더는 통하지 않았다.

비록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긴 했지만, ‘위험한 이웃’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 청나라는 200년 후 비싼 대가를 치렀다. 19세기 말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와 각종 불평등 조약을 맺을 때 러시아는 만주의 동부, 연해주를 얻어냈다. 그리고 다른 열강들이 차지한 영토가 훗날 중국 측에 반환된 것과 달리 이 땅은 러시아로 완전히 귀속됐다. 이로써 중국의 태평양 진출이 사실상 무산됐으니 중국 입장에선 땅을 치고 아쉬워할 만한 결과였다. 소빙기와 모피가 바꾼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 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208호 (202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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