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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자본주의와 문화 - 물질문명의 파노라마(20)] 미디어,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다 

‘발 없는 말(言)’ 천 리 넘어 세계로 확산 

성경이라는 출판물 통해 근대 민족주의 형성, 신문 등장하며 자본주의 색채 강화
20세기 라디오와 TV가 역사를 만들어내… CNN 성공 이후 글로벌 프레임 각축장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CNN에 출연했다. TV에서 나오는 이미지는 이제 정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 사진:AP연합뉴스
인류 최초의 발명품으로 꼽히기도 하는 언어는 인간을 문명 세계로 이끈 1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생활하던 인간 집단은 언어를 통해 교류하고 협력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공동체는 비슷한 언어로 교류하지만, 거리가 멀어질수록 소통 자체가 점점 어려워진다. 언어가 인류의 공통분모이자 차별화의 요소라는 뜻이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정보를 다루는 수단이다. 인간은 언어를 활용해 다양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정리하고 축적할 수 있다. 무질서한 세상을 언어라는 도구 덕분에 잘 포착할 수 있고 또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원리다. 만일 언어 차이로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라면 통역이라는 ‘슈퍼 능력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들이 사회적 권력을 얻었던 배경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문화적이라고 생각하는 언어 현상과 가장 경제적이라고 여기는 화폐는 여러 측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언어가 정보를 정리하고 축약하는 수단이라면, 화폐 역시 재물의 가치를 측정하고 표현하는 도구다. 말이 순식간에 천 리를 가듯 돈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치를 이동하는 마법을 부린다. 언어의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공동체를 연결하는 능력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듯 화폐를 다루는 상인들은 부를 쉽게 얻는 세상이다. 화폐와 언어, 자본주의와 문화는 이처럼 비슷한 구조와 양상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둘은 외모만 흡사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돼 있다. 특히 근대를 연 자본주의 경제와 민족주의 문화는 시작부터 긴밀하게 짝을 이루며 발전해 왔다.

현대 사회에서 언론 혹은 매체와 동일 의미로 사용되는 라틴어 미디어(media)는 미디움(medium)의 복수형으로 ‘수단’이라는 뜻이다. 소리를 통해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는 대표적인 미디어다. 인류는 문자를 발명함으로써 언어로 표현된 내용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미디어를 추가로 확보하게 됐다. 말을 글로 쓰면 언어와 문자라는 두 미디어를 활용하는 셈이다.

동아시아와 서양을 구분하는 첫 번째 차별화는 문자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동아시아 문명의 기반이 된 한자는 뜻을 전달하는 표의(表意) 매체이지만 유럽의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은 알파벳으로 소리를 전하는 표음(表音) 시스템이다. 고대에 표의/표음 두 문자 미디어가 형성됐을 초기에는 양 지역의 사회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거대한 영역에 걸쳐 문자의 혜택을 확산했으나 당시만 해도 극소수의 엘리트만이 문자를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가 진행되면서 유럽에서는 표음문자와 민족 언어가 결합하면서 대중적 미디어의 시대가 열렸다.

성경과 인쇄와 자본주의


▎[보름스 국회의 루터]. 16세기 마르틴 루터는 성경 번역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중세까지 유럽의 종교와 문화를 지배하는 언어는 라틴어였으나 점차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종교개혁은 소수의 성직자가 독점하던 라틴어 성경과 미사의 장벽을 깨고 보통사람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해 개개인이 신과 직접 소통하는 길을 활짝 열었다. 한 연구에 의하면 1500년 유럽에는 1억 명의 인구에 2000만 권의 책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됐는데 1600년에는 장서의 수가 2억 권 정도로 폭증했다. 지금부터 5세기 전에 소위 출판 자본주의(print-capitalism)가 출범하면서 근대 세계로 빠르게 진입한 셈이다. 양가죽에 필사본으로 만들던 책을 종이와 활자를 통해 대량 인쇄하면서 출판은 자본주의 시대를 알리는 초기 공산품으로 등장했다.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하던 시대였던 만큼 성경은 가장 잘 팔리는 상품이었다. 특히 종교 개혁의 아버지 마르틴 루터는 실제 성경을 독일어로 옮긴 번역가였고,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1518년부터 1525년 사이 독일에서 팔린 모든 책의 3분의 1은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었고 1522년과 1546년 사이 무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무려 430여 차례 인쇄됐을 정도였다. 성경이라는 종교와 인쇄라는 기술이 자본주의 상품이라는 경제와 만나 근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책이 만든 민족주의


▎그리스어와 라틴어 텍스트를 금속 활자로 찍어낸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성경]. / 사진:위키피디아
물론 루터를 성공적인 번역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라고 부르는 일은 현대 독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으나 역사적 오해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당시 교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성경에 손을 대는 일은 큰 죄로 다스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루터의 영향 아래 성경을 영어로 몰래 번역했던 윌리엄 틴데일은 1536년 사형을 당했다.

루터가 성경 번역을 통해 독일어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 크게 공헌했듯 프랑스어권의 칼뱅주의 개신교와 영어권의 킹 제임스 성경은 각각 근대 프랑스어와 영어를 완성하는 데 결정적인 주춧돌이 됐다. 1535년 출간된 프랑스어 성경을 번역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사촌인데 번역서에 칼뱅이 직접 라틴어 서문을 썼다. 또 영국 국왕 제임스가 주도한 킹 제임스 성경(King James Bible)은 앞서 언급한 틴데일 번역본을 기초로 1611년 출간됐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경은 일상의 양식이어야 했다. 아마 현대인이 스마트폰을 종일 들여다보는 일과 유사했을 것이다. 신부가 라틴어로 집전하는 미사에 참석한 신도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마도 그들은 성당의 웅장함과 화려함 속에서 신을 상상했을 것이다. 반면 자신의 언어로 전달되는 종교 메시지는 이해가 쉬웠고, 말로 표현하는 기도도 일상화됐다. 자본주의가 인쇄술을 빌려 종교의 세계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듯,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은 민족주의를 잉태하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정의한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 출발점으로 출판 자본주의와 민족 언어의 형성을 꼽았다. 예전에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거대한 문명권과 무수히 많고 다양한 지역의 구어(口語)가 공존했다. 하지만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의 부상으로 라틴어권이 분할됨과 동시에 서로 소통하지 못하던 다양한 구어 집단은 중재자 역할을 하는 출판언어(print-language)를 중심으로 민족 단위로 통합됐다.

같은 글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공유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계속 변화하는 구어와 달리 출판물은 언어를 고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유럽 주요 언어가 17세기에 확정돼 지금까지 계속 내려오는 이유다. 언어는 사람들이 매일 활용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지만 동시에 고정된 형식을 가졌기에 영원한 민족의 상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출판물을 통한 민족 언어의 부상은 이처럼 생명력과 영구성을 통해 근대 민족의 얼개를 제공했다.

문자를 통해 소통하던 사람들을 책이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다면, 신문은 동시성을 추가함으로써 더 끈끈한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신문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18세기에 뉴스를 전문적으로 전달하는 종이 매체의 등장은 일종의 혁명이었다. 기독교 유럽에서 민족 언어로 된 책은 종교와 같은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사용하는 언어만 달랐다. 하지만 뉴스는 그야말로 독립적인 현실과 관심을 가진 공동체를 기반으로 민족 집단을 강화하고 형성하는 메커니즘으로 작동했다.

16세기 유럽에서 성경을 밑천으로 삼는 출판 자본주의가 커다란 성공을 거뒀듯이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는 민주주의 정치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언론 자본주의가 기지개를 켰다. 물론 프랑스나 독일에서도 뉴스를 파는 신문은 존재했으나 이들 국가에서는 국가의 검열과 통제가 심한 편이라 자유를 먹고 자라는 언론의 특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정부의 구미에 맞는 일방적 메시지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나 정당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19세기 말 미국은 특히 근대적 신문 시장이 발전한 본고장이다. 현재 퓰리처는 미국 언론에서 훌륭한 기자에게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賞)으로 꼽힌다. 사실 퓰리처는 남북전쟁 때 미국으로 이주하기 위해 군대에 자원했던 헝가리 이민자다. 1870년대 중서부 세인트루이스에서 독일어로 발행하는 신문으로 성공을 거둔 그는 1880년대 뉴욕에서 영자(英字)신문 [뉴욕월드](New York World)를 발행하며 대중 언론의 시대를 열었다.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


▎20만 부의 유통을 자랑했던 1센트짜리 [시카고 데일리 뉴스] 광고. / 사진:위키피디아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이란 엘리트 식자층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퓰리처의 [뉴욕월드]는 엘리트를 포기하고 노동자나 이민자와 같은 대중 독자를 지향했다. 무미건조한 정치인의 연설이나 의회의 입법 과정은 생략하고 살인이나 강도, 사건·사고 등을 중심으로 독자에게 다가갔다. 문체도 이민자조차 이해할 수 있도록 매우 쉽게 작성했다. 그림과 사진을 첨가한 시각적 구성으로 숨통을 틔게 해주었고, 일기예보나 경마 소식으로 일상의 관심을 반영했다. 덕분에 적자에 시달리던 [뉴욕월드]는 5년 만에 20만 부 이상을 판매하는 거대한 매체로 성장했다.

신문 시장에서 퓰리처의 혁신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를 통해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퓰리처가 독자의 생활과 취향을 파악해 신문을 바꿔놓았다면 허스트는 독자의 정치적 관심과 ‘팬덤’까지 활용하여 판매 부수를 늘렸다. 1896년 대선에서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이라는 30대 민주당 아웃사이더 정치인이 대중적 인기몰이를 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 허스트가 [뉴욕 모닝저널](New York Morning Journal)을 활용해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허스트의 신문은 선거 당일 뉴욕 맨해튼의 상공에 열기구를 띄워 놓고 미국 전역에서 전신으로 도착하는 실시간 개표 상황을 깜박이는 램프 불빛으로 알렸다. 라디오나 TV가 등장하기 한참 전에 이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해와 달에 착안한 중계를 시도했던 셈이다. 선거를 전후해 허스트는 신문 판매 150만 부라는 엄청난 규모에 도달했다. [모닝저널]이 지지했던 브라이언 후보는 패했으나 신문은 승승장구하면서 결국 퓰리처의 [뉴욕월드]를 제치고 선두로 나갔다.

뉴스와 광고의 동거


▎1950년대 TV를 시청하는 미국의 한 가족. / 사진:위키피디아
미국 최대 도시 뉴욕의 신문 시장에는 퓰리처나 허스트와는 전혀 다른 전략을 앞세운 아돌프 옥스라는 언론인도 있었다. 그는 켄터키 채터누가 출신으로 1896년 대선을 앞두고 엘리트신문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를 장악했다. 뉴욕시 금융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적자 신문을 인수한 옥스는 퓰리처나 허스트의 대중 중심의 센세이셔널리즘 유혹을 거부하고, 보수적 정치 노선과 품격 관리를 지향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대중지와 권위지로 신문 시장의 계급적 차별화가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자본주의 논리가 그렇듯 신문 시장에서도 대중지와 권위지의 가장 큰 차이는 가격이었다. 박리다매의 대중 전략을 지향하는 퓰리처는 신문 가격을 1센트까지 내림으로써 뉴욕 시장의 모든 경쟁지 가격 인하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뉴욕타임스]는 3센트의 높은 가격을 유지함으로써 가격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신문은 대중지나 권위지를 막론하고 광고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수입원을 개발했다.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소식을 전하면서 동시에 노골적인 상품 광고를 끼워 넣음으로써 객관성이 중요한 정보와 이윤을 추구하는 상품의 유혹이 한 매체에서 동거하게 된 셈이다. 상품 광고를 객관적인 정보로 착각하기도 쉽고, 뉴스가 판매 부수를 늘리기 위한 허풍이나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오해받기 쉬운 상황이 됐다. 이처럼 성경으로 성공한 출판 자본주의는 신문을 통해 뉴스와 자본주의의 공생으로 발전했다.

미국 뉴욕 언론에서 아직도 명성을 유지하며 건재한 신문은 국제적 권위를 자랑하는 [뉴욕타임스]다. 영국의 [더 타임스]나 프랑스 [르몽드]와 함께 미국의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간지다. 하지만 이들이 유명한 이유는 권위지로 엘리트들이 선호하기 때문이지 판매 부수가 많아서는 아니다.

미국에 이어 근대 신문 시장에서 신세계를 연 것은 동아시아의 일본이라고 할 수 있다. 권위지와 대중지가 그다지 차별화되지 않았고 한 도시를 넘어 전국적인 시장을 지배하는 언론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보스턴글로브] [LA타임스] 등은 대도시를 대표하지만 일본에는 [요미우리] [아사히] [마이니치] 등 전국적인 신문이 여럿 공존한다.

미국과 유럽은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보는 습관이 일반적이지만, 일본은 집까지 신문을 배달하는 서비스를 발전시켜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했다. 기껏해야 수십만 부에 불과한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 신문에 비하면 일본은 신문의 전성시대인 20세기 후반 다수의 전국 신문이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자랑하며 일부는 전설적인 1000만 부를 초과하는 기록도 세웠다.

전신으로 소식을 전하는 방식은 유선과 무선 두 종류다. 교통수단의 발전을 살펴보면 길을 놓아 차가 다니는 육로와 바다와 하늘처럼 그 자체가 길처럼 기능하는 해상과 항공이 존재했다. 사람이나 물자가 아닌 정보를 전달하는 분야도 비슷한 선택지가 존재한다. 미국과 유럽은 19세기 말에 이미 해저케이블을 통해 유선으로 연결돼 있었다. 무선보다 안정적이고 보안 유지에 수월했기 때문이다. 반면 무선은 이동하는 선박에 설치해 활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1912년 타이태닉호의 침몰 사건은 무선 통신의 중요성과 활용 가능성을 널리 인식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됐다. 대서양을 항해하던 호화 유람선 타이태닉은 사고를 당하자 무선으로 구호를 요청했고 덕분에 인근의 배들이 동원될 수 있었다. 운 좋게 구출된 사람들과 사망자 명단이 무선으로 전송됐고, 상품이나 주문 관리를 위해 무선 전송팀을 운영하던 뉴욕 워너메이커 백화점에서는 이를 받아 신문보다 빨리 운집한 군중에게 알릴 수 있었다. 1896년 대선 상황을 시민들에게 전파한 열기구에 이어, 취재와 기사 작성, 편집, 인쇄, 배송 등의 과정을 뛰어넘는 새로운 형식의 실시간 뉴스 보도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20년대 라디오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게 팔려나가는 상품이었다. 신문 자본주의에 성공했던 미국은 라디오의 일상화에서도 선두를 달리면서 전국에 수백만 대를 보급했다. 앤더슨이 말했던 책이나 신문은 사람들이 민족이라는 거대한 단위를 ‘상상’하게 만들었으나 라디오는 민족을 ‘실감’하게 해준 도구다. 정확하게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같은 음악에 춤출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안방에 등장한 대통령

이제 민족의 역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특정 방송과 결부됐다. 예를 들어 1930년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화롯가 이야기’라는 라디오 정기 방송을 통해 경제 대공황으로 고통받는 국민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직접 호소하는 새로운 정치 문화를 만들었다. 1940년 6월 18일 드골 장군의 런던 방송은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계속 저항해 나가겠다는 레지스탕스 운동의 시발점으로 역사에 남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도 일본을 넘어 세계사의 전환점을 세계인이 공유하는 계기가 됐다. 물론 이 모든 역사는 라디오를 통해 이뤄졌다.

이제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넘어 특정 인물에게 전달되는 정도가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 수백만, 수천만 명에게 동시에 확산 가능하다. 전통 사회에서 커다란 단위의 인류 공동체를 그리기 위해서는 상상력과 노력이 필요했다. 반면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민족과 시장과 상품이 개인에게 강요되면서 오히려 상상력을 빈곤하게 만드는 시대가 됐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언어가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복합적인 관계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디오는 언어를 사용할 경우, 인류를 민족과 언어 공동체로 나누지만, 음악을 틀어 주면 오히려 한 가족으로 묶는 기능도 한다. 라디오의 뒤를 이어 발전한 텔레비전 또한 이 같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영국의 BBC는 1920년대 라디오로 출범한 이후 곧바로 영상까지 송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대중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1950년대 미국에서다. 특히 흑백에서 컬러로 이미지를 전송하는 기술이 발달하자 텔레비전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마술 상자로 돌변했다.

신문에서 라디오, 텔레비전으로 주요 매체가 진화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광고 또한 점차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신문에 실리는 구인·구직이나 부동산 광고는 정보와 선전을 조합한 형식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는 음악에 맞춰 브랜드를 소비자의 뇌리에 주입하는 방식으로 점점 과감해졌고, 연이어 텔레비전에서는 각종 자극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소비자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발전했다.

나뉨과 합침의 게임

뉴욕 신문 전쟁에서 보았던 정치 게임과 미디어의 결합은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도 반복됐다. 스포츠나 예술 등 놀기를 좋아하는 ‘호모 루덴스’뿐 아니라 권력 경쟁에 몰두하는 ‘정치 동물’로서의 인간도 TV의 중요한 시청자였기 때문이다. 최대 TV 시장 미국에서 24시간 뉴스 채널 CNN이 등장한 것은 1980년이다. 정치 캠페인은 이제 유권자와 직접 만나는 집회보다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1996년에는 폭스와 MSNBC가 뉴스 채널로 경쟁에 뛰어들었다. 전자가 보수층을 노리는 전략이었다면 후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로 성공한 마이크로소프트와 전통 TV 채널 NBC의 결합이었다.

미국 뉴스 채널 CNN의 성공은 국제적으로도 경쟁의 장을 만들었다. TV 세계의 맏형 BBC는 물론 아랍 세계를 대변하려는 알자지라, 21세기 중국의 세계를 향한 야욕을 대표하는 CGTN 등은 미국의 특정 시각과 분석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서는 곤란하다는 반발인 셈이다. 그 결과 지금은 텔레비전만 틀면 굉장히 다양한 언어로 색다른 시각과 해석을 접할 수 있는 세상이다. 나뉨의 원칙이 작동하는 셈이다.

동시에 텔레비전을 지배하는 기술도 다양하게 변화했다. 처음에 지상 공중파 시설을 통해 방송하던 방식은 점차 케이블이나 위성TV로 확산했다. 지구 주위를 맴도는 수많은 위성은 인류의 동시성을 쉽고 일상적으로 만들었다. 미디어의 발달로 시차와 상관없이 월드컵 결승전을 세계인이 동시에 관람하는 시대다.

21세기에는 IP TV를 통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 능력과 환상적인 영상을 제공하는 텔레비전이 만났다. 수십 개 언어로 자막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언어의 디지털화는 동시통역의 경계를 빠르게 개척해 나가고 있다. 미디어의 통합성이 강화되는 이런 융합의 원칙이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도울지, 아니면 오히려 분쟁의 씨앗이 될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일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2208호 (2022.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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