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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⑪ 한려수도 통영 연화도 연화봉에서 

 

연화도, 욕지도의 멋스러움에 취했다

여기가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의 에덴동산이라 말하는 듯, 눈앞에 하얀 치자나무가 사랑의 오르가즘 향내를 라이브로 내뿜고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해 천년만년 살다가 그 사랑마저 유효기간이 다가오면, 김성우 시인처럼 빈 배에 내 생애의 그림자들 달빛처럼 싣고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이 천금 같은 공백의 시간, 갭 이어(gap Year)의 진수가 참 아름답게 다가왔다. 공백의 시간여행은 18세기 영국에서 귀족 자제들이 여행을 통해 세계를 돌아본 콘티넨털 투어 전통으로, 이제는 유럽과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학기 중 권장하는 인격 정립, 마음 수양을 쌓는 소중한 학습 시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한 인간이 지식과 지혜만 가득 차고 따뜻한 가슴이 없어 인간 고유의 향내인 인간미가 나지 않는다면, 그 인간은 얼마나 차갑고 냉혈적인 괴물이 될 것인가! 젊은이들은 다양한 여행과 봉사 그리고 인턴십을 경험하면서, 상생하고 공존하는 마음과 넓은 시야가 싹터 호연지기를 기르게 된다. 이웃들과 부대끼고 자연과 교감하고 소통하면서 자아를 형성하고 인격을 배양시켜 자연스럽게 따뜻하고 가치 있는 인간, 즉 전인적인 인간으로 성장해간다. 이런 젊은이는 점수 1점을 더 얻기 위해 골방 독서실에서 수십 년간 처박혀 답만 달달 외우는 이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 역시 환갑이 다 돼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니, 군대에 가기 위해 휴학한 뒤 생긴 1년의 공백, 그리고 전역 후 복학까지 1년의 공백이 참 후회스럽고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지금은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알차고 의미 있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2년 동안 세차공·식당 종업원·벽돌공장 직원·제철소 노동자·포장마차 운영 등등 살아있는 인생 공부를 했고, 버스를 타고 3번의 전국 일주 여행을 했다. 그 공백의 시기엔 고뇌에 차 잠 못 이루는 수많은 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들이 내 가치관, 내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지금처럼 큰 욕심 없이 유유자적 미소 짓는 공백의 호사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마음이 찜통더위 폭염을 뚫고 밤새 약 500km 육지와 바다를 달려, 한려수도 통영 앞바다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지금 연화도를 밟게 한 것이 아닐까!


가만히, 연화도행 마도로스 선장의 멋진 배 운전을 지켜본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인간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꾼 최고의 발견 발명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 기관이 아닐까. 증기기관 발명으로 산업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나 문명의 대폭발이 시작됐다. 세탁기·에어컨·자동차·배·기차·우주선이 만들어졌고, 공장들이 24시간 가동할 수 있게 되면서 물질의 공급이 수요를 압도해 지금까지의 지구인들이 누리지 못한 풍요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로 인해 노동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니 불과 200~300년 전에는 꿈도 못 꾸었을, 하룻밤 사이에 500km를 달려 남쪽 바다 머나먼 섬 연화도를 이렇게 아침 7시 30분부터 감상하게 된 것이다.


널찍한 바다 한가운데에 퐁당퐁당 섬을 심어 바람들이 한가로이 숨바꼭질 놀이하고, 저 멀리 하얀 운무 아가씨는 연한 속옷을 입고 넓은 바다를 품고서 꾸밈없는 미소를 내게 보낸다. 알록달록 검은색 리본을 단 하얀 창공에서는 쌍쌍의 갈매기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활공하고 땅에선 수국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반갑게 반긴다. 이에 질세라, 백척간두 기암괴석 절벽들은 저마다 근육질을 자랑하고, 저 멀리 대양의 바다 내음을 가득 담은 맑은 공기는 인간들의 콧구멍과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화시킨다. 이런 화기애한 야릇한 분위기에 화룡점정인 듯 치자나무가 내 눈앞에서 사랑의 오르가즘 향내를 라이브로 뿜어내니 여기가 진정 신선이 산다는 무릉도원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무릉도원에서도 인간들은 날마다 숨을 쉬고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에너지를 만들어야 생이 이어지기에, 참으로 염치없이 배고픔과 피로가 심하게 몰려왔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무릉도원 느낌은 잠시, 나는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와 잠깐 욕지도의 비경을 감상하고는 선착장 정자에 앉아 인간의 최대의 행복이자 즐거움인, 허기진 배를 갖가지 음식으로 맛있게 채웠다. 인간 세상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에 있을쏘냐! 역시 배불리 먹는 것이 최고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그런 운명을 알기에, 그것을 잠시라도 잊고 살아가기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 구름·바다·산·바람·바위 등의 무생물을 동경하고 사랑하고 신기루 같은 아지랑이를 쫓으며 그것을 행복이라 위안 삼아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살아보니 그 이하도 이상도 없는 것 같다. 역시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지금이 전부이다. 섬 여행은 내 마음속 숨겨진 바다를 또다시 파도치게 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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